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처의 교환
계단 아래에서 준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봄 햇빛이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지은은 그 광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3년 만에 보는 그 얼굴은 여전히 낯설었고, 그럼에도 너무나 익숙했다.
"당신이 내 시에 관심 없다고 했잖아."
지은의 목소리는 떨렸다. 문학제 건물에서 내려오며 억누르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려 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헤어질 때 당신은 분명히 말했어. 내 글 같은 건 관심 없다고. 그래서 난 당신을 떠났어. 당신이 날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준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지은의 말을 끝까지 듣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준호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감정이 없는 듯 들리는 음성 속에는 깊은 상처가 잠복해 있었다.
"당신이 원하던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널 포기하길. 당신은 내가 당신의 시를 심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길 원했고,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받아들였을 거라고."
지은은 그 말의 의미를 천천히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준호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준호가 자신을 포기할 거라고 예상하고, 먼저 떠난 것이었다. 3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3년을 자신의 상처 속에서만 살아왔다는 깨달음이 몸을 관통했다.
"당신은 내게 무언가를 증명해달라고 요구했어."
준호가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 속에 얼마나 많은 절망이 있었는지 지금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의 시가 좋다고, 당신이 훌륭한 작가라고, 당신의 글이 세상에 나갈 자격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어. 심사위원이 아니었으니까. 영향력이 없었으니까."
준호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직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당신이 날 떠났다. 당신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지은은 그 말을 듣고 있었지만, 동시에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준호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그 대신 3년 전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절망했던 자신을. 자신의 글이 거절당할 때마다 상대를 탓했던 자신을.
"난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어."
준호가 손을 들었다. 지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은은 손을 거두었다.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손등의 피부가 경련했다. 그 작은 움직임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잡고 싶은 마음과 잡을 수 없다는 깨달음, 그리움과 죄책감, 3년의 무게.
"당신이 날 떠났을 때, 나는 생각했어. 당신이 내게서 필요로 하는 게 뭔지를."
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은 누군가가 자신의 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원했어. 누군가가 그 시에 닿는 것을 원했어."
그는 말을 이었다. 지은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봤다. 마치 오랫동안 품었던 말을 꺼내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당신의 시를 찾아다녔어. 문학제 카페 벽에 붙은 시들을 매달 손으로 옮겨 적었어. 당신의 원고가 심사위원들의 손에 닿을 수 있도록 했어. 그 과정에서 심사위원이 되기 위해 노력했어. 모두 당신의 시가 세상에 닿기를 바라면서."
지은은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지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것은 질문이었으면서 동시에 항복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음성.
준호는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결정되는 느낌이 있었다. 3년의 시간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우리 여기서 끝이야?"
준호가 물었다. 그것도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은과 달랐다. 준호의 질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모르겠어. 난 3년을 어떻게 버텼는지도 모르는데."
지은이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흔들림이 아닌 솔직함이 있었다.
"나도."
준호가 말했다. 단 두 글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그도 버텼다. 3년을 버텼다. 그리고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아니라, 버텨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지은은 준호를 바라봤다. 문학제 건물의 벽에 부딪친 봄 햇빛이 준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3년 전과 달라 있었다. 얼굴이 더 깊어졌다. 눈이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단단해져 있었다. 상처를 받아들인 사람의 단단함.
"신인상 발표가 2분 남았어."
지은이 말했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이 말을 나누는 동안도,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응."
준호가 대답했다.
"내가 떨어졌을 수도 있어."
"그럴 리 없어."
준호의 대답이 빨랐다. 마치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치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듯.
"당신이 심사위원이잖아. 편향된 판단을 할 수도 있고."
"나는 당신의 시를 처음 읽은 게 아니야."
준호가 말했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어두웠던 눈 속에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3년 동안 당신의 시를 읽었어. 카페 벽에 붙은 것들을 읽고, 거기서 또 읽고, 또 읽었어. 그렇게 읽은 시들이 이번 심사에 올랐을 때, 나는 심사 위원회에 즉시 이 사실을 보고했어. 내가 심사 대상 작품과 개인적 관계가 있다는 걸 명시했어."
지은이 눈을 떴다. 준호를 바라봤다.
"그래서 나는 최종 심사에서 배제됐어. 다른 심사위원들이 당신의 시를 평가했어. 나는 그 과정을 지켜봤을 뿐이야.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
지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3년 동안 얼마나 크게 틀렸는지가 한 번에 밀려왔다. 자신이 준호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준호는 자신의 시를 찾고 있었다. 자신이 준호가 자신을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준호는 매달 손으로 자신의 말들을 옮겨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준호는 자신의 감정을 버렸다. 심사 과정에서 물러섰다.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포기했다.
"왜 그랬어? 왜 그런 짓을 했어?"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엔 분노도, 절망도 아닌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감사와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감정.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잘못 이해했는지에 대한 죄책감.
"당신이 날 떠났을 때, 나는 생각했어. 당신이 내게서 필요로 하는 게 뭔지를 생각했어. 당신은 누군가가 자신의 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원했어. 누군가가 그 시에 닿는 것을 원했어.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어. 심사위원이 될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의 시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 계속하기로."
준호가 말했다. 그의 눈빛이 더욱 진해졌다. 결의로 가득 찼다.
"하지만 내가 심사위원이 되었을 때, 나는 다른 선택을 해야 했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물러나야 했어. 내 감정이 심사를 흐리게 하면 안 되니까. 당신의 시가 진정한 가치로 평가받아야 하니까."
지은은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말이 없었다. 생각도 없었다. 있는 것은 준호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크게 실수했는지를 아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목이 메었다. 대신 그녀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준호를 향해.
"미안해."
그 말이 나왔다.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명확하게.
"나는 당신을 오해했어. 당신이 나를 포기했다고, 당신이 나에게 무심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은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어. 내 시를 찾고, 내 말을 기억하고, 내 미래를 위해 자신을 내려놨어."
지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는 3년을 당신을 원망하면서 살았어. 하지만 당신은 3년을 나를 믿으면서 살았어. 그게 얼마나 큰 차이인지 지금 알겠어."
준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손이 움직였다.
"당신이 내 시를 읽어줬을 때, 그 시들이 세상에 나갈 수 있게 했을 때, 나는 당신에게 감사해야 했어. 하지만 나는 당신을 떠났어. 당신을 원망했어. 그래서 미안해."
지은은 자신의 손을 펼쳤다. 준호를 향해 펼쳤다. 이번엔 거두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준호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지은의 손과 만났다. 손가락이 맞닿았다. 그 순간, 지은의 몸이 떨렸다. 억눌렀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려 했다. 눈물이 흘렀다.
"나도 미안해."
준호가 속삭였다.
"내가 당신을 증명해주지 못했어. 내가 당신의 시를 심판할 수 없었어. 내가 무력했어."
"아니야."
지은이 말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나를 증명해줬어. 다른 방식으로. 당신은 내 시를 읽고, 기억하고, 지켜줬어. 당신은 내가 필요로 했던 모든 것이었어."
두 사람의 손이 더욱 단단해졌다. 봄 햇빛 아래서 그들의 손가락은 서로를 놓지 않았다.
문학제 건물의 현관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신인상 수상자들을 축하하는 박수와 카메라 플래시가 울려 퍼졌다. 지은의 이름이 여러 번 불렸다. 하지만 지은은 그것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준호의 손만 느끼고 있었다.
"지은!"
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달려왔다. 박기준 이사도 뒤따랐다. 축하의 인사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지은의 귀에는 오직 한 가지만 들렸다.
"당신의 시가 세상에 나왔어."
준호가 속삭였다. 오직 지은만 들을 수 있도록. 지은의 귀에만 전해지도록.
"우리가 함께 했어."
지은이 대답했다. 그 말은 과거형이 아니었다. 현재형이었다.
축하의 박수가 계속되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지은과 준호에게 지금 이 순간은 오직 둘 사이의 시간이었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지은이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준호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목소리로.
"절대."
준호가 대답했다.
지은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의 시가 세상에 나온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 이유가 준호의 사랑이었다는 것.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깨달음이 밀려왔다. 그 사랑이 3년 동안 어떤 무게로 존재했는지. 그 3년이 준호에게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잘못 이해했는지.
"이제 뭐해?"
지은이 물었다. 이번엔 자신의 시의 미래를 묻는 게 아니었다. 자신과 준호의 미래를 묻는 것이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더 단단히 쥐었다. 지은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 그의 눈빛이 지은을 향했다. 말 대신 눈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문학의 집 출판사의 공식 계약 통지서가 떠 있었다.
「지은 작가 시집 출판 계약 확정」
편집자 명: 이준호
지은은 그 이름을 봤다. 그리고 준호를 봤다. 준호도 지은을 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3년 전엔 절대 만나지 않을 것 같던 눈빛이 지금 마주쳤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지은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둘이 함께 나아갈 새로운 길의 시작.
"응. 이제부터."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지은이 계속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결의가 있었다.
"당신이 내 편집자가 되면, 우리는 또 다른 시험을 맞이하게 될 거야. 출판 과정에서, 독자들의 평가 앞에서. 당신이 나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 나도 당신을 지켜야 해. 우리가 함께 버텨야 해."
준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는 지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진지하게.
"알아."
준호가 말했다.
"당신이 있으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은이 대답했다.
"나도."
준호가 말했다.
그들은 손을 놓지 않았다. 봄 햇빛 아래서, 축하의 박수 속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딛고 다시 한 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닌,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