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퇴고본

교도소 철문 너머로 처음 본 서울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이수현은 아직도 실감하지 못했다. 13년을 세운 벽 안에서 보던 하늘은 손가락 크기였다. 지금 그 하늘이 온전히 펼쳐져 있는데도, 자신이 여전히 감옥 안에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형 집행 5일 전, 이수현은 깨어났다. 손가락 끝에서 은색 빛이 흘렀고, 그것이 닿는 모든 기록과 증거가 다르게 보였다. 13년 전 법정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몬 그 증거들이 거짓이라는 걸 한순간에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도.

이현준의 사무실은 강남역 근처 오피스텔 10층이었다. 낡은 엘리베이터가 삑삑거리며 올라갔다. 이수현은 거울처럼 반사된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신을 봤다. 검은 머리에 움푹 팬 뺨. 절망이 살을 깎아낸 얼굴. 그러나 눈동자는 달랐다. 그곳에는 은색 금이 그어져 있고, 그 사이로 빛이 흘렀다.

"이수현."

이현준이 문을 열었을 때, 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13년 만에 보는 친구의 표정은 복잡했다. 기쁨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살아 있었군."

단순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13년의 시간이 모두 들어 있었다. 이수현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서책이 빼곡한 책장, 낡은 책상,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강남의 건설 중인 빌딩들.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재심 청구를 해주세요."

이수현이 먼저 말했다. 이현준은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재심 청구는 사형 확정자에겐 법적 자격이 없어. 사실 넌 죽은 사람이야. 법적으로."

"그래서 살아난 겁니다. 다시 법정에 서기 위해."

이현준이 책상 위의 서류들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13년간 이수현의 무죄를 위해 썼던 손이었다. 억울함에 가득 찬 손이었다.

"재심이 인정되려면 새로운 증거가 필요해. 당시 판사는 증거의 부재가 아니라 충분함을 이유로 유죄 판결했어. 지금 와서 '당시 증거를 다시 봐달라'는 건... 법적 근거가 약해. 검찰이 '새로운 증거 없음'을 이유로 기각 신청할 거야."

이수현이 책상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이현준의 눈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손가락 끝에서도 희미한 은색이 흘렀다.

"증거는 내가 찾겠습니다."

"어떻게?"

이수현이 눈을 들었다. 그 눈을 본 이현준은 말을 잃었다. 그 눈동자 속의 금과 빛을 본 순간, 그는 자신의 친구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신뢰해주세요."

이현준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마치 위험한 동물 앞에서 하는 동작처럼.

"변호사 자격으로 넌 내 의뢰인이고, 나는 넌 무죄라고 믿어야 해. 하지만 인간으로서... 난 너한테서 뭔가 비정상적인 걸 느껴."

"비정상은 13년의 감옥입니다. 이현준, 재심 청구를 해주세요."

그 말이 명령처럼 들렸다. 이현준은 다시 한번 그녀의 눈을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

서울 중앙지방법원의 지하 1층 기록실은 회색 조명 아래 고요했다. 팩스 냄새와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수현은 2010년 11월 신문현 살인 사건 기록을 펼쳤다.

13년 전 그 문서들은 노랗게 변해 있었다. 사진, 증거 목록, 증인 진술서, 법의학 보고서. 모두 자신을 죽음으로 몬 증거들이었다. 손에 묻은 피,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 신문현에게 준 선물의 포장지. 모든 것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이수현의 손가락이 한 장의 문서에서 멈췄다. 「신체 발견 신고 기록」. 그 위에 타이핑된 글씨는 희미했다.

**신고자: 미상의 여성(30대 후반 추정)**

**신고 장소: 오피스텔 현관 앞**

**신고 시각: 오후 3시 47분**

그리고 그 아래 손으로 쓴 주석이 있었다.

「신고자 신원 미상. 추적 불가. 통화 기록만 남음.」

이수현의 눈이 좁혀졌다. 현장 최초 발견자가 정체 불명이라는 건 이상했다. 13년 전 당시 그녀는 법정에서 이 부분을 놓쳤다. 재판부는 '신고자의 신원이 중요하지 않다'며 진술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신문현이 이미 사망했고, 신고 시각이 이수현의 알리바이 부재 시간대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13년 뒤의 관점에서 보면 달랐다.

미상의 여성은 누구인가? 신문현의 사무실에 왜 있었나? 왜 신원 추적이 불가능했나?

이수현은 손가락을 기록에 올렸다. 손가락 끝의 은색이 문서 위에서 더욱 밝게 빛났다. 순간, 문서 전체가 다르게 보였다. 타이핑된 글씨 아래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지운 흔적이었다.

이수현이 손을 떼었다. 은색이 사라지자 문서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순간 이수현의 손가락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끝이 창백해졌고, 손톱 끝이 검어졌다. 손가락 관절까지 저릿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마치 살이 얼어붙는 것처럼.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몸이 깎여나간다. 그걸 이수현은 이제 알았다.

문서의 끝에 경찰 서명이 있었다. 이재훈 형사. 그리고 그 옆에 검사 서명. 박준호.

박준호였다. 13년 전 그 남자가 이 기록에 사인을 했다. 그는 미상의 여성을 추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니, 결정하지 않은 게 아니라 결정할 수 없었다. 왜?

"혹시 다른 자료가 필요하신가요?"

기록실 담당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13년 전 현장 CCTV 영상이 있나요?"

담당자는 컴퓨터를 두드렸다. 몇 초 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유실 처리되었습니다. 당시 검찰에서 증거 관리 과정에서 손상되었다고 보고했거든요. 기록에는 남아 있지만 실제 영상은 없습니다."

"누가 보고했습니까?"

"특수 검찰부 차장... 박준호 검사입니다."

이수현이 문서를 정리했다. 손이 차가워졌다. 능력 사용의 대가가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창백해지고, 피부가 회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

기록실 복도에서 이수현은 박준호를 만났다. 그 남자는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다.

"이수현?"

박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13년 전 법정에서 자신을 유죄로 몬 그 남자였다. 경악, 두려움, 그리고 무언가 더 복잡한 감정들이 그의 눈에 떠올랐다.

이수현이 천천히 다가섰다. 기록실의 형광등 아래서 그녀의 눈동자가 은색으로 반짝였다.

"13년 동안 죽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이제 증명하러 왔습니다."

박준호가 한 발 물러섰다. 그의 손이 떨렸다. 검사실을 나올 때만 해도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했던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CCTV 영상을 봤죠?"

이수현이 물었다.

"뭔가 불편한 게 있어서 없앤 건가요?"

박준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미상의 여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죠? 신원을 추적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가 뭐죠?"

박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부정이 아니라 거부였다. 말할 수 없다는 신호였다.

"당신이 재심 기각을 명령받았군요. 누가?"

"이수현, 그만해."

박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모르는 게 낫다. 정말로."

"그럼 당신은? 당신은 뭐가 무서운가요?"

이수현이 물었다.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수현을 지나쳐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의 등은 구부러져 있었다.

---

검찰청 특수 검찰부 부장실. 박준호는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상관 한석우가 의자에 앉아 문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수현이 기록실에 나타났다고?"

한석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위협적이었다.

"법원에서 재심 청구를 접수했습니다. 변호인은 이현준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여자와 기록실에서 마주쳤다."

박준호가 입을 다물었다.

"새로운 증거를 찾으려고 할 겁니다."

"새로운 증거?"

한석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박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계산적이었다.

"재심은 기각되어야 한다. 절대로."

"하지만 만약 당시 수사에 오류가 있었다면..."

"오류는 없었다."

한석우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마치 판결문처럼.

"13년 전 우리가 내린 결정은 정확했고, 당신의 판단은 완벽했다. 그 기록은 변하지 않는다."

한석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혹시 그 여자가 뭔가 새로운 증거를 들고 나온다면, 그건 거짓이다. 우리가 확인하고 처리해야 할 거짓이다. 이해하나?"

박준호가 목을 삼켰다.

"예, 부장님."

"그리고 박 검사."

한석우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이수현을 다시 만나면 안 된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만나라. 그 여자는 위험하다. 13년 전에도 위험했고, 지금도 위험하다."

박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 그 여자가 당신에게 접근한다면, 즉시 보고하라. 우리가 처리하겠다."

한석우의 말에는 명확한 위협이 담겨 있었다.

박준호는 부장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그는 한 번 멈춰 서서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

교도소 친구 김지영과 만난 카페는 강남역 지하에 있었다. 김지영은 이수현을 봤을 때 소리를 질렀다.

"오빠! 정말 살아났네!"

"응."

이수현이 커피를 마셨다. 커피의 쓴맛이 입안에 퍼졌다. 13년 만의 커피였다. 하지만 그 맛도 이제는 낯설었다.

"법원 간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어?"

"시작했어. 재심."

김지영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정말이야? 그럼 진범을 찾을 수 있어?"

이수현이 커피잔을 들었다가 멈췄다. 손가락 끝이 창백했다. 능력을 사용한 흔적이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손을 숨겼다. 테이블 아래로.

"나 죽어야 할 사람이었어."

김지영이 입을 다물었다. 이수현이 계속했다.

"근데 깨어났어. 뭔가 다른 거로. 이제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이수현이 눈을 들었다. 그 눈동자 속의 은색이 카페의 불빛에 반사되었다.

"교도소에 있을 때 들은 거 있어?"

"뭐?"

"신문현 사건 관련해서. 혹은 그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이나 검사 관련해서."

김지영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있긴 한데... 그게 사건이랑 관련이 있어?"

"말해봐."

"한석우 검사 얘기. 교도소 출소자 중에 한석우 부장이 과거에 수사한 사건들의 증인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있었어. 그런데 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게..."

김지영이 목소리를 낮췄다.

"한석우는 증거를 조작하는 검사라는 거야. 그리고 그를 도와주는 형사들이 있다고. 신문현 사건도 그 중 하나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

이수현의 눈이 좁혀졌다.

"이재훈이라는 형사 이름 들어봤어?"

"그 이름은 안 들었는데... 왜?"

"그 형사가 신문현 사건 현장 수사를 주도했어."

이수현이 커피를 마셨다. 그 순간 손가락이 다시 저릿해졌다. 능력을 쓸 때마다 몸이 깎여나간다. 이제 그것이 명확했다.

"미상의 여성이 있어. 신문현 시체를 신고한 여자.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해."

"어떻게?"

"그 여자가 진범을 보호하고 있어. 그리고 그 진범은 한석우나 이재훈과 연결되어 있어."

이수현이 테이블 위의 손을 다시 봤다. 손톱 끝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교도소에서 그 여자에 대한 정보 없었어? 혹은 한석우나 이재훈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김지영이 다시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있어. 근데 이건 정말 위험한 정보야. 나도 들었을 때 놀랐거든."

"말해봐."

"한석우 부장이 예전에 교도소에 있던 여자 수감자를 만났다고 해. 그 여자가 출소하면서 뭔가 합의를 한 거 같아. 그 여자가 증인이 되지 않는 대신, 한석우가 그 여자의 형량을 줄여주기로. 그 여자의 이름이..."

김지영이 입을 다물었다.

"뭐야? 이름이 뭐야?"

"이름은 모르지만, 그 여자가 신문현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했어. 신문현의 아내라고."

이수현이 몸을 굳혔다.

"신문현의... 아내?"

"응. 신문현이 죽던 날, 그 여자가 현장에 있었다고. 그리고 그 여자가 신고를 했다고. 하지만 나중에 신고 기록이 없어졌다고."

이수현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에서 은색이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카페의 공기가 떨렸다. 마치 무언가가 공간을 찢고 들어오는 것처럼.

이수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열었다. 그 눈에는 13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신문현의 아내. 그 여자의 이름은 신미연이었다.

---

법정 기록실로 돌아간 이수현은 다시 한번 「신체 발견 신고 기록」을 펼쳤다. 미상의 여성. 신미연.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그 여자가 진범의 실마리였다.

이수현은 담당자에게 다시 물었다.

"당시 통화 기록 복원이 가능한가요?"

"복원이요? 그건... 유실 처리되었다고..."

"복원이 가능한가요?"

담당자가 컴퓨터를 두드렸다. 몇 초 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특수 검찰부 차장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박준호 검사?"

"예."

이수현이 기록실 복도로 나갔다. 그 순간, 박준호가 기록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진짜 범인이 아니라면..."

박준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13년을 잘못 산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죄책감도.

이수현이 그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의 금이 박준호의 얼굴에 반사되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게 있죠. 신미연이 누구인지."

박준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어떻게 알았어?"

"당신이 신고 기록을 없앤 이유가 뭐죠? 신미연을 보호하기 위해?"

박준호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말할 수 없다는 신호였다.

"한석우가 시켰죠? 신미연의 신원을 지우라고. 그리고 재심을 기각하라고."

박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부정이 아니라 거부였다.

"그리고 증거를 없애라고. CCTV도, 통화 기록도."

박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수현, 이건 넌 상대할 수 없는 일이야. 진짜로."

"그럼 당신은 상대할 수 있나요?"

이수현이 물었다.

박준호는 깊은 숨을 쉬었다. 오랜 갈등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는 이수현을 지나쳐 기록실로 들어갔다. 그 뒤 몇 초 뒤, 기록실 담당자가 복도로 나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그의 손에는 몇 장의 문서가 들려 있었다.

"이거... 누군가 가져가라고..."

담당자가 이수현에게 문서를 건넸다. 그것은 「신체 발견 신고 기록」의 원본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다른 문서들이 있었다. 지워진 부분이 복원된 통화 기록. 그리고 CCTV 영상의 메타데이터.

이수현이 문서를 받았다. 손가락이 그것을 만지는 순간, 은색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가락이 창백해졌다. 손끝에서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다. 피부가 회색으로 변해갔다. 마치 부패하는 것처럼. 능력의 대가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이건..."

이수현이 중얼거렸다.

"박준호가 준 거네."

기록실 밖으로 나간 이수현은 박준호를 찾았다. 그는 법정 복도의 창가에 서 있었다. 서울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수현이 물었다.

박준호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내가 13년을 잘못 살았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잘못 살 거니까."

박준호가 말했다.

"당신이 무죄라면, 나는 살인자야. 13년을 더 죽게 한 살인자."

이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를 찾아. 신미연을."

박준호가 계속했다.

"그 여자가 진범이 아니야. 그 여자는 목격자야. 그리고 그 여자가 왜 신원을 감춘 이유도. 그것까지 알아야 모든 게 끝난다."

"그 여자가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 건가요?"

이수현이 물었다.

박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난 정말 모른다. 그건 한석우와 이재훈만 안다. 그리고 신미연 자신도."

박준호가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당신이 신미연을 찾으면, 모든 게 드러날 거야. 그리고 그 순간 한석우는 당신을 죽일 거야. 진짜로."

"그렇다면 당신은?"

이수현이 물었다.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복도를 걸어갔다. 그의 등은 구부러져 있었고, 그의 걸음은 느렸다.

---

법정 기록실로 돌아간 이수현은 받은 문서들을 펼쳤다. 지워진 부분이 복원된 통화 기록에는 미상의 여성의 목소리가 기록되어 있었다.

「신문현이 죽어 있어요. 오피스텔 현관 앞에. 빨리 와주세요.」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고통을 참으려 하는 것처럼.

이수현이 CCTV 영상의 메타데이터를 봤다. 촬영 시간은 오후 3시 45분부터 3시 50분까지였다. 신고 시각인 3시 47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영상에는 뭐가 있었을까? 박준호가 없앤 이유가 뭐였을까?

이수현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에서 은색이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공중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마치 유령처럼.

CCTV 영상이 투명하게 떠올랐다. 13년 전의 그 영상이.

오피스텔 현관 앞. 신문현의 시체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한 여성이 서 있었다. 30대 후반의 여성. 신미연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고 명확했다.

그리고 그 여성 뒤에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림자 속에 서 있는 남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체형은 묵직했고, 그의 움직임은 익숙했다. 마치 권력에 익숙한 자의 움직임처럼.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칼에서는 아직도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수현이 손을 떼었다. 은색이 사라지자 영상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수현은 이제 알았다.

신미연은 범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목격자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진범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범은... 이수현이 손을 다시 들었다. 손가락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손톱 끝에서 검은색이 더욱 짙어졌다. 피부가 회색으로 변해갔다. 호흡이 가빠졌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자신의 수명이 깎여나간다. 그걸 이수현은 이제 명확히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법정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진범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수현은 기록실 문을 나갔다. 법정 복도는 밤이 되어 있었다. 그 복도를 걸으며 이수현은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 끝이 검어지고 있었다. 손톱 전체가 까맣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부패하는 것처럼.

13년을 더 살기 위해, 이수현은 자신의 수명을 깎아내고 있었다.

그것이 정의인지, 복수인지. 이수현은 여전히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일 아침, 한석우의 사무실에서 이수현의 재심 청구 기각 통보가 나올 것이다. 박준호의 상관이 내린 명령이었다.

하지만 이수현은 이제 신미연의 이름을 알았다. 그리고 그 여자를 찾는 순간, 그림자 속의 남자도 드러날 것이다.

이수현은 기록실의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만 은색으로 빛났다.

법정의 안개는 걷혀가고 있었다. 진범의 그림자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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