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혜와의 만남
향로골목의 창고는 이미 밤의 심도를 넘어 새벽의 고요함으로 접어들었다. 주경은 도면을 집어 들었다가 손가락이 떨려 놓쳤다.
"시간을 빼앗은 죄"
자신의 필체였다. 하지만 쓴 기억이 없었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코트 주머니 속 초침이 뜨겁게 느껴졌다. 신월의 압박이 가슴팍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 도면. 노인이 이것을 알고 있다면?
류해는 불을 밝히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노인의 실루엣만 보였다. 주경은 도면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입을 열었다.
"신월을 만나야 합니까?"
"그 사람이 당신을 원합니다."
류해의 목소리는 돌을 깎는 소리처럼 거칠었다. "거절하든 받아들이든, 답변은 지금 할 수 없을 겁니다."
주경은 묻지 않았다. 류해가 신월의 말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왜 자신을 보호하는지도. 질문이 쌓이면 자신의 정체가 더 드러날 것 같았다. 그저 "언제"라고만 물었다.
"내일 해질 녘. 서점가 거리의 '묵향다관'이라는 찻집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세요."
---
해는 중천을 지나 서쪽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주경은 향로골목을 빠져나와 경성의 골목들을 헤맸다. 자금성 언덕 너머로 철혈맹의 깃발이 희미하게 보였다. 붉은색과 검은색의 조합. 자신을 죽인 세력의 상징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손가락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묵향다관은 서점가 거리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창문은 종이로 발라져 있고, 문 앞에는 작은 간판만 달려 있었다. 주경이 들어서자 차 냄새와 먹이 섞인 향이 코를 찔렀다. 실내는 생각보다 넓었다. 책장들이 벽을 따라 세워져 있고, 구석구석에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신월이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한쪽 팔이 없는 여인이었다.
주경의 발걸음이 멈췄다. 여인은 주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정중하면서도 어딘가 낙천적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석혜입니다."
신월이 손짓으로 주경을 앉혔다. 주경은 석혜 옆자리가 아닌 신월 맞은편에 앉았다. 거리를 유지하려는 본능이었다.
"이 분은 우리 신기관의 기계 제작 보조원입니다. 당신의 비무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신월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주경은 석혜를 바라봤다. 여인의 왼쪽 팔은 어깨 아래에서 깔끔하게 끝나 있었다. 오래전 일인 것 같았다.
주경의 시선이 그 빈 공간에 머물렀다. 팔이 있어야 할 자리. 그 부재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주경은 고개를 돌렸지만, 시선은 자꾸만 돌아왔다.
석혜는 그 시선을 느꼈다. 다시 웃었다.
"약 3년 전입니다. 기계 부품을 다루다가."
"당신도 약함을 가지고 있군요."
주경은 그 말을 내뱉고 나서 후회했다. 무례했다. 하지만 석혜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약함이라는 표현을 싫어합니다. 저는 다만 다른 길을 찾아야 했을 뿐입니다."
석혜가 오른손으로 주경의 어깨를 톡 쳤다. 부드럽지만 명확한 접촉이었다.
"당신도 그럴 겁니다."
주경은 그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정확했다. 기계를 다루는 손의 움직임이었다. 자신과 비슷했다. 주경의 시선이 석혜의 얼굴로 올라왔다. 그 순간 거부감이 흔들렸다. 이 여인은 자신처럼 무언가를 잃었고, 그럼에도 움직이고 있었다.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경은 눈을 돌렸다.
신월이 찻잔을 마셨다. 차는 여전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당신의 비무는 강호를 바꿀 수 있습니다. 시간을 조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무술의 모든 경지는 순간의 감각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순간 자체를 멈출 수 있다. 이는 강호의 모든 규칙을 무너뜨립니다."
주경은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 신기관은 새로운 강호를 만들려 합니다. 서양의 기계 문명과 동양의 무술이 만나는 곳. 당신의 비무는 그 교점의 증명입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당신은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가 될 것입니다."
신월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주경은 고개를 저었다.
"저의 목표는 다릅니다."
"무엇입니까?"
"복수입니다."
신월과 석혜가 교환하는 눈빛이 있었다. 뭔가 예상된 대답이었던 것 같았다.
"철혈맹에 대한 복수 말입니까?"
주경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신월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조직이 자신을 죽였다는 것만 중요했다.
"그들을 상대로는 혼자 이길 수 없습니다."
신월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사실 그 자체였다.
"철혈맹의 최고 전력 공상은 '천풍검법'의 대가입니다. 당신이 비무를 쓸 때마다 수명이 깎여나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공상과의 전투에서 3회 이상 비무를 쓸 수 없습니다. 그 회수 안에 이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경의 얼굴이 굳었다. 신월은 계속했다.
"공상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그의 정보망은 경성 전역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미 향로골목의 공방도 감시 대상입니다. 당신이 그곳에 돌아가면 즉시 발각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우리와 함께하세요. 신기관의 비밀 집회소들은 철혈맹의 감시망 밖에 있습니다. 당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석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당신의 비무를 보완할 기계 장치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저와 함께라면."
주경은 찻잔 위의 증기를 바라봤다. 증기는 위로 올라갔다가 공중에서 흩어졌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것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주경이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신월이 응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위협이 아닌 사실만 있었다.
---
찻집을 나오며 주경은 석혜를 다시 봤다. 여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자신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당신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습니다."
석혜가 주경의 손을 보며 말했다.
"비무를 사용할 때마다 그런가요?"
"예."
주경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저도 팔을 잃을 때 손가락이 떨렸습니다. 마치 팔이 아직도 거기 있다고 착각하듯이. 하지만 그 떨림이 사라졌을 때, 저는 더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약함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강함을 배웠다는 뜻입니다."
주경은 그 말을 듣고도 입을 다물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석혜의 말은 논리적이었지만, 자신의 상황은 달랐다. 자신의 떨림은 약함이었다. 죽음 앞의 무력함이었다.
하지만 석혜의 목소리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 확신이 주경을 흔들었다.
서점가 거리의 골목을 빠져나오려 할 때였다.
첫 번째 비명이 들렸다.
찻집 뒤쪽에서 무술을 쓰는 소리가 났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발이 바닥을 치는 소리, 그리고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 주경의 몸이 경직됐다.
"습격입니다!"
석혜가 소리쳤다. 신월의 무인들이 찻집 안에서 무술을 펼쳤다. 창문이 깨졌다. 종이는 검은 검날에 찢겨나갔다.
주경의 손이 주머니로 갔다. 그 안에는 시계 부품이 들어 있었다. 초침. 시간을 멈추는 힘.
"가야 합니다!"
석혜가 주경의 팔을 잡았다. 한쪽 팔로도 힘이 충분했다. 주경은 그 손에 이끌려 골목 깊숙이로 들어갔다.
뒤에서 신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들을 보호하세요!"
철혈맹의 검들이 들렸다. 창을 부수고 들어오는 검들이었다. 주경이 뒤돌아보자 신월의 무인 세 명이 도망치는 길을 막아섰다. 검이 부딪쳤다. 그들은 우수했지만 상대는 더 우수했다.
"빨리!"
석혜가 주경을 끌었다.
경성의 골목들은 미로였다. 주경은 이 거리를 모르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이곳은 신기관의 영역이었고, 그는 그곳에 온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석혜는 길을 알고 있었다. 서점가 거리에서 남쪽으로, 포구 지대 방향으로. 그 경계의 좁은 골목들을 헤쳐나갔다.
발소리가 뒤를 따랐다. 철혈맹의 살수들이었다. 최소 다섯 명. 아니, 일곱 명.
주경은 초침을 꺼냈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시간이 멈출 준비가 됐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이 떨렸다. 코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렀다. 피였다.
'이미 썼다. 이미 한 번 썼다.'
주경이 깨달았다. 어제 밤 신월과 철혈맹의 첩자들을 상대할 때 이미 능력을 한 번 썼다. 그리고 오늘은 또 한 번을 썼다. 남은 것은 이번 달 한 번뿐이었다.
"당신도 약함을 가지고 있군요."
석혜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것은 약함이 아니라 저주였다.
"여기!"
석혜가 좁은 담장 사이의 틈으로 주경을 밀어 넣었다. 주경은 그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석혜는 한쪽 팔로 담장을 잡고 주경 옆에 몸을 숨겼다.
발소리가 지나갔다. 철혈맹의 살수들은 이 틈을 놓쳤다. 하지만 더 뒤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더 신중한 움직임. 더 위험한 냄새.
"공상입니다."
석혜가 속삭였다. 목소리에 공포가 있었다.
주경은 담장 사이의 틈으로 밖을 봤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지나갔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일반 무인의 것이 아니었다. 검을 들지 않고도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천풍검법.
주경이 깨달았다.
---
밤이 내려앉을 때쯤, 두 사람은 향로골목에 도착했다. 좁은 골목의 끝, 시계 공방이 보였다.
그 공방은 불타고 있었다.
빨간 불이 밤하늘을 물들였다. 나무와 종이가 타면서 내는 소리가 들렸다. 검게 그을린 벽, 떨어지는 재, 그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이었다.
노인 공방주가 불 속에 서 있었다.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주경의 도면들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씩 불에 던지고 있었다.
"아버지!"
주경이 소리쳤다. 하지만 노인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도면들을 하나씩 태우고 있었다. 그 중 하나—"시간을 빼앗은 죄"라는 메모가 있는 도면—을 집어 올렸다.
노인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경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 있었다. 연민도, 분노도 아닌 것. 마치 무언가를 결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망쳐."
노인이 입을 움직였다. 그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주경은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불이 더 타올랐다. 노인이 손에 든 도면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시간을 빼앗은 죄"였다. 노인의 눈빛이 그것을 바라봤다. 마치 그 도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노인의 입이 움직였다.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경은 알았다. 노인이 깨달은 것이 있다는 것을.
도면이 불 속으로 떨어졌다. 종이는 검게 타들어갔다. 순간, 노인의 표정이 변했다.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야 합니다!"
석혜가 주경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한쪽 팔의 힘은 여전히 강했다.
주경은 뒤를 보며 끌려갔다. 불 속의 노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의 실루엣—불 속에 서 있는 그림자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무언가를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향로골목의 밤은 완전히 타올랐다.
석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주경을 끌고 가는 손의 힘도 세졌다. 하지만 주경의 눈은 여전히 뒤를 향했다. 불길 속의 노인 공방주가 점점 작아져갔다.
"더 빨리!"
석혜가 다시 끌었다.
주경의 다리가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여전히 뒤에 있었다. 향로골목은 빠르게 멀어졌다. 골목 어귀에 도달했을 때, 주경은 돌아섰다.
불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공방의 창문들이 터져 나갔다. 나무 기둥이 부러지며 불타는 소리. 시계들의 태엽이 녹는 소리.
"여기서 멈추면 죽습니다."
석혜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였다.
주경은 가만히 서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코트 주머니 속의 초침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한 번 더 쓸 수 있다면,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노인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죽음이었다.
주경의 손이 주머니로 향했다. 초침을 꺼낼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석혜의 한쪽 팔이 주경의 어깨를 잡았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힘이었다.
"당신의 죽음이 그 노인을 구하지 못합니다."
석혜가 속삭였다. "당신의 죽음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주경은 손을 멈췄다. 초침은 주머니 속에 남겨졌다.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주경이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다.
"도망칩니다."
석혜가 대답했다.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살아야 합니다."
주경은 한 번 더 뒤를 봤다. 그 다음, 발을 옮겼다.
---
신기관의 비밀 집회소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신월의 무인들은 대부분 떠나거나 전투 중이었다. 신월 자신도 없었다.
남겨진 것은 어둡고 좁은 지하실뿐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지하실 깊숙한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신월의 부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석혜를 보고 눈을 찡긋했다. "그녀를 데려왔군요. 신월께서는 좋아하실 겁니다."
주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석혜가 물었다. 그녀는 신기관의 사람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철혈맹이 집회소를 습격했습니다. 우리는 후퇴했습니다. 신월께서는 안전한 곳으로 가셨고,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하가 말했다. "하지만 공상 그 자는 아직 거리를 돌고 있습니다. 그를 피해야 합니다."
주경은 이 이름을 들을 때마다 무언가가 가슴에 걸렸다. 신월이 말했던 그 이름. 철혈맹의 최고 전력. 천풍검법의 사용자.
"그는 무엇을 원합니까?"
주경이 물었다.
신월의 부하가 웃음을 지었다. "당신을 원합니다. 당신의 비무를. 그는 지금 경성의 모든 골목을 뒤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철혈맹의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당신을 생포하되, 살아서."
생포하되, 살아서.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경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능력을 강제로 빼앗는다는 뜻이었다. 고문, 강제, 죽음의 경계에서.
주경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코트의 주머니 속에 숨겨진 초침을 찾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어제의 마비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것이었다.
"이번 달 사용 횟수가 남았습니까?"
석혜가 물었다. 그녀는 주경의 손을 보고 있었다.
"한 번."
주경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써서는 안 됩니다."
석혜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당신은 아직 살아야 합니다."
주경은 그녀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은 명확했다. 미소는 없었다. 대신 냉정함이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것이.
"당신은 왜 이 모든 것을 아십니까?"
주경이 물었다.
"신기관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석혜가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죽으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경은 묻지 않기로 했다.
---
신월을 만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장소는 포구 지대의 오래된 창고였다. 해상연맹의 배들이 정박된 그곳에서, 신월은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도망쳤군요."
신월이 말했다. "그리고 공방을 잃었습니다."
주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신월이 물었다.
"알 수 없습니다."
주경이 대답했다.
신월은 한 번 웃음을 지었다. "노인은 죽었을 겁니다. 철혈맹의 방화는 철저합니다. 생존자는 드뭅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주경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 나를 여기로 불렀습니까?"
주경이 물었다.
"제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월이 말했다. "당신의 공방은 사라졌고, 당신의 도제 신분은 이제 끝났습니다. 당신은 이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죽음, 아니면 삶."
"삶이라면?"
주경이 물었다.
"신기관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신월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비무를 완성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공상은 당신을 찾고 있지만, 우리의 조직 속에서는 그를 피할 수 있습니다."
주경은 신월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무언가 거짓이 있었다.
"그리고 복수는?"
주경이 물었다.
"복수는 나중입니다."
신월이 대답했다. "당신이 죽으면 복수도 끝나는 것입니다. 먼저 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주경은 침묵했다. 신월의 말이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복수를 미루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미루는 사이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의 공방주인은 죽었을 겁니다."
신월이 다시 말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가문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신기관과 함께라면."
그 말을 들었을 때, 주경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신월은 주경의 약함을 알고 있었다. 가문을 복구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고 있었다.
주경의 손가락이 떨렸다. 초침을 만지려는 본능이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멈췄다. 남은 것은 한 번뿐이었다. 그것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주경은 주머니 속의 초침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신월을 노려봤다. 그 눈빛은 분노였다. 하지만 분노 뒤에는 무력함이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주경이 말했다.
"시간은 없습니다."
신월이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압박이 있었다. "공상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창고를 나가면, 그는 당신을 찾을 것입니다. 당신은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주경의 가슴이 철렁했다. 신월의 말이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복수 욕망과 생존 본능이 충돌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이 빨라졌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주경은 다시 한 번 초침을 만졌다. 그 차가운 금속이 손가락 사이에서 느껴졌다. 이것을 쓰면 죽는다. 하지만 쓰지 않으면 노인처럼 끌려갈 것이다.
주경은 초침을 놓았다. 손을 주머니에서 빼냈다.
"신기관에 합류하겠습니다."
주경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신월이 미소를 지었다.
---
그 밤, 주경은 포구 지대의 낡은 다리 아래에서 자지 못했다. 물소리만 들렸다. 포구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들. 배의 밧줄이 움직이는 소리, 선원들의 목소리,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
"당신도 약함을 가지고 있군요."
석혜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주경은 자신의 손을 봤다. 아직도 마비되어 있었다. 초침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은 것은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경은 일어났다. 다리 아래에서 나왔다. 포구 지대의 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배들은 계속 오고 갔다. 선원들은 계속 일했다. 세상은 계속 돌았다.
그 와중에, 주경 혼자만 멈춰 있었다.
향로골목의 불을 떠올렸다.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노인이 마지막에 들었던 도면을 떠올렸다. 그것은 "시간을 빼앗은 죄"였다. 노인이 그것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무엇이었을까.
주경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 공방은 타버렸고, 도면들은 재가 되었고, 노인은 죽었을 것이었다.
"여기 있었군요."
목소리가 들렸다.
주경은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
철혈맹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달빛 아래에서 명확했다.
공상이었다.
"당신을 찾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공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칼날이 있었다.
주경은 물러섰다.
"도망칠 수 없습니다."
공상이 말했다. "이곳은 포구 지대입니다. 우리의 영역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주경은 계속 물러섰다. 다리 쪽으로. 그 아래는 어둠이었다. 물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비무는 진정한 비무가 아닙니다."
공상이 계속 말했다.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가진 것은 불완전한 모조품일 뿐입니다. 진정한 강자는 그런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주경은 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주머니 속의 초침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우리와 함께 오십시오."
공상이 말했다. "당신의 비무를 우리에게 넘기십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의 목숨을 살려드리겠습니다."
공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이 검의 자루에 닿았다. 천풍검법의 대가의 움직임이었다. 공기가 떨렸다.
그 순간, 다리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물이 튀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발소리가 들렸다. 빠른 발소리.
"달아날 준비가 되셨습니까?"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그것은 석혜의 목소리였다.
주경은 뒤를 봤다. 어둠 속에서 한 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손이 주경을 향해 뻗어졌다.
공상이 검을 뽑았다. 달빛이 검날에 반사되었다. 천풍검법의 기운이 공기를 가르며 주경을 향해 날아왔다.
"뛰십시오!"
석혜가 소리쳤다.
주경의 손이 주머니로 갔다. 초침이 손가락 사이에 들어왔다. 마지막 한 번.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석혜의 한쪽 팔이 주경을 밀어냈다. 천풍검법의 기운이 석혜의 어깨를 스쳤다. 그녀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석혜!"
주경이 소리쳤다.
공상의 검이 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주경을 향했다.
주경은 초침을 들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시간이 멈췄다.
세상이 정지했다. 공상의 검이 공중에서 멈췄다. 철혈맹의 살수들의 얼굴이 고정되었다. 석혜의 떨어지는 몸이 정지했다.
하지만 주경은 움직일 수 있었다.
주경은 달렸다. 공상의 검을 피해 달렸다. 그리고 석혜를 잡았다. 그녀의 몸을 안았다. 그 몸은 가벼웠다. 한쪽 팔뿐인 그 몸이 주경의 팔 안에서 떨렸다.
"가야 합니다."
주경이 속삭였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공상의 검이 주경이 있던 자리를 베었다. 빈 공간을 베었다.
"도망쳤군요."
공상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없었다. 마치 이것도 예상된 일인 듯했다.
주경은 석혜를 안고 달렸다. 포구 지대의 밤을 헤쳐나갔다. 뒤에서 공상의 발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주경은 멈추지 않았다.
석혜는 주경의 팔 안에서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약함을 가지고 있군요."
그녀가 속삭였다.
주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달렸다. 그리고 달리며 깨달았다. 석혜가 자신을 구했다는 것을. 자신의 마지막 한 번을 남기기 위해. 그 대신 무엇을 잃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남은 것은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선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