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명이오! 은장대군 이진은 들으라!”

눈 덮인 영산(靈山)의 골짜기를 가르는 목소리는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말 위에 올라탄 함경도 관찰사 김형우의 안색은 기고만장했다. 붉은 번갑 위에 쌓인 눈가루를 털어내지도 않은 채, 그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조정의 참판 직인이 찍힌 첩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 뒤로 길게 늘어선 관군 오십여 명이 일제히 창끝을 세웠다. 창날이 한겨울의 강렬한 햇살을 받아 서슬 퍼런 빛을 뿜어냈다.

야철지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가마터 주변에서 풀무질을 하던 장인들이 질겁하며 바닥에 엎드러졌다. 서태강 역시 굳은 표정으로 망치를 내려놓은 채, 대군의 눈치를 살폈다. 붉은 화염을 토해내던 가열로의 열기마저 관군이 몰고 온 살기에 억눌려 사그라드는 듯했다.

오직 이진만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가마터의 가장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송풍구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방금 막 정밀 야금 설계도의 수치들을 뇌리에 각인하고 현실의 공정과 동기화한 직후였다.

머릿속에서 쏟아진 수천 개의 열역학 공식과 유체역학 계산식의 대가는 가혹했다. 척추를 타고 내리꽂히는 극심한 오한에 이진의 손끝등이 미세하게 떨렸다. 허벅지 안쪽의 근육이 경련하듯 뒤틀렸으나, 그는 도포 자락 아래로 주먹을 꽉 쥐며 내색하지 않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차가운 공기에 닿아 하얗게 얼어붙었다.

이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가열로의 열풍을 등 뒤로 받으며, 그의 시선이 김형우의 오만한 눈동자에 내리꽂혔다.

“관찰사.”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으나, 넓은 야철지 전체를 울릴 만큼 단단했다.

“대군의 신분인 나를 압송하겠다고 했느냐. 조정의 허가 없는 사철 매입과 무기 주조 혐의라면서.”

“그렇소! 경국대전 호전(戶典)의 야철 통제령은 명백히 사사로운 철광 채굴과 주조를 금하고 있소. 대군께서 이곳 회령의 거친 사철을 쓸어 담고, 함경도 전역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이토록 거대한 가마를 지은 것이 역모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오!”

김형우가 말안장을 세차게 때리며 쏘아붙였다. 그의 눈에는 이미 사냥감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사냥개의 탐욕스러운 희열이 가득했다. 좌의정 한명진에게 이 소식이 전해진다면, 한양의 정국은 다시 한번 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소용돌이에 휩싸일 터였다.

그러나 이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비웃음이었다.

“무식한 관리 놈이 직첩을 얻으니 법조문조차 제멋대로 해석하는구나.”

“무어라 하셨소!”

김형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관군들의 창끝이 일제히 이진의 가슴팍을 향해 좁혀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여을의 손이 소맷자락 속 암기로 향하는 것을 이진은 가벼운 손짓으로 제지했다.

이진은 품 안에서 두꺼운 한지 뭉치를 꺼냈다. 한양을 떠나기 전, 의금부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밤을 새워가며 필사해 둔 고서의 일부였다.

“김형우. 네 놈이 경국대전을 입에 담았으니, 내 친히 그 법전의 구절을 읊어주마.”

이진이 종이를 펼치지조차 않은 채, 낭랑한 목소리로 법조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경국대전 공전(工典) 야철조, 그리고 호전의 구휼 및 치수 예외 규정을 보아라. ‘국경 지대의 강물이 범람하여 군영과 민가를 해할 우려가 있을 시, 해당 지역의 치수를 위한 도구 제작은 예외로 둔다’ 하였고, ‘특히 토착 사철과 유황 석탄을 이용한 치수용 대형 도관, 즉 치수 가관(治水 架管)의 제작은 관할 관청의 허가 없이도 지방관의 방조 하에 군민이 합심하여 즉시 시행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김형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치수…… 가관이라니? 지금 이 거대한 쇠가마가 강물을 막는 도관을 만든다는 말이오?”

“그렇다.”

이진이 가열로 옆에 쌓여 있는 거대한 원통형 강철 형틀을 가리켰다. 그것은 훗날 속사 기관포의 포신과 고압 추진관이 될 두꺼운 철제 파이프들이었다.

“회령은 매년 봄철이면 두만강의 빙탄(氷炭)이 녹아내려 요새의 축대와 민가가 쓸려나가는 수해를 입는다. 내 비록 유배된 몸이나 이 나라의 대군으로서 백성들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사재를 털어 사철을 사고 장인을 모아 물길을 돌릴 고압 도관을 주조하고 있었다. 이것이 어찌 역모란 말이냐?”

“궤변이오! 이토록 두껍고 단단한 강철 도관이 어찌 물길을 막는단 말이오! 이는 필시 대구경 화포의 포신이 분명하거늘!”

김형우가 소리를 질렀다.

이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김형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서린 압도적인 위압감에 김형우의 말이 턱 막혔다.

“포신이라? 관찰사, 그대의 눈에는 이것이 화포로 보이는가? 화포에 필수적인 약실(藥室)이 어디 있으며, 도화선을 꽂을 화문(火門)은 어디에 있느냐? 이 관 내부를 보아라. 그저 강물의 진흙과 모래를 뿜어내기 위해 매끄럽게 깎아낸 원통일 뿐이다. 화약 한 줌 넣을 공간도 없는 이 무거운 쇳덩이를 화포라 우기는 것은, 조정의 종친을 모함하여 공을 세우려는 사리사욕에 눈이 먼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이진의 목소리가 야철지 가득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성리학을 숭상하고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나라에서, 천재지변을 막으려는 왕실의 선행을 역모로 모는 관리가 있다니. 주상전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어찌 생각하시겠느냐? 함경도 관찰사가 치수 사업을 방해하여 내년 봄 회령 요새가 물에 잠기면, 그 책임을 네 놈이 온전히 지겠느냐!”

“그, 그것은…….”

김형우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고삐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조선은 명분을 중시하는 나라다. 더욱이 경국대전에 명시된 ‘치수 가관’의 예외 조항은 아무리 기세등등한 훈구파라 한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법리였다. 무기가 아닌 ‘농기구 및 치수용 준설 장비’라는 명목을 들이대자, 공권력의 칼날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멈춰 선 것이다.

이진은 쐐기를 박듯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주변의 공기를 더 차갑게 얼리는 듯했다.

“대명률(大明律) 형률 조항에도 나와 있다. 무고히 종친을 역모로 고발한 자는 그 가문을 멸하고 참형에 처한다 하였지. 관찰사, 지금 당장 내 가마를 폐쇄하고 나를 압송해 보아라. 대신, 사헌부와 의금부에 올라갈 상소문에는 네 놈이 회령의 수해 대책을 무산시켜 변방의 방비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죄목이 가장 먼저 적힐 것이다.”

“대군……!”

김형우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한명진의 수하로서 은장대군의 숨통을 끊어놓으라는 밀명을 받고 왔으나, 도리어 철저한 법리적 그물망에 갇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진의 논리는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눈앞의 거대한 강철관들은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치수용 도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화포로 개조할 수 있을지언정, 현재로서는 그저 거대한 철제 파이프에 불과했다.

주변의 군졸들조차 관찰사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창끝을 내리기 시작했다. 대군을 무고하게 엮었다가 자신들의 목숨줄마저 날아갈 수 있다는 공포가 그들의 눈빛에 서렸다.

“……철수한다.”

김형우가 이를 부득 갈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하지만 기억해 두십시오, 대군마마. 조정의 눈은 언제나 이 회령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면, 그 즉시 한양의 의금부 포졸들이 이 가마터를 잿더미로 만들 것입니다.”

“풍광이 좋은 회령이니, 자주 들러 구경이나 하거라.”

이진이 차갑게 응수했다.

김형우는 말머리를 거칠게 돌려 가마터를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관군들이 허겁지겁 눈밭을 헤치며 퇴각했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야철지에는 팽팽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관군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장인들의 안도 섞인 한숨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살았다…… 정말 살았어.”

“대군마마께서 저 오만한 관찰사 놈의 주둥이를 완전히 막아버리셨구나!”

장인들이 이진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이제 단순한 경외감을 넘어선 깊은 숭배의 염이 깃들어 있었다. 법과 성리학의 모순율을 꿰뚫어 조정의 권력자를 단숨에 굴복시킨 대군의 지적 우위는, 변방의 천한 대장장이들이 평생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경지였다.

서태강이 이진의 앞으로 다가와 묵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마의 혜안에 소인, 혀를 내둘렀습니다. 법조문 하나로 관군의 칼날을 물리치시다니요.”

그러나 이진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벌써 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설계도의 지식을 너무 깊게 인출한 탓에, 심장에 스며드는 한기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서태강.”

“예, 마마.”

“방심하지 마라. 한명진과 조정의 밀정들은 이제 더 정밀한 도면 감찰관들을 보낼 것이다. 그들의 감시망을 완벽히 피해야 한다.”

이진은 가열로 옆의 평평한 바닥에 나뭇가지로 설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망막에 투사되는 현대식 ‘속사 기관포(Autocannon)’의 기계 메커니즘이 물 흐르듯 잔상을 남겼다.

전체 포신과 약실, 그리고 탄창이 결합하는 프레임.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주조하면 즉시 사병 주조죄로 단두대에 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치수 도관이 아니다.”

이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리는 강물이 아닌, 적들의 피를 뿜어낼 도강 정화 준설선(渡江 淨化 浚渫船)을 만들 것이다. 이 특수강 파이프들은 그 준설선 내부에 들어갈 ‘고압 추진 펌프 배관’으로 등록한다. 포신은 고압 배관으로, 회전식 약실은 압력 조절 밸브 뭉치로, 격발 장치는 유량 제어 레버로 위장하여 각각 다른 공방에서 분할 주조한다.”

서태강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분할하여 주조한 뒤, 마지막에 결합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조정의 감찰관들이 공방을 샅샅이 뒤져도, 그들이 보는 것은 오직 농기구 부품과 물길을 내는 펌프 조각들뿐일 것이다.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분당 수백 발의 철환을 쏟아내는 사신(死神)의 병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이진의 눈빛이 잔혹할 정도로 냉철하게 빛났다.

과거 현대에서 믿었던 동료에게 기술을 빼앗기고 배신당했던 기억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인간은 믿을 수 없다. 오직 완벽한 도면과 검증된 물리 법칙, 그리고 자신만이 통제하는 기계 시스템만이 배신하지 않는다. 이 철기 영지를 완성해 조정의 목줄을 끊기 전까지는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당장 가열로의 온도를 더 올려라. 내화벽돌의 기밀성을 확인해야 한다. 온도를 섭씨 천사백 도까지 끌어올려라!”

이진의 서슬 퍼런 호통에 장인들이 일제히 풀무를 쥐어 잡았다.

가열로 내부의 불꽃이 황색에서 백색으로 변해가며 포효하듯 타올랐다. 이진은 가열로의 노벽에 몸을 바짝 밀착했다. 고열의 열기가 도포를 뚫고 들어와 차갑게 식어가던 그의 심장을 강제로 데우기 시작했다. 비로소 손끝에 붉은 생기가 돌았다.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

땅을 울리는 기이한 진동이 가열로 하부에서부터 치솟았다.

“……!”

서태강이 황급히 가마의 압력 배출구를 살폈다. 가마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의 색이 기이하게도 탁한 황색을 띠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유황 냄새가 순식간에 야철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마! 석탄을 투입한 탄갱 내부에서 이상 반응이 일어나는 듯합니다! 압력이 너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진의 망막 위로 붉은색 경고등이 가차 없이 점멸했다.

[위험: 가열로 내 황화가스(H2S) 및 아황산가스(SO2) 농도 급증] [내부 압력: 4.2기압 - 한계치 임박] [경고: 고령토 내화벽돌 열팽창 균열율 87% 돌파. 60초 내 폭발 위험]

회령의 질 낮은 석탄에 포함된 과도한 유황 성분이 고온의 열기와 만나 예상치 못한 가스 포화 상태를 유발한 것이었다. 이대로 두면 가열로 전체가 폭발하여 야철지는 물론, 주위의 모든 장인들이 몰살당할 위기였다.

“모두 대피하라! 가마에서 멀어져라!”

서태강이 비명을 지르며 장인들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러나 이진은 오히려 폭발 직전의 가열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눈동자에 붉게 끓어오르는 죽음의 불꽃이 고스란히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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