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테 카페의 벽
라테 카페의 벽은 지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녀의 눈은 자동으로 그곳을 찾았다. 카페 한쪽 벽면에 붙은 시들.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라고 현정이 설명했었다. 하지만 지은은 지금까지 그곳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오후 햇살이 벽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카페의 소음—커피 머신의 웅웅거림, 손님들의 속닥거림, 스푼이 잔을 긁는 소리—이 모두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은은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여덟 개의 시가 붙어 있었다. 대부분 인쇄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는 달랐다.
손글씨였다.
펜으로 정성스럽게 쓴 글씨. 여백까지 계산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내려 그은 듯한 필체. 지은은 자신의 시를 읽는 순간 호흡이 멈췄다.
'봄이 오는 길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 그들은 겨울이 끝나도 / 손가락 끝이 차가운 줄을 모른다.'
자신의 시다. 올해 초 썼던 시.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던, 노트에만 남겨두었던 시.
지은의 손이 떨렸다. 벽에 손을 짚고 시의 글씨를 따라갔다. 누군가의 손이 쓴 글씨. 누군가가 자신의 노트를 펼쳐 읽고, 펜을 들어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옮겨 적었다는 뜻이었다.
침해당했다. 그렇게 느껴졌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것을 누군가가 들었다는 공포감. 그러나 동시에 그 글씨 하나하나에는 경배가 담겨 있었다. 기도처럼 천천히 내려 그은 각 글자. 누군가가 자신의 영혼을 다시 그려내는 것처럼.
눈물이 맺혔다. 손가락이 글씨 위에서 멈췄다.
"내가 붙였어."
현정이 나타났다. 어디서 나왔는지 지은은 알 수 없었다. 카페 주인인 현정은 지은의 옆에 서서 함께 벽을 바라봤다.
"누가 했어?"
지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침해감이 분노로 변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와서, 이 시를 붙여달라고 요청했어. 손글씨로 적혀 있는 그대로."
"누구야? 정확히 누구?"
"그건 말할 수 없어."
현정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예술가들을 이해하는 사람이었고, 그들의 신뢰를 지키는 것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내게 부탁했어. 이 시가 세상에 나가기 전에, 누군가의 눈에는 닿아야 한다고. 그리고 이 시는 거짓이 아니라고. 누군가 이 시를 읽으면 분명히 알아볼 거라고."
"거짓이 아니라니? 무슨 뜻이야?"
지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현정의 말이 계속되었지만 지은은 반만 들었다. 자신의 시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증명해야 하는가. 누가 그럴 권리가 있는가.
"당신도 알겠지? 이 시가 얼마나 좋은데."
현정이 벽을 가리켰다. 손글씨로 적힌 시. 지은은 자신이 쓴 이 시를 처음으로 제대로 본 것 같았다. 자신의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다시 그려진 이 시가, 자신이 쓴 시보다 더 진실해 보였다.
"누가 했는지 말해줘."
"미안해. 그건 내가 지켜줄 수 없어."
현정은 진심이었다. 지은은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알 수 없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시를 이렇게까지 정성들여 옮겨 적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봤다는 것을.
"혹시... 준호는 아닐까?"
지은의 목소리는 속삭임이었다. 자신도 듣고 싶지 않은 이름.
현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지은을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는 이미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지은은 카페를 나갔다.
거리의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봄인데도 여전히 차가운 바람. 자신의 시처럼. 겨울이 끝나도 손가락 끝이 차가운 사람들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박기준 이사'라고 떴다. 지은은 한 번 더 흔들렸다. 누군가의 손으로 옮겨진 자신의 시를 바라본 직후에 받는 이 전화. 우연일 리 없었다.
"지은, 너 시간 돼?"
박기준의 목소리는 조급했다. 여느 때와 달랐다.
"네, 이사님."
"그 시집 원고 말이야. 기억하지?"
"어떤 원고 말씀입니까?"
지은이 물었다. 거절당한 원고가 여섯 개였으니까.
"너한테서 받았던 그 원고 말이야. 6개월 전에. 너희들이 거절하고 난 다음에... 그 원고가 어디론가 넘어갔어. 제대로 된 채널로."
박기준이 말을 멈췄다. 그 침묵 속에서 지은은 자신의 심장이 어떻게 뛰고 있는지 들었다.
"혹시 넘어갔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심사 과정으로. 문학제 심사 과정으로 들어갔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너가 누군가한테 넘긴 거 아니지?"
지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가락이 까무러질 정도로.
"제가... 네, 보냈습니다."
"뭐? 누구한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은은 대답했다. 현정처럼. 누군가의 신뢰를 지키는 방식으로.
박기준의 한숨이 들렸다. 그 한숨 속에는 실망과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혹은 이해.
"알겠어. 그럼 혹시... 그 사람이 원고를 받았는지 알 수 있어?"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지은은 거리에 서 있었다. 카페에서 나온 햇살이 자신의 어깨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떠올랐다.
원고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의 시를 손글씨로 옮겨 적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인가.
지은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테 카페의 벽. 거절당한 원고. 준호의 손가락이 원고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는 모습. 문학제 심사위원 명단에 있던 그의 이름.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자신의 시가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시를 이렇게까지 정성들여 대했다. 그 누군가가 정말 준호라면.
그렇다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지은은 거리에 멈춰 섰다.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박기준에게 전화를 다시 걸어야 할까. 아니면 준호에게.
준호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손가락이 화면을 스쳤다. 연락처 목록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3년 전 마지막 통화 이후로 그의 번호를 저장한 채로 두었다. 언젠가는 지우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한 번도 지우지 않았다.
지은은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
현정은 여전히 바리스타 기계 옆에 서 있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김이 그녀의 얼굴을 살짝 흐렸다.
"현정, 그 사람한테서 연락받은 건 언제야?"
현정이 물을 담은 컵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 달 전쯤이었어. 온라인 메시지로."
"뭐라고 했어?"
"'이 시가 있다. 벽에 붙여주면 좋겠다'고. 그리고... 이 시가 세상에 나가기 전에 누군가의 눈에는 닿아야 한다고."
현정이 말을 멈췄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 말만 들었어도 나는 알았어.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게 사랑이라는 걸."
지은의 목에서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사랑. 그 단어가 자신의 몸 안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혹시... 그 사람이 준호라고 말했어?"
"아니.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
"근데 넌 알았지? 누군지."
현정은 대답하지 않고 지은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확인이었다. 현정도 알았다는 뜻이었다. 아마 처음부터.
지은은 카페를 다시 나갔다.
거리는 점점 저물고 있었다. 봄이라고 해도 해는 빨리 진다. 지은은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핸드폰을 들었다.
문학제 공식 웹사이트를 켰다. '심사 결과 발표: 2주 후'라고 적혀 있었다. 정확하게는 13일. 그날까지 자신의 시가 준호에 의해 심사받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기차가 들어왔다. 지은은 탔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흘러갔다. 불빛들이 시처럼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 불빛을 시로 읽을 것이고, 누군가는 단순한 전깃불로 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불빛 하나하나에 사연을 담을 것이다.
준호가 그랬던 것처럼.
지은은 눈을 감았다. 3년 전의 준호가 떠올랐다. 자신이 기억하는 준호는 말이 적었다. 하지만 말 대신 손으로 말했다. 책장을 넘기는 손. 펜을 잡는 손. 그리고 자신의 손을 잡는 손.
"당신의 시를 이미 알고 있다."
문학제에서 준호가 한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때는 그 말이 조롱처럼 들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고백이었다.
기차가 자신의 역에 도착했다. 지은은 내렸다.
집에 가는 골목길. 밤 10시. 주변에는 편의점과 닫힌 식당들이 있었다. 지은은 걷다가 멈춰 섰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미라였다.
"지은, 너 지금 어디야?"
"집 가는 길인데. 뭐 있어?"
"문학제 심사 결과가 나왔대. 아직 공식 발표는 아니고, 기준이가 내게 먼저 알려줬는데... 넌 수상작에 올랐어."
지은의 심장이 멈췄다. 아니, 멈추지 않았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뭐?"
"너의 시 '3월의 손가락'이 신인상 후보에 올랐어. 최종 심사는 내일인데, 기준이가 자신 있대. 너는..."
미라의 말이 떨어졌다. 전화 너머에서 미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미라, 그게 정말인가?"
"응. 진짜야. 축하해, 지은. 정말 축하해."
통화가 끝났다.
지은은 거리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밤거리의 불빛이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시 제목이 준호의 손가락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3월의 손가락.'
자신이 썼던 그 시는 사실 준호의 손가락이었다. 준호가 자신의 손을 잡을 때, 그의 손가락의 온기를 느낄 때, 그 감각을 글로 옮긴 것이었다.
그리고 준호가 그 시를 읽었다.
준호가 그 시를 심사했다.
준호가 자신의 시를 신인상 후보에 올렸다.
"3년은..."
지은이 중얼거렸다. 문학제에서 준호가 한 말이 떠올랐다.
"3년은 꽤 긴 시간인 것 같다."
그 말의 의미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3년은 그냥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시를 쫓아다니는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작은 기회들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카페의 벽. 거절당한 원고. 그리고 문학제.
모든 것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지은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은 문학의 집 출판사로 향했다.
밤 11시. 사무실은 당연히 닫혀 있었다. 하지만 지은은 계단을 올라갔다. 자신의 책상 서랍이 있는 3층으로.
사무실 앞에서 멈춰 섰다.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책상이 보였다. 그 위에 쌓여 있는 거절 편지들. 그리고 그 모든 것 아래에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다.
지은은 핸드폰을 들었다. 준호의 번호를 찾았다. 3년 동안 저장해둔 그 번호를.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
지은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내 원고를 받았죠. 카페 벽에 붙인 것도 당신이죠. 그리고 내 시를 심사한 것도 당신이죠. 모두 다 당신이었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하나야. 왜?"
메시지를 전송했다.
몇 초가 지났다. 준호의 답장이 왔다.
"지금 어디야?"
지은은 대답했다.
"문학의 집 앞."
"나도 지금 거기 가는 길이야."
밤거리를 통해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은은 그것을 알았다. 자신의 심장이 그것을 먼저 알아챘다. 3년 동안 기억하고 있던 그 사람의 발걸음 소리를.
준호가 나타났다.
거리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3년 전과 달라진 모습. 좀 더 깊어진 눈빛. 좀 더 단단해진 턱선.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의 눈빛 안에 자신을 보는 방식.
준호가 한 발 다가섰다.
"지은, 이제 알겠어?"
"뭘?"
"내가 너를 놓지 않았다는 걸."
지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눈 안에 분노가 일었다. 3년. 3년을 어떻게 견디라고 말 한 마디 없이 자신의 뒤에서 움직였단 말인가.
"당신이 나한테 한 말 기억나? 3년 전에. 내 글은 관심 없다고."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준호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얼굴은 창백했다. 3년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한 발 물러섰다.
"내가 한 말은 '지금은 할 수 없다'는 거였어."
그 말도 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준호의 입술이 떨렸다.
"너를 설득할 수 없다는 뜻이었어. 너를 함께 기다릴 수 없다는 뜻이었어."
그는 말을 멈췄다. 지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자책이 가득했다.
"하지만... 너를 놓을 수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어."
준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어. 작은 것들부터. 카페 벽에 너의 시를 붙이게 했어. 너의 원고를 심사 과정에 올렸어."
그는 숨을 쉬었다. 마치 물 위에서 겨우 고개를 내밀듯이.
"내가 할 수 없는 것들—너를 설득하는 것, 너를 함께 기다리는 것, 너를 믿는 것—대신에 나는 너의 시를 믿었어. 그 시가 세상에 나갈 거라고. 그리고 언젠가 너가 그걸 알게 될 거라고."
준호가 또 한 발 다가섰다. 하지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마치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는 듯이.
"지금 그 시가 상을 받으려고 해. 내일 심사 결과가 나올 거야. 너의 시가 세상에 나올 거야. 내가 3년 동안 믿었던 그 시가."
지은의 눈빛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왜...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어?"
그 질문 속에는 분노가 있었다. 자책이 있었다. 그리고 깊은 죄책감이 있었다. 3년을 헛되이 보낸 죄책감.
준호는 대답하지 않고 지은을 바라봤다. 그 침묵이 길어졌다.
"말할 수 없었어."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심사 위원의 신분이 공개되면 안 되거든. 그리고..."
준호가 다시 멈췄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려는 듯이.
"너는 내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았어. 너는 내 말보다 세상의 인정을 더 원했으니까. 내가 '너의 시는 좋다'고 말해봤자, 그건 너에게 위로일 뿐이었을 거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지은은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자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준호가 자신의 뒤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했는지. 그리고 자신은 그를 얼마나 오해했는지.
"나는... 당신을 오해했어. 3년 동안."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어. 당신이 나의 글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모든 게..."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닫는 순간.
"당신은 3년을 내 시를 위해 보냈어. 내 뒤에서 모든 걸 다 했어. 그런데 나는..."
지은은 고개를 들었다.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3년의 침묵이 만든 상처들.
"당신을 믿지 않았어.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았어. 당신을 외면했어."
지은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눈물이 아니라 준호의 눈물도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줬을까."
그 순간, 지은은 자신이 3년 동안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글에만 집중했고, 자신의 상처에만 빠져 있었고, 준호의 진심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자신을 무너뜨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은은 중얼거렸다. 그 말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준호는 침묵했다. 그의 침묵 속에는 3년의 시간이 모두 담겨 있었다. 말하지 않은 것들. 참아낸 것들.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사랑.
"근데 이제는 알겠지? 내가 너를 놓지 않았다는 걸."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감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단단한 것이 있었다. 3년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그 무언가.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했어?"
지은이 물었다. 그 질문 속에는 여전히 의심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간절함도 있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3년 동안 기억하고 있던 그 손. 그의 손가락이 지은의 손을 찾았다.
손이 맞닿는 순간, 지은의 눈물이 더 흘러내렸다. 따뜻함과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준호의 손은 변하지 않았다. 3년 전과 같은 온기. 같은 부드러움. 하지만 지은은 이 손을 잡을 자격이 있는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내일 심사 결과가 나와."
준호가 말했다. 지은의 손을 꼭 잡으며.
"그 다음엔?"
지은이 물었다. 그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모든 일이 끝난 후에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해가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은의 손을 더 꼭 잡을 뿐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지은은 자신의 손이 준호의 손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이 손을 잡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했다.
그때였다.
준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박기준'이라고 떴다. 준호는 지은의 손을 놓고 전화를 받았다.
"네, 이사님... 네... 알겠습니다."
통화는 짧았다. 준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있어?"
지은이 물었다.
"심사 결과가... 예정보다 빨리 나왔대. 내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뭐?"
"그리고..."
준호가 말을 멈췄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박기준 이사가 말하길, 심사 결과 발표 직전에 문제가 생겼대. 누군가가 심사 결과를 누설했다고. 그 누설자가..."
준호는 지은을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너라고 의심하고 있어. 너한테 보낸 원고가 어디론가 흘러나갔다는 거야. 그리고 그 원고가 신문사에 제보됐대."
지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이 보낸 원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건넸던 그 원고.
"나는... 아니야. 내가 그럴 리가..."
"나는 알아. 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의심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의심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의문. 지은이 누구에게 그 원고를 보냈는지에 대한 의문.
"그런데 박기준 이사는 뭐라고?"
"너한테서 확인하고 싶대. 정말로 누설자가 너인지 아닌지를."
밤거리의 불빛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한 번은 손을 맞잡았던 두 사람. 하지만 지금 그들 사이에는 새로운 의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은, 너... 그 원고를 누가 받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