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구치소 독방의 천장이 회전했다. 신경통이 극에 달했을 때 세상은 항상 이렇게 기울어진다.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마지막 기억이 온다는 신호다. 열 번째. 모든 것을 끝낼 기억.

그 순간, 어둠이 밀려들었다.

---

**기억: 강남역 주차장, 밤 11시 47분**

손에 피가 묻어 있다. 박민지의 피다. 여자는 이미 숨을 쉬지 않는다. 주차장의 CCTV 사각지대에서 이준호는 천천히 일어난다. 뒤에서 발소리가 난다.

"잘했네."

이수영이다.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다. 얼굴에는 차갑고 명확한 표정이 있다.

이준호는 돌아본다. "상관."

"자네가 한 일들을 보면, 정말 뛰어난 형사야. 고문도 깔끔하고, 증거 조작도 정교하고, 살인도..." 이수영이 말을 끝내지 않는다. 총의 총구가 이준호를 향한다. "이제 자네는 증거가 되어야 해."

"내가 박민지를 죽인 건 당신의 명령이었잖아요."

"그래. 하지만 그것도 기록에 남으면 문제가 된다네." 이수영의 손가락이 트리거에 닿는다. "경찰청의 모든 일은 자네 하나가 책임져야 해. 고문범, 살인범, 증거 조작자. 그게 자네의 정체성이지. 그리고 그런 자는..."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이준호의 가슴을 통과한 것은 총알이 아니다. 이준호 자신이 움직였다. 몸을 날려 이수영을 밀쳤다. 총알은 주차장의 콘크리트 벽을 때렸다. 스파크가 튀었다.

이준호는 이수영에게 덤벼들었다. 주먹이 얼굴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그 순간—

---

이준호는 깼다.

구치소 독방의 천장이 고정되어 있었다. 손가락의 경련은 멈췄다. 호흡이 고르지 않았다. 몸이 식은 땀에 젖어 있었다.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고문실에서 김태희를 때린 것. 주차장에서 박민지를 죽인 것. 술집에서 50대 남자를 협박한 것. 고문실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이수영으로부터 박민지를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 그리고 자신도 제거 대상이었다는 것.

모두 실제였다.

이준호는 일어나 앉았다. 독방의 벽을 손으로 짚었다. 벽에는 이미 누군가의 낙서가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아래에 또 다른 문구가 있었다. "나는 나다."

누가 썼을까. 아니면 자신이 썼을까.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손가락을 봤다. 거기에는 작은 흉터가 있었다. 언제 생겼는지는 모른다. 기억 속에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손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

다음 날 오후, 정현택이 면회를 왔다.

방문실의 투명한 칸막이 너머에서 그는 이준호를 봤다.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폭행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찰청에서 당한 것이다.

"당신의 모든 기억이 진짜입니까?" 정현택이 먼저 물었다.

이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뭘 모르겠다는 거요?"

"기억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이수영이 명령한 건지 내가 스스로 한 건지. 경찰청이 내 뇌에 뭔가를 심은 건지 아닌지." 이준호가 한 문장씩 떨어뜨렸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고?"

"진짜든 거짓이든, 나는 범인입니다."

정현택의 눈이 흔들렸다. "당신은 법적으로 무죄입니다. 박민지 살인 사건에 대한 증거가 부족합니다. CCTV는 삭제되었고, 목격자는 없습니다. 법의학팀은 당신의 기억이 신뢰할 수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기억상실 환자의 증언은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고문한 김태희도 이미 죽었습니다. 교통사고. 그것도 당신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리고 50대 남자—강남역 술집의 사건도 진정이 없었습니다.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법정에 설 때 무죄를 주장하면 됩니다. 검찰이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면, 법은 당신을 무죄로 판결합니다. 그것이 법입니다."

"법은 진실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정현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법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입니다."

이준호는 칸막이를 봤다. 그 너머의 정현택과 이쪽의 자신. 중간에 투명한 벽이 있었다. 투명하지만 나눌 수 없는 벽.

"당신의 기억 기록이 검찰에 제출되었습니다. 경찰청의 비리를 증명하는 증거로." 정현택이 덧붙였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증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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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법정.

판사는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증거 부족으로 인해 피고인 이준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합니다."

법정의 기자들이 움직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검사는 표정이 없었다. 변호사는 이준호를 축하하는 듯 눈짓을 했다.

이준호는 일어났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승리의 웃음이 아니었다. 절망의 웃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역설의 웃음이었다. 자신이 범인임을 증명하려고 했는데, 법이 자신을 무죄로 만들어버렸다. 자신의 범죄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범죄를 더 명확하게 만들었다.

"피고인은 법정 밖에서의 언론 활동을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판사의 말이 들렸다.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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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을 나가며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형사님, 무죄 판결 소감이 어떠하신가요?"

"당신은 정말 범행을 하지 않으셨나요?"

"경찰청에서의 고문 혐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준호는 걸음을 멈췄다. 카메라들이 그의 얼굴에 초점을 맞췄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유죄입니다."

기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준호는 그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경찰이 길을 터줬다. 햇빛이 눈을 찔렀다.

---

거리를 걸어가며 그는 지하철역 입구를 봤다. 구치소에서의 계약이 끝났다.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었다. 서울을 떠나야 했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한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지는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맞은편에 앉았다.

수진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 공포인가, 아니면 해탈인가.

"당신이 정말 당신인지 확인하고 싶었어."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다. "기억이 돌아왔을 때부터."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한 일들이 모두 진짜예요?"

이준호는 수진을 봤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요?"

"기억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당신이 나를 사랑했는지 두려워했는지. 우리가 부부였는지 낯선 사람들이었는지."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내가 당신의 친구를 죽였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수진의 몸이 흔들렸다. "박민지는..."

"내가 죽였습니다. 당신의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아니면 당신의 기억이 돌아온 후에. 시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살인자입니다."

"법은 당신을 무죄라고 했어요."

"법은 거짓입니다."

수진이 일어났다. "당신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나는 당신을 모르는 사람 같은 기분이었어.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뭘 한 건지. 당신이 정말 당신인지."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떠납니다." 수진이 말했다. "당신을 사랑했던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생존자로서."

그녀는 카페를 나갔다. 창밖으로 그 모습이 보였다. 거리를 걸어가는 수진. 그녀의 어깨는 구부러져 있었다.

이준호는 다시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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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 플랫폼.

이준호는 기차 표를 샀다. 부산행.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서울을 떠나야 했다. 기차를 탔다. 창가 자리였다.

플랫폼을 떠나며 그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40대 후반의 남자. 피곤한 눈. 이글거린 광채.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이수영이었다.

"자네, 잘 나왔네."

이준호는 전화를 끊으려 했다.

"잠깐만. 들어봐. 자네가 기억한 건 진짜가 아니야. 우리가 자네 뇌에 시술을 했거든. 억압된 기억을 활성화했어. 자네는 박민지를 죽이지 않았어. 우리가 그 기억을 자네에게 심었을 뿐이야."

이준호의 손이 경련했다.

"자네가 한 일들은 모두 우리의 명령이었고, 우리가 책임진다. 자네는 피해자야. 그러니까 도망치지 말고 돌아와. 우리가 보호해줄 테니까."

전화 너머에서 이수영의 숨소리가 들렸다.

"기억이 진짜든 거짓이든, 상관없잖아. 자네는 이미 살인자의 기억 속에 살고 있어. 그게 진실이야."

이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기차가 터널로 들어갔다. 창밖의 세상이 어두워졌다. 창에는 이제 외부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얼굴만 보였다.

그 얼굴이 움직였다. 웃었다.

그것이 누구의 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열 번째 기억 이후, 열한 번째 기억은 오지 않았다. 더 이상의 신경통도 없었다. 뇌가 재생을 멈췄다. 아니면 이미 모든 기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니면 기억이란 애초부터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차는 달렸다. 터널을 빠져나갔다. 창밖에 풍경이 나타났다. 강, 산, 도시. 모두 낯선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도 모두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이었다.

# 정체성

열 번째 기억이 밀려오는 순간, 이준호는 비명을 질렀다.

몸이 경련했다. 독방의 콘크리트 바닥에 등이 부딪혔다. 혀를 깨물었는지 입에서 피가 흘렀다. 신경통은 이전의 것과 달랐다. 이전까지의 통증이 뇌 한쪽에 국한된 것이라면, 이번엔 온몸이 타오르는 듯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손가락들이 바닥을 할퀴었다.

그리고 기억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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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밤 11시. 강남역 주차장 지하 2층.**

자신은 박민지 앞에 서 있다. 여자의 목에 칼을 댔다. 손이 떨리지 않는다. 호흡이 빨라지지 않는다. 마치 이 모든 게 일상처럼.

"왜 하는 거예요?"

박민지가 울었다.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

"당신이 본 것들 때문이다."

"저는 아무것도—"

칼이 들어갔다. 깊게. 확실하게. 손목을 꺾어 위쪽으로 그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피가 신발까지 튀었다.

여자가 쓰러졌다.

그는 주차장의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발걸음이 들렸다. 구두 신발. 남자의 목소리.

"잘했다."

이수영이었다.

"이제 마무리해야 한다."

이수영이 권총을 꺼냈다. 검은색 권총. 소음기가 달려 있었다.

"당신의 기억도 정리해야 하니까."

총구가 그의 이마를 향했다.

그 순간, 이준호는 이수영의 손을 쳐냈다. 총이 튀었다. 총성이 울렸다. 기둥을 맞고 튀어나갔다.

그는 이수영과 싸웠다. 주차장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그리고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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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는 독방에서 깨어났다.

천장을 봤다. 낙서가 보였다. '나는 누구인가.'

그는 웃음이 나왔다. 미친 듯한 웃음이었다.

모든 기억이 진짜였다.

고문했다. 살인했다. 협박했다. 조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막았다. 모두 자신의 선택이었다. 모두 자신의 손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봤다. 손가락에 있는 작은 흉터. 그제야 기억났다. 박민지를 칼로 찌를 때, 칼이 뼈에 부딪히며 튀어나갔던 것. 그때 손가락이 베였던 것.

증거는 자신의 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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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구치소 면회실.**

정현택이 들어왔다. 경찰복은 입지 않았다. 민간인 복장이었다. 고문당한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당신의 모든 기억이 진짜입니까?"

정현택이 물었다.

이준호는 정현택을 봤다. 그의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요?"

"기억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그것이 경찰청의 시술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내 뇌가 스스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정현택이 테이블을 쳤다. "당신이 알아야 해요! 당신이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요! 당신의 기억이 경찰청 비리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진짜든 거짓이든." 이준호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나는 범인입니다."

정현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박민지는 내가 죽였습니다. 기억 속에서. 그리고 기억은 나의 일부입니다. 그것이 거짓이라고 해도, 그 거짓은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도 나의 일부니까요."

"당신은..."

"당신을 고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증거는 나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증거와 범인이 동시에 존재하는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정현택은 일어났다. 그리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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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같은 면회실.**

수진이 들어왔다.

15년을 함께한 아내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눈 밑에 검은 자국이 있었다.

둘은 마주 앉았다.

말이 없었다.

"당신이 정말 당신인지 확인하고 싶었어." 수진이 먼저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다. "기억이 돌아왔을 때부터."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한 일들이 모두 진짜예요?"

이준호는 수진을 봤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요?"

"기억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당신이 나를 사랑했는지 두려워했는지. 우리가 부부였는지 낯선 사람들이었는지."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내가 당신의 친구를 죽였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수진의 몸이 흔들렸다. "박민지는..."

"내가 죽였습니다. 당신의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아니면 당신의 기억이 돌아온 후에. 시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살인자입니다."

"법은 당신을 무죄라고 했어요."

"법은 거짓입니다."

수진이 일어났다. "당신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나는 당신을 모르는 사람 같은 기분이었어.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뭘 한 건지. 당신이 정말 당신인지."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떠납니다." 수진이 말했다. "당신을 사랑했던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생존자로서."

그녀는 카페를 나갔다. 창밖으로 그 모습이 보였다. 거리를 걸어가는 수진. 어깨는 구부러져 있었고, 가방은 무거워 보였다.

이준호는 다시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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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조사실. 1주일 후.**

검사는 파일을 덮었다.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기소 유예입니다."

이준호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기억상실증 피해자의 증언은 법정에서 신빙성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특히 경찰청의 뇌 시술 혐의가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당신의 기억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민지의 시체는?"

"3개월 전 발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기억을 회복하기 훨씬 전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기억이 사건 이후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증거는?"

"없습니다. 경찰청이 모두 제거했습니다."

이준호는 웃었다. 조용한 웃음이었다.

"당신은 무죄입니다. 법적으로는."

이준호는 법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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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판사의 선고.**

"피고인 이준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합니다. 증거 부족으로 인한 무죄입니다."

방청석에는 기자들이 앉아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법정을 나왔다.

기자들이 몰려왔다.

"당신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이준호는 미소 지었다. 그것은 승리의 미소가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뭘 아세요?"

"나는 유죄다."

기자들이 당황했다. 플래시가 계속 터졌다.

이준호는 거리를 걸어갔다.

법정 건물을 빠져나갔다. 서울 중심가의 거리였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누구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택시를 탔다.

"어디 가세요?"

운전사가 물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봤다. 서울의 풍경이 흘러갔다. 강남역, 도곡동, 강남구청. 모두 익숙한 장소였다. 모두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곳들이었다.

택시가 한강대교를 지났다.

한강 위에서 그는 자신의 얼굴을 창에 비쳐 봤다.

40대 후반의 남자. 피곤한 눈. 이글거린 광채.

그 얼굴이 웃었다.

그것이 누구의 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

기억은 계속됐다.

고문실의 기억. 주차장의 기억. 술집의 기억. 칼싸움의 기억. 모든 것이 여전히 생생했다.

하지만 열한 번째 기억은 오지 않았다.

신경통도 멈췄다.

뇌가 재생을 멈춘 것인가. 아니면 이미 모든 기억이 돌아왔기 때문인가. 아니면 기억이란 애초부터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인가.

택시가 도곡동에 멈췄다.

이준호는 내렸다.

자신의 집 앞이었다.

현관 열쇠는 여전히 주머니에 있었다. 수진은 가져가지 않았다. 아니면 남겨두었다.

문을 열었다.

거실은 어두웠다.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소파. 테이블. TV. 모두 있었다. 모두 낯설었다.

거울이 벽에 붙어 있었다. 미술 강사인 아내가 달아놓은 것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간을 넓혀 보이기 위해서.

그는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이 보였다.

그 자신이 웃었다.

그것이 누구의 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경찰청의 웃음인가. 자신의 웃음인가. 아니면 기억 속의 자신의 웃음인가.

그 모든 것이 같은 것이었다.

이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거실의 벽장을 열었다. 여행 가방이 있었다. 수진이 떠나면서 남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신호인가.

가방을 꺼냈다.

물건들을 챙겼다. 옷. 지갑. 여권.

그리고 노트북.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이 켜졌다. 파일 목록이 보였다.

'기억 기록 1~10.'

10개의 파일.

10개의 기억.

10개의 범죄.

그는 파일을 하나 열었다. 첫 번째 기억. 고문실. 손글씨로 작성된 텍스트.

'용의자 김태희. 고문 혐의로 조사 중. 상황 : 고문실. 시간 : 오후 3시. 행동 : 폭행. 동기 : 불명.'

텍스트는 객관적이었다. 마치 타인의 행동을 기록한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기억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이준호는 노트북을 닫았다.

가방에 집어넣었다.

집을 나갔다.

---

역 플랫폼.

기차 표를 샀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서울을 떠나야 했다. 부산행이었다. 아니면 대구행이었다. 어디든 상관없었다.

기차에 탔다. 창가 자리였다.

기차가 출발했다.

플랫폼을 떠나며 그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이 움직였다.

웃었다.

그것이 누구의 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기억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자신이 살인자인지 피해자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그것들은 모두 같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답은 하나였다.

자신은 존재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

기차는 터널로 들어갔다.

창밖의 세상이 어두워졌다.

창에는 오직 자신의 얼굴만 보였다.

그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는 모든 기억이 담겨 있었다.

고문실에서의 분노. 주차장에서의 결단. 술집에서의 협박. 칼싸움에서의 생존. 모든 것.

그것들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들이 자신이었다.

그것들이 자신의 정체였다.

기차는 터널을 빠져나갔다.

창밖에 풍경이 나타났다.

강, 산, 도시. 모두 낯선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도 모두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기억이었고, 기억은 자신이었고, 자신은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것이 누구의 웃음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웃음이었다.

가장 진실한 자신의 웃음이었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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