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
경기가 끝나는 순간, 준호는 알았다. 뭔가 빠졌다.
5경기째, 서울 이글스 대 인천 피닉스. 1세트 중반, 상대 스파이크가 날아왔다. 준호는 몸을 날렸다. 손가락이 공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리고—
손가락이 저렸다.
정확하지 않은 저림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신경을 누르는 느낌.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 공은 그의 팔을 스쳐 지나갔다. 바닥에 떨어졌다.
"아!"
박성준의 외침이 들렸다. 서울 이글스가 득점을 내주었다. 10년간 몸에 새겨진 근육 기억이 처음으로 배신했다.
경기는 계속됐다. 준호는 계속 뛰었다. 하지만 손가락 저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리시브도 완벽하지 않았다. 토스의 정확도가 1센티미터 밀렸다. 그 1센티미터가 박성준의 공격 타이밍을 흐트러뜨렸다. 공이 블로킹에 걸렸다. 또 다른 득점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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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후 라커룸. 준호는 샤워실에서 나왔다. 타올로 몸을 닦으며 박성준을 마주쳤다. 박성준의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났다.
"넌 뭔가 달라졌어."
박성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준호의 손이 멈췄다.
"4경기 전과 비교하면 10% 정도 약해진 것 같은데?"
"피로일 뿐이야."
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담담했다. 하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박성준도 느꼈나? 준호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박성준은 준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살펴봤다.
"이건 너의 손이 맞지?"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만 흘렀다. 팀의 에이스와 리베로 사이에 처음으로 말할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겼다.
박성준은 준호의 손을 놨다.
"쉬어. 내일 의료진 봐."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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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심리 상담실. 회색 소파, 담담한 조명, 그리고 이혜진 심리 상담사의 노트북.
"어떤 식의 불안감인가요?"
이혜진은 준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날카로웠다.
"뇌에서는 기억하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해요."
준호가 처음으로 자신의 증상을 명확하게 말했다.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며.
"어제 경기에서 실수했어요. 손가락이 저렸어요. 마치... 누군가가 내 몸을 빼앗아가는 것 같은 느낌."
"빼앗아간다는 표현이 흥미롭네요."
이혜진이 펜을 들었다.
"당신은 지금 성공하고 있어요. 팀은 당신을 신뢰하고, 팬들도 환호해요. 그런데 당신은 이 성공이 '진짜'가 아니라고 느끼고 있다는 건가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느끼는 것을 해리 증상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자신의 신체에 대한 거리감, 소속감의 상실. 심리적 방어 기제죠. 성공에 대한 죄책감이나, 그 성공이 진정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무의식적 거부."
"그게 맞을 수도 있겠네요."
준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심리 증상만은 아닐 수 있어요. 신체 감각의 이상, 특히 손가락 저림이 심해지면 의료적 검사가 필요해요. 신경계 문제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화 증상일 수도 있고요."
"그럼... 뭘 해야 해요?"
준호가 물었다.
"일단 신경과 검사를 받아보세요. 의료진과 상담해야 합니다."
이혜진이 노트북을 닫으며 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당신이 받은 협박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도 중요해요. 신경계 증상과 심리적 스트레스는 연결되어 있거든요. 외부의 위협이 신체 반응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협박 메시지라고요?"
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있어?"
준호는 휴대폰을 꺼냈다. 알 수 없는 번호의 메시지들을 보여줬다.
[우리가 당신을 잘 지켜보고 있어요.]
[당신의 손이 점점 더 약해질 거예요.]
[당신은 정말 당신인가요?]
이혜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메시지를 자세히 읽었다. 그리고 준호를 봤다.
"이 메시지들을 누가 보냈는지 알아?"
"아니요. 번호 추적도 안 되고..."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 해. 이건 협박이야. 그리고 당신이 받고 있는 신체 증상은 이 협박과 무관하지 않을 거예요. 스트레스가 신경계를 자극하고 있는 겁니다."
이혜진은 준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느끼는 신체 감각의 이상은 실제 신경계 문제와 심리적 스트레스가 합쳐진 것 같아요. 협박을 받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신체가 반응하는 거죠. 하지만 이건 혼자 감당할 수 없어. 도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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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자취방.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 저림은 여전했다. 간헐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신경을 누르는 듯한 리듬.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 준호는 받지 않았다. 메시지가 왔다.
[알 수 없는 발신자: 당신의 손이 점점 더 약해질 거예요.]
준호의 손가락이 경련했다.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천장을 바라봤다. 손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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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경기 직전 라커룸. 준호는 혼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여전히 저림이 있었지만, 어제보다는 나았다. 근육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걸까?
"뭐 하는 거야?"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최준영이 라커룸 입구에 서 있었다. 서울 타이탄스의 유니폼을 입은 채. 경기 전 상대팀 리베로가 자신의 라커룸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경기 전에 상대 라커룸에 들어오는 건 예의가 아닌데?"
준호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냥... 너를 보고 싶었어."
최준영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어제 경기 봤어. 넌 뭔가 달라졌어. 손이 떨리고, 토스가 밀리고... 처음이더라."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넌 누가 돼야 해?"
최준영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10년을 벤치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천재 같은 플레이를 하는 선수. 그런데 이제 약해지고 있지. 누군가가 너를 조종하려고 하는 것처럼."
준호는 최준영의 눈을 마주쳤다.
"넌... 뭐야?"
"나? 난 그냥 지켜보고 있을 뿐이야."
최준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차갑고 계산적인 표정이었다.
"너는 누구야? 정말로. 10년 전 그 벤치 선수가 맞아?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너의 몸을 빌려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최준영의 말은 준호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그 질문은 협박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했다. 준호는 최준영을 바라봤다. 상대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으려고.
"경기장에서 봐."
최준영은 돌아섰다. 그리고 나갔다.
라커룸에는 준호 혼자 남았다.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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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준호는 박성준 곁에 있으면서도 혼자였다. 선수들의 발걸음 소리, 관중의 웅성거림, 해설진의 목소리—모든 것이 멀게 들렸다. 손가락 저림이 팔뚝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준호?"
박성준이 옆을 봤다. 준호의 얼굴이 창백했다.
"괜찮아?"
"응. 그냥... 피로일 뿐이야."
거짓말이었다. 준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박성준도 안다. 하지만 둘 다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팀의 신뢰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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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에 나선 순간, 관중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서울 이글스는 지난 몇 경기 동안 기적 같은 성적을 올렸다. 10년 최약체팀이 갑자기 상위권 팀들과 경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준호라는 한 명의 선수 때문에.
하지만 준호는 관중들의 기대를 느낄 수 없었다. 손가락이 저렸다.
경기는 첫 세트부터 박진감 있게 흘러갔다. 서울 타이탄스는 최강팀답게 체계적인 공격을 펼쳤다. 준호는 포지션에 서서 상대의 스파이크를 기다렸다.
첫 번째 상대 스파이크가 날아왔다. 준호의 신체는 자동으로 반응했다. 발을 움직이고, 팔을 펴고, 공을 받아냈다. 토스는 완벽했다. 박성준이 스파이크를 날렸고, 공은 네트를 넘어 상대 코트에 떨어졌다.
득점. 1:0.
관중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근육 기억이 맞는 궤적을 만들었지만, 감각은 어디론가 멀어져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스파이크. 모두 받아냈다. 토스도 정확했다. 박성준은 계속 득점했다. 준호의 플레이는 여전히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다섯 번째 스파이크에서 무언가 달라졌다.
상대 에이스가 날린 강력한 스파이크. 준호는 위치를 잡았다. 신체는 반응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저렸다. 순간, 뇌와 신체 사이에 시차가 생겼다. 손이 한 박자 늦게 올라갔다.
공은 준호의 팔을 스쳐 지나갔다.
실수. 상대 득점.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준호는 손을 바라봤다. 손이 떨렸다. 더 심하게.
박성준이 달려왔다.
"괜찮아? 뭐 했어?"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기는 계속됐다. 준호는 다시 집중했다. 손가락 저림을 억누르고, 신체를 믿고, 기억에 의존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완벽하지 않았다. 박성준이 느낀 대로였다. 준호는 10% 약해져 있었다.
여섯 번째 스파이크. 준호는 몸을 날렸다. 손가락이 공을 향해 뻗어나갔다. 하지만 손가락 저림이 심해졌다. 손이 한 박자 늦게 올라갔다.
공은 준호의 팔을 스쳐 지나갔다. 또 다른 실수.
박성준은 준호를 봤다. 에이스의 눈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 자신의 파트너가 무너져 내리는 걸 보는 것 같았다.
첫 세트는 서울 이글스가 25:23으로 이겼다. 준호의 실수가 있었지만, 그 외의 리시브와 토스는 충분히 좋았다. 하지만 준호는 그 두 번의 실수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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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커룸으로 돌아온 준호는 벤치에 앉았다.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박성준이 앞에 섰다.
"넌 뭐 하는 거야?"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하지 마. 난 넌 뭔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
박성준은 준호 앞에 앉았다. 준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살펴봤다.
"손이 떨려. 왜 떨려?"
"모르겠어."
준호가 대답했다.
"모른다고? 우리는 팀이잖아. 팀이라면 뭘 나눠야 하는 거야."
박성준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묻어났다. 그는 준호의 손을 놨다.
"3세트에 집중해. 우리가 이겨야 하니까."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제 확신을 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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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트는 더 어려웠다. 준호의 실수가 계속 나왔다. 손가락 저림이 이제 팔뚝 전체로 번져갔다. 신체 감각이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일곱 번째 스파이크. 준호는 위치를 잡았다. 신체는 반응했다. 하지만 손가락 저림이 어깨까지 번져갔다.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공은 준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또 다른 실수.
박성준은 계속 준호를 봤다. 뭔가 크게 달라졌다. 이전의 완벽한 준호가 아니었다.
"준호!"
박성준이 외쳤다.
"집중해!"
준호는 박성준을 봤다. 에이스의 눈에는 불안함을 넘어 분노가 가득했다.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박성준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2세트는 서울 타이탄스가 25:20으로 이겼다. 준호는 이 세트에서 6번의 실수를 했다. 경기 시작 이후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실수를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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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트는 더 치열했다. 준호는 손가락 저림을 억누르고, 신체를 믿고, 기억에 의존했다. 하지만 기억은 계속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여덟 번째 스파이크. 준호는 몸을 날렸다. 손가락이 공을 향해 뻗어나갔다. 하지만 손가락 저림이 전신으로 번져갔다.
공은 준호의 팔을 스쳐 지나갔다.
또 다른 실수.
경기 말미, 준호는 또 한 번의 실수를 했다. 상대의 스파이크를 받아내지 못했다.
서울 타이탄스가 세트를 가져갔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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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커룸으로 돌아온 준호는 벤치에 혼자 앉았다.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았다.
그 때 누군가가 라커룸 문을 열었다.
최준영이었다.
"뭐 하는 거야?"
최준영이 물었다.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내 손인지 확인 중이야."
준호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확인됐어? 그게 너의 손인지?"
최준영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아직... 확인 중이야."
준호가 말했다.
"그렇겠지. 왜냐하면..."
최준영이 준호의 손을 바라봤다.
"그건 너의 손이 아니니까."
준호는 최준영을 바라봤다. 상대의 말이 협박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했다.
"넌 누가 돼야 해? 10년을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가 맞아?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최준영의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무언가 더 깊은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는 준호의 반응을 관찰하듯 바라봤다.
"경기장에서 봐."
최준영은 돌아섰다. 그리고 나갔다.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