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애의 연기, 시작되다
식당의 침묵이 가시성 물질처럼 무거웠다.
레이나는 뒷모습으로 모든 것을 말했다. 어깨를 펼친 자세, 느릿한 발걸음, 떨어지지 않는 검은 마력의 자국—모두가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멈췄다.
"저런 게 저주 맞지?"
누군가의 속삭임이 테이블에서 테이블로 번졌다.
레이나는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미소를 참았다. 아직까지는 연기였다. 거울 앞에서 연습한 표정, 계산된 침묵, 의도된 공포. 하지만 식당을 나가며 손가락을 펼쳤을 때 느껴진 것은—이것이 먹혀든다는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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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도서관 지하 열람실.
레이나는 책장 뒤에 웅크리고 앉은 1학년 소녀를 발견했다. 어제의 후배였다. 눈 주변이 부었다. 책도 펼쳐있지 않았다. 그저 숨죽이고 있었다.
그 순간 위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 미천한 것, 책장 정리는 했나?"
3학년 상급생들이었다. 레이나는 이들을 알았다. 작년에도 1학년들을 괴롭히던 무리였다. 그들의 손에는 책이 아닌 채찍이나 마찬가지인 신문지 묶음이 들려있었다. 돈을 받고 심부름을 하는 대신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것이 취미인 무리였다.
레이나는 책장에서 나왔다.
천천히.
상급생 중 가장 앞에 있던 금발의 여학생이 먼저 알아챘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베, 베르그란트 영애?"
"흥미로운 광경이군."
레이나의 목소리는 차갑고 길었다. 어제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더 위험해 보였다.
"저들은 뭐 하는 거지?"
상급생 중 한 명이 용기를 내려 했다.
"그냥 후배하고 장난하는 거고—"
"장난?"
레이나가 한 발 다가섰다.
상급생들이 물러섰다. 그들도 느꼈다. 공기가 짙어지고 있다는 것을. 레이나 주변의 어둠의 마력이 서서히 농밀해지고 있다는 것을.
"내 말을 안 들었나? 아카데미 규칙 10조. '동료 학생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괴롭힘은 제명'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레이나는 손을 들었다.
검은 마력이 손가락에서 소용돌이쳤다. 어제 훈련장에서처럼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어제는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너무 착하니까—"
레이나의 입가가 올라갔다.
"대신 저주를 걸어주겠다. 한 달 동안 너희가 괴롭힌 모든 후배들이 너희의 악몽에 나타날 것이다. 매일밤 똑같은 악몽. 도망칠 수 없는 악몽."
거짓이었다. 레이나는 저주를 걸 수 없었다. 하지만 어둠의 마력은 그들의 뇌에 직접 접근했다. 상대의 무의식적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것. 그것이 베르그란트 가문의 진정한 능력이었다.
상급생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말로. 한 명이 신문지 묶음을 떨어뜨렸다.
"그, 그런 건 불공정해—"
"불공정?"
레이나가 웃음을 흘렸다. 처음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도서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누군가는 그 웃음에서 진정한 악의를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연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공포했다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후배들에게 한 짓이 공정했나?"
상급생들은 도망쳤다. 정말로 도망쳤다. 레이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호흡이 가빠졌다.
그것은 연기의 떨림이 아니었다.
도서관 지하 열람실에는 레이나와 1학년 소녀만 남았다. 소녀는 여전히 책장 뒤에 웅크리고 있었다. 레이나가 다가갔다.
"괜찮아?"
레이나의 목소리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차갑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은, 그저 담백한 목소리.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개 있었지만, 더 이상 공포로 떨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경외감이 보였다.
"감, 감사합니다. 영애님."
"다음부터는 도서관에 올 때 나한테 말해. 그럼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거야."
레이나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 순간, 자신의 손을 봤다.
검은 마력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마치 물이 새는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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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귀족 여성 예절 수업.
교실 전체가 달라져 있었다. 레이나가 들어오자마자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어제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아니었다. 순수한 공포였다.
"오늘 파트너 활동은—"
교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레이나가 앞자리에 앉으면서 주변 학생들이 스르르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야?"
레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 학생은 즉시 웃음을 멈췄다.
'이게 맞는 건가?'
레이나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검은 마력이 희미하게 맴돌고 있었다. 어제는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에서 나오고 있다.
공포. 성취감. 자유.
그 감정들이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불러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복도로 나갔을 때, 무언가 이상했다. 공기가 가시적이었다. 사람들이 레이나 주변의 공간을 피했다. 마치 그 공간에 무언가 오염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레이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어제 훈련장에서 세인을 위협했을 때, 그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오늘 도서관에서 상급생들을 혼냈을 때도, 그들의 공포가 명확했다. 마치 투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그게 진짜였다. 그들의 반응이. 그들의 공포가.
어제까지 레이나는 착한 일을 해도 악으로 읽혔다. 오해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의 의도가 명확하게 전달된다. 자신의 감정이 정확하게 전해진다.
'이게 자유구나.'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손에서 검은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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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기숙사.
레이나의 방은 조용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만이 공간을 적시고 있었다. 레이나는 책상에 앉았다.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제어할 수 없는 경직.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경직은 더 심해졌다.
'이게 정상인가?'
어제는 연기였다. 의도적으로 검은 마력을 흘려보내고, 의도적으로 그들을 위협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검은 마력은 자신의 감정에서 자동으로 솟아나고 있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레이나는 손을 펼쳤다 다시 움켜쥐었다.
검은 마력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나왔다.
'멈춰.'
명령했다. 아무 효과가 없었다.
'멈춰!'
더 강하게 명령했다. 대신 마력이 더 세차게 흘러내렸다. 마치 자신의 저항을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레이나는 손을 물에 씻었다. 물론 이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어둠의 마력은 씻을 수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손을 계속 비비고 있었다. 마치 그것으로 뭔가 지울 수 있을 것처럼.
찬 물이 손목을 타고 내려갔다. 레이나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 마력이 손가락에 감겨있었다. 어제는 이것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것은 제어가 아니라 동의였다. 자신의 감정이 마력을 부르고, 마력이 자신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이게... 뭐지?'
손을 움켜쥐었다. 검은 마력이 손바닥에서 흘러내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영애 진짜 악한 거 같아. 어제도 상급생들이 다 도망쳤대."
"저주 건다고 했잖아. 저건 진짜 마녀 같은 건데?"
"쉬, 들릴 수도 있지."
목소리들이 멀어졌다.
레이나는 손을 펼쳤다. 마력은 여전히 흘러내렸다. 마치 상처에서 피가 나오듯이.
그리고 그 순간, 레이나는 깨달았다.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내일의 자신이 또 다를 것이라는 것을.
방 안의 불이 희미해졌다. 검은 마력이 빛을 삼키고 있었다. 마치 방 전체가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는 것처럼.
레이나는 천장을 봤다. 천장의 모서리에서 검은 마력이 피어올라 있었다.
'제어해. 지금.'
손을 들어 올렸다. 마력이 다시 손으로 몰려들었다. 천천히. 마치 자신의 부름에 응하듯이. 마치 자신이 진짜로 제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지만 레이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제어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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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기숙사 카페테리아.
레이나가 식사를 마치자 옆 테이블의 학생이 자리를 옮겼다. 반대편에서 또 다른 학생이 일어났다. 어제와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더 빨랐다. 더 자동적이었다.
"레이나 영애가 왔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퍼지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마치 감염되는 것처럼.
레이나는 우유를 마셨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게 더 쉽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공포는 명확했다. 오해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고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은 진짜였다.
반대로 착한 일을 할 때는 항상 의심받았다. 도움이 저주로 읽혔다. 선의가 계산으로 읽혔다. 자신의 진심이 왜곡되었다.
'어느 쪽이 더 참인가?'
그 질문을 하는 순간, 무언가 이상해졌다.
카페테리아의 온도가 떨어졌다. 아주 조금. 하지만 명확하게. 레이나 주변 3미터 반경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학생들이 더 멀리 앉았다.
레이나는 자신의 손을 봤다. 어제 밤처럼 검은 마력이 희미하게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자신이 부른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그런데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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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도서관.
레이나는 3층 열람실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이 층에 없었다. 오전 수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도 이 층에 오지 않았다.
레이나 때문에.
어제 이곳에서 상급생들을 혼낸 이후로, 학생들은 3층을 피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곳이 오염된 장소인 것처럼.
레이나는 책을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이 계속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레이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심장이 빨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검은 마력이 솟아올랐다.
"혼자 있네요."
세인 기사 후보생이었다. 어제 훈련장에서 위협한 그 학생.
레이나는 책을 계속 넘겼다. 무시하는 척.
"궁금해서요."
세인이 더 가까워졌다.
"왜?"
"당신이."
레이나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세인의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있었다. 호기심이었다.
"뭐가?"
"당신이 정말 악한 건지, 아니면 그냥 연기하는 건지."
레이나의 손이 책 위에서 멈췄다.
"둘 다."
그 말이 나온 순간, 자신이 한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신이 뭐라고 말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세인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군요."
그는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레이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책상 끝에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혹시... 당신도 연기 중인 건가요?"
세인의 질문이 날카로웠다. 마치 상처를 헤집는 것처럼.
레이나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니, 정확히는 세인의 뒷모습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자신의 마력이 주변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건 내 문제지."
레이나가 답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돌아섰다.
레이나는 세인의 뒷모습을 봤다. 그의 어깨가 조금씩 올라갔다. 마치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뭐 하는 거야?'
레이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대신 손에서 검은 마력이 더 세차게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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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기숙사 복도.
"들었어?"
"뭐?"
"레이나 영애. 도서관에서 세인이랑 뭔가 있었대."
"뭐가?"
"모르는데, 세인이 나올 때 웃고 있었대."
"진짜?"
"응. 그런데 레이나 영애는 진짜 무서운 표정이었다고."
복도에서의 속삭임이 계속되었다. 이미 어제의 사건이 확대되고 있었다. 실제와 상관없이. 상상과 현실이 섞이고 있었다.
레이나는 방 안에 앉아 그 목소리들을 들었다.
'내가 한 게 아닌데도...'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 마력이 손가락에 감겨있었다.
'이게... 나인가?'
목이 경직되었다. 호흡이 얕아졌다. 하지만 이번엔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기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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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30분, 기숙사 옥상.
누군가가 기숙사 지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망토를 입은 인물이. 레이나의 방 창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검은 마력을 관찰하며.
그 인물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더 깊어진다."
인물이 중얼거렸다.
"좋다. 더 깊어져야 한다."
손에 들린 기록장에 뭔가를 적었다. 마치 실험을 기록하듯이.
"아직 초기 단계지만... 이 속도라면..."
인물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에 진짜 악역 영애가 탄생하겠군."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레이나는 여전히 손을 들고 있었다. 검은 마력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내가 뭐가 되고 있는 거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대신 손에서만 검은 마력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