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흑장미 재심

약물이 정맥을 타고 흐른다.

2023년 4월 14일, 밤 11시 47분. 서울 북부교도소 사형 집행실. 이수현의 팔에 꽂힌 주사바늘에서 투명한 액체가 천천히 밀려 내려온다. 의료진의 손가락이 정맥주입관을 누르고, 심전도 기계가 규칙적인 비프음을 낸다.

13년이었다.

2010년 11월 15일 신문현 변호사 살인 혐의로 체포된 후, 1심에서 사형 판결. 항소심에서 기각. 대법원에서도 기각. 그리고 지금, 죽음의 약물이 혈관을 타고 들어온다.

이수현의 눈이 천천히 감긴다.

의식이 흐려진다. 천정의 형광등이 흔들린다. 집행인의 얼굴이 흐릿해진다. 심전도 음이 점점 느려진다. 비프음이 멀어진다. 마지막 호흡이 나간다.

그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멈춘다.

아니, 멈추는 게 아니다. 변한다. 이수현의 눈 앞에서 사형 집행실의 풍경이 마치 누군가의 기억 속 영상처럼 해체되기 시작한다. 의료진의 움직임이 프레임 단위로 끊어진다. 주사기의 궤적이 공중에 빛의 자국으로 남는다. 집행인의 손가락이 시간 밖으로 떨어진다.

이수현의 시야가 명확해진다.

죽음 직전의 뇌는 극도의 각성 상태에 빠진다. 모든 감각이 증폭된다. 약물의 화학식이 보인다. 심전도 기계의 전자 신호가 보인다. 집행인들의 공포에 찬 눈동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작은 손짓이다.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는 어린이처럼, 아니,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절박함으로.

집행인의 손이 멈춘다.

의료진의 움직임이 정지한다.

심전도 음이 사라진다.

세상이 단 1초간 정지했다가, 다시 움직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약물의 흐름이 역류한다. 집행인이 주사기를 뽑는다. 의료진이 패닉 상태에 빠진다. 누군가 긴급 신호를 울린다.

이수현의 눈이 다시 열린다.

——

2023년 4월 15일, 오전 6시. 교도소 의료실.

하얀 천정이 보인다. 의료용 조명이 눈을 찌른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의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사형 집행이 실패했습니다." 누군가 대답한다. "어떻게 실패할 수 있습니까."

이수현은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이 정말 살아 있는지, 죽은 건 아닌지, 꿈인지 현실인지 판단할 수 없다. 혼수 상태인가. 아니면 사후 세계인가. 의료실의 천정을 바라본다. 하얀 벽을 바라본다. 오른손에 꽂힌 생리식염수 주입관을 바라본다.

의료진이 패닉 상태다.

"심박이 정상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 투약 후 15분이 지났어."

"뇌파도 정상입니다. 완전히 깨어 있습니다."

누군가 의료실 밖으로 나간다. 누군가 전화를 건다. 누군가 지시를 내린다. 소문이 퍼진다. 패닉이 확산된다.

이수현이 몸을 일으킨다.

간호사가 다가온다. "움직이지 마세요.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이수현이 거울을 본다.

의료실 모서리에 붙은 작은 거울이 있다. 그곳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13년 전과 같다. 아니, 더 망가져 있다. 수감 생활로 인해 창백해진 얼굴. 눈 밑의 검은 자국. 뺨의 살이 빠진 형태.

그런데.

그녀의 눈동자가 이상하다.

홍채를 가로질러 미세한 금이 간다. 마치 도자기에 금이 간 것처럼. 그 금을 따라 은색 빛이 흐른다. 깜빡이는 빛이다. 심장 박동 리듬에 맞춰 빛난다.

이수현의 손가락이 거울에 닿는다.

자신의 눈동자 위로 손가락을 올린다. 금을 따라 움직인다. 빛이 손가락을 따라 춤춘다.

간호사가 비명을 지른다.

"의사! 의사를 불러!"

이수현이 손을 내린다.

금은 사라진다. 빛도 사라진다. 평범한 검은 홍채가 돌아온다.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이수현은 알고 있다. 착각이 아니다.

——

의료실 밖 복도에서 의료진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사형 집행 실패?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의료 오류라고 공식화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공식화? 교도소장과 검찰청에 보고해야 합니다."

"이미 보고됐습니다. 지금 긴급 회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수현은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본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 살아났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다.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

13년 전 법정에서 판사가 선고했다. "피고인 이수현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 선고가 집행되지 않았다.

13년이 무효가 되었다.

이수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아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흐느끼는 소리다. 병상에 누운 채로 몸이 떨린다. 간호사가 진정제를 들고 다가온다.

"주사를 맞으셔야 합니다."

이수현이 손을 들어 거절한다.

"나를 데려가. 수사 담당자들 앞으로."

"지금은 의료실에서 관찰이..."

"나는 법적으로 죽은 사람이다. 더 이상 교도소의 환자가 아니다."

간호사는 망설인다. 의료실 밖에서 누군가 지시를 내린다. "일단 보안실로 옮기세요."

——

보안실은 회색 콘크리트로 된 좁은 방이다. 책상 하나, 의자 두 개, 조명 하나. 감옥 안의 감옥이다.

교도소 감옥장 오기호가 들어온다. 60대 중반의 남자. 30년 근무한 공무원의 피로가 얼굴에 묻어난다. 그는 이수현을 마주 앉힌다.

"사형 집행 절차상 오류가 있었습니다. 의료 진단 결과, 투약 시 주입 경로가 정확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수현이 웃음을 터뜨린다.

"의료 오류? 그래서 나를 풀어줍니까?"

"아닙니다. 다시 집행될 것입니다."

"언제?"

"검찰청과 법원이 결정할 사항입니다."

이수현의 웃음이 멈춘다.

"그 사이에 나는 법적 지위가 뭡니까?"

감옥장이 잠시 침묵한다. 이것이 바로 법적 공백이다. 사형 선고를 받은 수감자가 집행 직전에 깨어났다. 집행이 실패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법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당신은... 법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집행 대기 중인 사형수로 기록되어야 하는데, 의료 오류로 인해 집행이 지연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법적 지위 자체가 모호합니다."

"그럼 재심 청구는?"

"할 수 없습니다. 사형 확정자는 재심 청구 자격이 없습니다."

이수현의 눈에서 금이 다시 빛난다.

"법적으로 죽은 사람이니까요?"

감옥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수현이 미소를 짓는다.

"그럼 법정에서 다시 증명하겠습니다.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그럴 수 없습니다. 법적으로..."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법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증명하겠습니다."

이수현이 일어난다.

감옥장이 막으려 한다. "당신은 여기서 나갈 수 없습니다."

"왜요? 법적으로 죽은 사람이니까요?"

그 순간, 의료실의 거울에서 본 그것이 다시 나타난다. 이수현의 눈동자를 가로질러 금이 간다. 그 금을 따라 은색 빛이 흐른다. 깜빡이는 빛.

감옥장의 눈이 무언가에 사로잡힌다. 그의 몸이 경직된다. 입이 열려 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뇌에 손을 집어넣어 생각을 멈추게 한 것처럼.

이수현이 걷는다.

보안실 문이 저절로 열린다.

복도를 걷는다.

아무도 막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간다.

경비원들이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교도소 정문이 보인다.

밖으로 나간다.

첫 번째 햇빛이 얼굴에 닿는다. 13년 만의 햇빛이다. 눈이 부신다.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웃음이 나온다.

멀리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법원이 있는 도시. 검찰청이 있는 도시. 그리고 자신을 죽음으로 몬 판사가 있는 도시.

이수현의 눈에서 금이 또 다시 빛난다.

——

그 같은 시각, 검찰청 특수부 회의실에서 긴급 회의가 열리고 있다.

특수부장 한석우, 담당 검사 박준호, 수사 담당 형사 이재훈. 그리고 법무부 담당자.

"사형 집행이 실패했다고요?"

"의료진 진술에 따르면, 주입 경로 오류로 약물이 정맥을 놓쳤다고 합니다."

박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이수현이 깨어났다는 말입니까?"

"네. 현재 교도소에서 보호 중입니다."

한석우가 책상을 내려친다.

"이것이 언론에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13년 전 우리의 판단을 의심하는 사건이 됩니다."

이재훈이 입을 연다. 목소리가 떨린다.

"재심 청구를 할 겁니다. 당연히."

"사형 확정자는 재심 청구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법적 선례가 없습니다. 집행 직전 깨어난 사형수의 법적 지위가 명확하지 않으면..."

박준호가 일어난다.

"당시 증거를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뭘 검토합니까?"

"사건 기록 전체입니다. 혹시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한석우가 박준호를 노려본다.

"검사, 당신이 13년을 잘못 산 건 아니겠지요?"

박준호의 눈이 흔들린다. 그의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를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한다.

"... 확실합니다. 당시 증거들은 명확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13년 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수사 담당자 이재훈이 자신에게 말했던 것. '영상은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영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그렇게 유지하세요. 이수현이 죽었든, 살았든, 그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석우가 법무부 담당자를 본다.

"공식 입장은 의료 오류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언론에는 교도소의 의료 과실로 발표하세요."

법무부 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회의실을 나오는 박준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복도의 형광등 아래에서 그의 손이 떨린다. 주머니 속에 꽉 쥐어진다.

그의 핸드폰이 울린다. 이현준 변호사의 전화다.

"검사님, 이수현이 살았습니다."

박준호가 답한다.

"...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박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를 반복했다. 마침내 나온 말은 작고 흐렸다.

"모르겠습니다."

박준호가 전화를 끊는다.

창밖으로 서울의 밤하늘이 보인다. 한 점의 별이 반짝인다. 13년간 꺼져 있던 별이 다시 켜진 것 같다.

박준호는 회의실 복도에 멈춰 선다. 손이 멈추지 않는 떨림으로 흔들린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이재훈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당시 CCTV 영상이 정말 삭제된 건가요?"

전화 너머에서 이재훈의 숨소리가 들린다.

"왜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요."

침묵.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박준호는 그 침묵 속에서 이재훈의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네. 삭제됐습니다."

"어떻게?"

"... 자동 삭제 시스템 오류입니다. 기록에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

박준호가 눈을 감는다. 그 기록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13년 전, 이재훈이 그에게 말했던 것. 그리고 그 이후로 자신이 한 침묵.

"그럼 영상이 있었다면 뭘 보였을까요?"

"... 모릅니다."

이재훈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것은 더 이상 수사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죄인의 목소리였다.

"검사님,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수현은 죽었고..."

"아니오. 이수현은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법원으로 갈 겁니다."

박준호가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결단이 담겨 있었다.

"뭐라고요?"

"당신이 숨긴 영상이 없다면, 그녀는 다른 방법을 찾을 겁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법을 어기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 검사님."

"법이 옳지 않다면, 법을 바꿔야 합니다. 하지만 법을 어기는 것은 다릅니다."

박준호가 전화를 끊는다.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내려앉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죽었어야 할 여자가 걷고 있었다.

——

교도소 정문을 나선 이수현의 발걸음은 처음에는 불안정했다. 13년간 고정된 공간에서만 살아온 신체가 갑작스럽게 자유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햇빛 아래에서 그녀의 그림자는 길고 가늘었다. 마치 누군가 그려낸 선화처럼.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 데 20분이 걸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지나쳐갔다. 누구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혹은 보고도 외면했다. 죽은 자처럼 보이는 여자는 도시의 배경음일 뿐이었다.

버스에 올라탔을 때, 이수현은 거울 같은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 주위는 검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여전히 금이 흐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뼈 안에 빛이 통전되는 것 같은 감각.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였다. 계단 앞에 서서 이수현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13년 전 이 계단을 내려갈 때, 그녀는 유죄인으로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오늘은 다르다. 손목은 자유롭고, 눈동자에는 금이 흐르고 있다.

법원 로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변호사, 소송인, 기자들. 이수현은 그들 사이를 헤치고 민원 안내소로 향했다.

"재심 청구를 하고 싶습니다."

민원 담당자가 위를 본다.

"사건 번호와 성명을 말씀해주세요."

"2010년 신문현 살인 사건. 이수현입니다."

담당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이... 이수현?"

"네."

"당신이... 사형 확정된 분?"

"네. 하지만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담당자는 이수현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수현은 그 대화를 듣지 않았지만, 몸짓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뭔가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30분 후, 이현준이 법원 로비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수현."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한 단어 안에는 13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이수현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어떻게... 살아났어요?"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재심을 청구하고 싶습니다."

이현준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이수현의 눈동자에 흐르는 금이 더 밝아졌다. 이현준의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신경에 전기를 흘린 것처럼.

"죄송합니다."

이수현이 말했다.

"무엇이?"

"제 능력이 당신에게도 작동했나 봅니다."

이현준의 눈이 커졌다.

"능력이라고요?"

"네. 저는 사형 집행 직전에 어떤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저는 살아났습니다."

이현준이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경이가 교차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의 의식을 조작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이수현이 손가락을 펼쳤다. 다섯 손가락 중 하나의 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그리는 것처럼. 손가락의 끝에서부터 반투명하게 변해가는 피부. 뼈가 보일 듯 말 듯한 경계.

"수명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이현준이 그 손가락을 봤다. 그리고 이수현의 눈을 봤다. 그 눈동자에 흐르는 금이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수현이 로비 바닥을 봤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로비의 CCTV 카메라 렌즈가 천천히 위로 향했다. 아무도 카메라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무형의 손으로 조종하듯이.

이현준이 그것을 봤다.

"당신은..."

"제가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법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진범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증거 조작입니다."

이현준의 목소리에 경고가 담겨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무죄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옳은 방법이 있었다면, 저는 지금 죽어 있지 않을 겁니다."

이수현이 이현준을 정면으로 봤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금이 더 밝게 흘러내렸다. 그 빛에 사로잡힌 이현준의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그의 뇌에 무언가가 침투하는 느낌. 저항할 수 없는 압박감.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신경계를 장악하는 것 같은 공포.

"저를 도와주실 겁니까?"

이현준이 한 발 물러났다. 그 순간, 그의 의지가 그녀의 눈빛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그의 입을 움직였다.

"... 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이수현의 눈동자에 흐르는 금이 더 밝아졌다. 동시에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언가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두통이 밀려왔다. 시야가 한 순간 흐릿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수현이 손가락을 펼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번에는 두 손가락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을까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가늘었고, 떨렸다.

"뭐라고요?"

이현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조종당한 사람의 무기력함이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수현이 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 어딘가에서 뭔가가 매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마치 폐기되는 운명처럼. 능력을 쓸 때마다 더 빨리.

——

법원 로비를 나온 이수현은 법원 카페에 앉았다. 창밖으로 서울의 도시 풍경이 보였다. 13년 만의 도시. 변한 것도 많고, 변하지 않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낯설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이현준이 커피를 놓고 앉았다. 그의 움직임은 기계적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조종 아래에 있었다.

"재심 청구 절차는 복잡할 겁니다. 당신은 법적으로 죽은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제 능력이 필요한 겁니다."

이수현이 커피를 마시지 않고 봤다. 검은 액체 속에 자신의 얼굴이 역으로 비쳤다. 그 얼굴의 눈동자에는 금이 흐르고 있었다.

"수현, 당신이 한 것... 로비에서."

이현준이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무언가가 돌아오고 있었다. 저항. 그녀의 조종에 대한 미약한 저항.

"그것은 제 의지를 조작한 겁니다."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방금 법을 어겼습니다. 증거 조작과 다를 바 없는 행위를 했습니다."

이수현이 이현준을 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금이 흐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빛 자체가 칼날처럼 예리했다. 조종의 실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그의 의지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제가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약속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이현준이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이 이제는 자유로웠다.

"당신이 필요한 것은 변호사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당신은 지금 정상이 아닙니다."

"제가 정상이 아닌가요? 아니면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닌가요?"

이수현이 물었다.

"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저는 이 능력을 써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또 다른 범죄자가 됩니다."

이현준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이미 그렇습니다."

이수현이 손가락을 펼쳤다. 그 손가락을 따라 카페의 불이 깜빡였다. 고객들이 놀라며 위를 봤다. 하지만 아무도 이수현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도시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손가락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변호사님,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저는 혼자 할 겁니다."

"그럼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이현준이 돌아섰다. 그리고 멈췄다. 뒤를 보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법정으로 돌아갈 때, 나는 당신의 옆에 있을 겁니다. 당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그가 떠나간 후, 이수현은 한 사람 남겨진 커피 잔을 봤다. 아직도 따뜻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가져다 댔을 때, 커피가 천천히 얼기 시작했다. 표면부터 가장자리까지, 얼음이 결정을 맺으며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금이 떨어져 나갔다. 마치 모래처럼. 마치 수명처럼. 한 점, 또 한 점.

이수현이 손가락을 펼쳤다. 다섯 손가락 중 세 개의 끝이 이제 희미해지고 있었다. 반투명한 피부 너머로 뼈의 윤곽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두통이 다시 밀려왔다. 이번에는 더 강했다. 시야가 흔들렸다. 카페의 조명이 깜빡였다. 아니, 그녀의 인식이 깜빡인 것이었다.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정신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이수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흘렀다. 그 피의 맛이 현실을 되돌렸다.

"수명이 줄어들고 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가늘었고, 떨렸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얼마나 남았을까요?"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오직 도시의 소음만이 계속되었다. 자동차 경적, 사람들의 발걸음, 그리고 어딘가에서 나는 사이렌의 소리.

그 사이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교도소로부터의 사이렌. 검찰청으로부터의 사이렌. 법원 쪽으로부터의 사이렌.

이수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창밖을 봤다. 서울의 밤이 내려앉고 있었고, 그 밤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정의인지, 복수인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단순한 파괴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규칙은 더 이상 그녀가 알던 법이 아니라는 것. 법정의 안개가 걷혀갈 때까지, 모든 것이 거짓이 될 수 있다는 것.

이수현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카페의 모든 CCTV 카메라가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 카메라들이 보는 것은 이제 빈 의자뿐이었다.

그 빈 의자에는 여전히 따뜻한 커피 잔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커피 표면에는 얼음이 소리 없이 결정을 맺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마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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