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딱 90초 준다. 노래를 하든 춤을 추든, 그 시간 지나면 마이크 꺼버릴 테니까 억울하면 나가든가."

예능본부장의 오만한 목소리가 좁은 대기실 안을 싸늘하게 얼려 버렸다.

최준형의 입꼬리가 뱀처럼 스르륵 말려 올라갔다. 빗물에 젖어 뚝뚝 흐르는 하진과 지훈의 옷자락을 보며, 그는 사냥감을 막다른 길목에 몰아넣은 포식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담당 PD 역시 본부장의 위세에 등 따스한 안도감을 느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90초.

일반적인 댄스곡의 인트로와 1절 벌스(Verse)만 겨우 소화해도 끝날 시간이었다. 대중에게 곡의 매력을 전달하기는커녕, 무대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내려가라는 조롱이나 다름없었다.

지훈의 가죽 장갑을 쥔 손에 핏줄이 굵게 돋아났다. 하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으나, 녀석은 입술을 깨물며 태온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강태온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예능본부장의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최준형에게 닿았을 때, 태온의 입가에 얇은 호선이 그려졌다.

"90초라."

태온이 품 안에서 가죽 서류 가방을 열어젖혔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서류 뭉치 몇 장과 낡은 레코드 디스크 하나가 대기실 탁자 위로 거칠게 내던져졌다.

탁-!

"그 90초가 당신들의 그 알량한 카르텔이 무너지는 데 얼마나 충분한 시간인지, 내가 직접 증명해 드리지."

최준형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 강태온. 쓸데없는 종이 쪼가리로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글쎄요. 최 이사님이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빠를 텐데."

태온이 서류 한 장을 툭 쳤다. 그것은 윤지훈의 전 소속 댄스 크루 리더인 배강두와 NHN 엔터테인먼트가 맺은 미공개 후원 계약서였다. 지훈을 백댄서로 착취하고, 그가 블루프린트로 이적하지 못하도록 사주했던 더러운 유착의 증거가 명백한 활자로 박혀 있었다.

최준형의 얼굴에 서린 여유가 순식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이건……!"

"아직 놀라기엔 이릅니다. 여기 있는 레코드 파일도 아주 흥미롭거든요."

태온이 먼지 쌓인 구형 디스크를 가리켰다. 그것은 태온이 회귀 직후 버려두었던, 나비효과로 인해 소멸할 뻔한 미래 히트곡의 최초 초안 레코드였다. 최준형이 태온의 작업실을 털어 가 NHN의 하반기 타이틀곡으로 도용하려 했던 바로 그 곡의 원본 데이터였다.

"이미 저작권협회에 제 명의로 선등록을 마친 곡입니다. 이걸 NHN의 신인 데뷔곡으로 발표하시는 순간, 표절 시비와 함께 회사 주가는 바닥을 치게 되겠지요. 대기업의 약탈적 전횡과 표절 도용. 이 두 가지가 내일 아침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면, 본부장님은 이 자리를 무사히 지키실 수 있겠습니까?"

태온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냉철한 통제력이 공간을 장악했다.

예능본부장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다급하게 최준형의 안색을 살폈으나, 최준형의 얼굴은 이미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너, 너……!"

"선택하십시오. 90초 동안 우리가 무대를 찢어발기는 걸 지켜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서류들을 들고 법정에서 방송사 임원진과 함께 카메라 세례를 받으시겠습니까?"

정적이 대기실을 지배했다. 예능본부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시계를 보았다. 방송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단 2분. 결국 본부장은 사들린 이빨을 부르르 떨며 최준형을 외면했다.

"……당장 무대 준비해! 90초 송출은 약속대로 간다!"

태온은 무너지듯 주저앉는 최준형을 뒤로한 채, 하진과 지훈의 어깨를 짚었다.

눈앞에 푸른빛의 '흥행 경영 장부'가 반짝였다.

[ 경고: 현재 남은 송출 시간 '90초'. 기존 무대 구성률 40% 저하 예측. ] [ 해결 책략: 극단적 압축 및 고밀도 임펙트 배치 제안. ]

태온의 뇌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심장이 조여오는 미세한 통증, '패닉 아웃'의 전조 증상이 가슴을 압박해 왔지만, 아이들의 단단한 눈빛을 보는 순간 통증은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신뢰 수치가 과부하를 상쇄하고 있었다.

"지훈아, 하진아. 잘 들어."

두 소년이 태온의 입술을 주시했다.

"인트로 30초는 지훈이 네 독무로 간다. 네가 거리에서 백댄서로 구르며 받았던 그 모든 서러움과 억압을 춤으로 박살 내버려. 카메라가 네 발끝을 쫓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라."

지훈이 이채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숨소리 사이로 투지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하진이 너는, 나머지 60초를 네 목소리 하나로 채운다. 1절의 빌드업 따위는 생략해. 곧바로 하이라이트 고음으로 진입한다."

"대표님, 하지만 제 성대로는……."

하진이 무의식적으로 제 목의 흉터를 감싸 쥐었다. NHN에서 성대가 망가졌다며 버림받았던 기억의 낙인이었다.

태온이 하진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그 눈을 마주 보았다.

"네 목에 남은 그 상처는 실패의 흔적이 아니야. 성대 비대칭의 특이점, 그건 오직 너만이 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날카롭고 아름다운 고음의 무기다. 내가 널 그렇게 훈련시켰고, 넌 이미 완성됐어. 자신을 믿어라."

하진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주눅 들어 있던 소년의 눈빛에 비장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 * *

생방송의 붉은 'ON AIR' 등이 켜졌다.

스튜디오 안은 차가운 냉기로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순서 변경과 시간 축소로 인해 관객석은 술렁이고 있었다.

무대 중앙,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

스포트라이트가 단 한 줄기 떨어졌다. 그 아래 빗물에 젖은 가죽 재킷을 입은 윤지훈이 서 있었다.

쿵-!

심장을 때리는 묵직한 베이스 드럼 소리와 함께 지훈의 신체가 기괴할 정도로 꺾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인 짐승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지훈은 과거 백댄서 시절, 자신을 도구로만 쓰며 무대 구석으로 밀쳐내던 기성 카르텔의 억압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바닥을 거칠게 쓸며 튀어 오르는 비보잉 동작 하나하나에 분노와 저항이 실려 있었다.

비가 내려 미끄러운 무대 바닥은 오히려 찬란한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지훈의 발끝이 스치며 튀기는 미세한 물방울들이 조명을 받아 에메랄드빛 보석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 저게 뭐야……?"

조정실에서 모니터를 보던 담당 PD의 입이 벌어졌다. 카메라 감독들은 본능적으로 지훈의 움직임을 쫓아 줌인을 당겼다. 단 30초 만에 안방극장의 시청자들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정확히 31초가 되는 순간, 지훈이 무대 뒤로 물러서며 손을 뻗었다.

그 손끝이 가리킨 곳에, 서하진이 서 있었다.

반주가 일순간 멈췄다. 무음(無音)의 정적 속에서 하진이 마이크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목에 새겨진 미세한 칼자국 흉터가 조명 아래 붉게 도드라졌다.

하진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반주도 없이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스튜디오의 천장을 뚫고 비상했다.

"아아아아——!"

그것은 단순한 고음이 아니었다.

성대의 특이한 비대칭 구조에서 뿜어져 나오는, 두 개의 음이 동시에 공명하는 듯한 기적적인 멀티포닉스(Multiphonics) 창법이었다. 애절하면서도 심장을 칼로 베어내는 듯한 날카로운 초고음이 생방송 메인 음향 기기를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

이퀄라이저의 붉은 그래프가 한계치인 데시벨 맥스를 찍으며 요동쳤다.

"말도 안 돼…… 무반주로 저런 성량을 낸다고?"

조정실의 음향 감독이 헤드폰을 벗어 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기계가 감당할 수 없는 천재적인 성대의 울림이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뒤늦게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하진의 목소리를 받쳐주었다. 하진은 눈을 감은 채, 제 모든 영혼을 쏟아내듯 끝없는 하이노트를 이어갔다. 빗물에 젖은 머리칼이 격렬하게 흔들렸고, 두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관객석의 누구도 숨을 쉬지 못했다. 압도적인 전율이 스튜디오 전체를 지배했다.

태온은 무대 옆 대기 공간에서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앞에 떠오른 '흥행 경영 장부'의 수치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 대중 몰입 지수: 85%... 92%... 98%... ] [ 시스템 과부하 발생! 실시간 피드백 데이터 폭증! ]

파지직-!

무대 전면에 배치된 실시간 시청자 평가 점수판의 LED 화면이 지익 소리를 내며 일시적으로 프리징되었다. 수만 건의 접속과 투표가 단 1초 만에 몰리며 방송사 서버가 전례 없는 과부하로 마비된 것이었다.

90초.

마침내 하진의 마지막 고음이 스튜디오의 공기를 가르며 잦아들었고, 조명이 암전되었다.

완벽한 침묵이 흘렀다.

1초, 2초, 3초.

그리고 이어진 것은, 폭탄이 터지는 듯한 정적의 파괴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앵콜! 앵콜! 블루프린트!"

관객석 전체가 기립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터져 나오는 광적인 함성과 열기가 스튜디오를 가득 메웠다.

시간을 줄이면 무대를 망칠 거라 호언장담했던 담당 PD는 조정실 의자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그는 멍하니 꺼져가는 모니터와 관객들의 미친 듯한 연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이게 가능한 일인가……?"

최준형은 대기실 구석에서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의 전신이 분노와 패배감으로 부르르 떨렸다.

무대에서 내려온 하진과 지훈이 태온을 향해 달려왔다. 두 소년의 얼굴에는 드디어 해냈다는 해방감과 뜨거운 눈물이 범벅되어 있었다.

"대표님…… 저희, 해냈어요."

하진이 벅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온은 처음으로 그 지독한 통제 강박을 내려놓은 채, 두 아이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래. 너희가 오늘 이 바닥의 판도를 바꿨다."

태온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을 켜자, '크레센도 한예주 본부장'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한예주: 괴물 같은 사람. 약속대로 NHN의 방송 보이콧 연합 제안은 우리 크레센도가 전면 거부하고 밟아놓을게요. 이제 당신들을 막을 수 있는 건 가요계에 아무것도 없겠네요.]

태온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흥행 경영 장부의 메인 화면이 연청색 빛을 뿜어내며 새로운 텍스트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 축하합니다! 역사 왜곡 나비효과 극복 성공. ] [ 블루프린트의 시장 지배력 급격한 격상. ] [ 차기 행선지 갱신: 연말 골든디스크 시상식 '대상 후보군' 공식 발탁. ]

가요계의 가장 거대한 장벽이자 독점 카르텔의 정점인 NHN을 부수고, 마침내 최고의 무대 위에서 대상을 거머쥘 역사적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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