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척축을 타고 올라오는 오한에 눈꺼풀이 들렸다.

뺨을 적시는 것은 지독하게 차가운 빗물이었다. 입안에서 비린 먼지 맛과 시큼한 알코올 향이 동시에 맴돌았다. 깨진 콘크리트 바닥의 거친 촉감이 손끝을 긁었다.

강태온은 거칠게 기침을 토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두통이 두개골을 깨부술 것처럼 밀려왔다.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담동의 화려한 유리 빌딩도, 자신을 시궁창으로 밀어 넣었던 동업자들의 비열한 비웃음 소리도 없었다.

사방은 어둡고 눅눅한 골목길이었다. 붉은 벽돌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녹슨 철문 옆으로 깨진 화분들이 나뒹구는 풍경. 낡은 전신주에 붙은 광고 전단지에는 빛바랜 글씨로 '2014년'이라는 숫자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말도 안 돼."

목구멍을 긁고 나온 목소리는 15년 동안 담배와 스트레스로 찌들었던 기획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훨씬 가볍고, 맑았다.

태온은 떨리는 손으로 젖은 주머니를 뒤졌다. 손가락 끝에 걸려 나온 것은 구형 스마트폰이었다. 화면을 켜자 퍼런 불빛이 어둠을 밝혔다.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자신을 소모품처럼 부려 먹다가 쓸모가 없어지자 음해와 소송으로 완전히 매장해 버렸던 NHN 엔터테인먼트. 그 거대한 카르텔의 손아귀에서 단 한 푼의 정산금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났던 그 잔인한 겨울의 한복판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 업계의 판도가 요동치던 10년 전의 황금기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갈비뼈 아래가 무겁게 조여왔다. 단순한 흥분이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압박감이 솟구치는 순간, 시야 전면에 푸르스름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웅성거리는 이명과 함께, 허공에 정교한 격자무늬의 빛줄기가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각을 마비시키는 홀로그램이 아니었다. 숫자가 빽빽하게 적힌 회계 장부이자, 기업의 미래 가치를 분석하는 거대한 재무제표의 형상이었다.

================================== [ 블루프린트 엔터테인먼트 - 경영 장부 ] * 대표 프로듀서: 강태온 * 보유 자산: 14,200,000원 (성산동 지하 연습실 임대 보증금 포함) * 소속 아티스트: 없음 * 시장 흐름 예측 동향: [활성화 대기 중] * 특이 사항: '과거 지식의 왜곡'에 따른 리스크 축적 중. ==================================

글자들이 안구에 박히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장부의 하단에는 붉은 글씨로 경고문처럼 적힌 문장들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경고: 미래의 유행 데이터를 강제로 인용하거나 상황을 인위적으로 뒤흔들 때마다 프로듀서의 신체에 과부하(패닉 아웃)가 발생합니다.] [상쇄 조건: 데뷔조 멤버와의 '진정성 어린 신뢰 수치' 누적.]

"장부……?"

태온이 헛숨을 들이켰다. 손을 뻗어 허공을 휘저었지만, 손가락은 아무런 저항 없이 빛을 통과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직관적인 확신이 내려앉았다. 이것은 시스템의 달콤한 사기 능력이 아니었다. 오직 숫자와 통계, 그리고 대상의 잠재적 가치를 정량화하여 보여주는 철저한 '경영 시뮬레이터'였다.

과거의 기억이라는 무기를 쥔 채, 이 장부를 다룰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다르게 짠다."

어금니를 사려 물자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공장의 부속품처럼 찍어내고, 단물이 빠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NHN의 최준형. 그 인간이 지배하는 추악한 카르텔을 제 손으로 부숴버리겠다는 갈망이 척추를 타고 뜨겁게 끓어올랐다. 사람을 믿지 못하고 모든 것을 혼자 통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강박과 트라우마가 심장을 짓눌렀지만, 이 기회만큼은 놓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철벅, 하는 거친 발소리가 골목길의 정적을 깨뜨렸다.

"야, 서하진! 거기 안 서?!"

날카로운 고함이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태온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가로등 그늘 아래로 몸을 숨겼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골목 끝자락. 한 소년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꼴사납게 굴러 넘어지고 있었다. 소년이 품에 안고 있던 낡은 가죽 가방이 터지며 서류 몇 장과 악보들이 진흙탕 위로 흩어졌다.

"아……."

소년은 무릎이 깨져 피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는지, 허겁지겁 구겨진 종이들을 긁어모았다. 빗물에 번져가는 악보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완전히 초점을 잃어 있었다.

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초라하게 젖은 어깨, 주눅 든 눈망울, 그리고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붉은 수술 자국.

'서하진.'

기억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NHN 엔터테인먼트가 자랑하던 최고의 보컬 유망주. 그러나 혹독한 트레이닝과 무리한 스케줄 강행으로 데뷔 직전 성대가 망가졌고, 결국 소속사로부터 '쓰레기 대접'을 받으며 버려졌던 비운의 천재.

원래 역사대로라면 하진은 이대로 업계에서 영원히 매장당한 채, 평생 목소리를 잃고 지방의 가라오케를 전전하다 사라질 운명이었다.

윙, 하는 나직한 구동음과 함께 태온의 시야에 붉은색 인터페이스가 겹쳐졌다. 장부의 스캔 기능이 하진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 [ 대상 분석: 서하진 (19) ] * 가창력 잠재치: SSS (현재 성대 손상으로 인해 85% 봉인됨) * 독창성: SS * 멘탈리티: C (극심한 불안 장애 및 트라우마) * 소속: NHN 엔터테인먼트 (계약 해지 절차 진행 중) * 신뢰도: 0% ==================================

잠재 가치 SSS.

가요계 역사상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규격 외의 수치였다. 비록 지금은 성대가 망가져 비참하게 젖어 있지만, 저 원석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거친다면 어떤 괴물이 탄생할지 기획자로서의 직감이 온몸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이 쓸모없는 새끼가, 사람 귀찮게 만드네."

골목 입구에서 구두를 신은 사내가 우산을 받쳐 든 채 걸어왔다.

NHN의 로드 매니저, 임성철이었다. 그는 가죽 구두 끝으로 하진이 떨군 악보를 짓밟으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서류에 도장 찍고 꺼지라니까 왜 도망을 쳐? 어차피 목구멍 찢어져서 노래도 못 부르는 벙어리 새끼가. 회사에서 그동안 처먹인 밥값 안 물려내고 곱게 보내주는 걸 감사히 여겨야지, 안 그래?"

"……아닙니다."

하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젖은 종이를 움켜잡았다. 목에 핏대가 섰지만, 성대 결절로 인해 제대로 된 고음은 나오지 않고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저, 노래…… 할 수 있어요. 조금만 쉬면, 다시……."

"지랄하네. 의사가 네 성대 평생 안 돌아온댄다. NHN이 자선단체냐? 너 같은 폐급을 언제까지 안고 가?"

임성철이 하진의 가슴팍을 구두 끝으로 툭툭 찼다.

"좋은 말로 할 때 사인해. 위약금 면제 합의서니까. 이것도 안 쓰면 너 평생 빚쟁이로 살아야 해, 인마."

강압적인 폭력 앞에 하진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0%에 고정되어 있던 하진의 신뢰도 수치가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인간을 향한 깊은 불신과 절망이 소년의 눈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태온은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그의 구두 굽 소리가 빗소리를 가르고 묵직하게 울렸다.

"소속사 직원이 연습생을 상대로 협박 공갈이라. NHN은 여전히 양아치 집단이군."

"뭐야? 어떤 새끼가……."

임성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우산을 치켜들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드러난 태온의 냉랭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강…… 강태온 피디님?"

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빗속에 주저앉은 하진의 곁으로 걸어가, 그가 떨구고 있던 젖은 악보를 천천히 주워 올렸다.

동시에 태온의 시야에 임성철의 머리 위로 노란색 장부 탭이 활성화되었다.

================================== [ 대상분석: 임성철 (32) ] * 직급: NHN 엔터테인먼트 로드 매니저 * 재무 비리 지표: 84% (법인카드 사적 유용 및 연습생 정산금 횡령 정황 포착) * 최근 거래 내역: 2014년 2월 28일, 청담동 유흥업소 '골드'에서 회사 카드 140만 원 결제 후 '신인 개발비'로 허위 청구. ==================================

태온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회계 장부의 힘은 단순한 수치 제시가 아니었다. 대상이 저지른 자본의 흐름과 비리를 완벽하게 역추적해 내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임성철 매니저."

태온이 악보를 털어내며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저번 달 28일에 청담동 골드에서 회사 카드로 백사십만 원 긁었지? 그걸 신인 개발비 영수증이랑 쪼개서 허위 청구했던데."

"……뭐, 뭐라고요?"

임성철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들고 있던 우산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그게 무슨 개소리야! 당신이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NHN 감사팀장 최준형이 자기 밑의 사냥개가 푼돈 횡령하는 걸 알았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거지."

태온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눈빛은 빗물보다 차가웠다.

"최준형은 완벽주의자야. 자기 개가 꼬리를 흔들다가 딴주머니 차는 꼴은 죽어도 못 보지. 내가 이 내역서 그대로 팩스 밀어 넣어 줄까? 아니면 횡령죄로 마포경찰서에 먼저 고발장을 접수해 줄까?"

"이, 이 미친 새끼가……!"

임성철이 주먹을 쥐고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태온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한 기묘한 위압감에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짓밟는 데만 익숙했던 양아치는, 자신보다 더 철저한 포식자를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꼬리를 내리는 법이었다. 장부에 기록된 횡령 액수와 정확한 날짜는 임성철의 숨통을 완벽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서하진의 계약 해지 서류, 이리 내."

태온이 손을 내밀었다.

"……."

임성철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빗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결국 그는 하진을 사지로 몰아넣으려던 계약서를 태온의 손에 쥐여주고는, 허겁지겁 골목 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철벅거리는 한심한 발소리가 멀어졌다.

골목길에는 다시 빗소리만이 남았다.

태온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여전히 바닥에 웅크려 있는 하진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구원해 준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목에 남은 희미한 수술 흉터가 빗물에 젖어 도드라져 보였다. 저 흉터는 단순한 부상의 흔적이 아니었다. 무자비한 기획사의 압박 속에서 혼자 비명을 지르다 얻은 상처였다.

"하진아."

태온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너, 노래하고 싶지."

하진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소년은 대답하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미 세상에게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 그의 눈빛을 흐려놓고 있었다.

"목소리가 안 나온다고 생각하겠지. 세상이 끝난 것 같고, 아무도 네 노래를 듣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겠지."

태온이 손을 뻗어 하진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차가운 강박증으로 똘똘 뭉친 태온이었지만, 배신당하고 버려진 소년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이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널 다시 무대에 세운다."

"……제 목은, 망가졌어요."

하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의사도, 회사도 다 끝났다고……."

"그들이 틀렸어."

태온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그 쓰레기들은 네 목소리의 진짜 가치를 모를 뿐이야. 나한테는 보여. 네가 가진 그 압도적인 재능이. 세상이 네 노래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 수 있어."

태온이 하진의 손을 굳게 잡았다.

"내 밑으로 와라. 블루프린트로."

그 순간이었다.

하진의 흐릿하던 눈동자에 아주 미약한, 정말 먼지 같은 불씨 하나가 번뜩였다.

[시스템 메시지: 서하진의 신뢰도가 상승합니다. (0% -> 5%)] [최초의 인연이 체결되었습니다. '블루프린트'의 첫 번째 원석이 등록됩니다.]

성공했다.

하지만 기쁨을 만끽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쿠르릉-!

머릿속에서 거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가슴을 대형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극심한 통증이 태온을 덮쳤다.

"윽……!"

태온은 반사적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아스팔트 바닥으로 쓰러졌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요동치며, 폐부의 산소를 전부 앗아가는 느낌이었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핏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경고: 역사 왜곡 페널티 발생!] [원래 역사에서 매장되었어야 할 아티스트 '서하진'의 운명을 강제로 개척하려 시도했습니다.] [세계선 간섭율이 급증하며 프로듀서의 신체에 극심한 과부하(패닉 아웃)가 시작됩니다.]

눈앞이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손끝이 딱딱하게 마비되며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피, 피디님? 피디님 왜 그러세요?!"

방금 전까지 절망에 빠져 있던 하진이 경악한 얼굴로 태온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태온은 대답할 수 없었다. 심장을 옥죄어오는 지독한 패닉 아웃의 고통 속에서, 장부의 붉은 경고등만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첫 번째 원석을 얻은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치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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