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시상식 전체를 보이콧하겠다고?"

귓가를 때리는 수화기 너머의 다급한 음성에도 강태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의 손아귀에 쥔 스마트폰 액정에는 미세한 손떨림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NHN 엔터테인먼트의 부사장 최준형. 막다른 골목에 몰린 포식자가 결국 판 자체를 엎어버리겠다며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블루프린트가 골든디스크 대상을 받는 순간, 자신들의 거대 카르텔 전체를 동원해 가요계의 모든 시상식과 방송을 마비시키겠다는 사상 초유의 협박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크레센도의 한예주 본부장이 태온의 굳어버린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에 복잡한 아지랑이가 일었다.

"최준형 부사장이 결국 최악의 수를 두었군요."

예주가 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이미 사내에서 NHN과의 무리한 카르텔 동맹에 반대하며 독자 노선을 구축하려던 터였다. 태온과 구축해 둔 비밀 핫라인은 바로 이런 파국을 대비한 예비책이었다.

"한 본부장님."

태온이 전화를 끊고 예주를 똑바로 응시했다. 창밖으로 마포대교 위의 붉은 차량 후미등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크레센도 내부의 친(親) NHN 세력을 완전히 밀어내고 본부장님이 사내 실권을 장악할 기회는 바로 지금입니다."

"제 약점을 너무 잘 아시는군요, 강 대표님."

예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NHN의 압박에 굴복해 크레센도가 함께 침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태온이 제시한 미래 지표는 이미 크레센도의 기존 데이터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좋아요. 협조하죠. 하지만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우리 크레센도가 중립을 지키는 것만으로 최준형의 저 무지막지한 독점을 막을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방송사와 협회는 여전히 NHN의 눈치를 볼 텐데요."

"크레센도가 움직여만 준다면, 나머지 판은 제가 짭니다."

태온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가 품속에서 낡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그 안에는 지난 몇 달간 그가 조용히 접촉하고 다져온 가요계의 밑바닥 동맹 지도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

그날 밤, 성산동 지하 연습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거웠다.

지하 특유의 눅눅한 냄새 속에서 서하진은 거울을 보며 목을 가볍게 풀고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어릴 적 수술로 생긴 가느다란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NHN 시절, 성대가 망가졌다는 낙인과 함께 쓰레기처럼 버려지게 만든 주범이자, 하진의 가장 깊은 트라우마였다.

태온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서류철과 함께 낡은 데모 레코드 파일이 들려 있었다.

"하진아."

태온의 부름에 하진이 어깨를 움츠리며 돌아보았다.

"네, 대표님."

"네 목에 있는 그 흉터 말이다. 다들 그걸 성대 결절의 실패한 흔적이라고 했지."

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차마 마주하기 싫은 과거의 상처를 들추는 태온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태온의 눈빛에는 오직 확신만이 가득했다.

"내가 네 과거 성대 치료 기록의 특이점을 전부 분석했다. 하진아, 네 성대 후두근은 일반적인 가수들과 구조가 달라. 수술 부위의 비대칭적인 유착 때문에 특정 주파수에서 공기가 샐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 그래서 고음에서 자꾸 소리가 갈라졌던 거야."

"......역시 저는 안 되는 목인가요?"

하진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태온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니. 정반대다. 그 미세한 틈새가 만들어내는 불규칙한 마찰음은 세상 그 어떤 가수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배음(Overtone)'을 만들어내. 네가 억지로 깨끗한 고음을 내려고 하니까 성대가 버티지 못했던 거야. 이 흉터와 특이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성대를 쥐어짜는 대신 호흡을 가볍게 흘려보내 봐."

태온은 하진의 상처를 약점이 아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무기로 재정의했다.

"이번 무대에서 네가 부를 클라이맥스의 아카펠라 파트는 이 상처가 없으면 완성될 수 없어. 네 실패의 흔적이, 내일 밤 온 세상을 울릴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될 거다."

하진은 멍하니 자신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태온의 손길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신뢰가 그녀의 가슴을 뜨겁게 채웠다.

그때 연습실 구석에서 땀을 흘리며 안무를 맞추던 윤지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대표님, 최준형 그 인간이 방송국이랑 시상식 다 보이콧한다고 난리라면서요? 우리 진짜 무대 못 올라가는 겁니까?"

지훈의 눈에 분노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밑바닥 길거리 댄서로 착취당하던 시절부터 지겹게 보아온 대기업의 횡포였다. 태온은 지훈을 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지훈아. 네 전 소속 크루 리더가 NHN이랑 맺었던 미공개 후원 계약서 기억하지?"

지훈의 눈이 커졌다.

"그거...... NHN이 우리 크루를 뒤에서 조종해서 배강두한테 돈 찔러주고 절 부려 먹게 한 계약서 아닙니까?"

"그래. 대기업이 길거리 청년들의 노동력을 어떻게 약탈하고 은폐했는지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법적 물증이지. 그리고 하나 더 있다."

태온이 가져온 데모 레코드 파일을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이건 내가 과거에 만들었다가 폐기했던 미래 히트곡의 초안 레코드 파일이다. 최준형이 내 컴퓨터를 해킹해서 훔쳐 갔던 바로 그 곡이지. 놈들은 이걸 자기네 메인 그룹의 신곡으로 발표할 예정이었어. 하지만 이 곡의 핵심 멜로디는 내가 이미 해외 저작권 협회에 선등록해 둔 표절 유인책이다. 최준형이 우리를 묻으려고 칼을 뽑는 순간, 놈들은 저작권 침해와 대기업의 표절 도용이라는 거대한 폭탄을 스스로 터뜨리게 될 거야."

태온의 치밀한 덫은 이미 최준형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

다음 날 오전, 마포의 한 비공개 회의실.

태온의 연락을 받고 모인 이들은 가요계에서 NHN의 기득권 카르텔에 밀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30여 개 독립 레이블의 대표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불신이 가득했다.

"강 대표, NHN이 시상식 전체를 보이콧하겠다는데 우리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괜히 블루프린트 편에 섰다가 우리 애들 방송 출연길 다 막히면 책임질 거요?"

한 중견 레이블 대표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쳤다.

태온은 동요하지 않고 준비한 서류를 펼쳤다. 크레센도 한예주 본부장과의 비밀 핫라인을 통해 확보한 NHN의 불공정 거래 내역, 그리고 윤지훈의 전 크루 불법 계약서가 담긴 문서들이었다.

"여러분, 언제까지 NHN이 던져주는 부스러기만 먹고 살 겁니까?"

태온의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저들이 방송사를 장악하고 시상식을 주무르는 건, 우리가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크레센도는 이번 골든디스크에서 완전히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이미 거대 카르텔의 한 축이 무너진 겁니다. 이제 우리가 연대하면, NHN의 독점은 오늘부로 끝납니다."

태온이 제시한 구체적인 물증과 크레센도의 이탈 소식에 대표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힘을 합쳐 이번 골든디스크에 참여하는 모든 소속사 연합의 이름으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할 겁니다. 대기업의 독점적 횡포와 시상식 외압을 거부한다는 성명입니다. 만약 NHN이 보이콧을 강행한다면, 그 빈자리는 여기 계신 소속사의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로 채워질 겁니다. 방송국 피디들이 과연 연말 최대 생방송을 텅 비워둘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결국 고개를 숙이는 건 방송국과 NHN이 될 겁니다."

치밀하고 영리한 역발상이었다.

독립 레이블 대표들의 얼굴에 서서히 결연한 의지가 깃들기 시작했다. 언제나 을의 위치에서 숨죽여야 했던 이들이, 처음으로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순간이었다.

그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오후가 되자,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실력있는_무대를_원합니다]

이 해시태그와 함께, 연합에 동참한 중소 기획사들의 연습생들과 신인 아티스트들이 자발적으로 라이브 지지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훈의 파워풀한 안무를 커버하고, 하진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는 블루프린트를 지지한다는 메시지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 "저희도 땀 흘려 준비한 무대로만 평가받고 싶습니다. 블루프린트의 도전을 응원합니다!" - "음악은 대기업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골든디스크는 공정해야 합니다!"

대중의 여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소모품으로 취급받던 전국의 연습생들과 중소 기획사들이 하나의 거대한 목소리로 뭉치는 순간이었다.

태온의 눈앞에 가상 스크린으로 '흥행 경영 장부'가 떠올랐다.

차가운 청색 빛을 뿜어내는 장부의 실시간 재무 지표가 무서운 속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실시간 시장 점유율 데이터 분석] - NHN 엔터테인먼트의 시장 지배력: 62.4% → 47.1% (최초로 50% 선 붕괴) - 독립 레이블 연합전선 점유율: 35.8% (급상승 중) - 블루프린트 브랜드 가치 및 신뢰 수치: MAX 도달

독점의 견고한 성벽에 최초로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음을 장부가 숫자로 엄숙히 선포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지각변동의 흐름 속에서, 태온의 심장을 조여오던 특유의 패닉 아웃 증상조차 아이들과 쌓아 올린 견고한 신뢰의 힘으로 말끔히 상쇄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한 골든디스크 조율 위원회가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다.

"골든디스크 시상식은 특정 기획사의 외압이나 보이콧 협박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오직 음악적 성과와 대중의 데이터만을 바탕으로 공정하게 심사할 것을 선언합니다. 블루프린트의 대상 후보 자격은 확고합니다."

최준형이 던진 협박 카드가 공식적으로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순간이었다. 대기업의 독점 카르텔이 독립 연합의 뜨거운 연대 앞에 무참히 무릎을 꿇었다.

***

시상식 전날 밤 11시.

성산동 연습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하진과 지훈은 마지막 동선 체크를 마치고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대표님, 내일 진짜 제대로 보여줄게요."

지훈이 탄탄한 어깨를 잔뜩 펴며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하진 역시 목을 가볍게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소리로, 대표님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게요."

태온은 아이들의 어깨를 한 명씩 짚어주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사람을 믿지 못하고 모든 것을 홀로 통제하려 했던 그의 낡은 트라우마가, 아이들의 땀방울과 신뢰 속에서 비로소 치유되고 있었다.

"그래. 내일은 너희들의 날이다. 가서 무대를 마음껏 찢어라."

그때였다.

태온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찢어지는 듯한 경고음을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표시된 것은 다급하게 깜빡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실시간 핫토픽 알림이었다.

태온의 눈썹이 급격히 좁혀졌다.

비서의 다급한 문자 메시지와 함께 링크 하나가 전송되어 왔다.

[폭로] 블루프린트 강태온 대표의 추악한 실체. 성산동 지하실 감금 및 멤버 가스라이팅 녹취록 공개.

태온이 차가운 손가락으로 링크를 클릭하자, 정교하게 합성된 딥페이크 음성 파일이 흘러나왔다.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태온 자신의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 "너희는 내가 만든 꼭두각시야. 시키는 대로 노래하고 기어라.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리고 이어지는 하진의 울부짖는 소리와 지훈의 비명 소리. 교묘하게 짜깁기되고 왜곡된, 숨 막히는 가혹 행위의 현장이 담긴 거짓 폭로였다.

시상식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 인터넷 공간은 순식간에 겉잡을 수 없는 분노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블루프린트의 신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가장 추악한 심연의 덫이 그들의 발목을 통째로 낚아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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