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진이 너를 부른다라."
이진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얼어붙은 바람이 문틈으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밀려들었다. 가마터의 열기가 닿지 않는 공방의 구석진 자리는 이미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이진은 흔들리는 여을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배신자의 최후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찌르고 웃던 자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동료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고 죽어가던 그 순간의 분노는 여전히 그의 영혼 깊은 곳에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오직 철저한 계산과 통제, 그리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 법칙만을 신뢰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서서 온몸을 떨고 있는 이 여인은, 자신의 한랭증 발작 때 체온을 나누어 목숨을 구해 준 자였다. 이진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것을 가져가거라."
이진은 조립대 위에 놓여 있던 두툼한 가죽 지갑을 툭 던졌다. 가죽 지갑 안에는 붉은 실로 꼼꼼하게 묶인 서책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여을이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받쳐 들었다.
"유황 가스를 제어하기 위한 석탄 미탄 배합률 수치다. 가열로의 온도를 단시간에 극대화하면서도 노벽의 균열을 막는 비책이지."
여을의 손가락이 서책의 표지를 쓸었다. 그러나 이진의 차가운 손가락이 그 위를 강하게 덮어눌렀다.
"단, 이 수치대로 불을 지피면 임계 열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고로가 폭발한다. 찰나의 온도는 얻을 수 있으나, 결국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자멸의 수치다. 한명진이 네게 진위를 물으면, 이 장부를 바치고 그것이 진짜라고 증언해라."
여을의 숨결이 순간 멎었다. 대군은 이미 자신을 감시하던 한명진의 손길을 역으로 이용할 덫을 파놓았던 것이다.
"마마, 하지만 좌상 대감은 의심이 극도로 많으신 분입니다. 만약 이 장부가 거짓임을 눈치채신다면, 한양에 잡혀 있는 제 동생들은……."
"그자가 이 장부의 의심을 풀기 위해선 직접 가마를 지어보는 수밖에 없다. 한양 근처에 이만한 고로를 몰래 짓는 데만 해도 수만 냥의 거금과 몇 달의 시간이 들 터. 그 탐욕스러운 영감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네 동생들을 해치지 못한다."
이진이 손을 거두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머릿속으로 야금 설계도를 지속해서 띄우며 연산한 대가, 심장으로 파고드는 한랭증의 전조였다. 그는 공방 한구석에서 붉게 이글거리는 가열로의 석탄 열기에 손을 가까이 대며 말을 이었다.
"네 동생들의 목숨은 한명진이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새 철기가, 그자의 목덜미를 겨누는 날 비로소 온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믿어라. 한명진의 허황된 약조보다, 내 강철의 파괴력이 훨씬 더 확실한 이치니까."
여을은 침묵했다. 대군의 푸른 눈동자에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독선이 서려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독선이 세상 그 어떤 구원의 약속보다 단단하고 굳건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서책을 품에 안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옵니다, 마마."
***
사흘 뒤, 회령 관아의 밀실.
바깥은 영하 20도를 밑도는 칼바람이 불어치고 있었지만, 밀실 안은 숯불 화로의 열기로 후끈했다. 기름진 음식 냄새와 비싼 술 향기가 코를 찔렀다.
"대군마마께서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왕림하셨습니까?"
객주 조필두는 퉁퉁한 얼굴에 기름진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으나, 그의 눈빛에는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비록 왕실의 방계 대군이라 하나, 조정에서 쫓겨나 함경도 구석에 유배된 '망나니'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속내였다. 게다가 조필두의 뒤에는 함경도 관찰사 김형우와 한양의 훈구 대신들이 버티고 있었다. 북방의 밀무역을 독점하며 쌓아 올린 부(富)는 그에게 왕족 앞에서도 꼿꼿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었다.
"조필두."
이진은 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얼어붙은 손을 불에 쬐었다. 고온의 화로 근처에 오자 심장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네놈이 관아의 창고에서 빼돌린 담피가 삼천 장, 그리고 조정에 바쳐야 할 의주 행궁 보수용 황동 주괴 오백 근을 사사로이 유통해 한양의 경강상인들과 폭리를 취한 장부가 여기 있다."
이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품 안에서 꺼낸 두툼한 장부 한 권이 조필두의 발치에 툭 떨어졌다.
조필두의 얼굴에서 기름진 미소가 순식간에 싹 가셨다. 그는 흠칫 놀라 장부를 펼쳤다. 장부에는 일자별, 수량별, 그리고 결탁한 관원들의 수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이것을 어찌……! 이건 터무니없는 모함입니다! 소인은 그저 국법을 준수하며 북방의 척박한 무역을 도왔을 뿐이옵니다!"
"네놈들이 사용하는 복식부기는 겉보기엔 그럴싸하지."
이진이 차갑게 비웃었다. 현대 대기업의 수석 연구원 시절, 수십억 단위의 프로젝트 예산과 원가 계산을 밥 먹듯이 했던 그였다. 조선의 조잡한 이중 장부 따위는 그의 망막에 투사되는 수치 연산 장치 없이도, 단 몇 분만 훑어보면 횡령의 흐름이 한눈에 파악되었다.
"회령의 사철 수급량과 장인의 숫자, 그리고 네놈이 경강상인에게 넘긴 황동의 무게를 대조해 보았다. 황동은 열을 가해 주조할 때 평균 3%의 기화 손실이 발생하지. 하지만 네 장부에는 기화 손실율이 15%로 잡혀 있더군. 12%의 황동 주괴가 어디로 증발했겠느냐? 관찰사 김형우의 뒷주머니, 그리고 한양의 좌상 대감 댁 안채로 흘러 들어갔겠지."
조필두의 이마에서 주르륵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기화 손실율이라는 생소한 단어와, 너무나 정밀하게 짚어내는 수치 앞에 사기꾼의 혀는 얼어붙었다. 조선의 어떤 관리도 이토록 세밀한 물리적 수치와 야금학적 손실을 계산해 내지 못했다. 대군의 머릿속은 인간의 계산 속도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그리고 여기,"
이진이 조필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의 완벽주의적 결함은 이런 지저분한 비리와 미숙한 거짓말을 마주할 때 폭군처럼 발현되었다. 그의 목소리에 서린 서슬 퍼런 살기에 조필두는 숨을 쉬지 못했다.
"국왕의 즉위 교서에 명시된 예외 규정, '공납 면제 대상국 조운선'의 권한을 증명하는 황동 식별표 세 개를 네놈이 사사로이 보관하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고 있다는 것도 안다. 감히 임금의 교서를 사리사욕의 방패막이로 삼다니. 대명률의 예외 조항을 어긴 죄는 삼족을 멸하는 참형이다."
"마, 마마! 살려주십시오! 그것은 소인의 독단이 아니라, 관찰사 대감께서……!"
조필두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이마를 찧는 소리가 밀실 안에 둔탁하게 울렸다. 이진의 압도적인 지적 우위와, 법리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카리스마 앞에 거상의 오만함은 순식간에 박살 났다.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 황동 식별표를 내놓아라. 그리고 향후 회령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모든 조운선의 선적 권한을 내게 넘겨라."
"하, 하지만 관찰사 대감께서 아시면 소인은 목이 날아갑니다! 한양의 눈도 무섭사옵니다!"
"김형우?"
이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큰 키가 조필두에게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자가 내게 보낸 밀정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느냐? 사헌부의 검수인마저 내 발밑에 조아리고 갔다. 네 목숨을 거두는 것은 관찰사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손끝이다."
이진의 서늘한 기세에 조필두는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결국 품 깊숙한 곳에서 붉은 비단에 싸인 물건을 꺼냈다.
황동으로 제작된, 국왕의 어인이 선명하게 찍힌 식별표였다. 이것만 있으면 사헌부나 호조의 검문 없이 조운선을 무사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진은 황동 식별표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만족스러웠다.
"현명한 선택이다. 이제 물러가라. 만약 한양이나 관찰사에게 이 일에 대해 한 마디라도 흘린다면, 네놈의 가문 전체가 대명률의 칼날 아래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조필두는 머리를 조아리며 혼비백산하여 밀실을 기어 나갔다.
***
조필두가 나가자, 이진은 밀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는 가져온 황동 식별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윽……!"
지독한 냉기가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뻗어 나왔다. 조필두의 횡령 장부를 머릿속으로 초고속 연산하고, 성종 즉위 교서의 법리적 틈새를 찾아 설계도와 동기화한 부작용이었다.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고, 전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손톱 밑이 검푸르게 죽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진은 비틀거리며 밀실 한편에 마련된 온돌 벽면에 몸을 밀착했다. 펄펄 끓는 온돌의 열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자, 겨우 숨통이 트였다. 이 극심한 한랭증은 그가 초월적인 지식을 현실에 불러올 때마다 치러야 하는 잔혹한 대가였다. 하지만 이 정도 고통쯤은 조선 조정의 목줄을 끊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아직…… 멈출 수 없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황동 식별표를 집어 들었다.
망막 위에 푸른빛의 반투명한 야금 설계도와 조선 조운선의 도면이 겹쳐서 떠올랐다.
[조선 후기식 조운선(漕運船) 하중 해석] - 최대 적재량: 1,000석 (약 80톤) - 수송 한계 하중 및 복원성 한계선 계산 완료. - 법률적 제한: 경국대전 호전(戶典) 조운조(漕運條) - 선적 높이 3척 초과 금지. - 우회 설계안: 선박 하부 용골(龍骨) 좌우측 격실(Compartment) 내장형 수송관 배치.
이진의 눈앞에 조운선의 3D 단면도가 부드럽게 회전하며 나타났다.
일반적인 검문관들은 배의 갑판 위와 창고 내부만을 수색한다. 배 밑바닥, 즉 용골 옆의 부력 격실은 물에 잠겨 있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뿐더러, 함부로 열었다가는 배가 침몰할 위험이 있어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금기의 구역이다.
이진은 이곳에 특수강 포신 완제품 10기를 거치할 격실 설계를 구상했다. 포신은 고압을 견디기 위해 저탄소 탄성강으로 단단하게 주조되어 있어, 바닷물의 염분에도 부식되지 않도록 표면을 황동으로 얇게 도금할 계획이었다.
"황동 식별표를 단 도관 수송선……."
이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겉으로는 강줄기의 흙모래를 퍼 올리는 '치수용 도관선'으로 위장하고, 배 밑바닥 격실에는 조선의 사직을 뒤흔들 초강도 기관포의 포신 10기를 숨겨 나른다. 황동 식별표가 있으니 전수 검사는 면제될 것이고, 설령 불심검문을 당하더라도 물속에 잠긴 격실을 찾아낼 방도는 없다.
망막의 연산 장치가 수송 한계 하중과 무게 중심의 배분을 완벽하게 계산해 냈다. 오차는 0.01% 이하였다.
"서태강."
이진이 밖을 향해 나직하게 불렀다.
문이 열리며, 숯가루를 잔뜩 묻힌 얼굴의 서태강이 들어왔다. 그의 눈은 이제 이진을 향한 맹목적인 숭배로 가득 차 있었다. 대군이 보여준 강철의 기적은 고집 센 노장인을 완전히 무릎 꿇렸다.
"예, 마마! 부르셨습니까!"
"이 도면대로 조운선의 하부 격실을 개조해라. 그리고 주조된 포신들을 황동으로 얇게 전기도금하여 그 안에 격치하도록."
서태강은 이진이 내민 정밀한 설계도를 받아들었다. 현대식 하중 분산 설계가 적용된 기이한 도면을 보며, 서태강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것은…… 배의 무게 중심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무게의 철물을 물속에 숨길 수 있는 신묘한 설계옵니다! 정녕 마마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칭찬은 됐다. 오차는 단 1푼도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격실의 균형이 맞지 않아 배가 기울기라도 한다면, 네놈의 손목을 잘라 고로에 던질 것이다."
이진의 가혹한 경고에 서태강은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대군의 혹독함은 기술의 완벽함을 보증하는 신호였기에, 장인에게는 오히려 신뢰의 징표였다.
"소인의 목숨을 걸고 완벽하게 만들어 내겠옵니다!"
***
그날 밤, 회령 야철지의 외곽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대지를 쓸고 지나갈 때마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부딪히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하늘에는 구름이 짙게 깔려 달빛조차 들지 않았다.
여을은 얇은 겉옷을 걸친 채, 제철 기지의 후문을 향해 은밀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방금 전 이진의 공방에서 필사한 '조운선 하부 격실 설계 도면'과 '가짜 가열로 배합 장부'서책이 꼭 쥐여 있었다.
그녀는 한양으로 떠나야 했다. 동생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한명진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이 정보를 한양으로 전달해야만 했다. 한명진이 이 도면과 장부를 받으면 일시적으로 동생들의 숨통을 틔워줄 것이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제 동생들을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여을은 입술을 깨물며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눈밭을 밟는 그녀의 발소리가 바스락거리며 고요한 정적을 깨웠다. 사방은 고요했고, 오직 차가운 바람 소리만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기지의 경계를 벗어나, 한양으로 향하는 비밀 연락망과 닿을 수 있었다.
툭.
돌연,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등 뒤에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드는 느낌과 함께, 나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그것은 눈을 쓰는 소리 같기도 했고, 뱀이 기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여을의 전신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붉은 등불 하나가 스르륵 밝아졌다.
등불의 미약한 불빛이 비춘 것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진의 얼굴이었다.
그의 손에는 여을이 품에 숨긴 도면의 원본이 들려 있었다. 이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오직 얼어붙을 듯한 정적 속에서 여을을 응시했다. 은은하게 흔들리는 등불 빛 아래, 그의 푸른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밤바람이 찬데,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느냐."
이진의 나직한 목소리가 한겨울의 서리처럼 여을의 가슴에 매섭게 내리꽂혔다. 여을의 눈동자가 극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방 외곽의 차가운 눈밭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