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 생방송 출연 라인업에서 블루프린트 측 무대가 최종 취소되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담당 AD의 목소리는 비참할 정도로 짓눌려 있었다. 통보가 끝나기 무섭게 끊긴 전화기에서는 차가운 기계음만이 공허하게 맴돌았다.
성산동 지하 연습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안무 연습을 하던 윤지훈이 수건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붉게 충혈된 눈에 고인 것은 명백한 분노였다.
"또 그 새끼들입니까? NHN의 최준형이 손을 쓴 거냐고요!"
지훈의 주먹이 하얗게 질린 채 부르르 떨렸다. 옆에 서 있던 서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과거 NHN에서 성대가 망가졌다는 낙인이 찍힌 채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기억이 다시금 그녀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하진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잘게 흔들렸다.
하지만 강태온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분노도, 좌절도 없는 기묘한 미소였다. 태온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가볍게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망막 위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흥행 경영 장부'의 홀로그램이 일렁이며 떠올랐다.
[NHN 엔터테인먼트 - 아레스(Ares) 컴백 프로젝트 판독 데이터] · 타이틀곡: 'Phantom Dust' (유사율 98.4%) · 소스 출처: 외부 유출된 'A-04_Draft_Corrupted' 파일 · 표절 리스크 점수: 99.8% (적색 경고) · 예상 흥행 지수: -87% (정밀 타격 대상)
태온의 안광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최준형, 네놈이 결국 내 덫을 밟았구나."
이것은 철저히 계산된 함정이었다. 지난 4화에서 태온은 성산동 연습실을 구축하며 의도적으로 오염된 미래 히트곡 초안 레코드 파일 하나를 외부 공유 드라이브의 허술한 구석에 방치해 두었다. NHN의 정보원들이 블루프린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기술 유출을 시도하리라는 것을 백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미래의 타임라인대로라면 거대한 수익을 올렸어야 할 명곡이었다. 그러나 태온이 회귀하여 판도를 뒤흔든 결과, 거대한 나비효과가 발생했다. 이 세계선에서는 프랑스의 유명 인디 일렉트로닉 듀오 '레투알(L'Étoile)'이 이미 3달 전, 해당 곡의 핵심 신스 루프와 멜로디 라인을 완벽하게 동일한 형태로 자신들의 언더그라운드 앨범에 수록해 등록해 버린 상태였다.
기존 미래 지식을 맹신하고 그대로 베끼려 드는 자들에게 내리는 가혹한 형벌. 태온은 그 나비효과의 치명적인 독을 고스란히 담아 덫을 놓았고, 다급해진 최준형은 그 독사과를 한입에 베어 물었다.
"대표님……?"
하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태온을 불렀다. 태온은 하진의 젖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진아, 지훈아. 무대가 사라진 게 아니다. 저들이 제 발로 무덤을 판 것뿐이지.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한다. 음악을 틀어."
태온의 단호한 목소리가 컴컴한 지하 연습실의 벽을 울렸다. 지훈이 침을 꿀꺽 삼키며 오디오 기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두둥, 둥, 둥!
심장을 사정없이 때리는 묵직한 하드 테크노 비트가 성산동 지하의 시멘트 바닥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블루프린트가 이번 무대를 위해 준비한 독자적인 신곡 '오버드라이브(Overdrive)'였다. 거칠고 빠른 기계음 사이로 날카로운 베이스가 엉키며 청각을 마비시킬 듯한 쾌감을 선사했다.
"다시 처음부터 간다. 동선 체크하고, 하진이는 브릿지 고음 파트에서 호흡 낭비하지 마."
태온의 지시에 지훈이 다시 한번 몸을 던졌다. 땀방울이 사방으로 튀었고, 지훈의 유연하면서도 절도 있는 크럼프 동작이 하드 테크노의 변칙적인 박자를 완벽하게 쪼개며 나아갔다.
그러나 브릿지 구간에 접어들자 하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지며 끊겼다. 고음의 장벽 앞에서 하진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켜쥐며 뒤로 물러섰다. 과거 실패했던 기억, 목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로 혹사당했던 트라우마가 그녀의 성대를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
태온이 음악을 멈추었다. 그는 하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하진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또……."
"하진아."
태온이 하진의 턱 끝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작은 수술 흉터가 불빛에 비쳐 보였다.
"네 목에 남은 그 흉터, 그리고 성대 결절 치료 기록의 특이점. 내가 왜 그걸 끝까지 추적했는지 알아?"
하진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보통 가수는 성대 수술을 받으면 고음역의 탄력을 잃어버리지. 하지만 네 성대 뒤편의 미세한 근육 조직은 접합 과정에서 아주 독특한 이중 공명강을 형성했어. 의사들은 부작용이라고 했겠지만, 내 귀에는 들렸다. 이건 결함이 아니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천상의 휘슬 레지스터를 낼 수 있는 최고의 무기다."
태온의 눈빛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완벽한 확신이 하진의 가슴 밑바닥을 강하게 두드렸다.
"네 상처는 실패의 낙인이 아니라, 네가 살아남았다는 증거다. 두려워하지 마. 네 상처를 믿고, 내 귀를 믿어라."
하진의 가슴이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매번 자신을 소모품으로만 여기던 NHN의 차가운 눈빛들과는 달랐다. 태온의 눈동자 속에는 온전히 가수로 서 있는 자신만이 존재했다.
그녀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자, 상처 입은 성대가 기적처럼 유연하게 풀렸다.
"아아아아——!"
지하 연습실의 방음벽을 뚫고 나갈 듯한, 맑고 투명하면서도 고막을 찌르는 압도적인 하이노트가 터져 나왔다. 배음이 겹쳐 들리는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천상의 목소리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지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전율이 연습실 전체를 휘감았다.
태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서 또 다른 서류 봉투를 꺼내 지훈에게 던졌다.
"그리고 지훈이 너. 네 발목을 잡던 쇠사슬도 오늘부로 끝이다."
서류 봉투 안에는 빳빳한 계약서 사본이 들어 있었다. 지훈이 서류를 읽어 내려가자, 그의 거친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건…… 배강두 그 인간이랑 NHN이 맺은 미공개 후원 계약서?"
"그래. 네 전 소속 댄스 크루 리더인 배강두가 대기업 NHN의 자금을 받고 너를 강제로 이중 계약 덫에 빠뜨리려 했다는 결정적 증거다. 이 계약서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배강두의 사기 혐의는 물론이고 대기업의 추악한 약탈적 전횡이 고스란히 폭로되지."
지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거리의 백댄서로 착취당하며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던 서러움이, 태온이 내민 종이 몇 장으로 인해 완벽하게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대표님…… 왜 저희 같은 애들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지훈의 물음에 태온은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희가 흘린 땀방울의 가치가, 저들의 더러운 돈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이지. 자, 준비해라. 이제 쇼 타임이다."
그 순간, 태온의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패닉 아웃의 전조 증상이 일어났다. 심장이 조여들고 호흡이 가빠오는 감각. 하지만 장부의 푸른색 수치가 급격히 치솟으며 통증을 상쇄시켰다.
[서하진의 신뢰도 수치: 98%] [윤지훈의 신뢰도 수치: 95%] [시스템 경고: 신뢰도 수치 최대치 근접으로 인해 패닉 아웃 페널티가 90% 경감됩니다.]
뜨거운 신뢰의 유대감이 태온의 심장을 지켜주고 있었다. 태온은 들이쉬는 숨끝에서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
목요일 오후 6시. 공중파 가요 순위 프로그램 '쇼! 뮤직 챔피언'의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블루프린트의 출연이 강제로 취소된 무대 위에는, 대문짝만하게 NHN의 핵심 보이그룹 '아레스'의 대규모 컴백 무대가 예고되고 있었다. 화려한 LED 조명과 수천 명의 팬들이 지르는 함성 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웠다.
"다음은 가요계의 절대 강자, 아레스의 최초 공개 무대입니다!"
MC의 멘트와 함께 아레스의 신곡 'Phantom Dust'가 흘러나왔다. 무대 위에서 멤버들이 칼군무를 추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실시간 방송을 지켜보던 최준형은 대기실의 모니터 앞에서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양주잔을 흔들었다.
"하찮은 쥐새끼들. 감히 누굴 넘봐? 무대가 없으면 대중은 너희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나 최준형의 미소는 정확히 1분 뒤, 산산조각이 났다.
곡의 하이라이트인 후렴구 신스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순간, 가요 커뮤니티와 SNS가 그야말로 폭발했다.
[실시간 커뮤니티 반응] - 야, 이거 지금 아레스 노래 실화냐? ㅋㅋㅋㅋㅋ - 헐, 이거 프랑스 듀오 'L'Étoile'의 'La Nuit'랑 완전 똑같은데? 멜로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스템 파일을 그대로 긁어왔잖아 ㄷㄷ - 설마 표절임? NHN 대기업이 대놓고 곡 표절을 했다고? - 표절 수준이 아니라 무단 도용 수준인데? 지금 해외 원작자 트위터에 한국 아이돌이 곡 훔쳐 갔다고 저격 글 올라옴!! 링크 첨부함!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최준형이 들고 있던 양주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유리가 박살 나며 투명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의 비서가 사색이 된 얼굴로 대기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최 본부장님! 큰일 났습니다! 프랑스 '레투알' 소속사에서 공식적으로 저작권 침해 및 무단 도용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이미 외신 기자들 사이에서도 기사가 퍼지기 시작해서…… 주가가 폭락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 곡은 분명……!"
최준형의 눈이 뒤집혔다. 자신이 가로챘던 태온의 비공개 드라이브 속 파일이, 애초에 다른 나라에서 이미 등록된 치명적인 독약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아레스 멤버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지만, 이미 관객석의 가득 찬 함성은 싸늘한 수군거림과 야유로 변해 가고 있었다. 생방송 화면 하단에는 실시간으로 표절 의혹을 다루는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1. 아레스 표절] [2. NHN 무단도용] [3. 레투알 저격]
"강태온…… 네 이놈!!!"
최준형이 이가 부러질 정도로 이를 갈며 포효했다. 자신이 놓은 덫에 자신이 걸려 뼈가 으스러지는 꼴이었다. 대기업 NHN의 자존심이자 심장 같았던 탑티어 그룹 아레스는 단 한 번의 무대로 역대 최악의 무단 표절작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채 전면 퇴출 위기에 처했다.
***
그 시각, 성산동 블루프린트의 낡은 축제용 밴 차량.
태온은 운전대를 잡고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하진과 지훈은 긴장되면서도 설레는 표정으로 무대 의상을 매만지고 있었다.
"준비됐지?"
"네, 피디님. 저희가 갈 갈 길은 오직 무대뿐이니까요."
하진이 굳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훈 역시 씨긋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태온은 차를 몰아 약속된 게릴라 라이브 장소인 여의도 한복판으로 향했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아레스의 표절 사태로 분노한 대중의 시선이 진짜 실력파인 블루프린트의 게릴라 무대 예고로 쏠리고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어두운 성산동의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끼이이이이익——!
갑작스러운 쇠 부딪치는 굉음과 함께 밴 차량의 차체가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며 요동쳤다. 핸들이 미친 듯이 꺾였다. 태온은 악물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쿵!
차량이 전신주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하진아, 지훈아! 괜찮아?!"
태온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뒷좌석의 두 사람은 안전벨트 덕에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피쉭—— 피쉭——
차량 우측 앞바퀴에서 날카로운 금속 조각에 찢긴 듯한 거친 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순한 펑크가 아니었다. 의도적인 칼부림의 흔적이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 양편에서 라이트도 켜지 않은 검은색 SUV 두 대가 서서히 다가와 블루프린트의 밴 차량 앞뒤를 완벽히 가로막았다.
문이 열리고, 두꺼운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손에 쥔 덩치 큰 사내들이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사설 폭력 대행업체의 무리였다. 최준형이 자신들의 참패를 가리고 블루프린트의 폭로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보낸 마지막 발악이었다.
사내 중 가장 덩치가 큰 자가 밴의 운전석 유리창을 쇠파이프로 툭툭 두드렸다. 빠드득, 하며 유리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사내들의 잔혹한 미소와 차가운 쇳소리가 좁은 차 안을 공포로 가득 채웠다. 게릴라 무대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단 30분. 이 올가미를 찢고 나가지 못한다면 모든 기회는 영원히 사라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