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 이하 서른다섯 칸의 혹한이 공방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폐부를 찔렀다.
붉게 이글거리던 마르텐사이트 강괴의 잔열이 급격히 사그라드는 것과 동시에, 이진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던 청색의 정밀 야금 설계도가 잘게 흔들리며 균열을 일으켰다. 초월적인 야금 지식을 현실의 물리 법칙과 동기화한 대가는 잔혹했다.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한기가 혈관을 타고 사지로 뻗어 나갔다. 손끝이 검푸르게 변색되며 감각이 마비되었고, 기도가 얼어붙는 듯한 고통에 숨을 들이쉴 수조차 없었다.
"마마! 정신을 차리십시오, 마마!"
서태강의 다급한 비명이 이진의 귓가에서 아득하게 멀어졌다. 고압 가스가 방출되며 하늘로 쏘아 올려진 황색 연기 기둥을 보고 관군들이 들이닥치고 있다는 경고도, 지금 이진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뇌가 산소 부족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완전히 굳어버린 다리가 꺾이며 이진의 신형이 차가운 흙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찰나, 차가운 어둠 속에서 오직 하나의 온기가 이진을 옭아맸다.
여을이었다. 그녀는 관군이 사방을 포위해 온다는 공포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혼절해 가는 이진의 무거운 몸을 가냘픈 어깨로 지탱하며, 가열로의 노벽 아래로 필사적으로 끌고 갔다. 고로 내부의 거대한 열기가 비상 배출구를 통해 희미하게 토해내고 있는 잔열 지대였다.
여을은 이진을 거친 흙바닥에 뉘인 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한 자락의 가식도 없는, 오직 생존만을 위한 가차 없는 손길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드러낸 채 이진의 얼어붙은 상체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얼음덩어리 같은 이진의 살결에 여을의 뜨거운 살결이 밀착되었다.
"흐윽……!"
여을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심한 한랭증의 냉기가 그녀의 온몸을 잠식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진의 목덜미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자신의 더운 숨결을 그의 입술 사이로 불어넣었다. 생체 온도의 강제적 동기화였다.
이진의 뇌리에 꺼져가던 푸른 설계도가 다시금 미세한 빛을 발하며 복구되기 시작했다.
여을의 몸을 통해 전해지는 심장박동과 온기가 얼어붙었던 이진의 혈류를 강제로 깨웠다. 수축했던 기도가 열리며 차갑고도 뜨거운 호흡이 허파를 채웠다. 청색의 수치들이 망막 위에서 빠르게 정렬해 나갔다. 이진은 서서히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땀방울과 눈물로 얼룩진 여을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망은 기이할 정도로 단단했다.
"…살아나셨사옵니까."
여을이 안도 섞인 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이진은 혼란스러웠다. 전생의 배신으로 인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불신해 왔던 그였다. 이 여인은 왕의 밀명을 받고 자신을 감시하러 온 첩자가 분명하거늘, 어찌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 차가운 냉기를 받아내었단 말인가. 가슴 한구석에서 정체 모를 불쾌함과 미세한 연민이 뒤섞여 솟구쳤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두구두구두구!
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마침내 야설지 가마터의 울타리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붉은 횃불의 그림자가 얇은 창문 종이를 붉게 물들였다.
"안의 자들은 모두 들어라! 함경도 북변 초관 임백호다! 이 야밤에 역모의 봉화와 같은 괴이한 연기를 피우고 야철을 자행하는 자들은 즉시 무릎을 꿇고 관아의 조사를 받으라!"
거친 고함과 함께 쇠가죽 채찍으로 문을 후려치는 소리가 공방을 뒤흔들었다. 서태강을 비롯한 수십 명의 장인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이진을 바라보았다. 식어가는 강괴들과 바닥에 널린 기묘하게 가공된 무기 부품들은 영락없는 역모의 증거였다.
이진은 대군의 의복을 매만지며 천천히 일어섰다. 아직 다리가 완벽히 풀리지 않았으나, 그의 눈빛은 이미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을 열어라."
이진의 나직한 명령에 서태강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죽 빗장을 풀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차가운 북풍과 함께 서슬 퍼런 군관들의 칼날이 안으로 들이쳤다. 초관 임백호는 험악한 인상으로 공방 내부를 훑어보았다. 식어가는 거대한 가마와 바닥에 뒹구는 정체불명의 쇳덩이들을 본 그의 눈이 번뜩였다.
"이것이 무엇이냐! 조정의 허가 없이 이 정도 규모의 야철을 행하는 것은 대명률과 경국대전을 위반한 대역죄다! 모두 포박하라!"
"무엄하도다!"
공방의 천장을 울리는 이진의 호통이 임백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압도적인 귀기(貴氣)와 차가운 오만함에 군사들이 멈칫하며 창끝을 내렸다. 임백호 역시 이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유배된 몸이라 하나, 눈앞의 사내는 명백한 왕실의 방계이자 무소불위의 망나니로 이름을 떨쳤던 은장대군 이진이었다.
"대대대군 대감…… 어찌 대감께서 이 천한 야철지에 계시옵니까?"
"이 눈먼 관군 놈들이 감히 누구의 앞길을 막아서는가!"
이진은 소맷자락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조선 경국대전의 치수 가관(治水 架管) 조항이 적힌 문서를 꺼내 임백호의 얼굴 앞에 내던졌다.
"대명률을 논하고 경국대전을 들먹여? 네놈들이 법을 알기나 하느냐! 경국대전 공전(工典) 치수조를 보아라. '겨울철 변방의 치수 및 도강 준설을 위한 장비의 주조와 수리는 지방 관할 관청의 묵인 하에 대형 농기구의 예에 준하여 면제한다'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함경도 관찰사 김형우 역시 이 법리를 인정하고 물러갔거늘, 일낱 국경의 초관 따위가 감히 조국의 치수 사업을 방해하려 드는가!"
임백호는 바닥에 떨어진 문서를 주워 들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종이에 적힌 글씨는 명백한 조정의 고서 선례와 경국대전의 맹점을 찌르는 법리적 방어벽이었다.
"하오나 대감, 저 가마에서 나온 황색의 거대한 연기는……."
"겨울철 얼어붙은 회령의 강바닥을 뚫기 위해 고온의 수증기와 석탄을 배합하는 과정에서 생긴 매연일 뿐이다! 준설용 대관(大管)을 주조하기 위해 가마를 돌린 것이 어찌 봉화란 말이냐! 만일 봄이 되어 강물이 넘쳐 육진의 농토가 수몰된다면, 네놈이 그 책임을 지고 목을 내놓겠느냐!"
이진의 폭압적인 질타와 빈틈없는 법리적 공세에 임백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조선의 법률은 왕실의 종친이자 대군이 명확한 예외 조항을 들이밀며 합법적인 치수 장비 생산이라 주장하는 이상, 현장에서 함부로 체포할 권한을 군관에게 주지 않았다.
"소, 소관이 미처 대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결례를 범했사옵니다. 군사를 물릴 것이오니 노여움을 거두소서."
임백호는 넙죽 엎드려 절을 올린 뒤, 황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퇴각했다.
관군들의 말발굽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공방 안에는 팽팽했던 긴장감이 풀리며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장인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이진의 발아래 엎드렸다.
"대감마마! 진정 신산(神算)이시옵니다! 이리 쉽게 관군들을 물리치실 줄은……."
서태강이 감격에 겨워 울먹였다. 그러나 이진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감탄할 시간 없다. 관군들이 물러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저들은 한양의 훈구파들에게 이 사실을 고할 것이고, 감사관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전에 우리는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진은 여을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묵묵히 도가니의 온도를 체크하고 있었다. 이진은 그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서태강을 소집했다.
"서태강, 그리고 장인들은 모두 들어라. 오늘 밤, 우리는 기관포의 심장인 '회전식 비결정 기어판'을 가공한다."
장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기어판이라 하심은…… 톱니바퀴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하오나 대감, 이리 단단한 마르텐사이트 강괴를 어찌 톱니 모양으로 깎아낸단 말씀이십니까? 조선의 정이나 줄로는 이 강철을 건드릴 수조차 없사옵니다."
서태강의 지적은 지극히 타당했다. 방금 얻어낸 초저황 탄성강은 일반적인 철보다 몇 배는 단단하여, 기존의 야철식 가공법으로는 정밀한 톱니를 새겨 넣는 것이 불가능했다.
"깎지 않는다."
이진의 망막 위에 청색의 현대 공학 설계도가 다시 정렬했다.
[수치 제어: 냉간 단조 압박 주조법(Cold Forging Press Casting) 활성화] [원료: 탄소 함량 0.4% 마르텐사이트 연신강판] [가공 오차 한계 수치: ±0.1mm]
"완전히 식기 전, 강철의 연성이 남아 있는 임계 온도에서 정밀하게 설계된 고정 형틀에 넣고 압박 단조한다. 단조 망치의 타격각과 힘의 분산이 단 0.1밀리미터라도 어긋나면 기어의 맞물림이 깨져 격발 시 무기가 스스로 폭발하게 된다. 내 지시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진은 공방 구석에 준비해 두었던 특수 고령토로 제작한 정밀 기어 형틀(Die)을 가져오게 했다.
"서태강, 망치를 들어라."
이진의 목소리에는 타협 없는 완벽주의와 폭군적인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수치와 각도대로만 타격해라. 만일 내 말보다 늦게 치거나, 힘의 강약을 조절하지 못해 균열이 생긴다면…… 그 망치로 네놈의 손목을 직접 부숴버릴 것이다."
서태강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군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인 거장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예, 마마! 목숨을 걸고 따르겠사옵니다!"
붉은 잔열을 머금은 탄성강판이 정밀 형틀 위에 올려졌다.
"타격각 우측 12도! 힘은 삼 분의 일! 지금 쳐라!"
깡-!
서태강의 무거운 망치가 강판을 때렸다. 이진의 망막에 실시간으로 하중 분산률과 변형률이 숫자로 표기되었다.
[타격 오차: +0.05mm. 양호.]
"다음, 좌측 45도! 힘을 두 배로 높여라! 쳐라!"
깡-! 깡-!
이진의 호령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정밀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차갑고 정확했다. 조금이라도 타격 타이밍이 늦어지면 이진의 불호령이 공방을 찢었다.
"멍청한 놈! 0.1밀리초 늦었다! 강철의 온도가 떨어지기 전에 타격하라고 했거늘, 네놈의 손은 썩은 동태냐! 다시!"
장인들은 숨을 죽인 채 이 잔혹한 공학적 지옥 속에서 움직였다. 쇠망치가 부딪치는 굉음과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고, 서태강의 이마에서는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영하 35도의 혹한 속에서도 공방 안은 열기와 긴장감으로 터질 듯 팽팽했다.
이진의 머릿속에서는 현대 제철소의 수석 연구원 시절 쌓았던 결정 구조 제어 이론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냉간 단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공 경화(Work Hardening) 현상을 이용해, 기어 톱니의 표면 경도를 극대화하는 고난도의 공정이었다.
"마지막 타격! 수직 90도, 전력으로 내려쳐라!"
깡--!
묵직한 타격음이 공방에 메아리쳤다.
서태강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망치를 내렸다. 형틀을 열고 식어가는 철물을 꺼내자, 공방 안의 모든 장인들이 탄성을 질렀다.
"이, 이것이 정녕 인간의 손으로 만든 기어란 말인가……."
빛나는 청백색의 강철 기어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의 그 어떤 장인도 흉내 낼 수 없는, 오차율 0.1밀리미터 이하의 완벽한 회전식 비결정 기어판이었다. 톱니 하나하나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정렬되어 있었고, 표면은 거울처럼 매끄러우면서도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했다. 이 초고속 속사 뭉치 기초 품이 완성됨으로써, 마침내 기관포의 자동 장전과 격발 메커니즘을 구현할 물리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서태강은 무릎을 꿇고 이진이 완성한 기어판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의 눈에는 대군에 대한 경외를 넘어선 광신적인 숭배의 빛이 넘실거렸다.
"마마…… 소신, 평생 철을 만져왔으나 이토록 완벽하고 아름다운 철물은 보지 못했사옵니다. 마마께서는 인간이 아니옵니다. 철의 신이십니다!"
장인들 역시 일제히 엎드려 이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진은 그들의 숭배 섞인 시선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차가운 눈으로 기어판을 확인했다. 완벽했다. 이 기어를 바탕으로 준설선의 회전 펌프 부품이라 위장 등록하면, 조정의 감시망을 완벽히 피하면서도 언제든 대구경 속사포로 조립할 수 있는 핵심 동력 장치를 확보한 셈이었다.
이진은 은밀히 여을을 바라보았다. 여을은 구석에서 조용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대군의 신비로운 기술력에 대한 경악과 함께, 또 다른 복잡한 계산이 스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야철지 외곽을 둘러싼 깊은 어둠 속, 눈 덮인 침엽수림 사이로 기이한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들은 관군이 아니었다. 가죽 옷을 입고 몸을 숨긴 채, 예리한 안광으로 야철지의 불빛을 주시하는 자들.
한양의 좌의정 한명진이 보낸 사헌부의 최정예 첩보 관원(밀정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대군의 기술을 훔치거나, 역모의 명백한 증거인 설계 도면의 잔재를 수집하라는 서슬 퍼런 밀령이 쥐어져 있었다. 밀정의 수장이 품속에서 예리한 단검을 꺼내 쥐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오늘 밤, 대군의 목숨줄과 함께 저 괴이한 철의 비밀을 취한다. 움직여라."
어둠을 틈타, 차가운 살기가 야철 기지의 장벽을 넘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