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붉은 횃불을 치켜든 채 회령 계곡을 뒤흔들던 여진의 척후 백여 명은 대군이 부리는 영지 사냥개들과 북방 야철지의 결사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국경 너머 골간(骨看) 여진의 대부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척후의 보고가 영지를 무겁게 짓누르던 나흘 뒤, 또 다른 칼날이 회령 땅을 밟았다.
"대군 마마, 어사께서 당도하셨사옵니다!"
제철동의 두꺼운 참나무 문을 밀치고 들어온 장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가득했다.
이진은 가열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끈한 열기 속에 서 있었다. 정밀 야금 설계도를 가동할 때마다 골수까지 얼려버릴 듯 찾아오는 한랭증을 다스리기 위해, 그는 늘 고로 바로 옆의 특수 온돌 지지대에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푸르스름하게 변했던 손끝에 겨우 붉은 피가 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흘 전, 황화가스의 급증으로 고로가 폭발하기 직전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설계한 기술적 안배 덕분이었다. 영하의 혹독한 외기 속에서 열수축 강도가 극대화되도록 고령토 함량을 특수 배합하여 제작한 송풍구 내벽 개스킷. 고로 내부가 한계 압력에 도달하는 순간, 영하의 바람을 맞은 외부 개스킷이 먼저 수축하며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 가스를 하늘로 분출시키는 긴급 바이패스(Bypass) 장치가 작동한 것이다.
그 기적적인 광경을 목도한 서태강과 장인들은 이제 이진을 단순한 왕족이 아닌, 철의 법칙을 부리는 신으로 경외하고 있었다.
"어사라?"
이진이 가볍게 혀를 찼다. 올 것이 왔다. 한양의 훈구파 수장 한명진과 왕권을 노리는 조정이 보낸 감시자일 터였다.
제철동 마당으로 걸어 나오자, 차가운 눈바람 사이로 붉은 조복을 입은 사내와 그 뒤를 호위하는 삼사(三司)의 서리들이 보였다. 무리를 이끄는 자는 성종의 밀명을 받은 어사, 임사홍이었다. 그의 째진 눈매가 야철지 곳곳에 쌓인 기괴한 철물들을 날카롭게 훑고 있었다.
"은장대군 마마를 뵈옵니다."
임사홍이 형식적인 읍을 올렸으나, 목소리에는 왕실 방계의 망나니를 내려다보는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주상 전하의 명을 받들어, 북방 영지의 사병 주조 및 경국대전 위반 여부를 사찰하러 왔사옵니다. 대군께서 이곳에서 대포와 화포를 밀조하여 역모를 꾀한다는 상소가 조정에 빗발치고 있사옵니다."
서태강을 비롯한 장인들의 어깨가 굳어졌다. 사병 주조는 삼족을 멸하는 대역죄다. 한눈에 보아도 임사홍은 오늘 이 자리에서 기어코 꼬투리를 잡아 이진의 목을 벨 기세였다.
이진은 콧방귀를 꼈다. 그의 시선은 임사홍의 발끝에 머물렀다.
"어사 임사홍이라. 주상께서 친히 내금위의 사냥개를 보내셨군. 내 북방의 척박한 땅에서 백성들을 살리고자 치수(治水)에 힘쓰고 있거늘, 이를 역모로 몰다니. 조정의 대신들은 눈이 멀고 귀가 막힌 모양이오."
"망발이십니다! 저기 가마터 뒤에 숨겨진 거대한 철제 도관들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 두께와 형상은 영락없는 대구경 화포의 포신이 아닙니까!"
임사홍의 손가락이 가열로 너머에 거치된 수십 개의 거대한 강철 실린더를 가리켰다. 그것은 이진이 한 달 동안 밤낮으로 장인들을 혹사해가며 주조해 낸 특수강 도관들이었다. 일반적인 조선의 화포보다 세 배는 더 두껍고, 표면은 냉간 단조를 거쳐 거울처럼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임사홍의 안광이 번뜩였다. 잡았다, 하는 확신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국왕의 허가 없이 이러한 대형 철제 무기를 주조하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하옵니다. 마마, 즉시 압수하고 의금부로 압송하겠사옵니다!"
"무기라?"
이진이 헛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큰 키와 가열로의 열기를 머금은 기세에 임사홍이 자신도 모르게 반 걸음 뒤러 물러섰다.
"임 어사. 글만 읽는 선비 놈들이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군. 저것이 화포로 보이는가?"
이진은 품속에서 가죽으로 장정된 낡은 서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이었다. 그는 거칠게 책장을 넘겨 특정 구절을 임사홍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경국대전 호전(戶典) 수리조(水利條)를 보아라. '매년 봄 가뭄과 겨울철 동결로 인한 농토의 피해를 막기 위해, 강물을 끌어올리는 치수 가관(治水 架管)과 수차는 그 중량과 재질에 법적 제한을 두지 아니하며, 지방관의 책임하에 적극 권장한다' 하였느니라. 또한 대명률 역시 농업용 준설 기계와 세원 확보를 위한 치수 장비는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지."
"이, 이것이 어찌 치수용 도관이란 말입니까! 이토록 두껍고 단단한 철물이 어찌 농기구란 말입니까!"
임사홍이 악을 썼다.
이진은 아무런 대꾸 없이 서태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서 대수. 준비한 것을 가동해라. 어사 대감께서 무식이 탄로나 부끄러워하시기 전에."
"예, 마마!"
서태강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야철지 계곡 아래로 달려갔다.
잠시 후, 대지를 흔드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계곡 아래에 설치된 수차가 거칠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진이 가리킨 거대한 강철 실린더—'고강탄 주레 가열 도관식 수차 펌프'가 요란한 기계음을 토해냈다.
쿵! 쿵! 쿵! 쿵!
일정한 행정 주기에 맞춰 정밀하게 가공된 피스톤이 강철 도관 내부를 고속으로 왕복하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진동과 압력 속에서도, 탄성 한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고강탄 도관은 찌그러지거나 균열 하나 가지 않았다.
슈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얼어붙은 회령천의 차가운 강물이 거대한 도관의 끝단을 타고 뿜어져 나왔다. 수십 길 상공으로 솟구친 물줄기는 계곡 너머 척박한 황무지의 고지대 농토로 정확하게 흘러들어 갔다. 겨울철 얼어붙은 흙바닥을 깨뜨리고 봄 농사를 준비하기 위한 온수가 뿜어져 나오는 장관이었다.
임사홍과 삼사 서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것이 정녕 물을 퍼 올리는 기계란 말인가?"
"보았느냐?"
이진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임사홍의 턱밑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것은 함경도 한원의 척박한 영지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강바닥의 모래를 준설하고 고지대에 온수를 공급하는 '수차 펌프'다. 이 추위 속에서 수압을 견디려면 이 정도 두께와 강도를 지닌 고강탄 강철이 아니고서는 당장에 터져버리고 말지. 어사, 그대의 눈에는 이것이 여전히 무기로 보이는가? 아니면 주상 전하의 은덕을 북방에 실현하는 구휼 기계로 보이는가?"
임사홍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기계의 위용은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분명 엄청난 철재를 소모한 거대한 장치였으나, 움직이는 목적은 오직 물을 퍼 올리는 것뿐이었다. 화약을 넣을 약실도, 포탄을 날릴 포구의 조준 장치도 없었다. 법적으로 완벽하게 가관(架管)의 범주에 들어맞는 농업용 기계였다.
"만약 그대가 이를 무기라 우겨 조정을 기만한다면, 나는 경국대전에 명시된 치수 방해죄와 영지 무고죄로 그대의 가문 전체를 탄핵할 것이다. 내 비록 유배된 몸이나, 왕실의 종친으로서 상소 한 장 올리지 못할 성싶으냐?"
이진의 목소리에는 서슬 퍼런 살기가 담겨 있었다. 전생에서 자신을 배신했던 이들을 처단할 때 품었던 냉혹한 안광이 임사홍의 심장을 꿰뚫었다.
임사홍은 다리가 풀리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침을 삼켰다. 대군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다. 경국대전을 들이밀며 합법적인 치수 장비라 주장하는 한, 이를 역모의 증거로 삼았다가는 역풍을 맞아 제 목이 먼저 달아날 터였다. 오히려 이 획기적인 치수 장비를 조정에 보고하여 세원 증대의 공으로 포장하는 것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득이었다.
"……과연, 대군 마마의 혜안이 놀랍사옵니다. 백성을 휼양하는 이토록 훌륭한 장치를 무기라 의심한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조정에는 마마께서 북방의 농토를 개간하기 위해 기이하고도 유용한 치수 기계를 완공하셨다고 상소하겠사옵니다."
임사홍은 굴욕감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이진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조소했다.
'어리석은 놈.'
임사홍이 믿은 대로, 이 장치는 완벽한 치수 장비였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했다.
이진의 망막 위에 투사된 '정밀 야금 설계도'의 3차원 투과 도면이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고강탄 주레 가열 도관식 수차 펌프 내부 투과도] - 내부 가압 실린더: 외경 120mm, 내경 80mm 고탄소 탄성강 - 핵심 장입 부품: 고진동 왕복 피스톤 및 초고강도 연신 스프링 코일 - 변환 효율: 기어 결합 시 분당 200발의 지속 가압 가능 (기관포 약실 및 격발 장치로 전환율 98.7%)
임사홍이 감탄한 수차 펌프의 내부 핵심 부품들—고진동 피스톤과 연신 스프링 코일은, 사실 수차용 기어를 떼어내고 화약 약실과 회전식 비결정 기어판에 결합하는 순간 즉시 수백 발의 철환을 쏟아내는 '초강도 속사 기관포'의 심장부였다.
철저하게 계산된 부품 분할 주조와 합법적 위장. 이진은 조선 조정의 감시망이라는 법률적 덫을 역이용하여, 자신만의 철기 군대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살상 무기의 부품들을 합법적으로 대량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생각했다니 다행이군. 어사 대감께서는 피로하실 테니 회령 성내의 객사에서 쉬어가시지요."
이진의 축객령에 임사홍은 서둘러 삼사의 무리를 이끌고 야철지를 벗어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진은 차가운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사 일행이 회령 성문을 나서는 바로 그 순간, 칠흑 같은 북방의 밤하늘을 찢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피이이이이익—! 쾅!
제철동의 서태강과 장인들이 일제히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국경선을 이루는 회령 계곡의 변방 진지, 그 험준한 산맥의 봉우리마다 붉은 섬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수십 개의 봉화가 어둠을 뚫고 일제히 일어섰다.
그것은 단순한 경계 경보가 아니었다. 붉은 화약 연기를 내뿜는 봉화는 오직 하나만을 의미했다.
"적습……! 여진족 본대의 대규모 침입이옵니다!"
장인의 비명이 칼바람에 흩어졌다.
이진의 눈동자가 봉화의 붉은 빛을 받아 기이하게 타올랐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그는 차갑게 식어가는 손끝을 꽉 쥐며, 방금 전 임사홍 앞을 흐르던 강철 수차 펌프를 바라보았다. 이제 위장을 벗겨내고 진짜 철의 위력을 보일 시간이었다.
"회군하라! 성문으로 들어가야 산다!"
야철지 외곽을 벗어나려던 임사홍의 행렬이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에서 역류해 들어왔다. 그들의 말들은 붉게 타오르는 봉화의 인화광에 놀라 앞다리를 치켜들며 울부짖었다. 임사홍의 조복은 이미 진흙과 눈더미에 더럽혀져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잘게 흔들렸다.
"대군! 오랑캐의 기병들이 계곡의 초소를 우회하여 이편으로 바로 내달리고 있사옵니다! 당장 회령성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늦었다."
이진의 목소리는 한 자루 잘 단조된 강철검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그는 계곡 아래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받았다. 바람 끝에 묻어나는 피비린내와 말땀 냄새가 그의 공학적 감각을 자극했다. 수백의 기병이다. 이 동토의 눈길에서 보병과 장인들을 이끌고 퇴각하는 것은 사지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짓에 불과했다.
"서 대수."
"예, 마마!"
"가관의 수차 연결 기어를 분리해라. 포차(砲車)를 제1방어선으로 전개한다."
대군의 서슬 퍼런 명령에 야철지는 순식간에 일사불란한 군사 기지로 탈바꿈했다. 장인들은 더 이상 평범한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군의 혹독한 규율 아래 기계의 오차를 밀리미터 단위로 깎아내던 기술 전사들이었다. 거대한 나무망치와 쐐기가 수차의 축을 때리자, 굉음과 함께 가관 펌프의 구동부가 분리되었다.
"포차 진입!"
두꺼운 참나무로 제작된 포차가 굴러와 강철 실린더와 결합했다.
그때였다. 이진의 시야가 푸른 광막으로 뒤덮였다.
[정밀 야금 설계도 시스템 동기화 시작] - 대상: 한원 특수강 속사포(漢原 特殊鋼 速射砲) 1호기 - 환경 온도: 영하 32도 - 기압 및 습도 보정치 계산 중...
"윽……!"
뇌수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통과 함께, 심장 부근의 혈관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한기가 그를 덮쳤다. 이진의 무릎이 꺾였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오한은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현대의 초월적 지식을 현실의 물리 법칙과 동기화하는 대가, 생체 열 에너지의 극단적 소모였다.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고, 거친 숨결이 하얀 서리가 되어 흩어졌다.
"마마!"
어둠 속에서 그를 감시하던 여을이 비명을 삼키며 달려와 그의 팔을 부축했다. 그녀의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가 이진의 얼어붙은 감각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진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밀쳐낸 뒤, 아직 식지 않은 2호 고로의 열수축 배출구 파이프에 타버린 장갑을 낀 손을 대었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가죽이 타들어 가며 열기가 혈관으로 스며들자, 겨우 시야가 맑아졌다.
"비켜라. 내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마라."
그는 망막에 떠오른 붉은 경고등에 집중했다. 영하 30도를 웃도는 혹한 속에서 강철의 연성은 급격히 저하된다. 이 상태에서 화약의 폭발 압력을 가하면 아무리 특수강이라 해도 포신이 깨져 나갈 위험이 있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 바로 가열로 폭발을 막았던 고령토 배합 기술이었다.
"약실 개스킷을 장착해라! 틈새가 없어야 한다!"
이진의 호통에 서태강이 허리춤에서 백색의 고령토 배합 링을 꺼내 약실의 회전부 틈새에 끼워 넣었다. 영하의 외기 속에서 급격히 수축하는 이 특수 고령토 개스킷은, 약실이 닫히는 순간 완벽한 기밀(氣密)을 유지하게 해 준다. 그리고 화약이 폭발하여 초고온의 가스가 가해지는 찰나, 열팽창을 일으키며 가스의 미세한 누출마저 원천 차단하는 이중 열수축 기밀 장치였다.
"대군! 정녕 미치셨습니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임사홍이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사헌부와 삼사의 호위 무사 열댓 명 역시 이진과 장인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수차 펌프라는 감언이설로 나를 속이더니, 결국 이 자리에서 사병을 부려 화포를 조립하는군! 이것은 명백한 역모다! 주상 전하의 명을 받든 어사로서, 내 더 이상 이 대역죄를 묵과할 수 없다!"
임사홍의 눈에는 야인들의 습격보다, 눈앞에서 움직이는 이 괴물 같은 철기 무기가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대군이 이 무기로 조정을 향해 총구를 돌린다면 사직이 흔들릴 터였다.
"무사들은 들어라! 대군 이진을 포박하고, 저 역모의 철기들을 파괴하라!"
"멈춰라!"
이진이 얼어붙은 목소리로 포효했다. 그의 안광에는 인간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 전생에서 기술을 도둑맞고 배신당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조선의 조정 역시 똑같았다. 외적의 칼날이 목전에 들이닥친 순간에도, 오직 권력의 안위와 붕당의 이익만을 위해 스스로의 팔다리를 자르려 들고 있었다.
"임사홍. 네놈의 그 얇은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그 검을 거두어라."
"무슨 망발이냐! 역적 놈이 감히 어사에게—"
"저기 보이지 않느냐?"
이진의 손가락이 어둠이 내려앉은 계곡 입구를 가리켰다.
두두두두두두!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칠흑 같은 숲속에서 횃불을 든 야인들의 선봉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가죽 투구를 쓰고 늑대 가죽을 두른 여진족의 철기병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조선군의 가죽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길 수 있는 거대한 철퇴와 장궁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기병들의 대열 중앙, 십여 마리의 말이 거대한 썰매를 끌고 밀어닥치고 있었다. 썰매 위에 얹혀 있는 것은 조잡하지만 거대한 주철제 대포였다.
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대포의 노벽 두께와 배합 비율 수치는, 자신이 일부러 흘렸던 '가짜 가열로 배합 장부'의 임계 열팽창 균열 수치와 기이할 정도로 일치하고 있었다. 한명진의 밀정단이 훔쳐 간 가짜 기술이 벌써 북방의 여진족 손에 흘러 들어가 실물로 구현된 것이 분명했다.
"저들이 들고 온 포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진이 임사홍을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저것은 네놈들이 그토록 탐내던 나의 철기 기술이자, 동시에 저 오랑캐들의 손에서 터져 나갈 자멸의 불꽃이다. 하지만 그전에 저 포탄이 이 야철지를 직격한다면, 네놈의 그 여린 가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임사홍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여진족의 대포가 아군을 향해 서서히 포신을 드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선택해라, 임사홍."
이진이 탄포의 격발 레버를 꽉 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한기가 강철 레버를 타고 하얗게 서려 붙었다.
"여기서 나를 묶고 저 오랑캐의 포탄에 고깃덩어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완성한 조선의 진짜 철이 어떻게 저 야만인들을 쓸어버리는지 똑똑히 지켜볼 것인가."
임사홍의 검끝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일촉즉발의 대치 속에서, 여진족의 거대한 주철포 구멍이 마침내 야철지 중앙을 향해 검은 아가리를 벌렸다. 부싯돌의 불꽃이 도화선을 타들어 가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