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바람이 울부짖는 회령의 밤은 뼛속까지 얼려 버릴 듯 매서웠다. 가열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화광(火光)만이 유일한 온기였다. 서태강이 바친 청백색 강철 기어판을 내려다보는 이진의 눈동자에 붉은 열기가 어른거렸다.

그 완벽한 톱니바퀴 위로, 이진의 망막에 푸르스름한 수식과 기하학적 선들이 어지럽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현대 제철 공학의 정밀 설계도였다.

머릿속에서 계산식이 동기화되는 순간, 어김없이 대가가 찾아왔다. 심장 가장자리에서부터 차디찬 얼음 파편이 돋아나는 듯한 극심한 오한. 이진은 이를악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입술이 순식간에 푸르게 질리고, 손끝이 굳어 들어갔다. 잔여 체온이 급격히 소모되는 한랭증의 발작이었다.

여을이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등에 더운 온수를 채운 가죽 주머니를 밀착시켰다. 그녀의 손길은 기민했으나, 눈빛에는 경계와 연민이 교차하고 있었다. 뜨거운 온기가 척추를 타고 흐르자 이진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가열로 너머, 눈 덮인 침엽수림의 나뭇가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스스스슥.

바람 소리에 묻힌, 가죽신이 눈을 밟는 나직한 마찰음. 일반적인 짐승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보폭과 무게중심이 철저히 통제된 무인의 발걸음이었다.

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가열로 옆에 놓인 가짜 배합 장부를 슬그머니 여을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밀어 놓았다. 유황 가스를 제어하기 위한 석탄 미탄 배합률 수치 중, 고의로 임계 열팽창 균열 수치를 바꾼 덫이었다.

"침입자다."

이진의 나직한 음성이 떨어지기 무섭게, 야철지 사방의 어둠 속에서 검은 복색을 한 사내들이 담벼락을 넘어 날아올랐다. 그들의 손에는 사헌부 밀정들이 사용하는 예리한 협도(俠刀)와 쇠줄이 쥐어져 있었다.

"역모의 증거를 확보하라! 대군의 목숨은 상관없다, 도면과 철물을 입수하라!"

수장의 냉혹한 명령과 함께 사내들이 가열로를 향해 쇄도했다.

"이놈들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서태강이 노효를 터뜨리며 집게를 휘둘렀으나, 상대는 살인에 특화된 조정의 최정예 첩보 관원들이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집게를 피한 밀정이 서태강의 목덜미를 향해 칼날을 그었다.

그 순간, 이진이 가열로의 고온 송풍구 레버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화아아악!

송풍구 내벽, 영하의 외기 속에서 열수축 강도가 극대화되도록 특수 배합된 고령토 개스킷이 즉각적으로 압력을 제어하며, 모여 있던 초고온의 가스와 탄화 미립자가 밀정들의 안면을 향해 폭발하듯 뿜어졌다.

"끄아악!"

순식간에 안면을 덮친 섭씨 수백 도의 열풍에 밀정 두 명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살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곳은 내 영지다. 조정의 사냥개들이 멋대로 날뛸 수 있는 도살장이 아니란 말이다."

이진이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의 손에는 이미 가열로에서 갓 꺼낸, 아직 붉은 기운이 가시지 않은 집게가 들려 있었다.

여을이 대군의 앞을 막아서며 품에서 암기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정체는 한명진이 보낸 첩자였으나,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몸은 본능적으로 이진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여을의 암기가 허공을 가르며 밀정 수장의 어깨를 꿰뚫었다.

"치명적인 독이다. 물러서라!"

수장은 어깨에 박힌 침을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야철지 주변에서 대군의 사설 경비단과 야철꾼들이 횃불을 들고 몰려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감을 직감한 밀정 수장이 신형을 뒤로 날렸다.

"퇴각한다! 철물을 챙겨라!"

그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부축하며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공방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타버린 가죽 냄새만이 남았다.

서태강은 헐떡이며 이진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소신들이 미련하여 마마를 위험에 빠뜨렸나이다."

"됐다. 놈들의 목표는 내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 기어판과 기술이다."

이진은 손에 든 청백색 기어판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한명진의 감시망이 벌써 이곳까지 뻗쳤다. 경국대전의 사병 주조 금지령은 무시무시한 법력(法力)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완성된 형태의 기관포 포신이나 약실, 격발 장치가 한꺼번에 발각된다면, 아무리 대군이라 해도 역모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나누어야 한다.'

이진의 머릿속에서 현대식 경영 기법과 분산 생산 프로세스가 빠르게 정렬되었다.

"서태강."

"예, 마마. 하교하시옵소서."

"회령 인근의 사철 소작 공방 열 곳의 명부를 가져오너라. 이제부터 우리는 이 기어판을 통째로 만들지 않는다."

이진의 선언에 서태강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이 완벽한 기어판을 나누어 만든단 말씀이옵니까?"

"그렇다. 톱니바퀴의 축은 제1공방, 외부 링 기어는 제2공방, 회전 기어의 고정 핀은 제3공방에서 주조한다. 각 공방에는 전체 도면을 주지 않는다. 오직 자신들이 담당한 부분의 단순한 치수 도면만 준다."

이진은 망막에 투사된 설계도를 조각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저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것이 화포의 부품인지, 단순한 농기구의 부속인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감찰관들이 공방을 들이닥쳐 뒤진다 한들, 그저 쓸모없는 철 조각 몇 개만 발견할 뿐이지."

"하지만 마마……."

서태강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철물은 주조하는 가마의 온도와 식히는 속도에 따라 미세하게 크기가 달라지옵니다. 하물며 제각기 다른 공방에서 만든 조각들을 어찌 하나로 조립한단 말씀이옵니까? 0.1밀리미터만 어긋나도 기어는 맞물리지 않고 깨져 버릴 터인데……."

장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었다. 조선의 기술 수준으로는 서로 다른 곳에서 만든 부품을 정밀하게 조립하는 '호환성'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진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바로 현대 야금학의 극의다. 내가 지시하는 배합비와, 최종 조립 단계에서의 압연 공정을 거치면 오차는 상쇄된다."

이진이 말한 것은 바로 '합산 공차 상쇄 방식(Tolerance Stack-up Analysis)'과 '모듈러 어셈블리' 기법이었다. 각 부품의 허용 오차 범위를 양(陽)과 음(陰)으로 교차 배정하여, 최종 조립 시 오차가 서로를 상쇄하도록 설계하는 고도의 통계적 기법이었다. 조선의 장인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다.

"당장 시행하라. 거역하는 자는 역모로 다스릴 것이다."

이진의 독선적이고 냉혹한 명령에 장인들은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대군의 눈빛은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거인의 그것이었다.

사흘 뒤, 회령 전역의 소작 공방 10여 곳으로 조각난 분할 도면들이 은밀히 전달되었다.

제1공방에서는 둥근 황동 판때기만을 주구장창 깎았고, 제3공방에서는 구멍이 뚫린 쇠막대기만을 두드렸다. 장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대군이 보낸 서리발 같은 감시관들의 눈초리 아래에서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부품만을 기계적으로 생산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한양에서 급파된 사헌부 감찰관들과 내금위 군사들이 회령의 야철지를 포위했다.

"조정의 금령을 어기고 사사로이 무기를 주조한다는 고변이 있었다! 가택을 수색하겠다!"

사헌부 분대장인 지평 이우성이 거만한 태도로 야철지 마당에 들어섰다. 그의 뒤로 무장한 군사 수십 명이 먼지를 일으키며 늘어섰다.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이진은 가열로 옆의 온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차갑게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의 곁에는 서태강과 야철꾼들이 도끼와 망치를 쥔 채 살기등등한 눈으로 군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군마마, 소신은 임금님의 밀명을 받고 온 자이옵니다. 사사로운 감정은 없으니, 길을 비키시지요."

이우성이 손짓하자 군사들이 공방 안으로 들이닥쳐 사방을 헤집기 시작했다. 가마를 부수고, 모래통을 뒤집으며, 장인들의 개인 상자까지 샅샅이 털어냈다.

"이게 무엇이냐!"

이우성이 공방 구석에서 발견한 강철 조각들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이진이 설계한 비결정 기어판의 외부 링과 회전 축들이었다. 제각기 분리되어 굴러다니는 철물들은 얼핏 보기에 기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것이 화포의 부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이우성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이진을 압박했다.

그러나 이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무식하군. 사헌부의 관원이라는 자가 농사법 한번 제대로 공부해 보지 않은 모양이구나."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그것은 이번 겨울, 함경도의 척박한 땅을 개간하기 위해 내 영지민들과 함께 고안한 '대형 회전식 탈곡기'와 수차의 수로 바퀴 부속이다."

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우성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큰 키와 압도적인 기백에 이우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경국대전 치수 가관(治水 架管) 및 공납 농기구 제조 조항을 읽어보았느냐? 백성들의 진휼과 농업 진흥을 위해 제조하는 도관 및 농기구 부속은 조정의 사전 허가 대상에서 제외되며, 중량 규제 역시 면제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진은 품에서 경국대전의 해당 구절이 적힌 문서를 꺼내 이우성의 면전에 들이밀었다.

"이것들이 어찌하여 농기구란 말입니까! 이토록 단단하고 정밀한 철물이!"

"직접 보아라."

이진이 서태강에게 눈짓했다. 서태강이 굴러다니던 링 기어와 축을 가져와 마당에 놓인 목제 수차 모형에 끼워 맞췄다.

철컥.

놀랍게도, 무기의 핵심 부품이었던 기어들이 목제 수차와 결합하자 완벽한 수로 회전 바퀴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물을 흘려보내자 기어가 부드럽게 맞물리며 아래쪽의 나무 날개를 돌렸다.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농업용 수차의 동력 장치였다.

"이것은 함경도의 얼어붙은 강물을 길어 올리기 위한 치수용 펌프의 회전 링이다. 감찰관, 네 눈에는 이것이 사람을 죽이는 화포로 보이느냐? 아니면 백성을 살리는 농기구로 보이느냐?"

이우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철물들을 이리저리 돌려보았으나, 조립된 상태의 그것은 완벽한 민수용 기구였다. 이것이 분리되어 다른 포신과 결합하면 가공할 속사 기관포의 격발 장치가 된다는 사실은, 현대식 기계공학을 알지 못하는 조선의 관료로서는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게다가 여기, 함경도 관찰사의 직인이 찍힌 농업 진흥 기구 임시 허가증도 있다."

이진이 들이민 서류에는 지난번 법리로 굴복시켰던 관찰사 김형우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김형우 역시 이것이 무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대군의 압박에 못 이겨 도장을 찍어준 것이었다.

이우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명백한 합법이었다. 수색령을 내렸으나 증거는커녕 백성을 위해 농기구를 개발한 대군의 선행만 증명해 준 꼴이 되었다.

"……소신이 미처 대군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나이다."

이우성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이 철물들이 합법적인 농기구 부속임을 증명하는 검수 도장을 이 문서에 찍어라. 네놈들이 사사로이 내 공방을 어지럽힌 대가다."

이진의 서슬 퍼런 요구에, 이우성은 굴욕감을 느끼며 품에서 검수인을 꺼내 조인서에 날인했다. 조정의 감찰관이 직접 이 비밀 무기의 부품들을 '농기구'로 공인해 준 순간이었다.

"돌아가라. 그리고 한양의 좌상 대감에게 전해라. 북방의 백성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철을 깎고 있으니, 쓸데없는 의심으로 국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이우성과 사헌부 군사들은 쫓기듯 야설지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야철꾼들과 장인들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대군마마! 저 어리석은 자들이 우리 화포의 심장을 농기구라며 제 손으로 도장까지 찍어주고 갔습니다!"

"마마의 지혜는 정녕 하늘을 찌르옵니다!"

장인들의 환호성 속에서, 이진은 묵묵히 흩어진 기어 조각들을 수거했다.

그는 공방 문을 닫고 홀로 조립대 앞에 섰다.

망막에 투사된 푸른색 3D 모듈러 도면이 실시간으로 부품들의 미세한 치수를 측정했다. 제1공방에서 만든 링의 내경 오차는 +0.05mm, 제2공방에서 만든 축의 외경 오차는 -0.05mm.

"공차 상쇄 완료."

이진이 두 부품을 겹치고 냉간 압연기로 강하게 내리눌렀다.

쾅!

두 개의 불완전한 조각이 합산 공차 상쇄 방식으로 완벽하게 맞물리며, 단 0.01밀리미터의 유격도 없는 초정밀 속사 기어 뭉치로 거듭났다. 현대식 조립 공학의 승리였다. 이로써 조정의 감시를 완전히 피하면서도, 필요할 때 단 수 분 만에 조립하여 발사할 수 있는 기관포의 핵심 메커니즘이 완성된 것이다.

이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나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여을이었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으로 이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한양에서 날아온 전서구의 은밀한 밀지가 쥐어져 있었다.

"마마……."

"무슨 일이냐."

여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좌상 대감께서…… 저를 한양으로 소환하셨습니다. 제 동생들의 목숨을 담보로, 이번에 입수한 가짜 가열로 배합 장부의 진위를 대면하여 보고하라 하십니다."

이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가짜 장부를 미끼로 던진 덫에 한명진이 반응한 것이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여을이 함경도 경계를 넘어 한양의 사지로 들어가야 함을 의미했다.

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배신해야 하는 여을의 눈에 고뇌의 눈물이 고였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마마."

이진은 그녀를 묵묵히 응시했다. 차가운 북풍이 창문을 흔들며 공방 안으로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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