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펼 수 없었다.
인천항 숙소의 침대에서 깨어난 이준석은 오른손을 들어 움직여 보려 했다. 다섯 손가락이 완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작은 손가락부터 검지까지, 손등 위로 솟은 힘줄들이 마치 나무의 마른 가지처럼 굳어져 있었다. 손가락뼈를 감싼 살은 반투명해졌고, 손톱 아래로는 검푸른 정맥이 그물처럼 드러나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힘을 주자 손목 전체가 떨렸다.
펼쳐지지 않는다.
침대 옆 주석 대야에 고인 물에 손을 담그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등을 타고 올라왔다. 물 속에서 손가락을 펼치려 했으나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물결이 일렁이며 손의 형상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이준석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척추를 펼치려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등뼈 전체에 날카로운 통증이 흘러내렸다. 등이 굽어 있었다. 어제는 곧게 펼칠 수 있었는데. 움직임 하나하나가 1905년의 죽음 직전 신체를 재현하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깨진 거울 조각을 집기까지 3초가 걸렸다.
얼굴이 처음으로 끔찍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더 이상 열두 살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눈 주변에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고, 관자놀이 아래로는 살이 꺼져 있었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나와 얼굴 전체가 해골처럼 보였다. 눈동자는 흐려져 있었다. 백내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얼굴은 1875년의 것이 아니라 1905년의 것이었다. 죽음 직전의 것이었다. 30년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 자신의 몸 위에 남겨진 흔적들이 역순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준석은 거울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에 힘을 조절할 능력이 없었다.
복도에서 이규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봉사, 일어났는가?"
스승은 새벽 4시부터 일어나 공사장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이준석이 문을 열자 이규완은 한 손에 들었던 등잔을 들어올렸다. 스승의 얼굴은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다. 70을 넘은 나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손가락이 굳어졌나?"
스승은 이준석의 손을 집었다. 펼쳐지지 않는 손가락들을 살폈다. 이규완의 손은 따뜻했다. 평생 금속을 다루며 불에 그을린 손이었다.
"회귀의 진행이 80%에 다다랐다. 20일 남았다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그 20일 동안 무엇을 더 만들 작정인가?"
이준석은 답하지 않았다. 이규완은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이 봉사, 들어라. 기술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스승님?"
"기술은 이미 존재하는 권력을 강화할 뿐이다. 왕은 더 강한 기술로 더욱 왕다워지고, 양반은 더욱 양반다워진다. 우리 같은 노비와 중인은 그 기술을 만드느라 더욱 죽어나간다. 내가 평생 보아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규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30년간 신분제 속에서 기술자로 살아온 사람의 목소리였다.
"경인선이 완성되었을 때, 그것이 조선의 백성을 해방시켰는가? 아니다. 그것은 왕과 양반의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제 그 기술은 일본의 손에 들어갔다. 그들은 더욱 강해지고, 조선은 더욱 약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만든 것이?"
"당신의 기술이 조선을 멸망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스승은 등잔을 높이 들었다. 복도의 어둠이 옆으로 밀려났다.
"20일 남았으니, 그 20일을 어떻게 쓸지 생각하거라. 더 이상 만드는 것이 답인지, 아니면 만드는 것을 멈추는 것이 답인지."
이규완은 돌아섰다. 발걸음이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이준석은 남겨진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손가락이 펼쳐지지 않았다.
그의 몸은 계속 변했다. 아침 햇빛이 들어오자 손등의 피부가 더욱 얇아진 것이 보였다. 손톱이 누렇게 변색되고 있었다. 목을 움직일 때마다 경추가 뻣뻣했다. 이규완의 말이 맞다면, 20일 뒤에는 글을 쓸 수도, 도면을 그릴 수도 없을 것이었다. 이미 손가락이 이 지경인데, 발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시력은? 머릿속의 기억은?
이준석은 자신의 손을 다시 바라봤다. 이 손으로 만든 것이 무엇인가? 경인선의 기관차 설계. 그것이 일본을 먼저 강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손으로 군함을 만들면?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더 빠르게, 더 확실하게.
그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도면을 펼쳤다. 군함의 설계도였다. 1905년에 스스로 그렸던 것. 손가락이 경직되어도 이미 그려진 선들을 따라 수정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필요한가? 이규완의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만드는 것이 답인가, 멈추는 것이 답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준석은 행동을 시작했다.
먼저 그는 공사장의 기술자들을 찾아다녔다. 자신의 기술을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1시경, 공사장 철공소에서 그는 젊은 기술자 둘을 만났다. 한 명은 기관차의 보일러 제작을 담당하던 이순영이었고, 다른 한 명은 차축 설계를 보조하던 김준호였다. 둘 다 30대 초반이었다.
"군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순영이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이준석은 두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동시에 결연함도 있었다.
"설계도를 함께 검토하겠다. 그리고 당신들이 직접 제작할 수 있는 부분과 불가능한 부분을 나누자. 20일 동안 당신들이 독립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작업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이준석이 취한 첫 번째 구체적 행동이었다. 후계자 물색. 그것이 20일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첫 번째 결정이었다.
오후 3시, 한양에서 특급 전보가 도착했다.
"기술 탈취 확인. 일본 제국이 경인선 설계도를 입수했습니다. 오토 슈미트가 도면 일체를 일본 공사관에 넘겼다는 정보가 확보되었습니다."
박영효는 공사장 임시 사무소에서 이준석에게 전보를 읽어주었다. 30대 중반의 개화파 관료는 안경 너머로 심각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더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 도면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철도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오사카에서 도쿄로 가는 노선에 우리 기관차 설계를 응용한 기차가 운행 중입니다."
이준석은 그 말을 듣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자신이 만든 기술이 조선이 아닌 일본을 먼저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 기술은 조선을 침략하는 데 사용될 것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 자신의 나라를 죽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기술이 일본을 먼저 강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박영효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의 손가락도 떨리고 있었다.
"고종 국왕은 이 소식에 격노했습니다. 명성황후와의 권력 싸움 속에서 당신의 기술이 일본에 빼앗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종의 입장이 약해졌습니다. 명성황후는 이를 빌미로 경인선 프로젝트의 완전한 중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철도는?"
"일단 중단됩니다. 하지만 그 대신..."
박영효는 사무소의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김홍집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했습니다. 군함입니다."
이준석의 눈이 들렸다. 군함. 같은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조선의 군사력을 강화하려면 해상 방어가 필수적입니다. 당신이 설계한 장갑함이 있다면, 고종 국왕의 권력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명성황후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국방력은 왕권의 정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결국 같은 싸움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왕권과 황후권의 싸움. 그 사이에서 기술이 도구가 되는 것. 철도로 실패했고, 이제 군함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박영효는 이준석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당신의 얼굴이 변했습니다."
이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회귀의 진행이 80%라고 들었습니다. 20일 남았다고."
"네."
"그 20일 동안 군함을 만들 수 있습니까?"
이준석은 손가락을 펼치려 했다. 펼쳐지지 않았다.
"불가능합니다. 손가락이 경직되고 있고, 시력도 흐려지고 있습니다. 1905년 제 죽음 직전의 신체 상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설계는 가능하지만, 현장 감독과 부품 제작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계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작업과 할 수 없는 작업을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박영효가 창밖을 바라봤다. 인천항의 오후 햇빛이 바다 위에 반짝이고 있었다. 사무소에서 해변까지는 약 1리 정도의 거리였다.
"당신이 후계자를 만들 시간도 20일입니다. 그 사이에 군함 설계도 마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분제는 어떻게 합니까?"
박영효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신분제를 폐지해야 기술자들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말했던 것 아닙니까? 기술이 조선을 구하지 못한다고. 그렇다면 신분제 개혁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박영효의 입이 다물어졌다. 이준석은 계속했다.
"저는 그것을 시도해보겠습니다. 20일 동안 고종 국왕께 신분제 개혁을 건의하겠습니다. 동시에 후계자들을 양성하겠습니다. 군함 설계도 진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신분제 개혁 없이는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박영효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동시에 깊은 피로가 드러나 있었다.
"당신이 그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미 죽을 사람입니다. 스승님도 말씀하셨습니다. 20일 남았다고. 그렇다면 이 20일을 어떻게 쓸지는 제 선택입니다."
박영효는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인천항의 오후 햇빛이 여전히 바다 위에 반짝이고 있었다.
"신분제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왜입니까?"
"명성황후가 반대합니다. 보수파가 반대합니다. 개화파 내에서도 의견이 나뉩니다. 신분제는 조정의 기반입니다. 그것을 건드리면 조정 자체가 흔들립니다."
"그렇다면 군함도 같습니다."
이준석의 목소리가 낮았다.
"군함을 만들어도 조선은 구해지지 않습니다. 신분제가 유지되는 한, 기술은 기존 권력을 강화할 뿐입니다. 저는 그 악순환을 끊고 싶습니다."
박영효는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갈등이 드러나 있었다.
"당신의 요구를 고종 국왕께 전하겠습니다. 하지만 약속할 수 없습니다. 신분제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준석이 말했다.
"하지만 저는 시도하겠습니다. 그것이 제 20일을 쓰는 방법입니다."
박영효는 사무소를 나갔다. 이준석은 남겨진 공간에서 자신의 손을 다시 내려다봤다. 펼쳐지지 않는 손가락들. 이 손으로 만들어야 할 것과 만들면 안 될 것 사이의 선택. 그리고 이제 그 선택은 더 이상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분제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있었다.
저녁 6시, 김홍집이 도착했다.
개화파의 최고 실력자이자 고종의 최측근 대신은 이준석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이 봉사의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네, 대인님."
"회귀의 진행이 80%라고 들었습니다. 20일 남았다고."
김홍집은 이준석의 손을 자세히 봤다. 펼쳐지지 않는 손가락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 20일 동안 우리는 조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합니다."
"대인님?"
"군함입니다. 장갑함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인선은 실패했습니다. 기술은 탈취되었고, 왕권 싸움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지금 고종을 더욱 강하게 통제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군함은 다릅니다."
김홍집은 창밖을 가리켰다.
"해상 방어는 왕권의 절대적 정당성입니다. 명성황후도, 보수파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국왕이 자신의 영토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왕권의 회복이자 국가의 독립입니다."
"그렇다면 그 군함이 일본에 탈취된다면?"
김홍집의 눈이 변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경인선이 일본에 탈취된 것처럼, 군함도 탈취될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은 더욱 빠르게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안이 절대적입니다."
"보안은 불가능합니다. 오토 슈미트와 일본 스파이 네트워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합니다."
김홍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것은 위협에 가까웠다.
"당신의 천재성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만드는 군함이 조선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당신이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조선은 5년 안에 멸망할 것입니다."
"5년이라는 것은?"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병합하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군함입니다. 당신의 군함입니다."
이준석은 침묵했다. 김홍집은 계속했다.
"당신은 미래를 봤습니다. 당신은 1905년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 죽음이 조선의 멸망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당신의 군함이 조선을 구할 수 있습니다."
"대인님은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 기술이 조선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김홍집이 인정했다. 그의 인정은 더욱 차갑게 들렸다.
"하지만 당신의 기술 없이는 조선을 구할 가능성 자체가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조선이 당신이 필요합니다."
이준석은 손가락을 펼치려 했다. 펼쳐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 손이 20일 뒤에는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 군함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그 선택은 무의미해질 것인가?
"저는 군함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이준석이 말했다.
"대신 신분제 개혁을 요구합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신분제를 폐지하고 교육 제도를 개혁해야 합니다. 기술자들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기술 혁신도, 국가 근대화도 불가능합니다."
김홍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도하겠습니다. 20일 동안 고종 국왕께 신분제 개혁을 건의하겠습니다. 동시에 후계자들을 양성하겠습니다. 그리고 군함 설계도 완성하겠습니다. 하지만 신분제 개혁이 선행되지 않으면, 저는 어떤 기술도 넘기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조선의 반역자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미 죽을 사람입니다."
이준석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20일 남았습니다. 그 20일을 제가 어떻게 쓸지는 제 선택입니다."
김홍집은 이준석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결정해주십시오."
이준석이 말했다.
"신분제 개혁을 고종 국왕께 건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를 반역자로 처벌하시겠습니까? 두 가지 모두 조선의 멸망을 초래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미래를 바꿀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홍집은 돌아섰다. 그의 발걸음이 사무소의 문으로 향했다.
"내일 정오까지. 당신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이준석은 사무소에 혼자 남겨졌다. 창밖의 인천항은 저녁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바다 위에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일본 상선들의 등불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기술을 갈취하고, 조선의 자원을 약탈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군함도 갈취할 것이었다.
손가락이 펼쳐지지 않았다.
시력이 흐려지고 있었다.
등이 굽어 있었다.
그는 거울에서 본 자신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1905년의 죽음 직전의 얼굴. 지금 그 얼굴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30년을 앞당겼지만, 결국 같은 시간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순환했다. 끝이 시작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를 수 있을까? 신분제 개혁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을 수 있을까? 20일 동안 조정을 움직일 수 있을까?
이준석은 책상 위의 종이를 집었다. 손가락이 경직되어 있었지만, 펜을 집을 수는 있었다.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신분제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건의서였다. 기술 혁신이 신분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신분제가 폐지되지 않으면 왜 조선의 미래가 없는지를 상세하게 기술했다.
밤 11시, 이준석은 해변으로 나갔다.
인천항의 밤은 고요했다. 파도가 모래사장을 쓸고 있었다. 멀리서 일본 군함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것은 조선의 해안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준석은 모래 위에 앉았다. 손가락이 펼쳐지지 않아 모래를 집을 수 없었다. 대신 손등으로 모래를 밀었다.
'기술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이규완의 말이 계속 들렸다.
'기술은 이미 존재하는 권력을 강화할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인가? 자신이 만든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을 구하기 위해?
조선은 구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기술로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자신의 천재성으로는.
그런데도 그는 만들어야 하는가?
알면서도?
미래를 봤으면서도?
군함을 만들면 더 빠른 멸망이 온다는 것을?
아니다. 이번에는 다르다. 이준석은 자신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신분제 개혁을 시도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시도한다. 그것이 자신의 20일을 쓰는 방법이다.
이준석은 일어섰다. 해변에서 한양 방향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 도시의 불빛들이 떠 있었다. 그 불빛 아래에는 왕실이 있고, 대신들이 있고, 백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드는 기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술이 자신들을 구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자신은 이제 다른 선택을 했다.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신분제라는 근본적인 벽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준석은 해변을 떠났다. 사무소로 돌아가려는 순간, 해상에서 빛이 반짝였다.
함선이었다.
여러 척의 함선이었다.
그 함선들은 조선의 해안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준석은 그것을 지켜봤다. 함선들의 깃발이 보였다. 일본 제국의 깃발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침략하고 있었다.
이준석의 손가락이 떨렸다. 펼쳐지지 않는 손가락이 떨렸다. 그 떨림은 분노였을까, 절망이었을까, 아니면 결연함이었을까? 그 모든 것이 섞여 있었다.
사무소로 돌아간 이준석은 설계도를 펼쳤다. 군함의 설계도였다. 그가 1905년에 죽기 전에 스스로 그렸던 설계도였다. 장갑함. 수심 6미터에서 운용 가능한 연안 방어용 군함. 철갑판 두께 5센티미터. 주포 구경 120미리. 최고 속력 12노트.
그 설계도 옆에 다른 종이들이 놓여 있었다.
박영효가 남긴 전보였다.
'신분제 개혁 건의안 검토 중. 고종 국왕께 보고 예정.'
그리고 또 다른 종이가 있었다.
이준석이 저녁에 직접 쓴 건의서였다.
'신분제 폐지와 교육 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
이준석은 두 문서를 들고 있었다. 한쪽 손에는 기술의 선택을, 다른 쪽 손에는 체제의 선택을 들고 있었다. 그 선택은 여전히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것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손가락이 펼쳐지지 않았다.
20일 남았다.
그 20일 동안 신분제를 개혁할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시도하겠다.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다.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동양인이 아니었다. 일본 군인들이었다.
선봉에 선 사람은 오토 슈미트였다.
"이 봉사, 좋은 저녁입니다."
슈미트의 입가에 미소가 떠 있었다.
"당신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준석이 손에 들고 있던 건의서와 설계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펼쳐지지 않는 손가락 사이로.
"당신의 설계도를 이미 입수했습니다."
슈미트가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이준석의 군함 설계도였다. 정확한 복사본이었다. 모든 치수, 모든 설명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의 설계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슈미트는 설계도를 다시 걷어 들었다.
"당신의 설계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연안 방어용 군함으로는 충분하지만, 원양 항해용으로는 개선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후계자는 누구입니까?"
이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의 제자들 중에 당신의 수준에 도달한 자가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남긴 설계도만으로 그들이 계속할 수 있습니까?"
슈미트의 질문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우리는 이미 당신의 설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지식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당신이 죽기 전에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당신의 제자들은 살아날 것입니다. 당신이 거부한다면, 당신의 제자들도 당신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이준석의 손이 떨렸다. 펼쳐지지 않는 손가락이 떨렸다.
그렇다면 이미 만들 이유가 없다. 설계도가 탈취되었다면, 자신이 더 만들 필요가 없다. 신분제 개혁에만 집중할 수 있다.
"선택하십시오. 당신의 기술로 우리를 도울 것인가, 아니면 침묵할 것인가? 당신의 선택이 무엇이든, 조선은 멸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제자들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슈미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내일 정오까지 결정해주십시오. 그때까지 당신의 제자들의 생명은 담보될 것입니다."
문이 닫혔다. 이준석은 남겨진 사무소에서 혼자 서 있었다. 창밖의 인천항은 여전히 고요했고, 바다 위의 일본 함선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이 펼쳐지지 않았다.
20일 남았다.
그 20일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였다. 신분제 개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20일을 쓰는 방법이다.
이준석은 바닥에 떨어진 건의서를 집었다. 손가락이 경직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집을 수 있었다. 그는 그 건의서를 다시 읽었다. 신분제 폐지의 필요성. 기술 혁신과 사회 개혁의 연결고리. 조선의 미래를 위한 근본적인 변화.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20일의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