# 한양 남쪽 저자거리의 쌀 가게
박준호는 저울 위에 한 되의 쌀을 올려놓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어제 구입한 쌀이 한 말에 삼십 냥인데, 손님들에게 팔 수 있는 가격은 겨우 이십오 냥. 육십 퍼센트를 넘지 못하는 이윤. 문제는 이 정도 마진으로도 신분제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게 문이 열렸다. 검은 도포를 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박준호는 그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다. 한명준의 심부름꾼이었다.
"거상님께서 오늘 들어올 쌀이 있냐고 묻으신다."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지시였다. 어제 구입한 쌀 열 말을 한 말에 오냥에 넘기라는 뜻이었다. 정가의 육십 퍼센트 수준이었다.
"쌀은 없습니다."
거짓이었다. 가게 뒤 창고에는 열 말의 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을 꺼내면, 한명준의 상회는 다시 방문할 것이고, 다음에는 오냥이 아니라 삼냥에 팔도록 강요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완전히 넘기도록 할 것이었다. 평민 상인이 한양의 최대 거상에게 거역할 수는 없었다.
심부름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거상님께서 실망하실 텐데.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 없으신가?"
박준호는 창고로 향했다. 열 말의 쌀을 한 말씩 담아냈다. 심부름꾼은 한 장의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것은 '계산서'라는 이름의 종잇조각이었다. 한 말에 오냥. 열 말이면 오십 냥. 박준호는 손가락으로 셈을 다시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어제 삼십 냥에 구입한 것이 오늘은 오냥이 되었다.
오서연은 남편이 돌아오는 것을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준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입술이 굳어졌다.
"또 한명준인가."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서연이 따라왔다.
"당신은 다를 거라고 믿습니다."
그 말은 오래된 약속처럼 들렸다. 박준호와 오서연이 결혼한 지 사년, 그녀는 이 말을 수백 번 반복했다. 매번 남편이 패배당할 때마다.
"믿음만으로는 신분제를 넘을 수 없습니다."
박준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오서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양반가의 딸이면서도 평민 상인과 결혼한 여인이었다. 남편의 분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시킬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침묵했다. 침묵은 때로 말보다 강했다.
박준호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신분제. 그것은 조선의 모든 상인이 맞닥뜨린 벽이었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양반의 눈에 띄면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었다. 평민이 가질 수 있는 부의 크기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신분제의 울타리 안에서.
박준호는 가게를 나왔다. 밤거리를 걸었다. 종로의 시전은 이미 문을 닫았고, 저자거리는 고요했다. 그는 어느 쪽으로 가는지도 모르고 걸었다. 발이 이끄는 대로. 그러다가 낡은 목재로 된 간판을 본 것이다. '고서점'.
가게 안은 어두웠다. 촛불 하나가 책장 옆에 놓여 있었고, 주인은 어느 서재에서 나온 노인처럼 보였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왔다.
"뭘 찾으시나."
"책입니다. 아무 책이나."
노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농담을 듣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를 아는 자의 웃음이었다.
"아무 책이나? 그렇다면 당신은 책을 찾는 게 아니라, 책이 당신을 찾기를 기다리는 중이군요."
노인은 깊은 책장으로 사라졌다. 한참 후, 그는 한 권의 책을 들고 돌아왔다. 표지는 낡았고, 글자는 희미했다. 박준호는 제목을 읽기 위해 촛불에 가까이 가져갔다.
'경영학 원론'.
"이 책을 읽는 자는 신분을 초월한다."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박준호는 노인의 얼굴을 봤다. 그의 눈은 수백 년을 산 자처럼 깊었다.
"가격은 얼마입니까."
"가격? 가격은 없습니다. 이 책은 주인을 찾아가는 것이니까요."
박준호는 책을 들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하지만 손바닥에 닿는 무게는 달랐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은 것처럼.
집으로 돌아온 박준호는 촛불을 켜고 책을 폈다. 첫 장부터 그는 빠져들었다.
'복식부기(複式簿記): 모든 거래를 차변과 대변으로 기록하여 자산의 흐름을 투명하게 추적하는 기법. 이를 통해 경영자는 언제든 자신의 재산 상태를 파악할 수 있으며, 거래처는 신뢰를 바탕으로 거래할 수 있다.'
박준호는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으며 다시 읽었다. 지금까지 그는 그날그날 팔고 번 돈을 마대에 넣어두었다. 어느 정도가 이윤이고 어느 정도가 손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명준 같은 거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경험과 직관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이 책이 말하는 것은 달랐다. 모든 것을 기록하고, 기록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라는 것이었다.
박준호는 계속 읽었다.
'분업화(分業化): 하나의 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담당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조직 운영 기법. 예를 들어, 쌀의 수매·보관·판매를 각각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만 집중할 수 있어 실수가 줄어들고 생산성이 증가한다.'
박준호는 가게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혼자 쌀을 사고, 혼자 보관하고, 혼자 팔았다. 모든 일을 혼자 하면서 피로는 쌓여가고 판단 실수는 반복되었다. 하지만 만약 이 일을 나눈다면? 만약 구입 담당자가 따로 있고, 보관 담당자가 있고, 판매 담당자가 있다면?
'계약서(契約書): 거래 당사자가 합의한 조건을 문서로 남겨 법적 효력을 갖도록 하는 장치. 신뢰와 인맥만으로는 보호받을 수 없는 거래자의 권리를 문서로 보장한다.'
박준호는 앞으로 몸을 굽혔다. 이것이었다. 이것이 신분제를 넘는 길이었다. 양반 상인들은 신분의 권위를 바탕으로 거래했다. 하지만 평민이 같은 방식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평민은 무엇으로 신뢰를 얻을 것인가? 투명한 기록으로. 법적 보호로. 체계적인 조직으로. 신분이 아닌 실력으로.
박준호는 밤새 책을 읽었다. 손가락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촛불이 더 가까워 보였다. 이 책의 모든 원리를 조선의 상업에 적용한다면? 아니, 적용할 수 있다면?
새벽녘, 박준호는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인쇄된 글자는 끝났지만, 그 아래에 누군가의 손글씨가 있었다.
'모든 혁명은 상업에서 시작된다.'
박준호의 손이 멈췄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헤집고 지나갔다. 그 순간,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아악—
그것은 비명이라기보다 절규에 가까웠다. 박준호는 창을 통해 바깥을 봤다. 저자거리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채찍에 맞고 있었다. 양반 집의 노비인 것 같았다. 관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따위 놈이 쌀을 파는 상인이 되려고 했다니!"
박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저기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본 것이다. 임재욱이었다. 그는 박준호의 가게에 여러 번 왔던 노비였다. 자유를 사고 싶다며,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벌고 싶다고 말했던 남자였다.
박준호는 창에서 몸을 빼고 책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떨림의 원인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오서연이 방 문을 열었다. 남편이 밤새 일어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책을 발견했고, 그 다음 남편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 얼굴에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강한 결의가 있었다.
"당신의 성공은 누군가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오서연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녀는 책을 들었다. '경영학 원론'. 제목만으로도 위험한 것 같았다.
"알고 있습니다."
박준호가 대답했다.
"그것도 감수할 건가요?"
박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오서연에게 보였다. '모든 혁명은 상업에서 시작된다.' 그 글귀를 읽는 오서연의 눈이 떨렸다.
"이건 말이 됩니까. 신분제를 유지하면서 혁명을 한다니."
"신분제는 유지됩니다. 하지만 상업의 논리로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박준호는 일어섰다. 그의 눈은 창밖의 어둠을 보고 있었다.
새벽 여섯 시, 박준호는 가게 문을 열었다. 임재욱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를 데려와야 했다. 그는 분업화의 첫 번째 조력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가게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어제의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도포를 입은 양반이었다. 박준호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긴장했다. 이 사람은 조정의 고위 관료, 이재성이었다.
"박준호 상인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의 경영 기법이 흥미롭습니다. 복식부기, 분업화, 계약서. 이 모든 것을 어디서 배우셨나요."
박준호의 등골이 서늘했다. 경영서를 어떻게 알았는가. 그리고 왜 관료가 평민 상인의 가게에 새벽에 온 것인가.
오서연이 옆방에서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이 방문을 예상했던 것처럼.
"이재성 나인가요."
오서연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렇습니다."
이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아내분은 이미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오서연은 남편의 옆에 섰다. 그녀의 손이 박준호의 팔을 잡았다.
"당신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조정의 보호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기득권 세력의 암살 위협 속에서 혼자 버틸 것인가."
이재성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박준호의 머리 옆으로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화살은 벽에 박혔다. 그 화살의 끝에는 검은 천이 묶여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신호였다.
오서연이 비명을 질렀다. 박준호는 즉각 그녀를 안고 바닥에 누웠다. 두 번째 화살이 날아올 때쯤 가게 문이 부서졌다.
임재욱이 몸을 날려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손목에는 여전히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옷은 피로 범벅이었지만, 그의 눈은 맑았다.
"뒤로!"
임재욱이 창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세 번째 화살이 그의 어깨를 스쳤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대신 창문 너머로 손을 뻗어 날아오던 화살을 맨손으로 잡아냈다. 그 순간, 옥상에서 내려치는 칼을 피하기 위해 그는 몸을 날려 가게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뒤따라 한 명의 자객이 뛰어내렸다. 임재욱은 즉시 일어나 그 자객과 마주쳤다. 둘의 움직임은 번개처럼 빨랐다. 임재욱이 자객의 팔을 꺾고 그를 가게 밖으로 내팽개쳤을 때, 이미 그 자객은 의식을 잃고 있었다.
박준호는 임재욱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질문이 있었다.
임재욱은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당신이 저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내 위치를 알았나."
"저를 고용한 자들이 당신을 감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임재욱의 눈이 이재성을 바라봤다. 마치 그를 의심하듯이.
이재성은 여전히 도포 자락을 정돈하고 있었다. 마치 화살이 그의 주변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왜 이런 일이?"
박준호가 물었다. 손은 여전히 오서연을 감싸고 있었다.
"당신의 성공이 너무 빨랐습니다."
이재성이 방 안을 걸어다니며 말했다. 그의 발걸음은 전혀 급하지 않았다.
"3년 만에 한양 최대 규모의 상회. 이는 신분제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득권 세력은 벌써 당신을 제거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명준 거상의 심부름꾼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미 암살자를 고용했습니다."
"암살자?"
박준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냉철한 인식이었다.
"윤지훈이라는 자입니다. 무술에 능하고, 독약을 다루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자입니다. 당신을 죽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그를 감시해왔습니다. 당신의 경영서 정보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그가 어디서 고용되었는지도 파악했습니다."
이재성이 박준호의 앞에 섰다. 그의 눈은 직접적이었다.
"당신은 조정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조정도 당신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의 경영 기법은 조선을 바꿀 수 있습니다. 신분제를 폐지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의 논리로 그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하지만 이 혁명이 진행되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합니다."
오서연이 박준호의 팔을 더 강하게 잡았다.
"당신의 성공은 누군가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것을 감수할 수 있습니까."
이재성의 질문은 오서연의 경고와 똑같았다. 하지만 이재성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것은 조정의 보호장입니다. 당신이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당신은 조정의 경제 정책에 협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종속입니다."
박준호가 말했다.
"정확합니다. 하지만 현재 당신의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조정의 종속이거나, 암살자의 칼입니다."
박준호는 창밖을 봤다. 임재욱이 고문당하던 장면이 자신의 뇌리에 다시 떠올랐다. 저 남자가 자유를 꿈꿨던 이유. 그리고 그 꿈이 어떻게 현실이 되어야 하는지.
"3일을 드리겠습니다."
이재성이 보호장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동안 결정하세요. 조정의 보호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혼자 버틸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신은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가."
이재성이 나간 후, 박준호는 임재욱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고통이 남아 있었다.
"당신이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임재욱은 한 발 물러섰다.
"저는 한명준의 심부름꾼으로 일했습니다. 당신을 죽이기 위해 고용된 자들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저는 당신의 가게에 들어갔고, 당신이 파는 쌀을 봤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에게 준 말을 기억했습니다."
"무슨 말?"
"'자유를 원한다면 돈을 벌어라.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한명준의 명령으로 당신을 죽여야 한다면, 저는 자유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선택했습니다. 당신을 보호하기로."
박준호는 임재욱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 얼굴에는 선택의 무게가 있었다.
"당신의 가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박준호의 질문이 나왔다.
임재욱의 눈이 흔들렸다.
"한명준은 당신의 가족을 보호해줄까요."
박준호가 계속했다.
"아니면 나를 죽이면, 당신의 가족도 함께 죽을까요. 증인이 되기 때문에."
박준호는 임재욱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을 고용한 자들은 일이 끝나면 당신을 버립니다. 그것이 상인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나는 다릅니다."
박준호는 책을 내려놓고 임재욱의 눈을 직접 바라봤다.
"당신의 가족이 내 가게에서 일하게 해주겠습니다. 월급은 한 달에 이십 냥. 당신도 일할 수 있습니다. 한명준의 심부름꾼으로서가 아니라, 대동상회의 호위 책임자로서. 급여는 오십 냥입니다."
임재욱의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계약서를 만들겠습니다."
박준호가 계속했다.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신분을 보호하는 계약서. 글로 남겨진 약속입니다. 한명준이나 조정이 아무리 강해도, 이 계약서는 훼손할 수 없습니다."
"나를 믿으시겠습니까."
임재욱이 물었다.
"당신이 한명준을 배신했으니까요."
박준호가 대답했다.
"이제 윤지훈을 찾아오세요. 그리고 그를 살려서 데려오세요. 당신처럼, 그도 선택의 기로에 있을 것입니다."
임재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옥상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이미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노비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인의 발걸음이었다.
오서연이 남편 옆에 섰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박준호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박준호는 책을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분업화의 장이었다. 조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한 명의 상인이 아니라, 여러 명의 상인들이 하나의 체계 아래서 움직이는 조직. 그렇게 되면, 한 명의 암살이 조직 전체를 흔들 수 없다.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박준호가 말했다.
"저자거리의 모든 평민 상인들을 찾아다닐 것입니다. 그들을 조직할 것입니다. 한 명이 죽어도, 십 명이 남고, 백 명이 남을 것입니다."
"그럼 한명준은?"
"한명준은 나를 죽일 수 없습니다."
박준호는 종이와 붓을 꺼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나는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조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직은 죽지 않습니다."
박준호는 복식부기의 양식을 종이에 옮겨 그렸다. 차변과 대변. 자산과 부채. 수입과 지출.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는 세상. 신분이 아닌 숫자로만 평가받는 세상.
"당신이 살아야 합니다."
오서연이 속삭였다.
"그리고 당신이 성공해야 합니다."
박준호는 첫 번째 계약서의 양식을 만들었다. 임재욱과의 계약서. 급여, 신분 변화, 가족 보호의 모든 조건을 명시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서명 란을 만들었다.
"이것이 신분제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입니다."
박준호가 말했다.
"글과 숫자로. 법적 효력으로."
밤이 깊어갔다. 박준호는 경영학 원론을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계약서의 장이었다. 어떻게 평민 상인들을 법적으로 보호할 것인가. 양반 상인들의 침해로부터, 그리고 조정의 수탈로부터.
그 순간, 또 다른 비명이 들렸다. 이번에는 더 이상 저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옆 집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박준호는 창을 열었다. 임재욱이 누군가를 끌고 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눈에는 증오만 가득했다. 그것이 윤지훈이었다.
임재욱이 그를 박준호의 가게 앞에 내려놓았다. 윤지훈의 입에서는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박준호를 죽이려고 했다.
"살려줍니까."
임재욱의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에는 질문이 있었다.
박준호는 창 안으로 들어가 책을 들었다. 그리고 윤지훈에게 한 장을 보였다.
"당신은 누구에게 고용되었습니까."
"죽일 것이냐, 말 것이냐."
윤지훈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박준호는 윤지훈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당신의 가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박준호의 질문이 바뀌었다.
윤지훈의 눈이 흔들렸다. 그것이 유일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명준은 당신의 가족을 보호해줄까요."
박준호가 계속했다.
"아니면 나를 죽이면, 당신의 가족도 함께 죽을까요. 증인이 되기 때문에."
박준호는 윤지훈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을 고용한 자들은 일이 끝나면 당신을 버립니다. 그것이 상인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나는 다릅니다."
박준호는 윤지훈의 눈을 직접 바라봤다.
"당신의 가족이 내 가게에서 일하게 해주겠습니다. 월급은 한 달에 이십 냥. 당신도 일할 수 있습니다. 한명준의 심부름꾼으로서가 아니라, 대동상회의 호위 책임자로서. 급여는 오십 냥입니다."
박준호는 계약서를 펼쳤다.
"그리고 이것입니다. 계약서.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신분을 보호하는 문서. 글로 남겨진 약속입니다."
윤지훈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것은 거부였을까, 아니면 항복이었을까.
박준호는 계속했다.
"당신도 나와 같습니다. 신분제의 벽 앞에서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하는 자. 그런 자들이 모여서 만드는 조직이라면, 그것은 어떤 권력도 꺾을 수 없습니다."
윤지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감정이 나타났다.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절망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 희망이 섞여 있었다.
"대동상회?"
오서연이 물었다.
"아직 없습니다."
박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만들 것입니다."
박준호는 책을 들었다. 그리고 그 책의 첫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모든 혁명은 상업에서 시작된다."
저자거리의 쌀 가게에 새벽이 밀려들었다. 그 가게는 더 이상 평민 상인의 쌀 가게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동상회의 본점이 될 것이었다. 그 안에는 평민과 노비, 그리고 암살자까지도 함께 일할 것이었다.
박준호는 종이 위에 첫 번째 계약서를 완성했다. 임재욱의 이름. 급여. 신분 변화. 가족 보호. 모든 것이 명시되었다. 그 다음은 윤지훈의 계약서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저자거리의 다른 상인들의 계약서일 것이었다.
한명준은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고용한 암살자가 이미 적의 편이 되었다는 것을. 조정의 관료 이재성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박준호가 어떤 선택을 할지.
그리고 박준호는 단 하나의 확신만 가지고 있었다.
신분제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은 돈의 질서였다. 신분이 아닌 숫자의 질서. 그리고 그 질서 안에서, 평민도 양반도, 노비도 자유인도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질 것이다.
박준호는 창밖을 봤다. 한양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저자거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폭풍 전의 고요함이었다.
그 순간, 또 다른 비명이 들렸다. 이번에는 더 먼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