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지진 같은 무대가 방송가를 휩쓸고 지나간 지 정확히 사흘 뒤였다.
지상파 음악 방송의 송출 사고급 위기를 단 90초 만에 역사적인 기적으로 뒤바꾼 서하진과 윤지훈의 무대는 인터넷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방송 직후 상향된 여론은 걷잡을 수 없는 산불처럼 번져나갔고, 대중은 카르텔의 횡포에 맞선 이 작은 기적에 열광했다. 이 뜨거운 기세에 힘입어 블루프린트는 연말 음악계의 가장 권위 있는 무대, 골든디스크 시상식의 유일한 대상 유력 후보군으로 최정상 격상 발탁되는 기염을 토했다.
대기업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깨부수고 단숨에 정상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간 형국이었다.
청담동 뒷골목에 조용히 자리 잡은 고급 일식 파인다이닝. 대나무 창살 사이로 스며드는 은은한 조명이 테이블 위의 정갈한 도자기들을 비추고 있었다. 나직하게 흐르는 가야금 선율 소리만이 방 안의 무거운 침묵을 채웠다.
찻잔을 든 한예주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강태온을 바라보았다.
"대단하더군요. 그런 악조건 속에서 라이브로 정면 돌파를 할 줄은 몰랐어요."
예주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이성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감출 수 없는 전율의 잔향이 묻어 있었다.
"서하진의 그 마지막 고음은, 데이터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어요. 솔직히 소름이 돋았습니다."
"데이터를 신봉하는 한 본부장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신선하군요."
태온이 찻잔을 가볍게 돌리며 대꾸했다. 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시시각각 변하는 장부의 수치들을 분석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주는 테이블 아래에서 가죽 서류 가방을 꺼내 놓았다. 가방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서늘하게 울렸다. 그녀가 꺼낸 것은 두툼한 서류 뭉치와 그 위에 얹어진 하얀 봉투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강 대표님.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이에요."
그녀는 서류 뭉치를 태온의 앞으로 밀어 보냈다. 표지에는 '크레센도-블루프린트 전략적 인수합병 제안서'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최준형은 무서운 사람이에요. 이번 방송으로 체면을 제대로 구긴 NHN이 골든디스크 대상 식장까지 순순히 길을 열어줄 것 같나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블루프린트의 숨통을 조여올 겁니다. 유통망을 막고, 음원 사이트의 차트를 조작하고, 심지어 있지도 않은 스캔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어요."
예주의 눈동자가 태온의 눈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그 미친개의 이빨을 막아줄 우산이 필요할 테죠. 우리 크레센도 산하로 들어오세요. 블루프린트의 지분 51%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업계 최고 대우의 자금 지원과 완벽한 경영 독립권을 보장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그녀가 하얀 봉투를 톡톡 두드렸다. 슬쩍 벌어진 봉투 틈새로 0이 무수히 박힌 고액 수표의 모서리가 보였다.
"우리의 계약 의지를 보여주는 선급금이에요. 대기업의 보호막 없이 홀로 대상을 차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현실을 보세요."
그녀의 제안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달콤했다. 웬만한 중소 기획사 대표라면 앞뒤 재지 않고 무릎을 꿇었을 법한 거액의 자본과 거대 기업의 방패막이였다.
그러나 태온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냉소에 가까운 미소였다.
"한 본부장님."
"말씀하세요."
"당신은 여전히 내 아이들이 흘린 피와 땀방울을 대기업의 화려한 포장지로 덮을 수 있다고 믿는군요."
태온이 제안서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예주의 앞으로 밀어 던졌다.
탁.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방 안을 울렸다.
"내 대답은 거절입니다. 이 수표도 거두어 가시죠."
예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강 대표. 이건 단순한 자존심 문제가 아니에요. NHN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면 블루프린트는 하루아침에 고사할 수도 있어요. 대상을 코앞에 두고 무너지고 싶어서 이래요?"
"무너지는 건 우리가 아니라 NHN이 될 겁니다."
태온의 목소리에는 뼈가 실려 있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낡은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한 본부장님은 하진이가 왜 NHN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졌는지 아십니까?"
"성대가 완전히 망가져서 회생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데이터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고요."
"그게 바로 대기업이라는 집단이 가진 한계이자 멍청함의 증거죠."
태온이 품에서 정교하게 복사된 의료 기록지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서하진의 과거 성대 결절 치료 기록이었다.
"하진이의 목에 남은 그 흉터, 그리고 성대의 특이점. NHN의 멍청한 트레이너들은 그걸 성대 결결로 인한 치명적인 결함으로 판단했습니다. 고음을 낼 때 성대가 비정상적으로 떨리는 현상을 보고 노래를 할 수 없는 목이라고 확신한 거지요."
예주의 시선이 기록지로 향했다.
"하지만 그건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로는 도달하기 힘든 독보적인 초고역대 주파수를 견뎌내기 위해 성대가 스스로 진화한 특이 구조였습니다. 그 상처와 흉터 자체가 하진이만이 낼 수 있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하이노트의 열쇠였던 겁니다. 그걸 알아보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처넣은 게 바로 당신들이 말하는 대기업의 '정밀한 시스템'입니다."
예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태온은 멈추지 않고 두 번째 패를 꺼내 들었다. 검은색 구형 USB 하나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리고 이건 최준형의 목을 죌 첫 번째 밧줄입니다."
"그게 뭐죠?"
"내가 과거에 작업하다가 블루프린트 창고에 버려두었던, 실패한 미래 히트곡들의 초안 레코드 파일입니다. 최준형이 내 밑바닥을 긁어보겠답시고 사람을 보내 우리 작업실 컴퓨터를 해킹해 훔쳐 간 바로 그 곡들이죠."
태온의 눈에 서늘한 안광이 서렸다.
"그 곡들은 나비효과 시스템의 치명적인 오류를 품고 있는 독약입니다.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아 시장에 나오는 순간 표절 시비에 휘말려 자멸할 수밖에 없는 구조의 멜로디라인을 심어두었죠. 최준형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네 신인 그룹의 타이틀곡으로 대대적인 녹음을 끝마쳤더군요. 조만간 세상에 공개되면, NHN은 표절 시비와 대중의 비난이라는 거대한 늪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대게 될 겁니다."
예주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태온이 말하는 정보들은 크레센도의 정보망으로도 포착하지 못한 극비 사항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태온이 두툼한 서류 봉투를 하나 더 꺼냈다.
"윤지훈의 전 소속 댄스 크루 리더인 배강두와 NHN 간의 미공개 후원 계약서 원본입니다. NHN이 뒤에서 자금을 대며 지훈이의 발목을 묶고, 노예 계약으로 부려 먹으려 했던 모든 정황과 불법 금융 거래 내역이 고스란히 담겨 있죠. 대기업이 중소 기획사의 연습생을 강탈하기 위해 폭력 조직과 유착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터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태온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압도적인 기세에 예주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몸을 젖혔다.
"이 세 가지 카드가 내 손에 있습니다. 하진이의 완벽한 독창성, NHN의 표절 자멸 유인책, 그리고 대기업의 약탈적 전횡을 폭로할 스캔들. 내가 왜 당신들의 그 좁아터진 우산 밑으로 기어들어가 지분을 나눠줘야 합니까?"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예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자랑하던 데이터와 합리성은 태온이 치밀하게 설계해 놓은 거대한 덫과 진실 앞에서 무력하게 깨져나가고 있었다.
태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쉬익-
그의 시야 너머로 '흥행 경영 장부'의 반투명한 인터페이스가 연청색 빛을 뿜으며 허공에 떠올랐다.
[ 실시간 데이터 분석 완료. ] [ 크레센도 엔터테인먼트의 향후 1년 성장률: 12.4% (정체기 진입 예정) ] [ 블루프린트 엔터테인먼트의 1년 후 독점 자본 지표 및 시장 지배력: 348% (급진적 폭발 상승 예정) ]
태온은 장부의 화면을 그대로 캡처하듯, 태블릿 PC를 켜서 가공된 예측 통계 그래프를 예주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그 그래프는 단순한 예측이 아니었다. 블루프린트가 독자 생존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크레센도의 지표를 아득히 초월하는 우상향 곡선이었다.
"보이십니까?"
태온의 손가락이 그래프의 정점을 가리켰다.
"이게 블루프린트의 진짜 가치입니다. 1년 뒤, 우리는 당신들 크레센도의 성장률을 앞지를 겁니다. 우리가 당신들을 인수하면 했지, 피인수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예주는 그래프의 수치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수치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태온의 눈빛과 그가 제시한 명확한 근거들은 그것이 곧 현실이 될 것임을 엄숙하게 선고하고 있었다.
자신을 여전히 '을'로 대하며 품에 안으려 했던 대기업 본부장의 오만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예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이지, 무섭군요. 내 데이터가 완전히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다니."
그녀는 천천히 합병 제안서와 수표 봉투를 거두어 가방에 넣었다. 그녀의 패배 선언이었다.
"좋아요. 합병 제안은 없던 일로 하죠. 대신…… 크레센도는 이번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완벽한 중립을 지키겠습니다. NHN의 어떤 공작에도 동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죠."
"현명한 선택입니다, 한 본부장님."
태온이 잔을 들어 가볍게 건넸다. 예주 역시 잔을 부딪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태온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찢어지는 듯한 진동음을 내며 울렸다. 발신인은 홍보팀 담당자였다.
태온이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다급하고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NHN 최준형 부사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태온의 눈썹이 꿈틀했다.
- 최준형이…… 만약 이번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우리 블루프린트에게 대상을 수여할 경우, NHN 사단 소속 모든 아티스트의 향후 시상식 보이콧 및 지상파 방송 전면 출연 거부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방송국과 협회에 대놓고 칼을 빼 들었어요! 블루프린트에게 대상을 주면 시상식 자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는 겁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벼랑 끝에 몰린 최준형이 가요계의 모든 기득권을 쥐고 마지막 폭탄 테러를 감행한 것이었다. 대상을 목전에 둔 블루프린트의 앞길에, 상상조차 하지 못한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 다시 한번 가로막아 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