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강남역 지하 연습실. 오전 9시 30분.

박준서는 강준호를 보고 있었다. 그 침묵이 깊어질수록, 신뢰는 커졌다.

"프로듀서님, 이 부분 다시 들어봐요."

박준서가 헤드폰을 건넸다. 강준호는 받지 않았다. 대신 박준서의 눈을 봤다. 절대음감이 감지한 것은 음악이 아니라, 그 눈빛 속의 불안이었다.

강남역 지하 카페. 오전 11시.

강준호와 박준서가 마주 앉았다. 커피는 식고 있었고, 침묵만 자라고 있었다.

박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없이는 우리가 불가능해요."

강준호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떨렸다.

"당신이 우리를 선택했잖아요. 이 침묵으로."

박준서가 계속했다. 강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당신이 우리 음색을 찾아줬고, 감정을 음악으로 만들어줬어요. 당신의 침묵이 우리의 목소리를 살렸어요."

강준호가 노트를 꺼냈다. 손이 떨려서 첫 글자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다시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박준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하지 마세요."

박준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는 테이블을 밀어내고 일어섰다.

"프로듀서님, 제가 묻겠습니다."

강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를 포기하려고 했나요?"

침묵이 흘렀다. 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답이 곧 '예'였다.

박준서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제가 말하겠습니다."

박준서가 강준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연습실이 아닌 카페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은 충분히 해주셨어요. 이제 우리가 할 차례예요. 우리가 당신을 끝까지 데려갈 거예요."

박준서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준호는 그 목소리에서 감지했다.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절박한 다짐이었다.

박준서가 강준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고맙다"는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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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로 돌아온 강준호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Resurrection'의 마스터 믹스를 다시 재생했다. 이지은이 헤드폰을 벗고 눈을 감았다. 곡이 끝나고 5초가 지났는데도 그대로였다.

"이거 진짜 우리 곡이 맞아?"

최민준이 중얼거렸다. 한나영은 눈물을 닦고 있었다. 박준서는 강준호를 본다. 강준호는 창문을 통해 지하 통풍구 너머의 거리를 보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 달 전 "미안해"라는 마지막 음성을 낸 이후로 그의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태균이 노트를 손에 들고 강준호 옆에 섰다.

"발매 준비 됐어. 국내 스트리밍 플랫폼 전부 동시 업로드. 내일 자정."

강준호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움직였다. 마이너 코드를 그렸다. 다시 한 번 더. 그 손짓은 '좋다'가 아니었다. 미세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이태균은 그걸 알아챘다. 둘 사이의 침묵은 더 이상 공백이 아니었다.

"마스터 믹스 다시?"

강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으로 특정 구간을 지적했다. 2분 47초. 박준서의 브릿지 파트. 절대음감이 감지한 것은 음정의 미세한 떨림이 아니라, 박준서 자신이 아직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체적 신호였다.

박준서가 일어섰다.

"다시 녹음해야 해요?"

강준호가 손을 들어 '아니'라고 했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음정 라인을 공중에 그렸다. 감정을 담으라는 신호.

"그냥 감정?"

강준호의 눈이 박준서를 지나갔다. 박준서는 그 눈빛이 자신의 성대까지 뚫고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절대음감이 아니라, 절대 신뢰의 눈빛이었다.

국내 데뷔 앨범 'NOVA'는 발매 3일 차에 멜론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신인 그룹, 데뷔 앨범 차트 1위 진입... 노바, 뜨거운 데뷔."

기사는 쏟아졌다. 멤버들의 각 음색에 대한 분석 글, 강준호의 정체에 관한 추측, K-pop 신흥 강자 등장이라는 제목들. 크레센도 엔터의 회의실에는 기업 투자자들이 모여들었다. 회사 대표의 얼굴이 해가 뜨듯 밝아졌다.

강준호는 그 모든 것을 노트 위에 기록했다. 차트 순위, 스트리밍 수, 댓글의 감정 분석. 절대음감이 감지한 팬들의 목소리는 '좋아한다'가 아니라 '공감한다'였다. 음악이 아닌 감정이 전달되고 있었다.

이태균이 강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글로벌 버전 작업 시작할까?"

강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영어 가사, 스페인어 버전, 중국어 버전을 동시에 진행하라는 신호.

"한 번에 셋?"

강준호가 다시 끄덕였다. 손가락이 복잡한 음악 신호를 그렸다. 각 언어의 음운 특성에 맞춰 음정과 멜로디를 조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절대음감이 아니면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이태균이 휴대폰을 들었다.

"준비해야 할 게 많겠네. 빌보드 핫 100 진입을 목표로 하면, 최소 3주 안에 마스터링까지 끝내야 해."

강준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2주"라는 신호.

이태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2주? 그건 불가능해. 각 버전의 로컬라이제이션 작업만 해도..."

강준호의 눈이 이태균을 봤다. 그 눈빛에는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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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차.

영어 버전 녹음 스튜디오.

박준서가 마이크 앞에 섰다. 강준호는 헤드폰을 끼고 그를 바라봤다. 손가락으로 음정을 지시했다.

박준서가 노래를 시작했다.

"*Res-ur-rec-tion...*"

강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박준서의 발음이 한국식이었다. 영어의 자음 구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강준호가 손가락으로 다시 지시했다. 더 강하게, 더 명확하게.

박준서가 다시 시도했다.

"*Res-ur-rec-tion...*"

여전히 같았다. 강준호는 손으로 박준서를 멈추게 했다. 노트에 글을 쓰려다 손이 떨렸다. 다시 시도했다.

"음운 변환 필요. 자음 강화."

박준서의 얼굴이 굳었다. 강준호는 박준서의 눈에서 처음으로 의심을 봤다. 자신을 따를 수 없다는 절망이 그 눈빛에 담겨 있었다.

최민준이 다음 파트를 맡았다. 그의 중음역대는 영어의 음운 특성에 더 잘 맞았다. 하지만 강준호는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계속 지시를 내렸다. 다시, 또 다시.

강준호의 목에서 음성이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데 이태균은 2시간이 걸렸다. 강준호가 물을 마시려고 했을 때, 목구멍에서 나오던 음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마지막 "미안해"는 벌써 한 달 전이었다. 그 사이에 점진적으로 음역대가 줄어들고 있었다는 것을 강준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끊기는 건 처음이었다.

이태균이 강준호의 목에 손을 얹었다.

"성대 부종? 아니야, 이건..."

강준호가 노트를 들었다. 글씨가 떨리고 있었다.

"시간 없다. 계속 진행."

이태균의 손이 떨렸다. 그는 10년을 강준호와 함께 일해왔다. 절대음감의 대가가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강준호."

이태균이 말했다. 정중한 존댓말을 버렸다. 처음으로.

"멈춰."

강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계속"이라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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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차.

스페인어 버전 녹음이 시작되었다. 강준호는 이지은에게 스페인어의 음운 특성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손이 떨려서 글을 쓸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손가락으로 음정을 그렸다. 스페인어의 구르르 음을 영어와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이지은이 노래를 시작했다. 강준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더 깊게, 더 낮게.

이지은이 다시 시도했다. 강준호는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이건 스페인어가 아니라 한국 여자가 흉내내는 스페인어야."

강준호가 노트에 쓰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반응하지 않았다. 펜을 떨어뜨렸다.

이태균이 펜을 집어줬다.

"글씨 쓰지 마. 말해."

강준호가 입을 열려고 했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태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의료진 불러야 해."

이태균이 휴대폰을 들었다.

강준호가 손으로 그를 막았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시간이 없다"는 신호 다음, "이것이 대가다"라는 신호.

이태균의 얼굴이 굳었다.

"넌 언제까지 이래? 넌 이미 충분히 했어. 충분해!"

강준호가 노트를 들었다. 손이 떨려서 글씨가 구부러졌다.

"멤버들을 위해서라면, 계속할 수 있다."

이태균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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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차.

중국어 버전 녹음.

한나영이 마이크 앞에 섰다. 강준호는 헤드폰을 끼고 있었지만, 손가락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한나영이 노래를 시작했다.

강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손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한나영이 노래를 마쳤다. 강준호는 눈으로만 그녀를 봤다. 그 눈빛에는 "좋다"는 신호가 담겨 있었다.

이태균이 강준호의 옆에 섰다.

"마지막 버전이야. 이제 마스터링만 남았어."

강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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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차 새벽.

강준호는 거울 앞에 섰다. 화장실의 형광등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입술이 거의 창백했다. 아니, 피가 빠진 것처럼 하얀색에 가까웠다. 그 위의 목은 더욱 심했다. 음성대역이 사라지면서 성대 주변의 근육이 위축되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강준호가 손을 들어 목을 만져봤다. 아무 감각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그가 노트를 들었다. 펜이 손에서 떨렸다. 첫 글자를 쓰려 했으나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 세 번째 시도.

마침내 글씨가 나왔다. 흔들리지만, 분명한 글씨.

"이제 나는 침묵이다."

펜을 놓으려다 멈췄다.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다."

강준호의 얼굴에는 절망이 없었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그는 웃음을 지었다. 음성은 없었지만, 그 웃음은 진정했다. 침묵 속의 해방. 목소리를 완전히 잃음으로써 비로소 얻은 것이 있었다.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확신.

하지만 그 확신 뒤에는 다른 감정이 숨어 있었다. 빌보드 진입이라는 성과와 신체 붕괴라는 현실 사이의 깊은 모순. 성공하면 할수록 자신은 사라져야 한다는 역설. 노바의 목소리가 완성되려면 강준호 자신은 완전히 소멸해야 한다는 끔찍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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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차.

크레센도 엔터 회의실.

오수진이 유명 연예 기자와 만났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노의 진동이 담겨 있었다.

"노바? 그 그룹은 데뷔 초부터 문제가 많았어. 멤버 간 불화, 리더의 자기중심주의..."

오수진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프로듀서의 정체도 불명확해. 음악 산업에서 그렇게 한 명의 인물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말이 안 돼. 나는 확실한 증거를 찾고 있어."

기자가 물었다.

"증거라면?"

"프로듀서가 방송국 PD들과 만나는 장면, 혹은 멤버들 사이의 갈등을 증명하는 음성 파일 같은 것. 그걸 가지면 기사의 신뢰도가 달라져."

오수진이 휴대폰을 꺼냈다.

"이미 방송국 PD 한 명에게 연락했어. 노바의 글로벌 버전 작업 과정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어."

기자가 놀랐다.

"이미?"

"아직 답장은 안 왔지만, 곧 올 거야. 그리고 멤버들도 접근할 거고."

기사는 3시간 후 포털 사이트의 엔터테인먼트 섹션에 올라왔다.

"노바의 프로듀서 정체는? 의심되는 능력 분석."

댓글은 섞여 있었다. 일부는 음모론에 빠져 있었고, 일부는 노바를 옹호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노바의 음악에 빠져 있었다. 오수진의 루머는 그 앞에서 무력해 보였다.

강준호가 그 기사를 읽은 것은 밤 11시였다. 노트에 무언가를 적으려 했으나, 손이 떨려서 멈췄다. 대신 그는 휴대폰을 들고 빌보드 차트를 확인했다.

아직 진입하지 못했다.

연습실에서 박준서는 그 기사를 먼저 봤다. 댓글을 읽으며 얼굴이 굳어갔다. 최민준과 한나영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지은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박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프로듀서님 정체가 뭐 어때?"

최민준이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박준서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우리는 알잖아. 그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우리가 누군지도."

한나영이 덧붙였다.

"루머 따위로 흔들릴 우리가 아니야."

이지은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전의 확신이 없었다.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

박준서가 이지은을 봤다.

"넌 뭐야? 왜 그 표정이야?"

이지은이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프로듀서님 정체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박준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지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그럼 뭐야?"

"프로듀서님이 우리를 위해 뭔가를 잃고 있는 거 같아. 목소리도 그렇고, 손도 그렇고... 이게 계속되면..."

이지은이 말을 잇지 못했다.

최민준이 말했다.

"그건 우리 책임이 아니야."

이지은이 최민준을 봤다.

"책임이 아니라고? 우리 때문에 그러는 건데?"

한나영이 중재했다.

"프로듀서님이 선택한 거잖아."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냥 봐야 해? 루머까지 나오고 있는데?"

박준서가 이지은의 팔을 잡았다.

"우리가 함께라는 걸 보여줘야 해. 그게 프로듀서님을 지키는 거야."

이지은이 박준서를 봤다. 그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었다.

"넌 왜 그렇게 확신해?"

박준서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강준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강준호는 창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공중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음악을 그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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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차.

오수진이 방송국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바의 글로벌 버전 작업 과정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있었나요?"

PD의 목소리가 들렸다.

"글쎄요. 특별히 이상한 건 없었는데... 다만 프로듀서가 영어 버전 녹음 때 멤버들을 굉장히 엄격하게 지도했다고 들었어요. 멤버 중 한 명이 발음을 따라가지 못해서 몇 시간을 반복했다고."

오수진의 눈이 반짝였다.

"그 멤버가 누구죠?"

"박준서라고 알고 있어요."

오수진이 휴대폰을 내렸다. 박준서. 노바의 리더이자 메인 보컬. 그를 통해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수진이 박준서의 SNS를 확인했다. 최근 게시물에는 노바의 글로벌 버전 작업에 대한 감사 글귀가 있었다. 하지만 댓글에는 의문의 목소리들이 섞여 있었다.

오수진이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

"박준서 님, 안녕하세요. 저는 음악 산업 기자입니다. 노바의 글로벌 버전 작업 과정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메시지는 읽음 표시가 되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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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차.

노바의 글로벌 버전 'Resurrection'이 스포티파이의 'Today's Top Hits'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되었다. 작은 신호였지만, 강준호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다. 글로벌 시장이 노바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이태균이 강준호를 깨웠다. 아침 7시.

"떠. 차트 올라왔어."

강준호가 눈을 떴다.

휴대폰 화면. 빌보드 핫 100. 아직도 목록에 없었다. 하지만 빌보드 글로벌 차트에 'Resurrection'이 떠 있었다. 순위는 67위.

강준호의 손이 떨렸다.

"아직 핫 100은 아니지만..."

이태균이 말했다.

"이게 진입의 신호야. 3~4일이면 충분해."

강준호가 노트를 들었다. 손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글자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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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차.

노바의 멤버들이 강남역 지하 연습실에 모였다. 이지은은 글로벌 버전 'Resurrection'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스페인어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음색을 완벽하게 담고 있었다.

"이게 진짜 우리 목소리라고?"

한나영이 물었다.

강준호가 손가락으로 대답하려 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눈으로 대답했다. "너희 목소리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신호.

박준서가 강준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이미 여러 번 봤지만, 이렇게까지 심한 것은 처음이었다.

박준서는 강준호의 팔을 잡았다. 손목에서 맥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프로듀서님... 괜찮으세요?"

박준서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강준호는 그 두려움의 진동을 절대음감으로 감지했다. 하지만 그 감지는 더 이상 음악적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을 향한 절망이었다.

박준서가 강준호의 팔을 더 단단히 잡았다. 손가락이 흔들리고 있었고, 피부는 차가웠다.

"우리 함께 끝낼 거예요."

박준서가 말했다. 강준호는 그 말 속에 자신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강준호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했다. 하지만 그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이지은이 박준서의 뒤에 섰다.

"프로듀서님, 저 물어봐도 돼요?"

강준호가 이지은을 봤다.

"혹시... 프로듀서님이 우리 때문에 아프신 거예요?"

침묵이 흘렀다.

박준서가 이지은을 봤다.

"뭔 소리야?"

"아니, 그냥... 글로벌 버전 작업할 때 프로듀서님이 엄청 힘들어하셨잖아. 목소리도 나가고, 손도..."

이지은이 말을 잇지 못했다.

최민준이 말했다.

"프로듀서님이 선택한 거잖아."

이지은이 최민준을 봤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냥 봐야 해? 우리 때문에 이러는 건데?"

한나영이 중재했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음악뿐이야. 프로듀서님이 원하는 건 그거고."

이지은이 한나영을 봤다.

"그게 맞나요? 정말?"

박준서가 이지은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가 프로듀서님을 지키는 방법은 음악을 완성하는 거야.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이지은이 박준서를 봤다. 그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동의는 완전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양심을 외면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그 동작 안에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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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차.

빌보드 글로벌 차트가 업데이트되었다. 노바의 'Resurrection (Global Version)'이 43위로 올라왔다.

이태균이 강준호를 깨웠다.

"거의 다 왔어. 핫 100 진입까지 이제 며칠 안 남았어."

강준호가 눈을 떴다.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확신 뒤에는 다른 것이 숨어 있었다. 절망. 자신이 사라져야 한다는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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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차.

빌보드 핫 100 차트 업데이트.

노바의 'Resurrection (Global Version)'이 진입했다.

순위는 87위.

약한 진입이었다. 하지만 한국 신인 그룹으로서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빅3 기획사의 지원을 받지 않은 중견 기획사의 신인 그룹이 빌보드 차트에 진입한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크레센도 엔터의 회의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강준호는 그곳에 없었다.

연습실에서 강준호는 거울 앞에 섰다. 손을 들어 목을 만져봤다. 감각이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글씨를 쓰려 했으나, 펜을 집을 수 없었다. 손가락이 반응하지 않았다.

노트를 들었다. 펜을 떨어뜨렸다. 다시 집었다. 떨어뜨렸다.

마침내 한 글자를 썼다.

"빌"

그 다음 글자가 나오지 않았다. 손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성공의 순간, 동시에 소멸의 순간이었다. 빌보드 87위라는 숫자가 자신의 신체 붕괴와 정확히 일치했다. 노바가 올라갈수록 자신은 내려갔다. 이것이 회귀의 대가였다. 이것이 절대음감이 감지한 우주의 균형이었다.

거울을 봤다. 입술은 회백색이었다. 눈은 흐려졌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강준호가 받으려 했으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화는 자동으로 끊겼다. 그 대신 메시지가 왔다.

발신자: 미등록

메시지 내용:

"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빌보드 87위는 시작일 뿐. 1위까지 가야 한다. 노바의 목소리를 완성하려면 넌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강준호의 눈이 확대되었다. 그 목소리. 회귀의 기회를 준 그 신비로운 목소리. 정확히 10년 전에 자신을 죽음에서 건져낸 그 음성이었다.

손이 떨려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이태균이 들어왔다. 그 순간, 강준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만, 화면을 켰다.

메시지를 보여줬다.

이태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10년을 함께했던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완전히 사라진다고?"

이태균이 중얼거렸다.

강준호가 눈으로 대답했다. 그 눈빛은 분명했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빌보드 1위까지 가야 한다는 그 목소리의 명령. 그것은 선택지가 아니라 운명이었다.

박준서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강준호와 이태균이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본 그는 즉시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뭐... 뭐예요?"

박준서가 물었다.

강준호는 휴대폰을 내렸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느리고, 고통스럽게.

"계속해야 한다."

그것이 강준호의 마지막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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