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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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의 불이 켜졌다.

23년 전과 똑같은 조명이었다. 임준호는 라커룸 의자에 앉아 신발 끈을 조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신경 때문이 아니라 근육 기억 때문이었다. 33세의 손가락이 23세의 몸 안에서 경기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준호, 준비됐어?"

박성준이 라커룸 문을 열었다. 에이스의 얼굴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해야 한다. 이 경기가 모든 걸 바꾼다."

박성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지난 10년간 혼자 팀을 짊어져온 선수의 목소리였다. 준호는 그 무게를 안다. 자신도 한때 그렇게 혼자였으니까.

라커룸을 나가며 감독 이명호와 마주쳤다. 감독의 얼굴은 차분했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와."

"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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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조명 아래로 나서는 순간, 준호의 신체가 반응했다. 10년 전 이 무대에 섰던 33세의 감각이 전부 살아났다. 상대팀의 워밍업을 보며 그들의 공격 패턴을 읽었다. 좌측 스파이커가 강하고, 중원 블로킹이 약하고, 백 코트의 리시버가 신경질적이다. 모두 신체가 먼저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서울 이글스는 0점에서 출발했다. 상대팀 강남 코리아의 첫 공격은 강력했다. 좌측 스파이커의 타이밍 좋은 스파이크가 네트를 넘어왔다.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궤적을 계산했기 때문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낮은 자세로 내려가 오른쪽 팔을 펼쳤다. 스파이크가 손등에 닿자마자 토스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공이 박성준 앞의 정확한 높이로 올라갔다. 그 순간 박성준의 표정이 바뀌었다. 완벽한 토스를 받은 에이스의 표정은 항상 같았다—확신.

박성준의 스파이크가 상대 블로킹을 뚫고 라인 안으로 떨어졌다.

"서울 이글스, 1점!"

경기장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팬들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컸다.

준호는 세레브레이션을 하지 않았다. 이미 다음 공을 생각하고 있었다.

세 번째 공은 중원 스파이커의 빠른 공격이었다. 준호는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블로킹 라인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공이 떨어지는 각도를 읽고, 반 박자 빠르게 몸을 날렸다. 다이빙 리시브. 손가락 끝이 공을 스쳤다. 공은 높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토스가 아니었다. 커버 플레이였다. 준호는 일어나며 동시에 박성준이 어디에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에이스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공을 띄웠다. 다시 한 번 박성준의 스파이크가 상대 진영을 관통했다.

"2점!"

준호는 여전히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떨렸다. 신경 때문이 아니었다. 근육 기억이 각성하고 있었다. 33세의 손가락이 23세의 몸 안에서 경기장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경기는 계속됐다.

강남 코리아는 준호의 플레이에 점점 신경질적이 되었다. 백 코트 리시버가 준호에게 직접 공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격이 아닌 견제였다. 준호는 모두 받아냈다. 낮은 공, 빠른 공, 높은 공. 모든 것이 손에서 느껴졌다. 신체가 이미 10년을 경험했으니까.

경기 2세트, 준호는 15개의 리시브를 성공시켰다. 모두가 정확한 토스로 박성준에게 연결되었고, 박성준은 놓친 공이 없었다. 에이스와 리베로의 호흡이 완벽했다. 마치 연습장에서 수천 번 반복한 것처럼.

2세트가 끝날 때쯤, 준호는 경기장의 한쪽 끝을 봤다.

최준영이 앉아 있었다. 서울 타이탄스의 리베로는 팔짱을 낀 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준호의 플레이를 보는 최준영의 눈빛이 변했다. 아주 미묘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그 순간 최준영이 일어났다.

경기장 복도로 나가는 문 쪽을 향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준호를 바라봤다. 눈을 마주쳤다.

그것은 인정이 아니었다. 경고였다.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무게를 느꼈다. 최준영의 눈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나도 본다. 넌 뭔가 다르다.*

하지만 경기는 멈추지 않았다. 준호는 즉시 집중을 돌렸다. 3세트가 시작됐고, 강남 코리아는 준호를 노리기 시작했다. 직접 견제가 아닌 전술적 공격이었다. 좌측 스파이커가 준호의 정면에 강한 스파이크를 날렸다. 준호는 낮게 내려갔다. 손가락이 공에 닿았지만, 토스가 흐트러졌다.

박성준이 불완전한 토스를 받으며 약간의 움직임이 필요했다. 그 찰나가 상대팀의 블로킹을 강화했다. 스파이크가 블로킹에 걸렸다.

강남 코리아가 점수를 얻었다.

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첫 실수였다. 하지만 더 심각한 건 다른 곳에서 왔다. 최준영이 웃고 있었다. 경기장 복도에서, 준호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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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마지막 20초. 스코어는 2세트 24:23. 서울 이글스가 앞서고 있었다. 하나의 점수만 더 있으면 세트를 가져갈 수 있었다.

강남 코리아의 마지막 공격이 들어왔다. 좌측 스파이커의 절망적인 스파이크. 준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공이 네트를 넘기 전에 위치를 잡았다. 낮은 자세. 팔을 펼쳤다.

공이 손에 닿았다.

그 순간, 준호의 손가락이 저렸다. 순간적이고 뜨거운 감각. 하지만 신체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10년 전 경험한 수백 번의 리시브가 손 안에 있었다. 공이 박성준 앞에서 떠올랐다. 완벽한 높이. 완벽한 거리. 완벽한 타이밍.

박성준의 스파이크가 상대 진영을 가르고 라인 안으로 떨어졌다.

"서울 이글스, 세트 승리!"

경기장이 폭발했다. 라커룸에서 나온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뛰어나왔다. 박성준이 가장 먼저 준호에게 달려왔다. 에이스의 팔이 준호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가 이길 수 있겠다! 정말 이길 수 있어!"

준호는 박성준의 등을 두드렸다. 말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손가락의 저림이 사라졌다.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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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커룸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선수들이 외쳤다. 승리의 함성이었다. 10년 만에 처음 경험하는 기쁨이었다. 아니, 준호에게는 더했다. 33세에 느껴본 패배의 맛을 알기에, 이 승리는 다른 것이었다.

이명호 감독이 준호에게 다가왔다. 감독의 얼굴은 엄했지만, 눈은 부드러웠다.

"넌 정말 우리 팀을 구했다."

준호는 고개를 숙였다.

"아직 시작일 뿐입니다."

겸손한 말이었지만, 내면은 단단했다. *증명됐다.* 근육 기억이 완벽하게 작동했고, 박성준과의 호흡도 정확했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경기 내내 느낀 신체의 반응, 공을 예측하고 움직이는 감각, 박성준과 맞춰떨어지는 호흡—모두 10년 전 프로 리베로로서 경험한 것들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10년 동안 근육이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 모두 되살아났다. 이것이 증명이었다.

라커룸 밖에서 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열정은 분명했다. 서울 이글스가 이겼다. 10년 만의 승리였다. 그리고 그 승리의 중심에는 준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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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은 기자는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라커룸 입구에서 준호를 기다렸다. 스포츠 기자의 카메라가 준호를 찍었다.

"임준호 선수, 잠깐만요."

준호가 돌아섰다. 기자의 눈은 예리했다.

"당신의 리시브 실력은 벤치 선수 수준이 아닙니다. 10년 전 당신은 서울 이글스에 입단했을 때 최고의 평가를 받았는데, 왜 계속 벤치에만 있었어요?"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의심이 섞여 있었다. 준호는 기자의 눈을 마주쳤다.

"감독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럼 지금 왜 갑자기 이렇게 잘해요? 10년 동안 뭐 했어요?"

기자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보여줬다. 10년 전 준호의 경기 영상이었다. 그 영상 속 준호의 움직임과 오늘의 움직임을 비교하고 있었다.

"움직임이 다릅니다. 반응 속도가, 신체 제어가 다릅니다. 당신은 지난 10년 동안 뭔가를 경험했어요."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벤치 생활 중에도 개인 훈련을 계속했습니다."

목소리는 평탄했다. 그럴듯한 거짓이었다.

"그런 정도로는 이 변화를 설명할 수 없어요. 당신은 정말 다릅니다."

한지은은 카메라를 들고 준호의 손을 촬영했다. 떨리는 손가락을.

"당신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분명해요. 저는 계속 파고들 겁니다. 당신의 진짜 정체를 찾을 때까지요."

감독이 옆에서 기자를 밀어냈다.

"인터뷰는 나중에 해. 지금은 팀이 쉬는 시간이야."

기자는 물러났지만, 눈은 여전히 준호를 따라다녔다.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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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클리닉의 상담실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소파, 관엽식물, 따뜻한 조명. 이혜진은 30대 중반의 여성으로, 눈빛이 예리했다. 그녀는 준호를 보자마자 웃었다.

"경기를 잘 봤어요. 정말 놀라웠어요."

"감사합니다."

준호는 소파에 앉았다. 거리를 유지했다.

이혜진은 노트를 펼쳤다. 펜을 집어 들었지만 바로 내려놨다.

"첫 경기 후 기분이 어떻게 되세요?"

"좋습니다. 팀이 이겼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요? 당신의 플레이는 어땠어요?"

준호는 조용했다. 이 질문의 함정을 느꼈다.

"준호 선수는 지금 성공했어요. 그런데도 자신이 없어 보여요. 왜 그럴까요?"

준호의 턱이 경직됐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혜진은 기다렸다. 심리 상담사는 침묵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당신은 왜 우리 팀을 선택했어요?"

이것도 함정이었다. 준호는 이명호 감독이 했던 같은 질문을 기억했다. 그때도 대답하지 않았다.

"더 나은 팀이 있었을 텐데요."

이혜진의 목소리는 판단적이지 않았다.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선택의 문제입니다."

"선택이라기보다, 복수처럼 보여요."

준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이혜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복수는 자신을 파괴합니다. 당신은 이미 파괴되고 있는 것 같아요. 성공하면서도."

상담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녀는 경기 영상의 한 장면을 보여줬다. 준호가 마지막 리시브를 하는 순간, 손가락이 저리는 표정이 포착된 장면이었다.

"경기 중에 손가락이 저렸나요?"

"신체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왜 손가락이 저리나요? 신체가 보내는 신호는 분명합니다. 불안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성공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요. 당신은 자신이 이 성공을 진정으로 이룬 건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어요."

준호는 돌아섰다. 이혜진의 얼굴을 직시했다. 상담사의 말이 정확했다. 근육 기억이 작동했고, 박성준과의 호흡이 맞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성장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정말로 자신을 변화시킨 건지, 아니면 단순히 과거의 신체가 되살아난 것일 뿐인지.

"당신도 모르는 것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괴롭히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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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으로 돌아온 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저림이 돌아오고 있었다. 경미했지만 분명했다. 상담사의 말이 맞았다. 성공했지만, 그 성공이 진정한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신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었다. 근육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그 불안감은 더 커질 것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최준영이었다.

준호는 한 번 망설였다가 받았다.

"준호야."

최준영의 목소리는 낮았다.

"네."

"오늘 경기 잘 봤어. 정말 잘했더라."

"감사합니다."

"근데 말이야. 너 뭔가 이상해.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러워. 벤치에만 있던 놈이 저렇게 될 수는 없어."

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호흡이 가빠졌다.

"뭐라는 거예요?"

"난 10년을 봤어. 너를. 너는 절대 이렇게 못했어. 그런데 오늘은 달랐어. 마치..."

최준영이 말을 멈췄다.

"마치 뭐예요?"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너를 통해서 하는 것 같았어.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어."

준호의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건 그냥..."

"난 모르겠어. 하지만 너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 너 정말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다음 경기에서도 그 정도 실력을 유지할 수 있어?"

침묵이 흘렀다.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근육 기억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이 그 기억을 천천히 삭제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경기는?

"준호?"

"네. 할 수 있습니다."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럼 됐어. 화이팅."

통화가 끊겼다.

준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저림이 깊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이 자신의 손을 통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하지만 그건 환상이었다. 신체의 불안감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었다.

준호는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다시 선명해졌다. 하지만 온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리고 그 차가움 속에서 떨렸다.

준호는 천장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자신이 이긴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을 통해 이긴 것 아닐까?*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근육 기억이라고 불렀던 것이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 10년 전 경험한 것이 정말로 자신의 신체에 남아 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자신을 빌려 쓰고 있는 것인지.

준호의 눈이 떠졌다. 천장의 어둠 속에서.

손이 떨렸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일은 회복 훈련이 있을 것이다. 그 다음날은 영상 분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음 경기가 있을 것이다. 근육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준호는 손을 다시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떨림이었다. 불안감이 아니라 기대감이었다.

다음 경기에서 증명하겠다. 이것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근육 기억이 단순한 신체의 반응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성장이라는 것을.

준호는 손을 내려놨다. 천장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손가락의 저림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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