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밤바람이 찬데,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느냐."

이진의 나직한 목소리가 한겨울의 서리처럼 여을의 가슴에 매섭게 내리꽂혔다.

여을의 눈동자가 극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방 외곽의 차가운 눈밭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품에 안은 서책의 모서리가 옷감 너머로 살을 파고드는 것처럼 아팠다.

침묵은 무거웠고, 밤바람은 칼날보다 매서웠다. 이진의 손에 들린 붉은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그 푸른 눈동자에는 분노도, 배신감도 없었다. 오직 빙판처럼 차갑고 투명한 계산만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여을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떼었다.

"마마…… 소인은……."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짐승에게 이유를 묻지 않는다."

이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눈을 밟는 가죽신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여을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다리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진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굳어 버린 그녀의 품에서 서책을 부드럽게 빼앗아 들었다.

그것은 여을이 필사한 '가짜 가열로 배합 장부'와 '조운선 하부 격실 설계 도면'이었다.

이진은 서책의 표지를 툭툭 쳤다.

"이것을 한양의 좌의정 한명진에게 보내려 하느냐."

여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곁에 둔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첫 만남에서부터 대군은 그녀의 정체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죽여…… 주시옵소서."

여을이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눈더미가 무릎을 적셨지만, 그 냉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다.

"소인의 목숨은 어찌 되어도 좋사오나, 한양에 있는 제 누이들과 동생들은 아무런 죄가 없나이다. 그 호랑이 같은 자들의 손에서 아이들을 구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나이다……."

그녀는 머리를 땅에 찧으며 흐느꼈다. 하지만 이진의 시선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전생에서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해 연구를 통째로 빼앗기고 죽음에 이르렀던 기억을 품고 있었다. 인간의 신의 따위는 믿지 않는다. 오직 철저한 이해관계와 완벽한 통제만이 세상을 움직이는 유일한 법칙이었다.

이진이 나직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누가 너를 죽인다 하더냐."

"예……?"

여을이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진은 품에서 붓을 꺼내 장부의 몇 군데를 슥슥 고쳐 썼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시 여을의 품에 툭 던져 주었다.

"가져가거라. 그리고 한명진의 밀정에게 바쳐라."

"마마, 그것은……."

"이 배합률은 고온 가열로의 핵심 비결이다. 다만, 석탄의 유황 유독 가스를 제어하기 위한 석탄 미탄 배합률 수치에서 임계 열팽창 균열 수치를 아주 미세하게 비틀어 놓았지. 이 수치대로 고로를 지어 온도를 올리면, 노벽 내부의 내화벽돌이 열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단숨에 폭발하게 된다."

이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잔인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한명진 그 늙은 여우가 이 장부를 손에 넣으면, 필시 사적으로 야철지를 만들어 나를 모방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불꽃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들의 야망과 함께 가마 전체가 공중으로 날아가겠지. 아주 화려한 불꽃놀이가 될 것이다."

여을은 숨을 들이켰다. 대군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십 수백 단계 뒤의 계책이 세워져 있었다. 자신은 그저 그 거대한 장기판 위의 말 하나에 불과했다.

"가서 네 동생들의 목숨을 구하거라. 그리고 한명진에게 전해라. 은장대군은 북방의 추위에 미쳐가고 있으며, 오직 기괴한 가마를 돌리는 데만 집착하고 있다고. 그리하면 너도 살고, 네 동생들도 살며, 나 역시 귀찮은 파리 떼를 잠시 쫓아낼 수 있을 터."

이진이 몸을 돌렸다.

"가라. 내 마음이 변해 네 목을 치기 전에."

여을은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떨었다. 대군의 자비는 따스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이익과 필요에 의해 계산된 냉혹한 유예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구원받았음을 느꼈다.

"마마……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나이다."

여을이 서책을 품에 안고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이진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묵묵히 응시했다. 한명진의 밀정단이 이 가짜 기술을 물고 늘어지는 동안, 북방의 철기 기지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요새로 거듭날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기지 깊은 곳에서 심장까지 뒤흔드는 기괴한 진동이 울렸다.

이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가열로가 위치한 제철동 방향에서 붉은빛이 비정상적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댕! 댕! 댕!

정적을 깨고 경보를 알리는 쇠징 소리가 맹렬하게 대지를 때렸다.

"불이다! 고로 상층이 끓어 넘친다!"

장인들의 비명 섞인 외침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이진은 지체 없이 대지를 박차고 달렸다.

***

제철동 내부는 지옥을 방불케 했다.

거대한 2호 고로의 상층 보일러 접합부에서 시뻘건 유황 가스가 쉿쉿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가마 내부의 압력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계기판 구실을 하는 철제 지시침이 이미 임계 영역을 한참 넘어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진이 들이닥치며 사효를 질렀다.

얼굴에 검은 그을음을 잔뜩 묻힌 서태강이 허겁지겁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은 공포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마! 큰일이옵니다! 새로 들여온 백산 탄광의 백토로 만든 보강재가 화근입니다! 백토의 예밀성(점성과 가소성)이 생각보다 너무 낮아, 고온의 유황 가스가 노벽 틈새로 스며들며 상층 보일러 압력 밸브를 막아 버렸습니다!"

"예밀성 하락이라고? 사전에 검수하지 않았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혹한의 날씨 때문에 흙이 얼어 있어 미처 그 미세한 성질 변화를 파악하지 못했사옵니다! 이대로 두면 60초 내로 고로 상층부가 통째로 폭화하여 기지 전체가 날아갈 것입니다!"

주변의 장인들은 이미 혼비백산하여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가마가 터지면 뜨거운 쇳물과 유독한 유황 가스가 사방을 덮쳐 이 안의 모든 생명이 순식간에 녹아내릴 터였다.

"모두 대피시켜야 합니다, 대군 마마! 어서 피하소서!"

서태강이 이진의 소매를 붙잡았으나, 이진은 그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비켜라! 이 가마를 식히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정밀 주조 공정이 수포로 돌아간다! 가열로의 노벽 벽돌을 전부 새로 쌓으려면 석 달은 걸려!"

석 달의 시간은 없었다. 한양의 감시망이 좁혀오고 있고, 국경의 여진족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진은 가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유황 냄새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정밀 야금 설계도.'

그가 속으로 읊조리자, 망막 위에 푸른빛의 반투명 계통도가 투사되었다. 수많은 화학식과 열역학 계산식, 그리고 실시간 압력 수치가 어지럽게 나열되었다.

[가열로 상부 압력: 4.2 MPa (임계점 4.5 MPa)] [노벽 붕괴 확률: 94%] [예상 폭발 시간: 42초 전]

동시에 이진의 전신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뇌수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두통과 함께, 심장 끝에서부터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순식간에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굳어갔다. 초월적인 현대 야금 지식을 조선의 물리 법칙과 동기화하는 대가, 한랭증의 습격이었다.

"으윽……!"

이진은 이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전신이 얼어붙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푸른 눈동자는 망막의 설계도를 놓치지 않았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 압력을 배출할 틈새가…….'

그때 설계도의 한 구석이 붉게 반짝였다. 5화에서 가열로를 지을 때 구축해 두었던 특수 장치가 머릿속을 스쳤다.

[가열로 고온 송풍구 내벽 개스킷: 고령토(백토) 함량 비례 조절식 열수축 구조.]

당시 이진은 영하의 혹한 속에서 가열로가 급격하게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온 송풍구 내벽의 개스킷을 특정 고령토 배합 비율로 제작했었다. 이 개스킷은 상온에서는 단단한 기밀을 유지하지만, 영하의 강풍이나 극단적인 냉각수 접촉 시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수축하여 유격을 발생시키도록 설계된 특수 바이패스 장치였다.

"서태강!"

이진이 차가운 한기를 뿜어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 예! 마마!"

"송풍구 외벽에 연결된 수로 관을 열어라! 그리고 외부의 찬 눈과 얼음을 송풍구 주위에 사정없이 퍼부어라!"

서태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마, 고온의 송풍구에 찬물을 부으면 급격한 온도 차로 철이 깨지거나 가마가 완전히 깨질 수 있사옵니다!"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그 개스킷은 영하의 냉기가 닿으면 열수축 강도가 극대화되는 고령토 배합으로 만들어졌다! 틈새를 만들어 가스를 강제로 유출시켜야 한다!"

이진의 서슬 퍼런 호통에 서태강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대군의 혜안은 언제나 상식을 뛰어넘었다.

"모두 물을 길어와라! 눈더미를 쏟아부어라! 송풍구 외벽을 식혀라!"

장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양동이에 가득 담긴 냉수와 얼어붙은 눈더미가 뜨겁게 달아오른 송풍구 외벽으로 사정없이 뿌려졌다.

치이이이익—!

자욱한 백색 증기가 제철동 내부를 가득 채웠다. 뜨거운 철판에 물이 닿으며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진은 한랭증으로 온몸을 벌벌 떨면서도 가마의 상태를 주시했다. 손끝의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입술은 파랗게 질렸고,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눈은 번뜩이고 있었다.

[송풍구 온도: 1200℃ -> 800℃ -> 400℃ 급강하] [고령토 개스킷 수축률: 12% 돌파]

쩍! 쩌적!

송풍구 접합부의 용접선 부근에서 기괴한 균열음이 발생했다. 온도 차에 의해 내부의 특수 고령토 개스킷이 순식간에 쪼그라들면서, 철판 사이에 미세한 유격이 생긴 것이다.

피이이이이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갇혀 있던 고압의 유황 가스가 그 틈새를 뚫고 뿜어져 나왔다. 뜨거운 가스 분출이 하늘을 향해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어냈다.

"압력이 떨어진다!"

지시침이 급격하게 안전 영역으로 내려앉는 것을 본 장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가열로 내부 압력: 1.8 MPa -> 안전 수준 도달] [폭발 위험 해제.]

가마는 터지지 않았다. 이진의 정밀한 계산과 설계가 또 한 번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아, 하아……."

이진은 가마 옆의 온돌 지지대에 몸을 기댔다. 가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온몸으로 흡수하며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기 시작했다. 손끝에 서서히 붉은 피가 돌며 통증이 가라앉았다.

서태강을 비롯한 장인들은 그 자리에서 대군을 향해 엎드렸다. 그들의 눈에는 단순한 경외를 넘어선, 신을 바라보는 듯한 맹목적인 광신이 서려 있었다.

"마마…… 정녕 마마께서는 철의 신이시옵니다. 이 나라 조선의 그 어떤 야철 장인도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옵니다."

서태강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이진은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신이 아니라 공학이다. 수치와 법칙은 결코 인간을 배신하지 않지."

그는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오한을 떨쳐내며 일어섰다. 한명진의 밀정에게 간계를 썼고, 고로의 폭발 위기도 막아냈다. 이제 이 기지에서 생산될 특수강 부품들을 조합하여,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무기를 완성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우당탕!

제철동의 무거운 목조 문이 거칠게 열리며, 외곽 초소를 지키던 보초병이 피투성이가 된 채 들이닥쳤다.

"대, 대군 마마! 변고옵니다!"

보초병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등에는 깃이 거친 여진족의 화살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냐."

"여진…… 여진족의 척후 무리입니다! 회령 계곡 너머, 수백 개의 횃불이 산맥을 타고 이편으로 밀려들고 있사옵니다! 머지않아 이곳 야철지 외곽에 도달할 것입니다!"

제철동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장인들의 얼굴에서 방금 전의 환희가 순식간에 지워지고, 새로운 공포가 그 자리를 채웠다.

이진은 천천히 가마의 열기를 뒤로하고 어둠이 내린 문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칠흑 같은 계곡 사이로, 붉은 횃불의 무리가 뱀처럼 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목표가 이 야철지임은 명백했다. 이진의 입술이 차갑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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