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는 열리지 않았다. 유하는 그것을 책상 위에 내려놓지 않고, 손끝으로 모서리만 눌렀다.
"검증해드릴게요."
말은 짧았지만, 뒤에 붙지 않은 절반이 방을 채웠다. 도경은 스탠드 불빛 아래 자기 손목시계를 만졌다. 초침이 도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단, 조건이 있어요."
"말해."
"선생님이 지금 하시려는 게 감각의 확인인지, 확신의 확인인지. 그걸 먼저 정하셔야 해요."
도경은 답하지 않았다. 유하는 봉투를 챙겨 문을 나섰고, 방에는 스탠드와 초침만 남았다.
그는 15년 전 파일을 다시 폈다. 윤태오. 당시 서른하나. 피해자와 같은 산책로를 매일 걷던 남자. 물증은 없었다. 정황과, 도경이 심문실에서 읽은 온도의 어긋남. 그 두 가지가 한 사람의 시간을 닫았다.
파일 열여섯 페이지째. 도경의 손가락이 멈췄다. 진술 요약 다음, 심리 분석 소견 앞. 페이지 번호는 이어지는데 내용이 없었다. 공백. 그는 그 자리를 오래 들여다봤다. 종이의 결까지 기억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엇을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또렷한 기억은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15년간 지켜온 원칙이었다.
그렇다면 이 공백은 흐려진 것인가, 지운 것인가.
---
명진섭의 방은 늘 커피 냄새가 났다. 그는 도경이 들어서자 잔을 두 개 내렸다.
"오랜만에 자네가 먼저 왔군."
"요청서."
"앉게. 커피부터."
도경은 앉지 않았다. 명진섭은 잔에 커피를 따르며 눈을 들지 않았다.
"검토 중이야."
"닷새째."
"이 사람아." 명진섭이 잔을 내밀었다. 받지 않자 그대로 책상에 놓았다. "종결된 사건을 다시 여는 게 어떤 일인지 자네가 몰라서 이러나. 그때 그 사건에 서명한 사람이 몇인지 알지."
"안다."
"자네 이름도 거기 있어. 나도 있고. 종결이 흔들리면 뒤집히는 게 자네 판단 하나가 아니야."
도경은 창밖을 봤다. 명진섭의 방에서는 청사 주차장이 내려다보였다.
"그때 우리가 사람을 잘못 넣었을 수도 있다."
명진섭의 손이 멈췄다. 잠깐이었지만 멈췄다.
"근거는."
"참고인 진술 습관이 윤태오와 같아. 삼키는 반 박자."
"그게 물증인가."
"물증이 아니라서 지금 검증을 요청하는 거잖나."
명진섭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삼키는 소리가 방을 지났다.
"도경아."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자네 두 달 뒤에 나가.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나. 39년 경력을 스스로 부수는 걸로?"
"부수는 게 아니라 세우는 거면?"
"세워지는 건 없어. 윤태오한테 15년 돌려줄 수 있나. 진짜 피해자를 살려낼 수 있나. 열어봐야 남는 건 없어."
도경은 문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고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검토, 오래 걸리진 않겠지."
"...일주일만 줘. 나도 생각할 시간이."
문이 닫혔다. 명진섭의 커피는 식어갔다. 그는 요청서를 집어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밀어 닫는 소리가, 방에서 유일한 소리였다.
---
유하는 자정이 넘어 자문실로 왔다. 손에 15년 전 심문 조서 원본 복사본을 들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보셔야 해요."
그녀는 조서를 펼쳐 열여섯 페이지에서 멈췄다.
"심문 직후 24시간 안에 분석 소견을 남기는 게 선생님 원칙이잖아요. 규칙 2번. 전 사건마다 확인했어요. 선생님 소견은 예외 없이 다 있었어요. 딱 하나 빼고."
도경은 이미 봤던 공백을 다시 봤다. 유하의 손끝이 그 위에 놓였다.
"4월의 강변. 윤태오 3차 심문 직후. 소견 자리가 비어 있어요. 페이지는 배정돼 있는데 내용이 없어요. 문서 관리 대장에는 '작성 완료'로 체크돼 있고요."
"...작성 완료."
"누군가 완료로 표시했는데, 정작 종이는 비어 있어요. 선생님, 이거 두 가지 중 하나예요. 처음부터 안 쓰셨거나—"
"썼는데 뺐거나."
유하가 도경을 봤다. 그녀의 어투는 항상 물증을 앞세웠지만, 지금은 물증 뒤의 것을 묻고 있었다.
"어느 쪽인지 기억나세요?"
도경은 손목시계를 만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손을 뗐다.
"기억이 나. 그게 문제야."
"기억이 나는 게 왜—"
"너무 선명해. 그날 조명, 심문실 온도, 윤태오가 물컵을 밀어낸 각도까지. 15년 전인데 어제 같아." 그는 공백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진짜 기억은 흐려져, 유하야. 이렇게 또렷한 건 내가 만든 거야."
방이 조용해졌다. 유하의 얼굴에서 스승의 방법을 배우려던 열의가 잠깐 물러났다.
"그럼 이 페이지는요."
도경은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15년 만에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내가 지웠을 수도 있어."
"...뭘요."
"윤태오 진술에서, 내 확신과 맞지 않는 게 있었다면. 어긋난 지점을 하나 읽었는데 그게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쪽이 아니라 반대쪽을 가리켰다면. 나는 그걸 안 썼을 수도 있어. 확신을 세우려고."
유하가 조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생님이 그럴 리—"
"유하야." 도경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그럴 리 없다'는 게 제일 위험한 말이야. 내가 15년간 심문실에서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봐왔어. 다들 그럴 리 없다고 했어."
유하는 봉투를 떠올렸다. 아직 그녀의 가방에 들어 있는 은퇴 계약서. 스승의 신화가 지금 이 방에서 금이 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 금을 메우고 싶었고, 동시에 그것이 진실이라면 벌어지게 두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검증할게요. 3차 심문 녹취 원본, 아직 있을 거예요. 문서철 말고 음성. 반 박자 지연이 실제로 어디서 나왔는지, 파형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찾을 수 있겠어?"
"찾아야죠. 선생님 기억보다 파형이 정직하니까요."
도경은 그 말에 처음으로 옅게 입꼬리를 움직였다. 웃음은 아니었다.
---
윤태오는 도시 외곽의 반지하에 살았다. 출소 후 3년. 도경이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들어와도 되겠나."
윤태오는 비켜섰다. 방은 좁았고, 창은 지면 높이에 달려 있어 사람들의 발목만 지나갔다. 두 사람은 낮은 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도경은 곧바로 묻지 않았다. 심문실에서 그는 늘 상대의 침묵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늘은 그가 심문받는 쪽에 가까웠다.
"새 사건이 생겼네." 도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고인 진술이... 15년 전 자네 것과 결이 같아. 삼키는 반 박자."
윤태오는 도경을 봤다.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보고 있어. 그때 내가 읽은 걸."
윤태오는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넘기지 않은 달력이었다. 도경이 물었다.
"자네, 그날 강변에 있었나."
침묵. 윤태오는 도경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발 하나가 지나갔다. 상 위의 두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네가 아니라고 하면 나는 다시 읽을 수 있어. 뭐라도 말해주면—"
"내가 말하면." 윤태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오래 쓰지 않은 것처럼 갈라졌다. "당신은 또 읽겠지. 온도를."
"...그래."
"그때도 그랬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당신은 온도를 읽었어. 내가 아니라고 하면 그게 거짓의 온도라고 했고, 침묵하면 그게 죄의 온도라고 했지." 윤태오는 상 위에 손을 올렸다. 손등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15년 동안 정했어. 당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안 말하겠다고. 당신이 뭘 읽든, 그건 당신 거지 내 게 아니니까."
도경은 손목시계로 손을 가져가려다 멈췄다. 윤태오가 그 동작을 보고 있었다.
"그거." 윤태오가 시계를 가리켰다. "그때도 그랬어.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 시계를 만졌어. 나는 그걸 봤어. 당신은 못 봤겠지. 당신은 나를 읽느라 바빴으니까."
방이 가라앉았다. 창밖으로 누군가의 발이 지나갔다. 도경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심문실에서 도경이 상대의 온도를 읽는 동안, 이 남자는 15년간 도경을 읽어왔다.
"질문 하나만." 도경이 겨우 물었다. "왜 결백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나. 재심 청구도 안 했어."
윤태오는 도경을 오래 봤다. 그리고 다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으로 되물었다. 당신은 그 답을 정말 원하나, 아니면 죄책감을 덜 답을 원하나.
도경은 일어섰다. 문 앞에서 돌아보자 윤태오가 낮게 말했다.
"당신, 강변 가본 적 있어?"
"...조사 기록으로는 없어."
"근데 아는 것처럼 말하잖아. 가로등이 몇 개인지, 물이 어디서 굽는지."
도경의 등이 서늘해졌다. 그 장면들. 낡은 가로등 불빛, 자갈이 발밑에서 굴러가던 감각. 그가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의 풍경.
"그거, 내 기억 아니야." 윤태오가 말했다. "당신이 어디서 가져온 거야?"
---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것이 다시 왔다. 신호에 걸려 멈췄을 때, 눈앞의 붉은 신호등이 강변 가로등으로 바뀌었다. 물이 굽어드는 자리. 4월의 밤. 누군가의 숨소리. 자갈을 밟는 발. 이번엔 처음으로, 장면에 순서가 생겼다. 걷는 사람이 있고, 뒤따르는 사람이 있고, 물가에서 멈추는 지점이 있었다. 서사였다. 잔상이 이야기를 갖기 시작했다.
도경은 핸들을 쥐고 눈을 감았다. 그가 만든 것인가, 본 것인가.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신호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자문실 앞에 차를 세우자, 로비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도경은 그 얼굴을 몰랐다. 낯선 여자. 그러나 여자가 일어서서 걸어오는 동안, 도경의 감각이 먼저 반응했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심문실에서 온도의 어긋남을 짚어낼 때와 같은 냉기였다. 걸음의 간격. 숨의 리듬. 그가 며칠째 파형으로 쫓던 그 반 박자가, 지금 걸어오고 있었다.
"한도경 자문위원님."
"...누구시죠."
"강여울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명함을 내밀지 않았다. "이번 실종 사건 참고인이 제 동생입니다. 조사받으러 다녀온 뒤로 잠을 못 자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신 인사드리러 왔어요."
도경은 여자를 봤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파일을 뒤졌다. 강여울. 참고인 진술서 어디에도 없던 이름. 배후에 있던 사람.
"동생분 진술이라면 이미—"
"완벽했죠." 강여울이 말을 이었다. 매끄러웠다.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위원님이 뭔가 걸리셨다고 들었어요. 반 박자, 였나요."
도경의 손이 시계로 갔다.
"그런 걸 어떻게—"
"위원님." 강여울은 미소를 지웠다. 로비의 조명 아래, 그 얼굴에는 어떤 균열도 없었다. "저는 오래전부터 위원님 일을 알고 있었어요. 4월의 강변. 그때도 위원님은 온도를 읽으셨죠."
도경은 움직이지 못했다. 등줄기의 냉기가 이제 목뒤까지 올라와 있었다.
강여울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문턱에서,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때 당신이 읽은 온도."
말끝에서, 반 박자를 삼켰다. 참고인의 것과 정확히 같은 호흡이었다.
"정말 그 사람 것이었습니까?"
문이 닫혔다. 도경은 그 자리에 서서, 자기 손목의 시계 소리를 들었다. 초침이 도는데, 시간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