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
복도의 형광등이 내려앉은 얼굴을 그대로 비췄다. 도현은 벽에서 몸을 떼려다 손등을 봤다. 갈색 반점이 손등을 덮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다가 잊었고, 이제는 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서 선생."
박민준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손에 든 태블릿을 도현의 얼굴 앞으로 들어 올렸다.
"의료 활동 중단, 아직 유효합니다. 그리고 오후 세 시, 감사실. 이건 통보입니다. 협조 요청이 아니라."
"환자가 밀려 있습니다."
"환자는 다른 사람이 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서 선생이 손댄 모든 차트가 감사 대상이에요."
민준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그게 더 서늘했다.
"82.6퍼센트." 민준이 숫자를 읽었다. "권역외상센터 다발성 외상 소생률. 전국 평균이 얼마인지 아시죠. 서 선생 개인 통계는 그 세 배입니다.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숫자예요. 저는 불가능한 걸 믿지 않습니다. 설명을 믿죠."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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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실은 창이 없었다. 긴 테이블 한쪽에 박민준, 그 옆에 김태오, 맞은편 문 가까이에 이준호가 앉았다. 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그의 손으로 향했다.
김태오가 먼저 헛기침을 했다.
"서 선생, 앉지."
도현은 앉았다. 의자에 손을 얹으려다 무릎 위로 옮겼다. 손등을 감추듯이.
"바로 본론으로 갑시다." 민준이 서류 뭉치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지난 나흘간 서 선생이 담당한 중증 외상 환자는 열아홉 명. 그중 임상적 사망 직전 상태에서 소생한 케이스가 아홉. 세부적으로 보죠. 침대 3번 버스 운전사, 급성 심낭압전. 도착 시 무맥성 전기 활동. 서 선생 처치 후 자발순환 회복. 침대 9번, 열 살 소아, 긴장성 기흉과 다발성 골절. 침대 4번, 뇌 관통상 여성."
민준이 페이지를 넘겼다.
"이런 조합은 문헌에 없습니다. 하나만 살려도 논문감인데, 나흘에 아홉. 저는 두 가지 가능성만 봅니다. 하나, 기록 위조. 둘, 승인되지 않은 약물 투여. 에피네프린 과량, 실험적 응고인자, 뭐가 됐든."
"세 번째 가능성은 없습니까." 도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뭡니까."
"제가 잘했을 가능성."
김태오가 코웃음을 쳤다. "서 선생, 오만도 정도껏. 자네 나이에 그런 소생률은—"
"김 선생님." 도현이 말을 잘랐다. "침대 3번 운전사, 심낭압전이었습니다. 도착 당시 심초음파에서 심낭에 고인 혈액이 심장을 눌러 이완기 충만을 막고 있었죠. 이건 약이 아니라 바늘로 풀립니다. 검상돌기 아래로 심낭천자, 이십 밀리리터 흡인.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이유는 압력이 풀렸기 때문입니다. 에피네프린으로는 압전을 절대 못 풉니다. 오히려 산소 요구량만 늘려 상황을 악화시키죠. 약물 투여 가설, 첫 케이스에서 이미 무너집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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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준의 손가락이 다음 서류로 옮겨갔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넘기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침대 9번. 열 살. 긴장성 기흉. 서 선생은 흉관 삽입 전에 이미 자발순환이 돌아왔다고 기록했습니다. 순서가 이상하죠. 긴장성 기흉은 감압을 해야 순환이 돌아옵니다. 감압 전에 회복이라니, 기록이 앞뒤가 안 맞아요."
도현은 이 질문을 기다렸다.
"바늘 감압이 먼저였습니다. 2번 늑간, 쇄골 중앙선. 흉관은 그 다음 단계고요. 차트에 흉관 삽입 시각만 적힌 건 EMR 입력 순서상 시술 코드가 흉관으로 통합되기 때문입니다. 바늘 감압은 별도 코드가 없어요. 병원 전산 구조를 모르시면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 순서를 보시려면 간호기록 타임스탬프를 대조하세요. 한수진 선생님이 기록한 활력징후 변화, 감압 직후 산소포화도가 71에서 94로 올랐습니다. 위조로는 못 만드는 그래프입니다. 실시간 모니터 로그니까요."
김태오가 이준호를 힐끔 봤다. 이준호는 팔짱을 낀 채 도현만 보고 있었다.
"침대 4번." 민준이 던졌다. "뇌 관통상. 이건 어떻게 설명하죠. 관통상 환자가 살아난 거."
여기서 도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침대 4번은 되감기였다. 흑색 태그였고, 사망이 확정됐고, 8분이 되돌아왔고, 그 8분 동안 그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 8분의 대가로 지금 이 손등이 이렇게 됐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설명하지 않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은 달랐다.
"관통상은 궤적이 전부입니다." 도현은 천천히 말했다. "탄도가 뇌간과 주요 혈관을 비껴갔습니다. 우측 전두엽 관통, 시상은 피했고 중대뇌동맥 손상 없었습니다. CT 재판독하시면 확인됩니다. 저는 즉시 감압 개두술로 두개내압을 내렸고, 출혈원을 클립했습니다. 관통상이라고 다 죽는 게 아닙니다. 궤적이 착하면 삽니다. 운이었냐고요? 진단이었습니다. CT 보고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으니 수술대에 올린 거고요."
"운이 아홉 번 연속으로 착할 확률은—"
"확률은 표본이 클 때 이야기입니다." 도현이 말을 끊었다. "나흘, 열아홉 명.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표본이 아닙니다. 감사관님이 통계로 절 몰아붙이시는데, 정작 표본 수가 통계를 논할 크기가 안 됩니다. 82.6퍼센트라는 숫자, 분모가 열아홉입니다. 한두 명 사망했으면 60퍼센트대로 떨어졌겠죠. 이건 이상 현상이 아니라 작은 표본의 요동입니다."
민준의 펜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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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서 선생, 그렇게 말재주로 넘길 문제가 아니야. 이건 센터 전체 평판이 걸린—"
"평판이요." 도현이 그를 봤다. "환자 아홉 명이 살아 있습니다. 김 선생님. 그중에 세 살 아이도 있고 열 살 아이도 있어요. 지금 이 방에서 논의되는 건 그 아이들이 살아 있는 게 부정행위냐 아니냐입니다. 저는 부정행위를 안 했습니다. 위조도 안 했고 승인 안 된 약도 안 썼습니다. 원하시면 제 처방 로그 전부 대조하세요. 혈액검사, 약물 재고, 폐기 기록, 다 뒤지세요. 나올 게 없습니다."
"그럼 이 노화는 뭐지."
이준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도현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이준호가 팔짱을 풀고 서류철 하나를 테이블 위로 밀었다. 낡은 클리어파일이었다. 도현은 표지에 적힌 날짜를 봤다. 사흘 전이 아니었다. 처음 되감기를 쓴 날, 그가 소생률이 튀기 시작한 그 날짜였다.
"3주 전부터 서 선생 소생률을 따로 출력해 뒀네." 이준호가 담담히 말했다. "감사반이 오기 전부터. 통계가 이상하게 움직여서. 처음엔 자네가 물이 오른 줄 알았어. 자랑스러웠지."
서류철 안에는 도현의 얼굴 사진이 있었다. 병원 출입기록용 CCTV 캡처. 3주 전 것과 어제 것.
3주 전의 얼굴과 어제의 얼굴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의학적으로 3주 만에 사람이 이렇게 늙지 않아." 이준호가 말했다. "박 감사관은 이걸 약물 부작용으로 보고 싶어 해. 서 선생이 뭔가를 자기 몸에 쓰고 있다고. 나는… 모르겠어. 자네가 뭘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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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렸다.
최은혜가 서류 봉투를 들고 들어섰다. 노크도 없었다.
"침대 3번, 9번, 14번 소아 환자 보호자 진술서 가져왔습니다. 다 서 선생님이 정상적인 응급처치로 살려냈다고—"
말이 끊겼다. 은혜의 시선이 도현의 얼굴에 닿았다. 창 없는 방의 형광등 아래, 그녀는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오래 봤다.
봉투를 쥔 손이 내려갔다.
"선생님…"
도현이 무릎 위 손을 더 깊이 감췄지만 늦었다. 은혜의 눈이 그 손등을 봤다. 반점으로 뒤덮인, 관절이 굽은, 일흔 노인의 손을. 그리고 3주 전 그녀가 존경하며 바라봤던, 흔들림 없이 봉합사를 다루던 그 손을 떠올리는 게 도현에게도 보였다.
은혜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손가락이 봉투의 모서리를 누르고 있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진술서, 여기 두겠습니다." 은혜가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목소리가 떨렸다. "서 선생님이… 정당하게 살렸다는 거, 환자들이 다 압니다."
그녀는 도현을 한 번 더 봤다. 도와주러 왔는데, 오히려 그의 비밀에 가장 가까이 닿아버린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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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준이 서류를 정리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서 선생 의학적 설명은 기록했습니다. 각 케이스, 재판독 걸겠습니다. CT, 심초음파, 모니터 로그, 약물 재고. 하나라도 안 맞으면 다시 부릅니다. 안 맞는 게 없으면…"
민준이 잠시 멈췄다.
"없으면, 서 선생 말이 맞겠죠. 저는 증거만 봅니다."
김태오가 뭔가 말하려다 삼켰다. 이준호는 서류철을 다시 챙기며 도현을 봤다.
"약물이든 뭐든, 자네 몸을 갉는 걸 쓰고 있으면 멈춰.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도현은 일어섰다. 세 사람의 시선을 등지고 문으로 걸어갔다.
의학 논리로 그들을 막았다. 되감기라는 단어 하나 꺼내지 않고 아홉 명의 소생을 전부 정당화했다. 재판독을 해도 나올 건 없었다. 진짜 진단이었고 진짜 수술이었으니까. 8분의 되감기 동안, 그의 판단은 옳았으니까.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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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로 나온 도현은 벽에 손을 짚었다.
간호 스테이션 데스크 위에 처방전 서식이 놓여 있었다. 습관처럼 손이 갔다. 잔여 환자 확인 사인을 해야 했다. 볼펜을 집었다.
손가락이 볼펜 몸통을 감쌌다.
쥐어지지 않았다.
엄지와 검지가 서로를 밀어냈다. 펜촉이 종이에 닿기도 전에 손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미세한 떨림이 아니었다. 손목이, 팔뚝이, 어깨까지 진동이 타고 올라왔다. 종이 위에서 펜이 제멋대로 튀었다.
도현은 반대쪽 손으로 오른손을 붙잡았다. 두 손으로 눌러도 떨림이 멎지 않았다.
볼펜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펜이 데굴데굴 굴러 스테이션 아래로 사라졌다.
도현은 자신의 오른손을 봤다. 되감기 중에만 정밀해지는 손. 되감기가 없으면— 이제 이 손은 펜 한 자루도 쥐지 못했다.
되감기를 쓸수록 손이 떨리고. 손이 떨릴수록 되감기 없이는 살릴 수 없어진다.
그 나선의 첫 바닥에 지금 그가 서 있었다.
"수전증이야." 도현은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소리 내어 말했다. 자기 진단이었다. 외상외과의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진단.
떨리는 손 너머로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 환자가 실려 오고 있었다.
스트레처 바퀴가 리놀륨 바닥을 긁는 소리. 이송대원의 인계 목소리가 자동문을 넘어 복도까지 밀려들었다.
"삼십 대 남성, 추락, 의식 저하, 혈압 팔십에 사십, 맥박 백삼십오, 7분 소요——"
도현의 몸이 저절로 그쪽으로 반 걸음 기울었다. 3년치로 굳은 습관이었다. 콜이 뜨면 다리부터 움직였다. 그런데 오른손이 여전히 왼손 안에서 떨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멈췄다.
"서 선생!"
준혁이 스테이션 저편에서 뛰어왔다. 장갑을 끼며 달려온 그가 도현을 지나쳐 스트레처를 잡으려다, 도현의 얼굴을 보고 속도를 줄였다.
"됐어. 내가 받을게." 준혁이 스트레처 손잡이를 밀며 말했다. "너 감사실에서 방금 나온 거 아냐. 잠깐 앉아 있어."
"3번 트라우마 베이. 대량수혈 프로토콜 걸어." 도현의 입은 지시를 뱉었다. 오른손은 주머니 속에 깊이 밀어 넣었다. "FAST 먼저 보고, 골반 벨트 준비하고—"
"알아. 나도 3년 차야." 준혁이 스트레처를 끌고 가며 어깨 너머로 말했다. "지시는 됐고, 너는 손이나 좀 봐."
도현의 발이 그 뒷모습을 따라가려다 멈췄다.
주머니 속에서 오른손이 떨렸다. 이 손으로는 지금 저 환자의 배를 열 수 없었다. 초음파 프로브를 잡을 수도, 봉합침을 쥘 수도 없었다. 되감기가 발동되려면 환자가 죽어야 했고, 죽지 않은 환자 앞에서 그의 손은 노인의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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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베이의 커튼이 젖혀졌다.
수진이 심전도 리드를 붙이며 준혁의 오더를 받아쳤다. 링거 폴대가 두 개, 세 개로 늘었다. 모니터 숫자가 붉게 물들었다 안정됐다. 준혁의 손이 환자의 복부를 훑었고, 초음파 화면에 검은 액체가 고였다.
"복강 내 출혈. 수술방 콜." 준혁이 프로브를 내려놨다. "혈압 잡히면 바로 올린다."
도현은 커튼 밖에서 그 전부를 봤다. 자기 손 없이도 환자가 살아나고 있었다. 준혁의 진단은 정확했다. 수진의 손은 빨랐다. 은혜가 수혈 팩을 걸었다.
되감기 없이. 노화 없이. 떨림 없이.
그가 3년 동안 매일 봐온 응급실의 모습.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게 낯설게 느껴졌다. 저 자리에 자신이 없어도 사람이 살아났다.
"서 선생님." 수진이 커튼을 젖히고 나왔다. 도현의 앞에 섰다. 그녀는 도현의 얼굴을 3화의 그 밤부터 봐왔다. "이송 세 대 더 온답니다. 3분 안에요."
"트리아지는—"
"제가 봅니다." 수진이 잘랐다. "선생님은 안 붙는 게 낫겠어요."
도현이 그녀를 봤다. 수진의 눈은 그의 얼굴을 지나 주머니에 닿아 있었다. 떨림을 감춘 그 손에.
"의무기록에 노화 소견 입력한 거, 제가 지운 거 아닙니다." 수진의 목소리가 낮았다. 비난이 아니었다. "감사반이 그걸 봤어요. 다음엔 그것도 물어볼 겁니다. 왜 서 선생 몸이 늙느냐고."
도현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되감기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말해도 정신 감정 대상이 될 뿐이었다.
"저는 선생님이 뭘 하고 있는지 몰라요." 수진이 계속했다. "근데 선생님이 살린 아홉 명, 지금 다 살아 있어요. 그건 압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손 넣고 계세요. 나머린 우리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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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문이 다시 열렸다. 이송대 세 대가 동시에 밀려들었다.
준혁이 첫 스트레처로, 수진이 둘째로, 은혜가 셋째로 흩어졌다. 각자의 손이 각자의 환자에 닿았다. 지시가 오가고, 리드가 붙고, 라인이 잡혔다. 도현은 스테이션 벽에 기대 그 모두를 봤다.
세 명 다 적색이 아니었다. 황색 둘, 녹색 하나. 죽을 사람은 없었다. 그의 손이 필요 없는 환자들.
주머니 속 오른손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발동될 이유가 없으니 떨림도 잦아들었다. 되감기의 나선은 죽음을 마주할 때만 시작됐다. 죽음이 없으면 손도 조용했다.
도현은 그 사실을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자신이 손을 놓는 순간, 응급실은 무너지지 않았다.
"선생님." 은혜가 다가왔다. 감사실에서 봉투를 내려놓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도와주러 왔다가 진실에 데인 얼굴. "커피 좀… 드실래요?"
그녀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도현이 왼손으로 받았다. 오른손은 여전히 주머니 안에 있었다.
"고마워요." 도현이 말했다.
은혜가 컵을 놓는 순간, 두 사람의 손이 살짝 스쳤다. 도현의 왼손도 미세하게 떨렸다. 컵 표면에 커피가 한 방울 넘쳐 손등을 타고 흘렀다. 갈색 반점 위로 갈색 물방울이 번졌다. 은혜의 시선이 그 자국에 못 박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현은 알았다. 그녀가 그 자국을 기억할 거라는 걸. 언젠가 감사반이 다시 물으면, 그녀 안의 무언가가 흔들릴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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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실 유리문 안에서 이준호가 서류철을 캐비닛에 넣고 있었다. 도현은 복도 끝에서 그 뒷모습을 봤다.
3화 그 밤, 이준호는 도현 몰래 소생률 통계를 출력해 따로 보관했다. 오늘 그 서류철이 감사 근거로 테이블에 올랐다. 센터장은 도현을 의심했고, 동시에 감쌌다. 약물을 멈추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자기 몸을 갉는 무언가라는 걸 눈치챈 사람의 말투로.
이준호가 캐비닛을 잠갔다. 유리문 너머로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다만 서류철을 넣은 캐비닛을 한 번 톡, 두드렸다. 저 안에 네 기록이 있다.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 뜻으로 읽혔다.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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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이 잦아들었다. 세 명의 환자는 각자의 병동으로, 수술방으로 흩어졌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도현의 손 없이.
그는 처치실 구석의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시야에 얼굴이 걸렸다.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관자놀이 살이 꺼지고, 눈꼬리에 잔주름이 잡힌 얼굴. 3주 전 서른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오른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물을 틀었다. 손을 씻으려고 했다. 비누를 집으려고 손가락을 폈다.
폈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은 반쯤만 펴지고 다시 굽었다. 관절이 명령을 반쯤만 들었다. 도현은 다시 폈다. 다시 굽었다. 손가락 다섯 개가 각자 다른 속도로 떨렸다. 세면대 가장자리에 손을 짚었다. 도자기 위에서 손톱이 달칵달칵 부딪쳤다.
그는 이 증상의 이름을 알았다. 진전. 미세 수전증. 신경계의 정밀 제어가 무너질 때 나타나는 것. 파킨슨, 소뇌 병변, 그리고 원인 불명의 급속 노화.
외과의에게 이것은 사형선고였다.
되감기 중에만 손이 살아났다. 죽음 앞에서만 이 손이 다시 신의 손이 됐다. 그러니 이 손을 되찾으려면— 환자를 죽게 두고, 되감아야 했다. 자기 수명을 태워서.
거울 속 노인이 도현을 봤다.
"물 잠급니다." 뒤에서 수진의 목소리. 도현이 물소리에 취해 세면대를 붙잡고 서 있는 걸 본 것이다.
도현은 수도를 잠갔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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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을 넘긴 응급실. 도현은 스테이션에 다시 앉았다. 잔여 환자 목록을 확인해야 했다. 사인이 필요한 서류가 클립보드에 끼워져 있었다.
그는 볼펜을 집었다. 아까 떨어뜨린 것과 같은, 새 볼펜을. 이번엔 왼손으로 몸통을 받치고 오른손 손가락을 하나씩 감았다.
펜촉을 종이에 댔다.
이름 석 자를 쓰려고 했다. 서. 첫 획을 그었다. 선이 종이 위에서 지진계처럼 튀었다. 도. 두 번째 글자는 형체가 뭉개졌다. 현. 마지막 글자는 획이 종이를 찢을 뻔했다.
세 글자. 자기 이름 세 글자를, 3년 동안 하루에 수십 번씩 서명해온 그 이름을, 오늘 처음으로 읽을 수 없게 썼다.
도현은 펜을 내려놨다.
클립보드 위의 서명을 봤다. 노인의 글씨였다. 떨림이 획마다 배어 있었다.
그의 손은 이미 수술대를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가 준비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응급실 화이트보드에 새 콜이 떴다. 붉은 글씨. 다발성 외상. 도착 예정 7분. 삼십 대 남성, 추락, 두부 손상 및 흉부 손상 의심.
수진이 화이트보드를 보고, 도현을 봤다. 준혁이 손을 씻으며 도현을 봤다. 은혜가 커피컵을 든 채 도현을 봤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도현의 오른손에 모였다.
도현은 그 손을 폈다. 펴려고 했다. 손가락이 반쯤 펴지다 다시 오그라들었다. 종이 위에 그의 이름이 지진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7분 뒤엔 새 환자가 이 손 앞에 실려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유일한 진실은 이것이었다.
이 손으로는 이제, 되감지 않고서는 아무도 살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