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이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볼펜이 데구루루 굴러 침대 다리에 부딪혀 멈췄다. 도현은 허리를 숙였다. 검지와 엄지가 펜을 향해 오므라들었다.
닿지 않았다.
손가락이 펜대를 스치기만 하고 미끄러졌다. 다시. 또 미끄러졌다. 세 번째에는 손 전체가 잘게 떨렸다. 잔물결처럼, 정지 신호를 받지 못한 근육들이 제멋대로 진동했다.
"—젠장."
숨을 멈추고 손목을 반대편 손으로 눌렀다. 진동이 손등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왔다. 갈색 반점으로 뒤덮인 오른손이 형광등 아래에서 낯선 노인의 것처럼 보였다.
이 떨림을 안다.
4년 전, 산모의 배를 열던 밤. 양수색전증. 혈압이 무너지고 산소포화도가 곤두박질치던 그 순간, 스물여섯의 도현은 메스를 쥔 오른손이 떨리는 걸 처음 느꼈다. 그때는 공포였다. 지금은—
지금은 몸이 그냥 무너지는 소리였다.
"서 선생님."
고개를 들자 한수진이 처치실 문가에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그의 떨리는 손을 정확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펜, 제가 줍겠습니다."
"됐어요."
"세 번째부터 셌습니다. 못 주우신 게."
도현은 손을 가운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3주 전에 제가 물었죠. 손이 떨리는 것 같은데 괜찮으시냐고. 그땐 대충 넘기시더니."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이젠 펜도 못 쥐시네요."
"수술 스케줄 확인하러 가야 합니다."
"어느 수술이요."
"14번 침대. 소아 비장 파열. 재관류 후 출혈 컨트롤—"
"제가 어시스트입니다." 수진이 문틀에 어깨를 기댔다. "그 손으로 봉합하실 거예요?"
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복도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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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방의 무영등이 열세 살 소년의 복부를 백색으로 채웠다.
"비장 상부극 열상, 3도. 지혈 클립 준비." 도현의 목소리는 마스크 안에서 안정적으로 울렸다. 여기서만큼은, 수술대 위에서만큼은 흔들릴 수 없었다.
"클립."
수진이 지혈 클립을 그의 손에 얹었다. 도현이 클립을 혈관 끝으로 가져갔다. 목표는 지름 2밀리미터의 비장동맥 분지. 손끝이 그 위에 정확히 얹혀야 했다.
클립의 끝이 흔들렸다.
미세한, 초당 예닐곱 번의 진동.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떨림이 클립 끝에서 증폭됐다. 혈관을 물어야 할 클립이 그 옆의 실질조직을 물었다.
"—어긋났습니다." 수진이 즉시 뱉었다.
"압니다."
도현은 클립을 뗐다. 실질조직에 미세한 열상이 하나 더 생겼다. 출혈량이 늘었다. 석션이 붉은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커졌다.
"다시. 클립."
두 번째 클립. 이번엔 손목을 반대편 손등으로 받쳤다. 그래도 진동은 손가락 마디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클립이 혈관을 물었다가—놓쳤다.
"BP 88에 52로 떨어집니다." 마취과가 알렸다. "출혈 지속."
"서 선생님." 수진의 목소리가 마스크 위로 날카로워졌다. "손. 지금 손 보고 계세요?"
도현은 자신의 오른손을 봤다. 4년 전 신의 손이라 착각했던, 첫 되감기 뒤 거울 앞에서 이건 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손이었다. 지금은 물어야 할 것을 물지 못하는 고장 난 도구였다.
사망 확정이 나야 되감기가 발동한다. 이 아이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니 능력은 오지 않는다. 순수하게 손만 남았고, 그 손은—
"제가 하겠습니다."
수진이 아니라, 문을 밀고 들어온 오준혁이었다. 이미 스크럽을 마친 채였다.
"도현, 비켜."
"내 환자야."
"네 손 봤어. 방금 밖에서 다 봤다고." 준혁이 수술대 반대편으로 붙었다. "지혈 내가 잡을 테니까 넌 어시스트로 내려와. 판단은 네가 해."
도현의 어깨가 굳었다. 손끝의 진동이 팔꿈치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내려서면, 인정하는 거다. 손을 잃었다는 걸.
"클립." 준혁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클립이 비장동맥 분지를 정확히 물었다. 딸깍. 출혈이 멎었다.
"석션." "지혈 확인. BP 회복 중." "92에 60."
도현은 수술대 발치로 물러났다. 준혁의 손이 소년의 복강 안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3년 전이라면 도현이 눈 감고도 했을 술기였다.
무영등 아래에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왼손은 멀쩡했다. 오른손만 떨렸다. 되감기를 발동시키는 건 언제나 오른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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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이 끝나고 도현은 회복실 밖 복도에 주저앉았다. 벽에 등을 붙이고 다리를 뻗었다. 오른손이 무릎 위에서 계속 떨렸다.
수진이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다가와, 하나를 그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제 말씀하세요."
"뭘요."
"석 달 동안 뭐가 일어난 건지." 그녀가 그의 눈을 정면으로 봤다. "저 이 바닥 열두 해입니다. 사람이 이 속도로 늙는 걸 본 적 없어요. 채혈할 때 혈관이 노인 거였고, 골밀도 수치는 검사실에서 재검 세 번 나왔고, CCTV엔 3주 만에 흰머리가 덮인 남자가 찍혀 있어요. 그런데 소생률은 82퍼센트예요."
"…감사에서 다 반박했습니다."
"저한테 반박하지 마세요. 저는 감사관 아닙니다." 수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저는 당신 손이 굳는 걸 매일 봐요."
도현의 호흡이 얕아졌다. 수진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그의 눈동자가 떨렸고, 오른손의 진동이 무릎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니까 그냥, 사람으로서 물어보는 겁니다. 뭘 하고 있어요, 당신."
도현은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수진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돌렸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복도 끝의 심전도 모니터 소리가 규칙적으로 삐, 삐, 울렸다. 그 소리를 세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환자가 죽으면… 8분 전으로 돌아갑니다."
수진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만. 저한테만 시간이 되감겨요. 그 8분 동안은 손이 안 떨려요. 판단도 명료하고, 손끝이 0.1밀리미터를 물어요. 그래서 살립니다. 오토바이 사고 환자도, 뇌 관통상도, 심장압전도. 전부 그렇게 살렸어요."
"…그 대가가."
"제 수명." 도현이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반점을 세듯 내려다봤다. "8분 되감으면 여덟 시간이 아니라, 수개월씩 몸에서 뜯겨나가요. 검사의가 그랬어요. 이런 수치는 본 적 없다고. 텔로미어가 예순 살짜리라고."
수진의 손에서 종이컵이 기울었다. 커피가 손등을 타고 흘렀지만 그녀는 닦지 않았다.
"그럼 지금 이 떨림도."
"쓸수록 손이 죽어요. 손이 죽을수록 되감기 없이는 못 살려요. 그래서 또 씁니다." 도현이 헛웃음을 뱉었다. "돌겠죠. 살리려고 쓰는 능력이 살릴 손을 태워먹어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준혁이 스크럽을 벗은 채 서 있었다. 언제부터 들었는지,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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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줄 알았지."
준혁이 도현 앞에 마주 섰다. 목소리가 낮았다.
"2년 전에 내가 말했잖아. 넌 모든 환자의 죽음을 네 책임으로 받아들인다고. 그건 의사가 아니라 신의 일이라고." 준혁이 한 발 다가섰다. "그런데 진짜 신 흉내를 낼 능력이 생겨버린 거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준혁아—"
"근데 아니야." 준혁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넌 신이 아니야. 넌 죽어가는 사람이야, 도현아. 지금 네 손을 봐. 이게 신의 손이야? 이게?"
도현의 오른손이 준혁의 손아귀 안에서 떨렸다.
"네가 살린 열두 명, 그거 기적 맞아. 근데 그 대가로 넌 죽어. 넌 열두 명을 살리려고 열두 명분의 미래를 태웠어. 그건 살린 게 아니라 자리를 바꾼 거야. 걔네 죽음을 네 죽음으로."
도현의 호흡이 가빠졌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준혁의 말이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신이 아니라는 것.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것. 그 말이 자신의 모든 선택을 부정했다.
"…그럼 어떡하라고." 도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앞에서 죽는데. 되감기가 오는데. 손만 뻗으면 되는데. 그걸 어떻게 안 해."
"안 하는 걸 배워야지." 준혁이 그의 어깨를 놓았다. "그게 의사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고, 못 살릴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거. 넌 그 두 번째를 한 번도 안 해봤어. 그래서 지금 손이 아니라 인생이 무너지는 거고."
도현의 몸이 흔들렸다. 거부하려던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신이 아니라는 것.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것. 그 말들이 자신의 신념을 갈라놓고 있었다.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밀려오는 느낌. 못 살릴 사람이 있다는 것.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게 의사라는 것.
복도 스피커가 삐빅 울렸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외상외과 병동 8번 병실. 코드 블루.』
세 사람이 동시에 몸을 세웠다.
수진이 태블릿을 들여다봤다. 얼굴이 하얘졌다.
"8번 병실… 오늘 새벽 사고 부상자 중 마지막 한 명. 흉부 다발성 손상, 수술 대기 중이던—" 그녀가 도현을 봤다. "기도 막혔어요. 상기도 부종에 혈종. 산소포화도 60퍼센트대로 떨어집니다."
도현이 벌떡 일어났다. 뛰기 시작했다.
병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소년보다 조금 큰 청년이 침대에서 몸을 뒤틀고 있었다. 입술이 파랬다. 목이 부어 기도가 눌린 상태였다. 마스크 산소로는 소용없었다.
"삽관 준비." 도현이 소리쳤다. "후두경."
수진이 후두경을 그의 손에 얹었다. 도현이 청년의 입을 벌리고 후두경 날을 밀어넣었다. 성대가 보여야 했다. 그 사이로 튜브를 넣어야 했다.
그의 오른손이 후두경 손잡이 위에서 떨렸다.
날 끝이 흔들려 성문을 놓쳤다. 다시. 진동. 화면 속 산소포화도가 58로 떨어졌다.
"안 됩니다." 수진이 다급했다. "포화도 계속 떨어져요."
도현은 후두경을 뺐다. 삽관은 이 손으론 안 된다. 그렇다면.
"윤상갑상막 절개. 외과적 기도확보."
"서 선생님, 그 손으로—"
"메스."
수진이 11번 메스를 그의 손에 얹었다. 도현이 청년의 목을 만졌다. 갑상연골, 그 아래 윤상연골. 그 사이의 막. 손가락 폭 한 마디.
오른손이 떨렸다.
절개는 1센티미터를 넘으면 안 된다. 아래엔 갑상선 정맥이, 옆엔 경동맥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이걸 그으면 청년이 아니라 자신이 죽인다.
되감기를 기다릴까. 죽으면 온다. 그러면 손이 멈춘다. 그러면 살린다.
그러면 또 몇 달이 몸에서 뜯긴다.
『넌 신이 아니야. 넌 죽어가는 사람이야.』
준혁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신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이 손도, 이 떨림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죽음도, 한계도, 자신의 무능함도.
도현은 이를 악물었다.
떨리는 오른손 손목을, 멀쩡한 왼손이 아래에서 꽉 붙잡았다. 왼손의 엄지가 오른손 손등을 눌러 진동을 죽였다. 두 손이 하나가 됐다. 근육이 저항했지만 왼손이 관절을 고정했다.
"—붙잡고 간다."
메스 끝이 윤상갑상막에 닿았다. 왼손이 오른손의 떨림을 흡수했다. 날이 막을 그었다. 정확히 1센티미터. 세로로 벌린 뒤 가로로 한 번.
"확장기."
수진이 지혈겸자를 벌려 절개 부위를 확장했다. 도현이 튜브를 밀어넣었다. 기도로.
"공기 들어갑니다." 수진이 앰부백을 짜기 시작했다. "포화도 62… 68… 75…"
청년의 파랬던 입술에 붉은 기가 돌았다. 가슴이 오르내렸다.
"…88. 92." 수진이 숨을 뱉었다. "안정됐어요. 되감기 없이."
도현의 두 손이 여전히 청년의 목에 얹혀 있었다. 왼손이 오른손을 붙든 채였다. 진동이 손바닥 안에서 계속 파도쳤지만, 이번엔 그 파도가 아무것도 어긋내지 못했다.
손가락 끝의 떨림은 여전했다. 하지만 도현은 알았다. 신의 손이 아니어도 사람은 살 수 있다는 것을. 되감기 없이도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을. 신이기를 포기하고 인간이 되는 순간, 손을 잃고 손을 얻는 순간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눈가가 뜨거워졌다. 눈물이 아니었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무언가였다.
준혁이 문가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현이 두 손을 뗐다. 오른손만 떼어놓자 다시 잘게 떨렸다. 그래도 방금, 그는 이 손으로 사람을 살렸다. 시간을 태우지 않고, 죽음을 빌리지 않고, 오직 인간으로서의 손으로.
숨을 고르는데, 옆의 모니터가 갑자기 알람을 뱉었다.
삐——
파형이 튀었다. 청년이 아니라, 옆 침대. 커튼 너머로 옮겨진 다른 부상자였다.
"어… 잠깐." 수진이 커튼을 젖혔다. 그녀의 손이 멈췄다. "이 환자…"
도현이 커튼 너머를 봤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침대 7번. 새벽에 심장압전으로 죽었던, 그가 되감기로 되살린 그 환자였다.
한 번 되감은 환자. 두 번째 사망은 영원한 봉인.
그의 심전도가, 지금, 곤두박질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