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이다. 돈 없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강 실장이 내뱉은 음산한 목소리가 성산동 지하 연습실의 페인트 벗겨진 벽면을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두꺼운 소송 서류 뭉치가 낡은 합판 책상 위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하진은 마치 채찍질이라도 맞은 것처럼 어깨를 크게 움츠렸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 사이로 소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3억이라는 숫자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는 연습생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진의 손끝이 잘게 떨리며 제 목덜미에 자리 잡은 희미한 흉터를 더듬었다. NHN 시절, 고음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성대가 찢어지던 그날 밤의 공포가 다시 그를 얽매는 듯했다.
강 실장은 그 꼴이 우스워 죽겠다는 듯 껌을 쩝쩝 씹으며 태온의 안면 앞으로 다가왔다.
"어째 말이 없냐, 강 프로듀서? 왕년에 NHN 에이스 소리 듣던 양반이 이런 곰팡이 냄새 나는 굴바닥에서 애새끼나 훔치고 있을 줄은 몰랐네. 계약서 잉크도 안 마른 애를 데려다가 불법 트레이닝을 시켜? 이거 아주 질이 나쁜 업계 교란 행위거든."
싸구려 스킨 냄새와 단내 나는 껌 냄새가 태온의 콧가를 찔렀다.
태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답은커녕 시선조차 강 실장에게 주지 않은 채, 책상 위에 흩어진 소송 서류의 첫 페이지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지하 연습실의 환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야. 내 말이 장난 같냐?"
강 실장의 주름진 미간이 좁혀졌다. 상대가 펄펄 뛰며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무릎이라도 꿇으며 사정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껌을 씹는 강 실장의 턱관절이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태온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천천히 손을 뻗어 서류 한 장을 스르륵 넘겼다. 종이가 스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이 새끼가 사람 말을 무시하네? 너 지금 우리가 겁주는 걸로 보여? NHN 법무팀이 움직였다고. 너 같은 구멍가게 기획사는 서류 몇 장으로 흔적도 없이 쓸어버릴 수 있어!"
강 실장이 책상을 쾅 내려쳤다.
하지만 태온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고요했다.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태온의 눈앞에는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주황색의 빛무리들이 어지럽게 명멸하고 있었다.
['흥행 경영 장부'가 대상 'NHN 엔터테인먼트 신인개발팀'의 세무 및 계약 데이터를 추적합니다.] [경고: 미래의 은폐된 데이터를 인위적으로 인출합니다. 심박수 급증 및 패닉 아웃 위험성 78% 소요.]
가슴 언저리가 꽉 막힌 듯 둔탁한 통증이 치밀었다. 심장이 요동치며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회귀의 대가이자 미래를 바꾸려는 자가 치러야 할 육체적 과부하였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흐려지고, 호흡이 가빠지려는 찰나였다.
옷자락 끝에 묵직한 힘이 실렸다.
태온이 고개를 살짝 돌리자, 제 뒤에 서 있던 하진이 보였다. 하진은 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태온의 셔츠 자락을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꼭 쥐고 있었다. 소년의 젖은 눈동자에는 두려움 뒤로 어떤 단단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이 사람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
그 간절한 믿음이 보이지 않는 파동이 되어 태온의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연습생 '서하진'과의 정서적 신뢰도 급상승.] [진정성 신뢰 수치 활성화: 패닉 아웃 페널티가 50% 상쇄됩니다. 심박수가 안정화됩니다.]
조여들던 가슴이 씻은 듯이 가벼워졌다. 시야가 맑아지며 장부의 텍스트가 명 또렷하게 박혀왔다.
[NHN 엔터테인먼트 세무 리스크 분석 완료] - 항목: 2013-2014 신인 연습생 가계약서 이중 작성 및 해외 트레이닝 비용 허위 계상. - 적발 시 예상 과징금: 14억 8천만 원 및 세무조사 즉시 착수 가능 위험도 '극상'. - 담당 행위자: 신인개발팀 강성태(현 강 실장) 및 최준형 상무 라인.
태온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사냥개가 주인을 믿고 사납게 짖어댈 때는, 그 주인의 목줄이 어디에 매여 있는지 확인하면 그만이다.
"강성태 실장님."
태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연습실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뭐?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되냐?"
강 실장이 기세등등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이 소송장, 최준형 상무가 직접 결재한 겁니까? 아니면 실장님 선에서 공포 분위기 조성하려고 대충 법무팀 명의만 빌려 온 겁니까?"
"이게 어디서 상무님 성함을 함부로 올려? 당연히 공식적인 절차를 밟은 소송이지! 너희가 서하진을 빼돌려 우리 회사에 입힌 유무형의 손해가 얼마나 큰지 법정에서 똑똑히 확인시켜 줄 테니까……."
"지치지도 않는지 여전히 똑같은 수법이군요."
태온이 무심히 서류를 덮어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어 낡은 만년필 한 자루와 빈 백지를 꺼냈다.
"서하진 군의 NHN 시절 계약서, 정확히는 '연습생 표준 계약서'가 아닌 '해외 연수 지원 합의서' 형태의 유사 이중 계약서였죠."
강 실장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껌을 씹던 입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자식이……."
"엔터테인먼트 산업 진흥법을 피해 가려고, 연습생들에게 정식 계약 대신 해외 지사 설립 자본금 명목으로 계약금을 우회 송금한 뒤 이를 전액 비용 처리하는 방식. 그 장부 작성할 때 실장님 도장 찍으셨지 않습니까?"
태온이 만년필 끝으로 책상을 툭, 툭 쳤다. 규칙적인 타격음이 강 실장의 심장을 압박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증거 있어? 어설픈 블러핑으로 대기업을 상대로 공갈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강 실장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뒤에 서 있던 덩치 큰 사내들이 움찔하며 기세를 잡으려 앞으로 나섰지만, 태온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증거야 국세청에 넘기면 그들이 알아서 찾아내겠지요. 특히 NHN이 작년 하반기 일본 쇼케이스 비용으로 허위 청구한 4억 5천만 원의 세금 계산서 발행처가 실장님 친인척 명의의 유령 페이퍼 컴퍼니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 최 상무가 실장님을 지켜줄까요?"
"너, 너…… 그걸 어떻게……."
강 실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장부가 보여준 수치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했다. 10년 전 가요계의 어두운 구석에서 횡행하던 관행들, 특히 최준형과 그 수하들이 자금을 세탁하고 횡령하던 구체적인 루트가 태온의 머릿속에 통째로 들어차 있었다.
"소송을 진행하면 법적 다툼 과정에서 양사의 재무 및 계약 자료 제출 명령이 떨어집니다. 저희야 잃을 게 없는 신생 1인 기획사지만, NHN은 세무조사라는 대형 악재를 맞이하겠군요. 마침 다음 달에 NHN 코스닥 상장 예비 심사가 있는 걸로 아는데 말입니다."
태온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강 실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상장 심사 기간에 탈세 및 배임 혐의로 세무조사가 착수된다면, 주가 하락과 투자자 이탈의 책임은 누가 지게 될까요? 최준형 상무가 지겠습니까, 아니면 그 서류에 직접 날인한 강 실장님이 독박을 쓰겠습니까?"
"……!"
강 실장은 숨을 들이켜지도 못한 채 얼어붙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그의 구두 끝으로 뚝 떨어졌다. 태온의 눈빛은 마치 모든 패를 다 들여다보고 있는 괴물 같았다. 단순한 공포탄이 아니었다. 타격 지점을 정확히 알고 쏘는 정밀 타격 미사일이었다.
뒤에 서 있던 덩치 큰 사내들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선택하십시오."
태온이 품 안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한 장을 꺼내 강 실장 앞에 놓았다.
[상호 합의에 따른 계약 해지 서약서]
"서하진 군에 대한 모든 계약 관계를 상호 합의 하에 조건 없이 해지한다. 양사는 향후 본 계약과 관련하여 어떠한 민형사상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깔끔하게 도장 찍고 가시죠."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강 실장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부르르 떨렸다.
"찍으세요. 아니면 지금 당장 중부지방국세청 조사4과에 있는 제 지인에게 전화를 걸까요?"
태온이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액정 화면에 띄워진 다이얼 패드가 차갑게 빛났다.
강 실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손이 주머니 속으로 기어들어 가더니, 붉은 인감이 새겨진 결재 도장을 꺼냈다. 손가락이 어찌나 떨리는지 도장이 책상 위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태온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강 실장은 굴러간 도장을 허겁지겁 주워 들어, 계약 해지 서약서 두 부에 사정없이 도장을 찍었다. 쾅! 쾅! 붉은 인명(印影)이 종이 위에 선명하게 낙인찍혔다.
"됐지? 됐냐고……!"
강 실장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소송 서류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갈 테니 그리 아십시오."
태온이 서약서 한 부를 챙겨 품에 넣고, 나머지 한 부를 강 실장의 가슴팍에 툭 던져주었다. 강 실장은 짓이겨진 자존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빨을 부득부득 갈았다.
"강태온……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최 상무님이 힘을 쓰면, 너희 같은 버러지들은 방송국 문턱 조차 못 밟아!"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실장님은 본인 모가지나 잘 보존하십시오."
태온의 냉랭한 축객령에 강 실장은 씩씩거리며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쾅 하고 낡은 철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성산동 지하에 메아리쳤다.
숨 막히던 열기가 걷히고, 고요한 평화가 지하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피디님……."
뒤에서 하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온이 뒤를 돌아보자, 하진의 뺨 위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3억이라는 족쇄가, 평생을 괴롭힐 줄 알았던 대기업의 그늘이 단 몇 분 만에 완전히 걷힌 것이다.
"이제 자유다, 하진아."
태온이 하진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네 목소리를 묶어두던 사슬은 전부 끊어졌어.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야. 내일 있을 오디션 무대에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는 것."
하진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 가득한 소년의 눈빛 속에 처음으로 단단한 확신과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독하게 사람을 믿지 못하던 태온의 가슴속에도, 이 아이와 함께라면 진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가요계라는 거대한 야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해방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 태온의 바지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요란한 진동음을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크레센도 한예주 본부장'이었다.
태온이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예주의 다급하면서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강태온 피디님. 지금 한가하게 연습실에 계실 때가 아닙니다. NHN 쪽에서 방금 움직였어요.
"무슨 일입니까?"
- 내일 서하진 군이 참가할 예정이던 SBC 방송국의 오디션 프로그램 '보이스 오디세이' 기억하시죠? 방금 출전 스태프 라인을 통해 긴급 입수된 정보입니다. NHN 최 상무가 방송국 예능국 메인 PD인 김태식 PD를 움직였습니다.
태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김태식 PD. 악마의 편집과 가학적인 연출로 시청률을 쥐어짜기로 악명 높은 SBC 예능국의 거물이었다.
- 서하진 군의 참가 신청이 완전히 다른 카테고리로 강제 전환되었습니다. 단순 보컬 오디션이 아니라, 패자부활전 형식의 가혹한 낙인조 서바이벌 '아이돌 리부트' 스페셜 매치로 강제 편입되었어요.
"낙인조라고요?"
- 네.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하거나 성대가 망가진 '실패작'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철저하게 조롱거리로 소비한 뒤 예선에서 탈락시키려는 악마의 편집 시나리오가 이미 짜여 있습니다. 방금 회사 팩스로 하진 군 이름이 찍힌 강제 서약서 요망 공문이 접수되었어요. 응하지 않으면 오디션 참가 자격 자체가 박탈됩니다.
예주의 다급한 경고 너머로, 태온의 귓가에 장부의 날카로운 경고음이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돌발 이벤트를 감지했습니다.] [NHN 엔터의 방해 공작: '낙인조의 악마적 편집' 플롯 가동.] [대응 실패 시, 연습생 '서하진'의 재기 가능성 지표가 '0%'로 급락합니다.]
태온의 눈빛이 밤바다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 올가미를 벗어나자마자 더 거대한 지옥의 아가리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대기업의 카르텔은 하진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무대 위에서 완전히 난도질해 매장하려는 음모였다.
"하진아."
태온이 전화를 끊고 하진을 바라보았다.
"예, 피디님?"
"내일 무대, 아주 매운맛이 될 것 같다. 독을 품은 칼날들이 사방에서 날아올 거야."
태온의 목소리에는 두려움 대신, 짐승 같은 투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갈 준비 되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