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서울 이글스의 라커룸은 평소와 달랐다. 승리의 냄새가 가득했다. 벽에 붙은 경기 영상 분석표에는 붉은 원형 마크가 열 개 이상 표시되어 있었고, 그 모든 마크 옆에는 '임준호 리시브'라고 적혀 있었다. 3경기 연속 출전, 3경기 연속 승리. 기록이 숫자로 증명했다.

준호는 라커에 앉아 양말을 벗었다. 발뒷꿈치에는 테이핑 자국이 선명했다. 손가락 저림은 여전했다. 어제보다 더 강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계속 흔드는 것처럼. 그는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움직임은 정상이었다. 감각만 이상했다.

"준호, 너 들었어?"

박성준이 라커 옆에 앉았다. 에이스 유니폼 등번호 4번. 팀의 정신적 지주. 지난 3경기에서 그는 준호와 콤비를 이루며 30개 이상의 스파이크 포인트를 터트렸다.

"뭘?"

"미디어가 난리야. '10년 벤치 선수의 기적'이래. 스포츠 뉴스 메인에 너 사진이 떠 있어. 리시브 장면. 네 손이 공을 받는 순간 촬영한 사진인데, 진짜 예술이야."

박성준의 목소리에는 감탄이 가득했다. 그는 진심으로 팀의 성공을 기뻐하는 타입이었다. 자기 포인트보다 팀의 승리를 먼저 세었다.

"그건 좋은 일이지."

"좋은 일? 좋은 정도가 아니야. 우리 팀 순위가 올라왔어. 최악에서 중위권이야. 중위권! 상상이나 했어?"

박성준이 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은 따뜻했지만, 준호의 신체는 움츠러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주무르고 있다는 착각이 계속 들었다.

"이혜진 상담사가 너를 찾는대. 심리 상태 체크라고 했어."

"알았어."

박성준이 떠난 후, 라커룸에는 고요함이 남았다. 준호는 다시 손가락을 펴 보았다. 저림은 더 심해졌다.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미확인 메시지 5개. 모두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우리가 당신을 잘 지켜보고 있어요.]

[당신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계속 나아가세요. 우리가 함께 있어요.]

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

훈련장은 오전 10시부터 떠들썩했다. 새로 들어온 카메라팀이 경기 영상을 촬영했고, 마이크를 든 기자들이 감독을 둘러싸고 있었다. 케이블 방송국의 스포츠 다큐멘터리팀이었다. '기적의 팀, 서울 이글스'라는 제목으로 준호의 귀환을 다룰 예정이었다.

준호는 코트 모서리에서 준비 운동을 했다. 스트레칭 중에도 손가락은 자꾸만 저렸다. 그는 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준호."

최준영이 다가왔다. 서울 타이탄스의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이건 훈련장이 아니라 체육관이었고, 최준영은 아직 자신의 팀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여기 있었다. 준호가 속한 팀의 훈련을 지켜보러 온 것이다.

"너 뭐야?"

최준영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그것이 더 위협적이었다.

"뭐가?"

"갑자기 나타나서 팀을 이끄는 척 하는 그 짓. 넌 뭐야? 천재? 회귀자? 무슨 영화 같은 소리야."

최준영이 한 발 가까워졌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조롱이 아니라 진짜 의문이었다.

"난 그냥 내 일을 하는 중일 뿐이야."

"내 일? 3경기 연속 출전하고 팀 순위를 중위권까지 올린 걸 '내 일'이라고? 10년 벤치에서 썩고 있다가 갑자기?"

최준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훈련장의 소음이 잠깐 멎었다. 카메라팀이 돌아봤다. 박성준도 멈췄다.

"넌 뭐가 다른 거야? 갑자기 나타나서 영웅 행세하고 있잖아. 우리 팀이 처음 본 리베로? 아니면 다른 세상에서 온 외계인? 뭐야?"

최준영이 준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약한 힘이었지만 도발적이었다.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손가락 저림이 손목으로 퍼져 나갔다. 팔뚝까지.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신체를 장악하려 하는 것처럼. 그는 눈을 감았다.

"넌 맞아. 나는 갑자기 나타났어."

준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최준영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넌 또 맞아. 나는 너와 다르다. 너는 선택받은 선수야. 최고의 팀에서 최고로 대접받은 선수. 나는 다르다. 나는 10년을 벤치에서 썩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나일 뿐이야. 넌 내가 아니야."

준호가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은 최준영을 관통했다. 차갑고, 선명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준호의 몸을 빌려 말하는 것 같았다.

최준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박성준이 다가왔다. 두 리베로 사이에 서려는 듯.

"야, 이제 그만해. 경기장에서 보자."

박성준의 중재였지만, 준호는 최준영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손가락 저림이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가 손을 놨다는 듯. 준호는 숨을 내쉬었다.

최준영이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공포도.

---

라커룸의 벤치에 준호와 박성준이 나란히 앉았다. 훈련이 끝난 후였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이미 나갔고, 두 명만 남아 있었다.

"너 뭔가 숨기고 있어?"

박성준의 질문은 직설적이었다. 그는 준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숨겨?"

"아까 최준영한테 한 말. '나는 나일 뿐이야.' 그게 뭐야? 너는 다른 누군가인 척했던 거야? 또 다른 너가 있다는 뜻?"

박성준의 목소리에는 상처가 묻어났다. 그는 준호를 완전히 믿고 싶었지만, 뭔가 막혀 있었다.

준호는 양말을 신으며 말했다.

"그냥 최준영에게 말한 거야. 넌 선택받은 선수고, 나는 아니라는 것. 그게 다야."

"그게 다? 진짜?"

박성준이 준호의 얼굴을 보려 했다. 하지만 준호는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냥...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해? 진짜로."

박성준의 질문에 준호는 한참을 묵묵했다.

"좋은 팀원. 좋은 선배."

"그게 아니라..."

박성준이 숨을 쉬었다. 그는 선택할 말을 찾고 있었다.

"너 회귀했거나, 아니면 뭔가 특별한 거 아니야? 미디어들이 소문내는 것처럼?"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박성준의 눈을 마주했다.

"회귀?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나는 그냥 경험이 많은 선수일 뿐이야."

그 대답은 거짓이었다. 준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박성준은 준호를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괜찮아. 넌 우리 팀의 영웅이야. 그게 전부야."

박성준이 일어섰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

카페는 강남역 근처의 조용한 곳이었다. 한지은 기자가 준호를 만난 곳이었다. 그녀는 아메리카노 앞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은 닫혀 있었고, 펜만 손에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한지은의 인사는 정중했지만, 그 뒤에는 뭔가 예리한 것이 숨어 있었다.

"기사 때문이죠?"

"네. 그리고 궁금해서요."

한지은이 펜을 돌렸다.

"10년을 벤치 생활했어요. 제 자료를 봤는데, 당신은 벤치 생활 기간 동안 거의 경기 출전이 없었어요. 거의 도구 취급을 받았다고 봐도 되죠. 그런데 갑자기?"

준호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쓴 맛이 혀에 묻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운? 3경기 연속 30개 이상의 리시브 성공률을 운이라고 하기는..."

한지은이 앞으로 몸을 숙였다.

"당신은 뭔가 있어요. 10년 벤치 생활했는데 갑자기 이런 수준의 플레이가 가능해? 뭔가 있지 않아?"

준호는 한지은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예리했다. 조사자의 눈이었다.

"제 입단 직후에 대해 알고 싶으신 건가요?"

"당신이 입단한 이유가 이상해요. 타이탄스에서 스카우트했는데 왜 거절했어요? 돈 문제? 아니면 다른 이유?"

한지은이 노트북을 열었다. 그 안에는 준호의 사진이 있었다. 23세 때의 준호였다. 스카우트 초대장을 받던 날 찍은 사진. 그리고 그 옆에는 낡은 서류 스캔본이 있었다.

"이거 아세요? 당신의 입단 10년 전 스카우트 기록이에요. 여기 보세요. '최고 평가: 리베로 포지션 최고 재능'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럼 왜..."

한지은이 문서를 확대했다.

"...왜 벤치만 했어요?"

준호의 손가락이 저렸다. 강하게. 마치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꽉 쥐고 흔드는 것처럼.

---

체육관 지하의 심리 상담실은 조용했다. 이혜진 상담사는 준호를 보고 첫 마디를 건넸다.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그렇나요?"

"네. 뭔가 불안해 하시는 것 같아요. 지난번 상담 이후로 달라진 게 있어요?"

준호는 소파에 깊게 기대앉았다. 천장을 바라봤다.

"상담사님. 만약에... 만약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면?"

이혜진이 펜을 멈췄다.

"꿈이라고요?"

"네. 내가 사실은 죽었고, 이 모든 게 임사 체험이라면? 마지막 뇌 신호가 만드는 환상이라면?"

준호의 목소리는 떨렸다. 처음으로 그가 진짜 불안감을 드러냈다.

"당신은 여기 있어요. 내 앞에. 이건 현실이에요."

이혜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근데 기억이 자꾸만 흐릿해져요. 10년 전 기억들이 사라지고 있어. 마치 누군가가 내 머리에서 지우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손가락이 계속 저려요.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당신은 지금 성공했어요. 팀도 성공했고, 미디어도 당신을 주목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불안해해요. 왜 그럴까요?"

이혜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당신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어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

밤 11시 30분. 준호의 자취방 침대 위에 그의 몸이 누워 있었다. 손가락이 저렸다. 팔뚝이 저렸다. 다리도. 신체 전체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주무르어지는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음성 변조 전화였다.

[당신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계속 나아가세요.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렸다.

그 순간, 한지은 기자가 발견한 스카우트 기록의 한 줄이 떠올랐다.

'최고 평가: 리베로 포지션 최고 재능'

10년 전, 그는 왜 벤치만 했을까?

준호는 천장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여전히 저렸다.

# 4화 「의혹」

카페 테이블 위의 아메리카노는 식어가고 있었다. 한지은은 노트북 화면을 준호 쪽으로 돌렸다. 그 안에는 스포츠 신문 헤드라인들이 가득했다.

'10년 벤치 선수의 기적 — 서울 이글스, 연승의 주인공은?'

'최하위에서 중위권으로 — 리베로 임준호의 정체는?'

'3경기 연속 30개 이상 리시브 성공률, 이게 정상인가?'

준호는 커피를 마셨다. 쓴 맛이 혀에 남았다. 그것만큼이나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당신을 처음 취재할 때는 '희망적인 복귀'라고만 생각했어요." 한지은이 말했다. "하지만 3경기를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거든요."

"이상하다는 게 뭔데요?"

"리시브 하나하나가 계산된 것처럼 보여요. 상대 스파이크의 각도, 높이, 스핀까지 전부 예측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건 경험으로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건..."

한지은이 한 발 물러섰다 다시 나아갔다.

"...그건 10년을 더 산 사람의 움직임처럼 보여요."

준호의 손가락이 저렸다. 약한 저림이 아니라 화끈거리는 통증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집어뜯고 있는 것 같았다.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운?" 한지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3경기 연속 30개 이상의 리시브 성공률을 운이라고 하기는..."

"그게 뭐가 문제죠?"

준호는 한지은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예리했다. 조사자의 눈이었다.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의 눈.

"당신의 입단 직후에 대해 알고 싶어요. 정확히는 입단 이전이 궁금해요."

한지은이 노트북을 몸 쪽으로 당겼다. 화면에는 낡은 서류 스캔본이 떠 있었다. 10년 전 스카우트 기록이었다.

"이거 아세요?" 한지은이 확대했다. "당신의 입단 10년 전 평가 기록이에요. 여기 봐요. 대체 분석 항목에 '최고 평가: 리베로 포지션 최고 재능'이라고 적혀 있어요."

준호의 눈이 그 문장에 멈췄다.

"그럼 왜..." 한지은이 몸을 숙였다. "...왜 벤치만 했어요? 10년을 벤치에만 앉혀 있었다고요? 최고 재능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침묵이 흘렀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희미하게 울렸다. 준호는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기록은 기록일 뿐이에요."

"그럼 실제로는 뭐였어요?"

한지은이 펜으로 노트를 두드렸다. 리듬감 있는 타닥타닥 소리가 준호의 신경을 자극했다.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거짓말이에요." 한지은이 펜을 내려놨다. "당신은 지금 뭔가 큰 비밀을 갖고 있어요. 나는 기자거든요. 사람의 거짓말은 냄새처럼 맡아요. 당신에게서는 그 냄새가 진짜 강해요."

준호는 일어섰다. 카페의 다른 손님들이 그를 바라봤다.

"인터뷰는 여기까지죠."

"잠깐만요." 한지은이 손을 들었다. "당신이 타이탄스를 거절한 이유가 뭐예요? 명문팀이 스카우트했는데 왜 최악의 팀을 선택했어요? 돈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준호는 한지은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아니라 집요한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건... 개인적인 이유예요."

"개인적인 이유? 그게 뭐죠?"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페를 나갔다. 뒤에서 한지은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당신은 지금 뭔가에 쫓기고 있어! 내가 알아낼 거야!"

---

체육관 지하의 심리 상담실은 조용했다. 밝은 조명 아래 소파와 책장, 그리고 관엽식물들이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혜진 상담사는 준호를 보고 펜을 내려놨다.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그렇나요?"

"네. 뭔가 불안해 하시는 것 같아요. 지난번 상담 이후로 달라진 게 있어요?"

준호는 소파에 깊게 기대앉았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의 조명은 부드러웠지만 그것도 준호에게는 자극으로 느껴졌다.

"상담사님. 만약에..." 준호가 입을 열었다 다시 다물었다. 다시 열었다. "만약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면?"

이혜진이 펜을 멈췄다. 준호는 그 침묵이 오래갈 것을 알았다. 심리 상담사는 반사적으로 대답하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 그들의 무기였다.

"꿈이라고요?"

"네. 내가 사실은 죽었고, 이 모든 게 임사 체험이라면? 마지막 뇌 신호가 만드는 환상이라면?" 준호의 목소리는 떨렸다. 처음으로 그가 진짜 불안감을 드러냈다. "처음엔 기억이 선명했어요. 10년간의 모든 경기, 모든 훈련, 모든 패배가. 근데 지금은... 지금은 자꾸만 흐릿해져요."

"기억이 흐릿해진다는 건?"

"10년 전 기억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마치 누군가가 내 머리에서 지우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손가락이 계속 저려요." 준호가 손가락을 펼쳤다.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내가 한 플레이들이 정말 내가 한 건지 확신이 안 서요."

이혜진이 노트에 뭔가를 기록했다. 준호는 그 펜의 움직임을 쫓았다. 타닥타닥 소리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당신은 여기 있어요." 이혜진이 펜을 내려놨다. "내 앞에. 이건 현실이에요."

"근데 어떻게 확신하죠?"

"당신이 느끼는 감각이 있잖아요. 이 소파의 질감, 공기의 온도, 나의 목소리. 이 모든 게 현실의 증거예요."

준호는 소파를 만졌다. 천으로 덮인 소파의 질감이 손가락에 전해졌다. 따뜻했다. 실재했다.

"당신은 지금 성공했어요." 이혜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팀도 성공했고, 미디어도 당신을 주목하고 있어요. 팬들도 당신을 응원하고 있고요. 그런데도 불안해해요. 왜 그럴까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어요. 그게 가장 큰 문제예요."

---

밤 11시. 훈련이 끝난 후 준호는 체육관의 코트에 혼자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이미 가고, 코치들만 정리를 하고 있었다. 준호는 코트 가장자리에 서서 골대를 바라봤다.

'최고 평가: 리베로 포지션 최고 재능'

한지은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럼 왜 벤치만 했어요?"

그 질문의 답을 준호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답 속에는 10년간의 모욕, 무시, 절망이 모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야, 준호."

박성준이 나타났다. 땀에 젖은 유니폼을 벗고 있었다.

"혼자 뭐 해?"

"그냥... 생각 좀."

박성준이 준호 옆에 섰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코트를 바라봤다.

"너, 뭔가 숨기고 있지?"

준호의 몸이 굳었다.

"뭘."

"아까 기자 여자. 뭐라고 말했어?"

"그냥 인터뷰."

"거짓말하지 마." 박성준이 준호를 바라봤다. "너는 뭔가 크고 무거운 걸 짊어지고 있어. 나는 그걸 느껴. 경기할 때도 그래. 넌 이기는데 기뻐하지 않아. 뭐가 뭐하는 건데?"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한테 상담사가 있잖아. 이혜진. 그 사람한테 얘기해 봤어?"

"할 말이 없어."

"아, 짜증나네." 박성준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 팀 역사상 최고의 리베로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뭐하는 거야. 그냥 도와줘. 우리한테. 그리고 너 자신한테도."

박성준은 라커룸으로 향했다. 준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다음날 훈련. 준호와 박성준은 조별 경기에 들어갔다. 준호 팀이 공격을 시작했다. 박성준의 스파이크가 날아왔다. 상대팀의 리베로가 받아냈다. 토스가 올라왔다. 다시 공격이 시작되려는 순간.

"어?"

최준영이 코트에 들어왔다. 조별 경기라는 이유로 교체가 된 것이었다. 그는 준호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어라, 이글스의 신성이 여기 있네. 뭐하는 거야, 계속 이기고만 다니니?"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좀 해. 갑자기 나타나서 팀의 영웅 행세하는데 뭐하는 거야? 10년을 벤치에 앉혀 있던 놈이?"

박성준이 개입하려고 했다.

"최준영, 그만..."

"아니, 말해 봐." 최준영이 준호에게 직진했다. "타이탄스의 제의 거절하고, 이글스를 선택한 이유가 뭐야? 뭔가 계산이 있는 거지? 아니면 진짜 정신 이상?"

준호는 최준영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진짜 의문과 함께 분명한 불안감이 담겨 있었다. 최준영은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난 네가 아니야." 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나는 나일 뿐이야."

최준영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그 순간, 준호는 자신이 처음으로 상대에게 압박을 주었음을 느꼈다. 근육 기억이 아니라, 진짜 자신의 의지로.

박성준이 손가락을 튕겼다. 훈련이 재개됐다.

---

밤 11시 30분. 준호의 자취방 침대 위에 그의 몸이 누워 있었다. 손가락이 저렸다. 팔뚝이 저렸다. 다리도. 신체 전체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주무르어지는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또 그 음성 변조 전화였다.

[당신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계속 나아가세요.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당신이 벤치에 앉혀 있던 이유를 기억하나요?]

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순간, 스마트폰에 뉴스 알림이 떴다.

'스포츠 기자 한지은, 입단 10년 전 서울 이글스 스카우트 기록 추가 발굴 — "리베로 임준호, 왜 벤치 생활만 했나?"'

준호는 기사를 열었다. 한지은의 기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고 평가 기록을 받았던 임준호가 10년간 벤치에만 앉아 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서울 이글스 측은 "선수 개인의 사유"라고만 답변했다. 하지만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임준호가 벤치 생활을 한 것은 구단의 의도적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계속 저렸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집어뜯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또 다른 알림이 떴다.

'서울 이글스 임도준 구단주, 긴급 성명 발표 — "임준호 선수의 벤치 생활은 구단의 경영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준호는 성명을 읽었다.

'당시 구단은 신인 발굴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임준호 선수는 본인의 요청으로 벤치 생활을 진행했습니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한 글자도 맞지 않는 거짓말이었다.

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엔 감독 이명호였다.

"준호, 지금 어디야?"

"자취방이요."

"내일 아침 체육관 와. 긴급 회의 있어."

전화가 끊겼다.

준호는 천장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여전히 저렸다.

그리고 그 저림 속에는, 자신이 절대 모르고 싶었던 진실의 손길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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