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회복과 깨달음」
새벽 5시 47분. 병원 집중치료실의 모니터들이 일정한 리듬으로 신호음을 울렸다. 이수현의 눈이 떠졌다. 천장의 불빛이 흐릿했다. 몸이 납처럼 무거웠다. 팔뚝에 주입 라인이 연결되어 있었고, 가슴팍에는 심전도 패치가 붙어있었다. 입안은 종이처럼 말라있었다.
"...깼나."
창 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희미하게 보였다. 밤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간. 새벽의 경계. 이수현은 천천히 목을 돌려 병실을 둘러봤다.
박준호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검사 박준호는 셔츠 소매를 걷어올린 채로, 팔짱을 낀 상태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틀간 면도를 하지 않은 턱에는 수염이 자욱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이수현을 발견한 박준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의식이 돌아왔군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13년 전 법정에서 들었던 그 음성이 아니었다. 이수현은 입술을 움직였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박준호가 옆 탁자에서 종이컵을 들었다. 빨대가 꽂혀있었다. 그가 물을 마시도록 돕자, 이수현은 한 모금을 삼켰다.
"3일 동안 의식이 없었습니다. 뇌출혈, 신경계 손상, 다발성 장기 부전. 의사는 기적이라고 했어요."
박준호가 다시 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팔뚝을 문지르고 있었다.
"당신의 능력... 그것이 뭔가요?"
이수현은 박준호의 얼굴을 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진정한 궁금증이 있었다.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증오는 더 이상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이수현의 목소리는 갈라져있었다.
"의학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박준호가 눈을 감았다. 그의 어깨가 가라앉았다. 마치 누군가 그의 등에 짐을 내려놓은 듯이. 오래된 죄책감이 조금 덜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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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이현준 변호사가 병실에 들어왔다. 그는 이수현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살았네요. 정말 살았다."
"네."
이수현은 침대를 일으켜 앉아있었다. 몸은 여전히 약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이현준은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서류 한 묶음이 들려있었다.
"당신의 무죄는 확정됩니다. 어제 판사가 공식 선언했어요. 13년 전 사건, 신문현 살인 사건에서 진범은 이수진. 당신의 동생이 맞다는 게 CCTV로 증명됐고, 박준호 검사의 자백으로 13년 전 증거 조작이 드러났다."
이현준이 서류를 펼쳤다. 판결문이 보였다. '피고인 이수현, 무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수현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팔에 박혀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이현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이 법정에서 조작한 증거에 대한 책임이 남아있다. 이재훈의 기억을 강제로 변조했고, 그로 인해 허위 자백을 유도했다. 증거 조작죄, 위증 강요죄, 법정모욕죄. 판사 김혜민은 당신의 책임을 별도로 규명하겠다고 선언했어요. 새로운 재판이 있을 겁니다."
이수현은 침대 보를 만졌다. 천이 몸에 닿는 감각이 유독 선명했다.
"그것도 제가 감당해야 할 죄입니다."
"뭐?"
"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거짓을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범죄예요."
이현준이 이수현의 얼굴을 봤다. 변호사는 많은 것을 읽으려 했다. 후회인지, 깨달음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모두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확함이 있었다.
"당신이 이걸 인정하는 거예요?"
"네."
"그러면 당신은 법정에서 또 다시 유죄를 받을 수 있어요."
"네. 하지만 거짓으로 정의를 이루는 건 정의가 아니거든요."
이현준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가 변호사로 산 30년 동안,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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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30분. 신지은이 병실 문을 두드렸다.
이수현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울 시내의 빌딩들이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신지은의 얼굴을 봤을 때, 이수현의 호흡이 잠깐 멈췄다.
신지은의 눈은 부어있었다. 3일을 울은 눈이었다.
"...들어오세요."
신지은이 천천히 들어왔다. 그녀는 이수현의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입술이 떨렸다.
"저는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신지은의 목소리는 작았다.
"13년간.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라고. 매일 밤 당신의 죽음을 상상했어요. 당신이 죽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이수현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 둘 다 피해자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신지은이 앉았다. 병실의 의자에 앉아,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떨렸다.
"13년을 잘못된 대상을 증오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억울함 속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이수현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신지은의 손을 잡았다. 피부가 차갑고 가늘었다.
"네. 우리 둘 다요."
신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를 용서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그가 저를 버렸으니까. 그런 아버지를 선택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신지은이 이수현의 손을 쥐었다.
"하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수현의 눈가에 습기가 맺혔다. 13년 동안 흘린 눈물보다도, 지난 일주일 동안 흘린 눈물보다도 다른 성질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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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박준호가 다시 왔다.
이수현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신지은은 이미 떠난 후였다. 박준호는 이번엔 화분을 들고 있었다. 작은 난초였다.
"입원 환자에게는 관례죠."
그가 화분을 창가에 놨다. 녹색 잎이 저문 햇빛에 빛났다.
"당신이 만든 증거들 때문에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박준호가 창 옆에 섰다.
"역설적이지만, 당신의 행동이 진실의 길을 열었어요. 당신이 이재훈의 기억을 조작하지 않았다면, 그의 자백도 없었을 거고, CCTV도 공개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의 동생도 적발되지 않았을 거고."
"하지만 그것도 정의가 아닙니다."
이수현이 말했다.
"거짓으로 만든 진실은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제 능력으로 만든 증거들이 모두 조작이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게 흔들립니다. 법정의 권위도, 판결도, 그리고 제 무죄도."
박준호가 이수현을 봤다.
"그래서 당신이 자백할 거군요."
"네."
"법정에서?"
"네. 제가 법정에서 저지른 모든 것들을."
박준호의 눈가가 젖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13년 전, 저는 당신이 범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모든 증거가 당신을 가리켰고, 법은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했어요. 하지만 제 확신은 틀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 달간, 당신이 만든 증거들이 진실을 드러냈습니다."
박준호가 이수현의 손을 잡았다.
"우리 둘 다 거짓 속에서 살았어요. 나는 틀린 확신 속에서, 당신은 조작된 증거 속에서. 그런데 마지막에 당신이 진실을 선택했습니다."
"아직 선택한 게 아닙니다."
이수현이 말했다.
"선택하려고 합니다. 법정에서 제 모든 것을 고백할 때, 그게 진짜 선택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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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났다. 이수현의 신체는 회복되고 있었다. 의사는 신경 손상이 덜 심각하다고 했다. 물론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했지만. 그녀의 왼쪽 손가락에는 여전히 미세한 진전이 있었다. 신경 손상이 능력을 영구적으로 손상시킨 것이었다. 의사는 뇌출혈로 인한 신경계 손상이 초자연적 능력의 물리적 기반을 파괴했다고 설명했다. 그 능력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의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손상은 명확했다.
오전 10시. 재심법원 304호.
이수현은 피고인석에 섰다. 법정은 가득 찼다. 기자들, 변호사들, 시민들. 모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판사 김혜민이 법망치를 들었다.
"피고인 이수현. 당신은 13년 전 신문현 변호사 살해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후 재심을 청구했고,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법정에서 증거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당신의 입장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수현이 마이크 앞으로 나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명확했다.
"저는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법정이 고요해졌다.
"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거짓을 만들었습니다. 증인의 기억을 강제로 변조했고, 그로 인해 허위 자백을 유도했습니다. 그것도 범죄입니다. 제가 13년 전에 받은 사형 선고가 부당했다고 해서, 제가 저지른 범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떨렸다. 법정 방청석에서 웅성거림이 시작됐다.
"저는 제 능력으로 진실을 왜곡했습니다. 그것이 우연히 진정한 진범을 드러냈다고 해도, 제 행위는 여전히 범죄입니다. 법정의 정의는 거짓 위에 세워질 수 없습니다."
이수현이 판사를 봤다.
"저는 제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
판사 김혜민이 법망치를 내려놨다. 그녀의 눈은 이수현을 깊게 들여다봤다. 오래된 침묵이 흘렀다.
"피고인 이수현. 당신은 13년을 죽음으로 살았습니다."
판사의 목소리는 낮았다.
"당신은 능력으로 거짓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진실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구원입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본 법원은 당신의 13년 전 사형 선고를 재심하여 무죄 판결합니다."
판사가 잠시 숨을 고르며 박준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검사 박준호는 13년 전 신문현 사건 수사 당시 CCTV 영상을 의도적으로 삭제했습니다. 피고인을 범인으로 확신했으나 그 확신이 틀렸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이는 검사의 기본적 의무를 위반한 중대한 직무 오류입니다. 검찰은 이에 대한 공식 입장을 표명해야 합니다."
박준호가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모든 눈이 그에게 쏠렸다.
"13년 전, 저는 피고인 이수현을 범인으로 확신했습니다. 그 확신은 틀렸고, 그로 인해 무고한 사람을 죽음의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박준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당시 신문현 사건의 CCTV 영상 삭제, 증거 조작 등 모든 수사 오류에 대해 검찰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합니다. 피고인 이수현에 대한 모든 기소를 유예하며, 향후 검찰 내부 조사를 통해 책임자를 규명하겠습니다."
법정이 요동쳤다. 박준호는 이수현을 봤다. 그의 눈에는 진정한 후회가 있었다.
"당신이 법정에서 저지른 증거 조작 행위에 대해서는 별도의 절차를 거쳐 판단하겠습니다. 다만 당신의 자발적 고백과 진정성을 고려하여, 선처를 권고하는 바입니다."
판사가 법망치를 내렸다.
"본 법원은 피고인 이수현을 무죄로 판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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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을 나온 이수현은 복도에 서 있었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들었다. 13년 만에 받는 햇빛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햇빛에 비춰봤다.
손가락에서는 더 이상 은색 빛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보려 했다. 예전처럼 그 특별한 감각을 불러내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가락은 그저 손가락일 뿐이었다. 신경 손상이 능력을 영구적으로 손상시킨 것이었다.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박준호가 복도에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무죄예요."
"네."
"그리고 당신은 살았어요."
"네. 살았습니다."
박준호가 이수현의 어깨에 손을 놨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13년 전, 저는 당신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신문현 사건의 CCTV를 의도적으로 삭제했고,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그것이 제 죄입니다."
박준호의 목소리는 명확했다.
"당신을 범인으로 확신했던 제 오류를 은폐하기 위해 그랬습니다. 그 모든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제 능력으로 당신을 조작했습니다. 그것도 제 죄입니다."
이수현이 박준호를 봤다.
"우리 둘 다 죄를 지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이수현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선택한 진실이 저도 진실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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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304호의 문이 닫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여전히 명확했다. 새벽이 끝나고, 낮이 왔다. 그리고 밤도 올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의 모든 순간이 이제는 다르게 보일 것이었다.
이수현은 복도의 벤치에 앉았다. 그녀의 왼쪽 손가락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비표시 번호였다.
이수현은 한동안 핸드폰을 바라봤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벨소리가 울다가 끊겼다.
곧이어 문자가 들어왔다.
'법정에서 봤어. 잘했어. 이제 우리 만나자. — 이수진'
이수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동생이 살아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신경 손상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공포였다.
이수현은 박준호를 찾아 복도를 돌아다녔다. 그는 검찰 관계자들과 대화 중이었다. 그녀의 눈을 만났을 때, 박준호는 즉시 그들을 떠났다.
"뭐예요?"
"문자가 왔어요. 이수진에게서."
이수현이 휴대폰을 보였다. 박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이수진이... 살아있다는 건 알았지만, 아직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도주 중인 상태예요. 당신이 법정에서 자백하는 모습을 봤다는 건... 그녀가 법정 방청석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박준호가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당신을 만나면 안 돼요. 위험합니다."
"네. 알아요."
이수현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만나야 해요. 제가 제 무죄를 얻기 위해 그녀를 희생시켰으니까."
박준호가 이수현의 팔을 잡았다.
"그건 당신의 책임이 아니에요. 당신의 동생이 범인이었고, 당신은 피해자였어요."
"하지만 제 능력으로 그녀를 조작했어요. 제 무죄를 위해."
이수현이 박준호의 손을 밀어냈다.
"저는 제 죄를 인정했어요. 이제는 제 동생도 만나야 합니다."
"이수현..."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이수현은 복도를 나갔다. 햇빛이 여전히 명확했다. 하지만 그 빛 속에는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
'언제 어디서?'
응답은 즉시 왔다.
'지금. 강남구 오피스텔 304호에서. 신문현이 죽던 그 자리에서.'
이수현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번엔 신경 손상도, 공포도 아닌 다른 것이었다.
결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