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공상의 검이 주경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 피가 튀었다. 흰 도복이 붉게 물들었다.

"시침의 귀향이라던가. 고작 그 정도군."

공상의 목소리는 경멸로 가득했다. 그의 천풍검법은 명성에 어긋나지 않았다. 초침을 쥔 주경의 손가락도, 석혜의 손도 모두 떨렸다. 계곡의 밤하늘은 여전히 붉었고, 철혈맹 신호탄의 빛이 초침 위에 반사되며 춤을 춘다.

주경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깨의 상처가 타는 듯했다. 초침을 한 번 더 사용하면 3개월이 깎여나간다. 이미 3번을 썼다. 수명은 18개월 남았다. 그 시간마저 잃으면 자신은 죽는다. 하지만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공상의 검에 베여 더 빨리 죽는다.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던 지법사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약함을 받아들일 시간은 없었다.

초침을 누르는 순간, 세상이 멈췄다. 공상의 검은 공중에 정지했다. 돌풍처럼 날아오는 검기도 멈췄다. 석혜의 떨리는 손가락도, 계곡 어딘가에서 지켜보는 지법사의 눈빛도 모두 정지된 시간 속에 갇혔다.

주경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30초. 최대 30초다.

20초가 흘렀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공상의 검은 주경이 있던 자리를 베어냈다. 그의 얼굴이 찌푸렸다. 분명 맞춘 것 같았는데. 주경의 도피 경로를 계산해서 재차 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사찰 계곡의 돌벽을 쪼아냈다.

"능력만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내 속도는 당신의 정지 시간과 같다."

공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검술은 계산된 것이었다. 초침의 정지 시간을 고려한 움직임. 주경이 어디로 갈지 예측하고, 그 위치에 미리 검을 내밀고 있다.

신월의 무인들이 공상을 압박했다. 하지만 그들은 공상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천풍검법의 회오리 속에서 한 명 또 한 명 밀려났다.

주경의 손가락이 떨렸다. 초침이 뜨거워졌다. 다시 사용하면 3개월이 더 깎여나간다. 지법사의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던 말.

그런데 지금은 약함을 받아들일 시간이 없었다.

주경은 초침을 다시 눌렀다.

세상이 멈췄다.

공상의 천풍검법이 중단됐다. 검이 공중에 떴다. 신월의 무인들이 밀려난 자리도 모두 정지됐다. 계곡의 바람조차 멈춰있었다.

주경은 천천히 움직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손가락이 마비되고 있었다. 머리에서 무언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코피였다.

주경은 공상의 옆을 지나갔다. 검을 들어올렸다.

15초가 흘렀다.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공상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의 검은 이미 주경의 옆을 지나쳐 있었다. 주경이 초침을 사용할 때마다, 공상의 계산도 한 박자 미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좋아. 이제 알겠다."

신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공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신월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의 눈은 물에 젖어 있었다. 첫 번째 눈물이었다. 신월이 눈물을 흘리다니.

신월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주경을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죄책감과 회한이 뒤섞여 있었다. 신월이 공상을 배신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공상의 야심이 신기관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전생에서 지키지 못한 주경의 가문을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한데 얽혔다.

신월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신기관의 암살자들이 나타났다. 검은 옷, 검은 얼굴, 검은 마음.

"당신은 나를 배신했다."

신월이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 듯했다.

공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암살자들이 사방에서 공상을 포위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신월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무릎이 꺾였다. 그는 계곡의 돌 위에 무릎을 꿇었다.

"전생에서 나는 당신의 가문을 지키지 못했다."

주경을 바라보는 신월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내겠다."

공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검은 여전히 신월을 향했다. 하지만 암살자들의 포위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당신도 나와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 지위. 강함. 우리는 같은 종류입니다."

"아니다."

신월이 일어섰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암살자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검은 옷, 검은 얼굴, 검은 마음. 끝이 없는 파도처럼.

공상의 검이 휘둘러졌다. 한 명, 또 한 명 밀려났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나타났다. 피를 흘리면서도, 다시 나타났다.

주경은 지법사를 바라봤다. 지법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관찰자의 것이었다. 마치 바둑판을 내려다보는 기사처럼. 하지만 지법사는 주경과 눈을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승인이 담겨 있었다.

전투는 30분을 넘어 1시간으로 이어졌다.

공상의 검이 암살자의 어깨를 베었다. 또 다른 암살자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공상이 몸을 날려 피했다. 세 개의 검이 동시에 내려쳤다. 공상이 검을 들어 막았다. 불꽃이 튀었다.

암살자들의 공격은 조직적이었다. 한 명이 무너지면 다른 한 명이 그 자리를 채웠다. 공상은 밀렸다. 한 발, 또 한 발.

그의 검술은 여전히 정교했지만, 수는 이기지 못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팔이 무거워졌다. 그의 얼굴에 피가 흘렀다.

공상은 결국 계곡의 한 모서리로 몰렸다. 암살자들이 그를 포위했다. 그의 검은 떨리고 있었고, 호흡은 가빠져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나타났다.

류해였다.

류해는 신월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 온 것처럼.

"당신도 알고 있습니까?"

류해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신월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경의 몸이 굳었다. 전생. 그들이 말하는 전생이란 무엇인가. 신월과 류해가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발굽 소리가 계곡 밖에서 울렸다. 빠르고, 많고, 거칠었다.

신월의 얼굴이 굳었다.

"철천의 선발대입니다."

신월이 중얼거렸다.

"3일이 아니라 3시간이었나 봅니다."

신월이 검을 뽑았다. 신월의 무인들이 계곡 입구를 막아섰다.

"도망쳐!"

신월이 소리쳤다.

류해가 주경의 팔을 잡았다.

"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석혜가 주경을 밀었다.

"움직여! 뒤로!"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횃불이 계곡의 입구를 밝혔다. 검은 옷을 입은 병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경은 초침을 쥐었다. 손가락이 아팠다. 이미 너무 많이 썼다. 더 이상 쓸 수 없다.

류해가 주경의 어깨를 밀었다.

"당신은 아직 죽으면 안 됩니다."

주경은 석혜의 손을 잡고 뛰었다. 계곡의 뒤쪽으로, 어둠 속으로.

뒤에서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주경은 뛰면서 생각했다. 3일이 아니라 3시간이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시간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살리는 것이라면.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강함이라면.

어둠 속에서 주경의 손이 떨렸다. 초침이 뜨거워졌다.

그 순간, 류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경!"

류해가 뒤에서 따라왔다. 그의 얼굴은 피로해 있었지만, 눈은 선명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남긴 것이 있습니다."

류해가 손을 펼쳤다. 그 안에는 작은 시계가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정교한 시계였다.

주경이 시계를 받았다. 손이 떨렸다. 아버지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만든 마지막 시계입니다."

류해가 말했다.

"이것 안에는 당신의 비무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뒤에서 검소리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경성의 지하 인쇄소로 가세요."

류해가 말했다.

"그곳에서 당신의 비무를 완성시키세요. 당신의 아버지가 남긴 시계와 함께."

주경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은요?"

류해가 옆을 바라봤다. 뒤에서 검소리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당신의 시간을 벌겠습니다."

류해가 웃었다. 그 웃음은 슬펐다.

"전생에서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을."

류해의 눈빛이 변했다. 그 속에는 깊은 기억이 담겨 있었다. 전생에서 그는 주경의 가문을 지키는 호위무사였을 것이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이 이생까지 따라왔다.

류해가 검을 뽑았다. 그의 몸에서 깊은 내공이 흘러나왔다. 주경이 미처 몰랐던 강함이.

"가세요, 주경. 석혜와 함께."

주경은 류해를 보고 있었다. 류해의 뒷모습이 계곡의 어둠 속에서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순간, 주경은 깨달았다.

류해도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류해도 자신처럼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류해도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는 것을.

"가야 해!"

석혜가 주경의 팔을 잡아당겼다.

주경은 마지막으로 류해를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주경이 중얼거렸다.

주경은 뛰었다. 석혜와 함께. 어둠 속으로.

뒤에서 류해의 검소리가 울렸다. 여러 개의 검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부딪히고,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 계곡의 돌을 울리는 검의 소리. 그리고 한 번의 비명.

주경은 뛰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류해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들렸다. 주경의 이름이었다.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축복하는 목소리였다.

"살아가거라."

그것이 류해의 마지막 말이었다.

주경의 손에는 아버지가 남긴 시계가 들려 있었다.

시계의 초침이 움직였다. 똑딱, 똑딱.

생명의 소리.

시간의 박동.

주경은 경성을 향해 뛰었다.

뒤에서는 더 이상 검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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