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삼십 도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함경도 회령의 야철지.
가마 하부에서 울리는 불길한 진동과 함께 시뻘건 가스가 점토벽 틈새로 품어져 나오는 순간, 야철 장인 서태강이 녹슨 철퇴를 치켜들며 이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망나니 왕손 놈이 기어코 야철지를 피바다로 만드는구나! 대감의 해괴한 짓거리 때문에 가마가 터지게 생겼소!”
짐승처럼 포효하는 서태강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몰아치는 가스 안개 속에서 장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바빴고, 사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망막 위로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현대 제철 공학의 정밀 야금 설계도가 선명하게 투사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가마 내부의 압력 수치와 가스 흐름률이 소수점 아래 단위까지 붉은 글씨로 깜빡였다.
[가마 내부 압력: 2.4기압] [노벽 하부 수증기 유입률: 초당 4.5리터] [임계 파괴 온도: 1,410℃ / 현재 온도: 1,354℃]
“시끄럽다. 물러서라.”
이진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대지보다 더 차갑고 낮았다. 철퇴를 든 서태강의 위협에도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갈라진 노벽 틈새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가마가 우는 것은 압력이 차서가 아니다. 서태강, 네놈이 노벽 아래 배수 구멍을 제대로 막지 않아 외기 온도차로 인한 결로와 틈새 물줄기가 유입된 탓이다. 내부 점토가 급격히 수축하며 수증기압이 팽창한 것뿐이다.”
“무, 무슨 해괴한 소릴 하는 거요! 불꽃이 저리 미쳐 날뛰는데!”
“눈이 있으면 보아라.”
이진이 가마 하부에서 흘러나오는 찌꺼기, 즉 슬래그의 색깔을 가리켰다.
“저 슬래그의 빛깔을 봐라. 붉은빛이 아니라 탁한 황백색을 띠며 흐름이 둔하지 않으냐. 점도가 0.8포아즈(Poise) 이하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쇳물의 온도는 지금 정확히 1,354도다. 만약 유황 가스 압력 때문이었다면 이미 노정이 주저앉았을 것이다. 지금 팽창하는 것은 오직 수증기다.”
글만 읽던 왕족 샌님이 뱉어내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밀한 야철 용어들이 쏟아지자, 서태강의 철퇴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1,354도라니…… 그걸 어찌 눈으로 안단 말이오?”
“앞으로 정확히 30초 뒤, 쇳물의 온도는 1,370도에 도달한다. 그때 노벽 좌측의 제3 배수 밸브를 열어라. 차오른 수증기가 빠져나가며 진동이 멈출 것이다.”
이진은 가마 곁으로 다가가 직접 긴 쇠창을 쥐었다. 그의 손 끝이 차가운 쇠붙이에 닿는 순간, 머릿속 설계도에서 실시간 열역학 계산식이 인출되기 시작했다.
‘동기화율 100%.’
뇌리를 스치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이진의 척추를 타고 얼음장 같은 냉기가 뻗어나갔다. 설계도를 인출할 때마다 생체 열량을 강탈당하는 불변의 대가, '한랭증'의 전조였다. 손가락 끝이 감각을 잃고 하얗게 질려갔지만, 이진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악물며 버턐다. 이 공정을 지배하지 못하면 북방의 미래는 없었다.
“서태강!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제3 배수구를 타격해라! 십, 구, 팔……”
이진의 서슬 퍼런 외침에 압도된 서태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수십 년간 불을 다뤄온 직감이 대군의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확신을 따르라 소리치고 있었다.
서태강이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 가마 좌측의 진흙 마개를 후려쳤다.
퍽!
마개가 부서짐과 동시에 콰아아아아! 하는 굉음과 함께 하얀 수증기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가마를 뒤흔들던 불길한 진동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사방을 가득 채웠던 유황 연기가 수증기와 함께 상공으로 흩어지며 가마 내부의 푸른 불꽃이 안정을 되찾았다.
“어…… 어찌 이런 일이……”
달아났던 장인들이 하나둘 가마터로 돌아오며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진동이 멈춘 가마의 출탕구에서 마침내 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보통의 무쇠와는 달랐다. 유황의 불순물이 백토 배합과 고온의 열풍 순환에 의해 완벽하게 분리된 쇳물이었다. 그것은 잡티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마치 거울과도 같은 푸른빛을 머금은 액체 상태의 강철이었다.
“지금이다. 용선 도관의 경사각을 12도로 유지해라. 유속이 초당 1.5자(尺)를 넘지 않아야 탄소 함량이 균일하게 보존된다.”
이진은 굳어가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이며 지시했다.
서태강은 쇳물이 흘러가는 길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군이 설계서에 그려놓았던 기이한 굴곡의 용선 도관은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조였다. 왜 쇳물이 가는 길을 구부려놓고 중간에 턱을 만들었는지 의문이었으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그 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쇳물보다 가벼운 불순물과 슬래그가 도관의 턱에 걸려 자연스럽게 걸러지고, 오직 순수한 선철만이 아래로 흘러내려 깨끗한 사각 주형에 담기고 있었다.
“이것은…… 야철의 극의다.”
서태강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수십 년 동안 조선의 모든 철장을 돌아다니며 불을 만졌지만, 이토록 완벽하게 슬래그를 분리해내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흐르는 쇳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이진을 바라보았다.
이진은 대지 위에 우뚝 선 채, 흘러내리는 강철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가마 속 푸른 불꽃보다 더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서태강은 들고 있던 철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거운 무릎을 꿇었다.
쿵.
“소인 서태강, 대군의 혜안을 알아보지 못하고 방자하게 굴었나이다. 죽여주옵소서.”
지켜보던 장인들이 일제히 웅성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함경도 최고의 고집쟁이자 야철 장인인 서태강이 왕족에게 머리를 숙인 것은 단순한 신분의 권위 때문이 아니었다. 기술의 절대적인 격차, 자신들이 평생을 바쳐도 도달하지 못할 천상의 경지를 이 젊은 대군이 손바닥 보듯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군마마, 이 도관의 배합과 경사각은 소인의 평생 경험을 아득히 초월한 것입니다. 이 가마의 불을 다스릴 권한을 오직 대군께 바치겠나이다.”
서태강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진은 그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경험이란 훌륭한 스승이나, 때로는 눈을 가리는 장막이 되기도 한다. 내 도면의 수치는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명심하겠나이다!”
그때, 이진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설계도의 고온 열풍 제어장치를 강제로 동기화한 대가였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얼음 송곳이 찌르는 듯한 한기가 차올랐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손끝이 마비되어 감각이 사라졌다. 자칫하면 이 자리에서 저체온증으로 심장이 멎을 판이었다.
스슥.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있던 여을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이진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진이 가열로의 열기를 탐닉하듯 곁에 머무르던 이유를 그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여을이 가열로 측면의 고온 송풍 노즐로 달려가 밸브를 힘껏 돌렸다.
화아아악!
가마 내부에서 순환하던 섭씨 수백 도의 예열된 뜨거운 공기가 노즐을 통해 이진이 서 있는 방향으로 뿜어져 나왔다. 영하 삼십 도의 혹한을 단숨에 녹여버리는 맹렬한 열풍이었다.
이진은 밀려드는 열풍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뜨거운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우고, 얼어붙었던 혈관이 요동치며 풀리기 시작했다. 시체 같던 뺨에 서서히 핏기가 돌아왔다.
여을은 말없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와 두꺼운 양털 망토를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의금부에 잡힌 동생들에 대한 걱정과 함께, 죽음의 문턱을 제 발로 넘나들며 강철을 빚어내는 이 기이한 대군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이 사람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스스로를 불사르는가.’
이진은 온기를 흡수하며 서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을 옭아매던 빙점의 고통이 가라앉자, 특유의 독선적이고 냉철한 이성이 다시 눈을 떴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서태강을 향해 가죽 장부를 던졌다.
“그 장부를 펼쳐라.”
서태강이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받아 펼쳤다. 장부에는 정밀한 한문으로 작성된 기묘한 배합 비율과 가열로의 노즐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향후 우리가 구축할 ‘한원 고로’의 기초 도면이다. 석탄을 가공하여 유황을 완벽히 제거한 코크스를 만들고, 사철의 불순물을 백토와 석회석으로 제어하는 상세한 방법이 적혀 있다. 이를 바탕으로 가마의 골격을 다시 짜라.”
사실 그 장부는 이진이 치밀하게 가공한 미끼였다. 유황 가스를 제어하기 위한 석탄 배합 수치 중 일부 임계 열팽창 균열 수치를 의도적으로 비틀어놓은 ‘가짜 가열로 배합 장부’였다. 한양의 훈구 세력과 한명진의 밀정들이 이 야철지를 감시하고 있음을 알기에, 언제든 탈취당해도 좋을 가짜 도면을 미끼로 던져둔 것이었다. 진짜 수식은 오직 이진의 머릿속에만 존재했다.
“소인, 이 도면대로 목숨을 걸고 가마를 올리겠나이다!”
서태강은 장부가 가짜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보물을 얻은 듯 품에 소중히 안았다.
이제 주도권은 완전히 이진에게 넘어왔다. 영지의 장인들은 더 이상 대군을 망나니 왕족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진은 불과 철을 지배하는 신비로운 지배자이자, 자신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거대한 거인이었다.
이진의 지휘 아래 야철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온 가열로의 기초 윤곽이 대지 위로 솟아올랐다. 영하 삼십 도의 혹한 속에서도 가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장인들의 망치질 소리가 회령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조선의 경국대전과 사병 주조 금지령을 피하기 위한 합법적인 위장 작업도 물밑에서 진행되었다.
이진은 장강의 치수용 준설 기계에 쓰일 ‘대형 도관’이라는 명목으로, 훗날 속사 기관포의 포신이 될 특수강 파이프의 주조 형틀을 깎도록 지시했다. 조정의 감찰관들이 불시에 들이닥친다 해도 법적으로 반박할 완벽한 명분을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모든 것이 이진의 계산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그때였다.
두두두두!
야철지 외곽의 얼어붙은 눈밭을 헤치고 수십 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장인들의 망치질이 멈추고, 야철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마터의 입구를 막아선 목책 너머로 푸른 융복을 입은 사내들과 붉은 번갑을 조여 맨 관군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말 고삐를 움켜쥔 선두의 사내는 사나운 눈매를 가진 함경도 관찰사, 김형우였다. 그는 좌의정 한명진의 심복이자, 북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동태를 한양으로 보고하는 감시자였다.
김형우가 말 위에서 이진을 내려다보며 소리 높여 첩지를 펼쳤다.
“어명이오! 은장대군 이진은 들으라!”
차가운 바람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야철지 전체를 얼려버릴 듯 울려 퍼졌다.
“대군은 유배지의 신분으로 조정의 허가 없이 사사로이 사철을 대량 매입하고, 대규모 장인들을 포섭하여 야철을 단행했다. 이는 경국대전 야철 통제령 위반이자, 사병을 기르고 무기를 주조하려 한 명백한 역모의 징후이다! 당장 가마를 폐쇄하고 대군을 압송하라!”
수십 명의 군졸들이 일제히 창검을 뽑아 들며 가마터를 포위했다.
갓 완공되어 붉은 열기를 뿜어내던 가열로의 불꽃 위로 차가운 살기가 내려앉았다. 서태강과 장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고, 여을의 손이 품속의 암기 쪽으로 은밀히 움직였다.
그러나 이진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김형우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