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미 세상에게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 그의 눈빛을 흐려놓고 있었다.
"목소리가 안 나온다고 생각하겠지. 세상이 끝난 것 같고, 아무도 네 노래를 듣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겠지."
태온이 손을 뻗어 하진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차가운 강박증으로 똘똘 뭉친 태온이었지만, 배신당하고 버려진 소년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이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널 다시 무대에 세운다."
"……제 목은, 망가졌어요."
하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의사도, 회사도 다 끝났다고……."
"그들이 틀렸어."
태온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그 쓰레기들은 네 목소리의 진짜 가치를 모를 뿐이야. 나한테는 보여. 네가 가진 그 압도적인 재능이. 세상이 네 노래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 수 있어."
태온이 하진의 손을 굳게 잡았다.
"내 밑으로 와라. 블루프린트로."
그 순간이었다.
하진의 흐릿하던 눈동자에 아주 미약한, 정말 먼지 같은 불씨 하나가 번뜩였다.
[시스템 메시지: 서하진의 신뢰도가 상승합니다. (0% -> 5%)] [최초의 인연이 체결되었습니다. '블루프린트'의 첫 번째 원석이 등록됩니다.]
성공했다.
하지만 기쁨을 만끽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쿠르릉-!
머릿속에서 거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가슴을 대형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극심한 통증이 태온을 덮쳤다.
"윽……!"
태온은 반사적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아스팔트 바닥으로 쓰러졌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요동치며, 폐부의 산소를 전부 앗아가는 느낌이었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핏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경고: 역사 왜곡 페널티 발생!] [원래 역사에서 매장되었어야 할 아티스트 '서하진'의 운명을 강제로 개척하려 시도했습니다.] [세계선 간섭율이 급증하며 프로듀서의 신체에 극심한 과부하(패닉 아웃)가 시작됩니다.]
눈앞이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손끝이 딱딱하게 마비되며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피, 피디님? 피디님 왜 그러세요?!"
방금 전까지 절망에 빠져 있던 하진이 경악한 얼굴로 태온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태온은 대답할 수 없었다. 심장을 옥죄어오는 지독한 패닉 아웃의 고통 속에서, 장부의 붉은 경고등만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첫 번째 원석을 얻은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치명적이었다.
"피디님! 정신 차리세요! 피디님!"
하진의 다급한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빗소리에 섞여 들어오는 소년의 목소리는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 자신 때문에 이 남자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하진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태온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태온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턱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이 일었지만,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철근 같은 압박감 속에서, 그는 강박적으로 스스로의 신경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통증마저 수치화하여 뇌에서 지워버리겠다는 독한 고집이었다.
"하아…… 흡……."
폐부에 억지로 차가운 빗공기를 밀어 넣었다. 주먹을 쥔 손끝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릴 때쯤, 태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붉은 경고창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갈라진 목소리였으나 어조만큼은 단단했다. 태온은 하진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사정없이 떨렸지만, 짚고 일어선 아스팔트 바닥을 딛는 발끝에는 온 힘을 실었다. 기획자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눈앞의 원석은 영원히 빛을 잃고 부서진다.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지병 같은 거야. 가끔 숨이 가빠지는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하지만 방금 피까지……."
"말했잖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태온이 젖은 셔츠 깃을 단정하게 정리하며 하진의 어깨를 짚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소년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시스템 메시지: 대상 '서하진'이 프로듀서의 통제력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신뢰도가 유지됩니다. 심박수 및 세계선 간섭율이 안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눈앞의 붉은빛이 완전히 가시고, 평온한 푸른빛의 장부 인터페이스가 내려앉았다. 심장을 쥐어짜던 손길이 서서히 느슨해졌다. 지옥 같은 고통의 터널을 오직 악력 하나로 버텨낸 순간이었다.
"가자. 네가 진짜로 노래할 곳으로."
태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하진은 잠시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젖은 가방끈을 고쳐 매고 그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
그날 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마포구 성산동의 한적한 상가 골목이었다.
청담동의 번쩍이는 유리기 빌딩들과는 대조적인, 낡고 때 묻은 붉은 벽돌 건물이 빗물에 젖어 눅눅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가파르고 좁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오래된 지하실 특유의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끼이익-.
녹이 슬어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자, 블루프린트 엔터테인먼트의 유일한 자산인 지하 연습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면에는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는 회색 방음 스펀지가 덧대어 있었고, 천장 중앙에는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는 구형 형광등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신디사이저와 작은 믹싱 콘솔,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구형 스피커 두 조가 이 공간의 전부였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하도 밟혀 털이 다 죽어 있었다.
하진은 낯선 공간이 어색한 듯 입구에 멈춰 서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NHN의 대형 연습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이고 최고급 음향 장비가 즐비하던 그곳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일 정도의 수준이었다.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나?"
태온이 콘솔 위의 먼지를 털어내며 물었다.
"아,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그냥……."
"초라해 보이겠지. 하지만 여기엔 네 목소리를 왜곡하는 기계도 없고, 네 가치를 돈으로만 환산하는 감시 카메라도 없다. 오직 네 목소리와 내 귀만 존재하는 곳이지."
태온이 낡은 철제 의자를 끌어당겨 하진의 앞에 놓았다.
"앉아라. 네 목 상태부터 제대로 복기해야겠으니."
하진은 쭈뼛거리며 의자 끝에 겨우 엉덩이를 걸쳤다. 소년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의 닳아 빠진 카펫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쓰레기라 낙인찍은 이의 전형적인 위축 반응이었다.
"피디님……."
하진이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젖은 카디건 깃이 아래로 밀려나며, 목줄기 오른편에 새겨진 선명한 자국이 드러났다. 가로로 약 3센티미터 정도 길게 뻗은, 붉고 단단하게 굳은 수술 흉터였다.
"성대 결절 수술을 받았어요. 그 뒤로…… 고음만 내려고 하면 목이 꽉 막혀요. 아무리 숨을 불어넣어도, 바람 빠지는 소리밖에 안 나와요. 의사 선생님도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는데…… 정작 회사 트레이너들은 제 성대 근육이 변형돼서 틈이 벌어졌다고 했어요."
하진의 목소리가 잘게 저며지듯 파르르 떨렸다.
"다시는 예전처럼 고음을 낼 수 없다고…… 노래를 부를 자격이 없다고 했어요."
태온은 아무 말 없이 그 흉터를 응시했다. 이내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흥행 경영 장부'의 정밀 분석 페이지가 떠올랐다.
[대상: 서하진 (보컬 잠재력: EX)] [신체 진단: 성대 점막 및 피열연골 수술 부위 완전 회복. 기질적 손상률 1.2% 미만.] [정신 진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인한 대뇌피질의 성문 폐쇄 명령 거부. 극심한 수행 불안.] [종합 의견: 신체적 장애가 아님. '소리를 지르면 또다시 성대가 찢어질 것'이라는 무의식적 공포가 후두 근육을 강제로 수축시키는 심인성 발성 장애.]
"하진아."
태온이 나지막하게 소년을 불렀다. 하진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들었다.
"네 목은 망가지지 않았다."
"네? 하지만 정말 소리가 안 나와요. 제 귀로도 들려요, 바람이 새는 소리가……."
"그건 네 성대가 고장 나서가 아니라, 네 뇌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소년의 목에 새겨진 붉은 흉터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차가운 태온의 손끝이 닿자 하진이 흠칫 놀라며 숨을 들이켰지만, 태온은 손을 떼지 않았다.
"수술 부위는 완벽하게 아물었어. 네 성대는 아주 튼튼하고 건강하게 붙어 있다. 문제는 네가 고음을 내려 할 때마다, 네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후두 근육을 쇠사슬처럼 감아쥐고 있다는 거야. 아플 거라는 공포가 브레이크를 꽉 밟고 있는 거지."
"제 몸이…… 방해를 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래. 기계가 부서진 게 아니라, 조종사가 겁에 질려 있는 거다. 그러니까 널 가르쳤던 NHN의 멍청한 트레이너들이 틀린 거지. 그 인간들은 고장 나지도 않은 엔진을 억지로 돌리려고 채찍질만 해댔으니, 네 목이 버틸 수가 있었겠나?"
하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죄책감의 근원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단지 몸이 겁을 먹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소년의 마음속에 작은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딱 3일만 주마."
태온이 손을 떼며 생수 한 병을 하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3일 안에 네 목을 조이고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사슬을 내가 직접 끊어내 주지."
***
다음 날부터 성산동 지하 연습실의 불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켜져 있었다.
태온의 트레이닝은 NHN의 전형적인 기계식 훈련법인 '스케일 무한 반복'이나 '복식호흡 압박 훈련'과는 완전히 달랐다. 태온은 하진에게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마이크조차 잡지 못하게 했다.
"누워라."
태온이 바닥에 얇은 매트 하나를 깔며 지시했다.
"예? 누워서 노래를 하나요?"
하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노래 안 해. 그냥 누워서 숨만 쉬어라. 배 위에 이 두꺼운 책 세 권을 올릴 테니, 책이 오르내리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태온은 무자비하게 전공 서적 세 권을 하진의 배 위에 얹었다. 하진은 당황하면서도 태온의 지시에 따라 호흡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압력을 주지 마. 숨을 들이쉴 때 목구멍을 완전히 열고, 차가운 공기가 기도를 지나 폐 깊은 곳까지 닿는 느낌에만 집중해라. 소리를 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
"흡…… 하아……."
"좋아. 이제 숨을 내뱉으면서 가볍게 입술만 떨어봐. '푸르르르' 소리가 일정하게 나도록."
하진이 입술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주음은 아주 낮은 저음이었다.
"음정을 억지로 올리려고 하지 마. 그냥 호흡의 흐름에 입술 떨림을 얹는 것뿐이다. 네 목 근육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게 만들어."
태온은 피아노 건반을 아주 느린 템포로 한 음씩 누르며 가이드했다. 하진은 누운 자세에서 오직 호흡의 압력과 입술의 진동만으로 음정을 따라갔다.
1시간, 2시간…… 시간이 흐를수록 하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평소 고음만 생각하면 목을 죄어오던 긴장감을 의도적으로 해제하는 과정은 엄청난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자, 이제 일어나라."
훈련 이틀째 밤, 태온이 마침내 하진을 일으켜 세웠다.
하진의 티셔츠는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소년의 눈빛만큼은 첫날의 흐릿함을 벗겨내고 조금씩 생기를 띠고 있었다.
"거울을 봐. 네 목 주변의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태온은 전신 거울 앞에 하진을 세웠다.
"보통 고음을 낼 때 턱을 치켜들거나 목에 핏대를 세우지. 그건 후두를 위로 끌어올려 성대를 강제로 짓누르는 최악의 습관이다. 하진아, 턱을 가볍게 아래로 당겨. 그리고 가슴뼈 중앙에 따뜻한 난로가 있다고 상상해라. 소리는 목이 아니라 그 난로에서 출발하는 거야."
태온의 손끝이 하진의 가슴뼈 중앙을 톡톡 두드렸다.
"자, 아까 했던 입술 떨림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모음 '우'로 전환한다. 소리를 지르지 마. 한숨을 쉬듯 뱉어."
하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목덜미의 흉터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또다시 소리가 막히면 어쩌지 하는 공포가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날 봐."
태온이 하진의 시선을 강하게 붙잡았다.
"내 귀를 믿어라. 네 목소리는 지금 최고로 아름다운 상태다. 그냥 흘려보내."
그 순간, 하진은 눈을 감았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NHN의 차가운 야유들, "목이 맛이 갔네", "이제 상품 가치가 없다"던 독설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회전했다. 하지만 그 모든 소음을 뚫고 들어온 것은, 묵직하고 흔들림 없는 태온의 목소리였다.
'날 믿어.'
하진은 무의식적으로 턱을 당기며 호흡을 내뱉었다.
"푸르르르…… 우……."
입술 떨림이 자연스러운 모음 발성으로 이어졌다. 음정이 3옥타브 도(C5)를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목이 조여들며 컥 소리가 나야 했을 타이밍.
그러나 하진의 목구멍은 활짝 열려 있었다.
"우우우──!"
맑고 투명한, 그러면서도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애절한 고음이 지하실의 천장을 때렸다. 맑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듯, 아무런 막힘도 없이 뻗어 나가는 고음이었다.
하진이 번쩍 눈을 떴다. 제 목소리를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는 두 손으로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어…… 소리가……."
"거 봐라. 내가 뭐라 그랬지?"
태온이 팔짱을 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네 성대는 멀쩡해. 넌 그저 노래하는 법을 아주 잠시 잊었을 뿐이다."
[시스템 메시지: 대상 '서하진'의 마음속 깊은 트라우마가 깨어집니다!] [신뢰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5% -> 25%)] [프로듀서의 신체 과부하가 완화됩니다. 가슴의 압박감이 15% 영구 감소합니다.]
가슴 깊은 곳을 옥죄던 둔탁한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시원한 청량감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태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장부의 수치가 가리키는 방향은 확실했다. 아이들과의 정서적 신뢰야말로 이 지옥 같은 패널티를 극복할 유일한 열쇠였다.
"피디님…… 저, 저 노래할 수 있어요. 진짜로 목소리가 나와요……!"
하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땀방울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가두었던 절망의 감옥에서 마침내 걸어 나온 소년의 뜨거운 눈물이었다.
***
훈련 3일째 되던 날 저녁.
성산동 지하 연습실은 하진의 완성된 보컬로 가득 차 있었다. 단 3일 만에 태온의 천재적인 발성 교정을 통해 소리는 완전히 길을 찾았고, 하진의 잠재력은 폭발적으로 개화하고 있었다.
"~ 내 맘속에 깊이 묻어둔…… 소리를 질러…… 우린 다시 빛날 테니……."
피아노 선율 위에 얹힌 하진의 목소리는 청아하면서도 묵직한 호소력을 담고 있었다. NHN 시절의 기계적인 고음과는 차원이 다른, 영혼을 흔드는 울림이었다. 태온은 믹싱 콘솔 앞에 앉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오디션 무대에서 판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바로 그때였다.
쾅──!
지하 연습실의 낡은 철문이 거칠게 걷어차이며 열렸다.
굉음과 함께 하진의 노래가 뚝 끊겼다. 하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마이크를 꼭 쥔 채 태온의 뒤로 몸을 숨겼다. 소년의 어깨가 다시금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내 두 명이 들어섰고, 그 뒤로 가죽 재킷을 걸친 남자가 껌을 씹으며 걸어 들어왔다. NHN 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개발팀 실무자이자, 최준형의 충직한 사냥개로 악명 높은 강 실장이었다.
강 실장은 발끝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생수병을 툭 차며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야, 강태온. 네가 쥐새끼처럼 성산동 구석에 처박혀서 뭘 하나 했더니…… 아주 눈물겨운 소꿉장난을 하고 있네?"
그의 뱀 같은 시선이 태온의 등 뒤에서 벌덜 떨고 있는 하진에게로 향했다.
"서하진. 너 회사 계약 남아있는 상태로 무단이탈한 거 알지? 게다가 목 망가졌다고 구라 치고 딴 주머니 차려고 했냐? 3일 동안 여기서 아주 목청 좋게 지르던데?"
강 실장이 품 안에서 두꺼운 서류 봉투를 꺼내 태온의 책상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툭, 하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서류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다.
'계약 위반에 따른 위약벌 청구 및 손해배상 소송 청구서.'
붉은색 대기업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법적 독촉장이었다.
"NHN이 우스워 보였나 본데, 배신자들의 말로가 어떤지 똑똑히 보여주지. 서하진, 위약금 3억이다. 돈 없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강 실장의 차가운 폭언이 연습실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하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고, 태온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