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타오르는 홀로그램이 태온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방금 전 무대를 찢어발겼던 하진의 고음이 남긴 전율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대기실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 오직 태온의 눈에만 보이는 장부의 경고창이 맹렬하게 점멸했다.
[경고: 나비효과 수치 급상승!] [역사 왜곡으로 인한 대체 불가능한 변수 발생!] [특수 원석의 이탈 징후 감지 및 긴급 좌표 개설!] [대상: 윤지훈 (잠재력: 댄스 퍼포먼스 SSS)] [현재 상태: 전속 계약 분쟁 및 신체적 위협 상황 노출] [잔여 골든타임: 45분]
태온의 턱끝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윤지훈. 미래의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댄스 제왕으로 군림하며 빌보드 퍼포먼스 차트까지 흔들었던 천재. 그 원석이 지금 마포구의 어두운 골목길에서 무너지기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주저할 시간은 없었다.
“하진아, 짐 챙겨라. 바로 이동한다.”
태온의 묵직한 목소리에 하진이 붉어진 눈을 비비며 황급히 가방을 둘러멨다. 대기실 문을 열고 나서는 태온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복도에 늘어선 방송 관계자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태온은 그들의 시선을 단 한 조각도 담아두지 않은 채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탄 하진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태온은 카니발의 시동을 걸며 백미러로 하진의 목덜미를 흘긋 바라보았다. 칼바람 같은 조명 아래 드러난 하진의 목덜미에는 작고 하얀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과거 실패한 기획사에서 억지로 고음을 내지르다 얻은 성대 결절 수술의 흔적이었다.
“목은 좀 어떠냐.”
태온이 운전대를 꺾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하진이 놀란 듯 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상하게 무음 상태가 되었을 때, 예전처럼 목이 막히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대표님이 수신호를 주시는 순간, 목 안쪽에서 공기가 아주 부드럽게 돌아 나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태온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장부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다. 타 기획사들은 하진의 성대 결절 흉터를 ‘망가진 폐기물’의 증거로 보았지만, 태온은 그 흉터와 특이한 치료 기록의 수치를 다르게 읽어냈다.
하진의 결절 수술은 일반적인 성대 접지면을 깎아내는 방식이 아니었다. 미세한 유착이 생기면서 오히려 가성을 쓸 때 비강과 두성을 연결하는 통로를 좁혀주는 독특한 물리적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즉, 고음 트라우마만 극복한다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하이노트의 공명감을 낼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바로 그 흉터였다.
“네 상처는 실패의 흔적이 아니다. 네 목소리를 완성하는 마지막 열쇠였지. 오늘 무대에서 증명했으니, 이제 네 목소리에 자부심을 가져라.”
“대표님…….”
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을 쓰레기처럼 버렸던 NHN 엔터테인먼트의 기억이, 태온의 차분한 확신 아래에서 완벽하게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기획자와 아티스트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신뢰 수치가 장부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상승하는 것이 보였다.
차가 신촌 대학가의 낡은 상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붉은 점이 가리키는 좌표는 한눈에 보아도 음침한 지하 클럽 근처의 공터였다.
차가 멈춰 서자마자 태온은 문을 열고 내렸다. 매캐한 담배 연기와 함께 쿵쾅거리는 비트가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대학가 길거리 댄스 배틀이 한창인 야외 무대 주변으로 10대와 20대 청년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윤지훈. 낡은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먼지 날리는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온몸을 꺾고 있는 소년.
지훈의 움직임은 경이로웠다. 중력을 무시하는 듯한 팝핀과 바닥을 쓸어 담는 고난도의 비보잉 동작이 음악의 정박을 자르며 꽂혔다. 하지만 태온의 눈에 들어온 지훈의 얼굴은 처참했다. 푹 꺼진 볼, 갈라진 입술, 그리고 땀방울 사이에 섞여 흐르는 핏방울.
태온은 장부를 띄워 지훈의 상태를 확인했다.
[대상: 윤지훈] [영양 상태: 극심한 영양실조 및 근육 피로도 위험 단계] [보유 자산: -4,200,000원 (어머니 요양병원 치료비 체납)] [특이사항: 불법 하청 댄스 크루 '와일드 킥'의 노예 계약 구속 중. 일당의 90%를 수수료로 갈취당함.]
“더 세게 털어! 지훈이 너 오늘 이거 끝나고 밤샘 백업 댄서 대타 뛰어야 해! 돈 벌기 싫어?”
무대 옆에서 확성기를 들고 소리를 지르는 덩치 큰 사내, '와일드 킥'의 단장 독고철이 보였다. 그는 지훈이 뿜어내는 천재적인 재능을 오직 자신의 주머니를 채울 소모품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지훈은 비틀거리면서도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치료비 독촉장을 품에 넣은 채, 뼈가 부서져라 바닥에 몸을 던지는 소년의 눈빛은 지독하게 외롭고 쓸쓸했다.
춤이 끝나자 관객들의 환호가 터졌지만, 지훈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목덜미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단장님…… 오늘 일당은 바로 주시는 겁니까? 병원에서 오늘까지 입금 안 하면 퇴원 조치 하겠다고 해서…….”
지훈이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독고철은 주머니에서 침을 뱉으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야, 네가 오늘 무대에서 실수한 게 몇 번인데 돈 타령이야? 그리고 크루 가입할 때 쓴 계약서 잊었어? 네가 우리 이름으로 따낸 행사비는 일단 크루 운영비로 차감하고 남는 걸 정산하는 거야. 이번 달은 적자니까 꺼져.”
“무슨 소리예요! 제가 이번 주에만 대타를 다섯 번 뛰었습니다! 최소한 병원비만이라도……!”
지훈이 눈을 부릅뜨며 독고철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주변에 있던 크루 패거리들이 지훈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냈다. 바닥에 나뒹구는 지훈의 주머니에서 붉은색 경고 도장이 찍힌 요양병원 치료비 독촉장이 흘러나왔다.
사내들이 지훈을 비웃으며 발로 짓밟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구두굽 소리가 고요한 골목을 울렸다. 태온이 천천히 걸어 나와 지훈의 앞에 떨어져 있던 독촉장을 주워 들었다.
“누구야, 넌?”
독고철이 턱을 치켜들며 태온을 째려보았다. 태온은 독촉장에 적힌 금액과 계좌번호를 눈으로 훑은 뒤,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몇 번의 터치만으로 송금을 완료했다. 그리고 화면을 지훈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우리요양병원 4,200,000원 송금 완료.]
지훈의 눈동자가 깨질 듯이 커졌다.
“당신…… 이게 무슨…….”
“네 빚은 방금 내가 다 갚았다. 이제 넌 가던 길 가라, 윤지훈.”
태온이 무심하게 말했다. 독고철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봐, 형씨. 돈 자랑하는 건 좋은데, 이 새끼 우리 크루 소속이야. 계약 기간이 3년이나 남았다고. 남의 집 일꾼을 공짜로 채 가시겠다?”
독고철이 품 안에서 조잡하게 인쇄된 전속 계약서를 꺼내 흔들었다. 전형적인 악덕 하청 계약서였다. 지훈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법적인 족쇄가 그를 평생 백댄서의 어둠 속에 가두고 있었다.
태온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서류 가방에서 두꺼운 파일 한 부를 꺼냈다.
“계약? 참 좋은 단어지.”
태온이 서류를 독고철의 가슴팍에 툭 던졌다. 독고철이 인상을 쓰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이, 이게 뭐야……?”
“네가 지난 2년간 길거리 청소년들을 모아 불법 하청 댄스 크루를 운영하면서 저지른 노무 위반 고발장이다. 근로기준법 위반, 미성년자 야간 착취, 그리고 세금 탈루 및 대리 정산 횡령 혐의까지 아주 꼼꼼하게 정리해 뒀지. 내가 전직 NHN 기획 실장이라 이런 법률 서류 만드는 데는 아주 이골이 났거든.”
태온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서늘했다. 회귀 전, 업계의 온갖 더러운 계약 관계를 청소하던 강태온의 치밀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너 같은 삼류 양아치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어. 계약서만 쓰면 노예처럼 부릴 수 있을 것 같지? 최저임금법 위반과 정산 불이행이 입증되는 순간, 그 계약서는 휴지조각이 아니라 너희를 감옥으로 보낼 구속영장이 된다.”
“이, 이까짓 서류로 겁줄 수 있을 것 같아? 보디가드 불러!”
독고철이 소리쳤지만, 태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화를 귀에 댔다.
“어, 마포경찰서 지능범죄수사과 이 형사님? 예, 강태온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불법 노무 착취 및 횡령 건, 지금 신촌 골목입니다. 예, 바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골목 입구에서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태온이 미리 배치해 둔 경찰들이었다. 독고철과 그의 패거리들은 사색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훈아, 가자.”
태온이 지훈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이, 이러면 안 되지…… 계약 파기 위약금은 어쩌고!”
독고철이 최후의 발악을 하며 소리쳤지만, 태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닥에 침을 뱉듯 쏘아붙였다.
“위약금은 법정에서 네 횡령 금액과 상쇄해 주지. 기대해라.”
경찰들이 골목으로 들이닥치며 독고철 일당을 에워싸는 모습을 뒤로하고, 태온은 지훈을 데리고 골목을 빠져나왔. 지훈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태온의 뒤를 따랐다.
성산동 블루프린트 지하 연습실로 돌아왔을 때, 시계는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눅눅하지만 익숙한 땀 냄새가 밴 연습실의 방음벽을 보며 지훈은 주춤거렸다.
태온은 책상 위에 정갈하게 인쇄된 새로운 계약서를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지훈이 붉어진 눈으로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블루프린트 엔터테인먼트 전속 계약서다. 전속 계약금은 네 어머니의 남은 1년 치 병원비 전액 선지급. 정산 비율은 기획사 5, 아티스트 5.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있지.”
태온이 계약서의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본 계약자는 타 아티스트의 배경을 채우는 백댄서가 아닌, 독보적인 솔로 및 그룹의 퍼포먼스 메인 디렉터이자 주인공으로서의 무대 권리를 완벽히 보장받는다.]
지훈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늘 무대 가장자리,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이름 없는 병풍으로 소모되던 삶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무대의 주인으로 바라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자신을 온전한 ‘주인공’으로 대접하고 있었다.
“왜…… 저 같은 놈한테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저는 그냥 거리에서 구르던 양아치 댄서일 뿐인데…….”
지훈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태온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그 손길에는 지독한 강박증 이면에 숨겨진, 상처받은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너의 춤은 누구의 배경이 되기엔 너무 찬란해. 나는 널 온 세상의 중심에 세울 거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아.”
툭, 하고 지훈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을 불신과 착취 속에서 살아온 소년이, 처음으로 어른의 진심 어린 신뢰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신뢰 수치 대폭 상승!] [윤지훈의 신뢰도: S랭크 달성!] [골든핑거 제약 '패닉 아웃'의 과부하 수치가 영구적으로 15% 상쇄됩니다.]
시야에 떠오른 푸른빛의 메시지가 태온의 차가운 심장을 조금은 따뜻하게 데워주는 듯했다. 하진이 옆에서 지훈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두 원석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며 연대의 화음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평화는 길지 않았다.
같은 시각, 청담동 NHN 엔터테인먼트 사옥의 펜트하우스 오피스.
최준형 부사장은 서하진의 완벽한 방송 무대 영상과 실시간 검색어 1위 기록을 모니터로 보며 이빨을 득득 갈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사채업과 철거 용역을 일삼는 폭력 조직 ‘삼합파’의 행동대장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강태온…… 아주 쥐새끼처럼 잘도 빠져나가는군.”
최준형이 양주잔을 벽에 던져 산산조각을 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서하진에 이어 윤지훈까지 데려갔다고? 제멋대로 노는 꼴은 여기까지다. 당장 성산동 지하 연습실로 사람을 보내.”
최준형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 법적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것은 NHN의 자회사 소유로 되어 있는 성산동 상가의 건물을 강제 명도 소송 및 압류 절차를 통해 기습적으로 폐쇄하는 가처분 신청서였다.
“법으로 묶고, 물리적으로 짓밟아라. 내일 아침, 그 잘난 블루프린트 연습실 문짝에 압류 딱지를 도배해 버려. 아티스트고 기획자고 간에, 길거리로 쫓겨나서 먼지나 마시게 만들란 말이다.”
최준형의 잔인한 명령과 함께, 어둠 속에서 수십 장의 붉은 압류 딱지가 인쇄기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블루프린트의 숨통을 끊어버릴 거대한 파도가 성산동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