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이 뺨을 때리는 감각은 이내 뼛속을 파고드는 칼바람으로 변했다.
어전의 차가운 박석 위에서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성종 이선은 은장대군 이진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사약을 내려 골육상잔의 피를 손에 묻히는 정적의 멍에를 쓰느니, 함경도 회령이라는 외롭고 혹독한 유배지로 보내 스스로 얼어 죽게 만드는 편이 군왕의 격식에 걸맞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병 주조를 금하는 대명률의 눈을 피해 야철지를 개설해 달라는 망나니 대군의 마지막 청은, 조정의 대신들에게 그저 ‘추위 속에 발악하다 죽으려는 미치광이의 몸부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귀를 찢는 북풍이 함경도 회령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한양에서 북쪽으로 천 리 길을 걸어 당도한 이곳은 오줌마저 공중에서 얼어붙는다는 동토(凍土)의 심지였다.
이진은 두꺼운 솜옷을 서너 겹이나 껴입고도 몸을 바르르 떨었다. 입술은 핏기 없이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고,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허연 김이 서리처럼 수염에 엉겨 붙었다.
“이것이... 회령의 사철(沙鐵)이더냐.”
이진이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고 얼어붙은 개천 바닥의 흙을 한 움큼 웅켜쥐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은 모래라기보다 칼날에 가까웠다. 자성을 띤 검은 모래들이 서릿발과 뒤엉켜 거칠게 버석거렸다.
그는 손바닥에 남은 검은 가루를 코끝에 가져다 댔다. 비린 철 냄새와 함께 가슴을 턱 막히게 만드는 불쾌한 악취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유황이었다.
조선의 철이 무르고 쉽게 부러지는 고질적인 이유는 바로 이 원자재의 결함에 있었다. 한반도의 사철은 티탄과 규소 함량이 기형적으로 높고, 함경도 일대에서 나는 석탄은 유황 불순물이 가득해 일반적인 야철 방식으로는 제대로 된 선철(銑鐵)을 뽑아낼 수 없었다. 유황이 섞인 석탄으로 철을 녹이면 황 성분이 철 분자 사이로 스며들어 고온에서 부러지는 '적열취성(赤熱脆性)' 현상이 발생한다. 칼을 만들면 이가 나가고, 농기구를 만들면 밭을 갈다 두 동강이 나는 쓰레기 철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고온의 송풍과 적절한 융제를 배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이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현대식 제철소의 고로(Blast Furnace) 계통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노정에서 원료를 투입하고, 하부의 풍구를 통해 고온의 공기를 불어넣어 일산화탄소에 의한 환원 반응을 극대화하는 촉진 장치. 섭씨 1500도 이상의 초고온을 유지하면서 석회석 대신 이 지역에 지천으로 널린 백토(고령토)를 활용해 황 성분을 슬래그로 완벽하게 포착해 분리해 내는 공정.
그 구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이진의 망막 위로 시뻘건 빛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스르륵.
허공에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반투명의 청사진이 펼쳐졌다. 현대 야금학의 정수, '정밀 야금 설계도 서(書)'가 각성한 것이다. 눈앞에 떠오른 복잡한 화학 기호와 분자 결합식, 그리고 고기압 송풍관의 유체역학 계산식들이 어지럽게 회전했다.
[고령토(Al₂O₃·2SiO₂·2H₂O) 내화벽돌의 임계 열응력 강도 계산식] [유황 고착 제어를 위한 산소 분압 및 염기도 수치 동기화 중...]
이진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의 지식을 현실의 물리 법칙과 연결하려 들자, 어김없이 대가가 찾아왔다.
쿠구궁, 하는 환청과 함께 심장 부근에서부터 시작된 지독한 한기(寒氣)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뼛속의 골수까지 순식간에 빙결되는 듯한 극렬한 통증이었다.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35도, 34도, 그리고 32도선까지.
“끄윽...!”
이진은 가슴을 움켜쥐고 눈밭 위로 쓰러졌다. 이 초월적인 설계도를 가동할 때마다 그의 육체는 생체 열에너지를 강제로 빼앗겼다. 사지가 마비되고 동결되는 지독한 한랭증. 이 구속에서 벗어나려면 가열로의 초고온 열기를 직접 쬐거나, 몸을 태울 듯한 열원을 지속적으로 주입해야만 했다.
그는 기어 올라가 곁에 놓여 있던 작은 화로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이글거리는 숯불의 열기가 솜옷을 뚫고 가슴팍에 닿아서야 비로소 얼어붙던 혈류가 돌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서리로 변해 하얗게 맺혀 있었다.
“대군 대감, 몸을 그리 험하게 굴리시면 명을 보존하기 어렵사옵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진이 고개를 들자, 털모자를 깊게 눌러쓴 여인이 따뜻하게 데운 독한 독주 한 잔을 내밀고 있었다. 기민한 눈빛을 숨긴 채 단정한 자태로 시종을 드는 그녀의 이름은 여을.
조정에서 은장대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보낸 내금위의 밀정이었다. 본인은 유배지의 잔일을 돕는 관비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발걸음걸이와 손가락의 굳은살은 그녀가 고도로 훈련된 살수이자 첩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진은 그녀가 건넨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타오르는 불길 같은 독주가 심장의 한기를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안다.”
이진은 싸늘하게 뱉어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막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을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며, 이진의 등 뒤로 드러난 기이한 한랭증의 증세를 예리하게 관찰했다.
‘소문대로 망나니 대군이 미쳐버린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음모를 꾸미는 것인가.’
여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녀는 한양의 좌의정 한명진으로부터 ‘대군이 야철지에서 사병을 기르거나 병기를 주조하는 낌새가 보이면 즉시 보고하라’는 밀명을 받은 상태였다.
막사 안으로 들어선 이진은 책상 위에 초라한 종이 몇 장을 펼쳐놓고 붓을 들었다. 그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여을은 먹을 갈아 바치며 슬그머니 이진의 손끝이 그리는 도면과 수치들을 훔쳐보았다.
종이 위에는 기이한 원형 기둥 모양의 가마 도면과 함께, 한자로 조잡하게 적힌 석탄과 석회, 사철의 비례 배합표가 적혀 있었다.
‘석탄 십 도에 유황 고착용 백토 세 홉, 그리고 가열 공기의 압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열팽창 균열 수치를 3배로 높일 것...’
여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제철에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그것은 엄청난 비밀이 담긴 야철 비법서처럼 보였다. 특히 '유황 고착'이라는 단어는 조선의 고질적인 무쇠 문제를 해결할 열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진이 작성하고 있는 그 비장한 문서가 사실은 거대한 덫이라는 것을.
이진의 입꼬리가 보이지 않게 살짝 비틀렸다.
그가 적어 내려간 수치는 현대 공학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치명적인 오류를 내포하고 있었다. 백토의 함량을 기형적으로 줄이고 탄소 유입량을 늘려 고로 내벽의 열팽창 균열 수치를 임계점 이상으로 높여놓은 가짜 장부였다.
만약 이 장부의 수치대로 고로를 축조하고 불을 지핀다면, 가마는 열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엄청난 유황 가스와 함께 고열로 폭발해 사방을 초토화할 터였다.
‘한명진, 그리고 조정의 간신배 놈들.’
이진은 전생에서 자신을 배신했던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인간은 믿을 것이 못 된다. 검증된 숫자가 아닌 타인의 충성심 따위에 기댄 자는 반드시 뒤통수를 맞기 마련이다.
그는 여을이 한명진의 수하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녀의 동생들이 의금부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까지도 뒷조사를 통해 알아낸 상태였다.
이진은 짐짓 피곤한 기색을 지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가슴이 답답하구나. 잠시 바람을 쐬고 올 터이니, 막사 안을 정리해 두어라.”
“예, 대군 대감. 염려 마시고 다녀오옵소서.”
여을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진이 막사를 나서고 가죽 막의 문틈으로 그의 실루엣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여을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빨라졌다. 그녀는 소매 속에서 얇은 모사지(模寫紙)와 기름종이를 꺼내 들었다.
책상 위에 놓인 가짜 배합 장부 위에 기름종이를 얹고, 굳은 손가락으로 빠르게 도면과 배합비 수치들을 베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것만 한양의 한명진 대감에게 보낸다면, 의금부에 갇힌 동생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은장대군을 역모의 굴레로 완벽하게 옭아맬 수 있었다.
‘대군 대감... 미안하지만 이것이 나의 소임입니다.’
여을은 신속하게 필사를 마치고 종이를 품속 깊숙이 쑤셔 넣었다. 가짜 장부의 덫이 자신의 목을 조여 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막사 밖으로 나온 이진은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야철지 공터로 향했다.
그의 눈앞에 임시로 축조된 조그만 점토 가마들이 보였다. 그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징발되거나 대군의 권세에 밀려 억지로 끌려온 대장장이와 야철 장인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장인들은 장작불에 손을 녹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무슨 무쇠를 부리겠다는 건지... 한양에서 온 망나니 왕족 놈이 우리를 다 얼려 죽일 작정이야.”
“쉿, 들리면 목이 달아나네!”
그들의 불만 섞인 속삭임이 이진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이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마터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가마터의 가장 거대하고 견고한 모루 앞에 서 있던 한 사내가 이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거구에 덥수룩한 수염, 숯 가루가 가득 묻은 가죽 앞치마를 두른 사내. 조선 최고의 야철 장인이자, 자신의 경험적 감각만을 신뢰하는 고집쟁이, 서태강이었다.
서태강은 한 손에 거대한 쇳덩이 철퇴를 쥔 채, 이진을 내려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대군 대감이고 뭐고, 이 신성한 불의 터전에는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옵니다!”
그의 쇠망치가 묵직한 파음과 함께 얼어붙은 땅을 내리찍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얼음 파편이 튀었다.
“글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왕족 놈이 책 몇 권 읽고 와서 이 신성한 야철을 망치려 드는 꼴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보오! 당장 한양으로 돌아가시오!”
서태강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적개심이 타올랐다. 영하 30도의 가혹한 바람 속에서, 조선 최고의 장인과 미래의 설계도를 쥔 대군의 날 선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충돌했다.
그 무거운 쇳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칼바람 속에서 이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서태강의 손에 들린 철퇴가 아니라, 그 너머 가마터 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검붉은 고철 더미로 향했다.
이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태강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쳐 고철 더미 앞에 멈춰 선 그는, 부러진 무쇠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단면은 거칠었고, 유리처럼 날카롭게 깨진 흔적이 역력했다.
“이것이 네놈이 자부하는 조선 최고 야철 장인의 결과물이더냐.”
이진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으나, 그 안에 담긴 냉소는 동토의 칼바람보다 더 매서웠다.
“단면이 어둡고 결정이 거칠다. 불순물이 전혀 제어되지 않았다는 증거지. 네놈은 그저 가마에 사철과 석탄을 한데 처넣고 불만 지피면 쇠가 나오는 줄 아는 모양이구나.”
“무슨 망발을 하시는 게요! 이 서태강이 평생을 철과 함께 살았소! 이 땅의 석탄은 원래 독한 유황 연기를 품고 있어, 아무리 명장이라 한들 쇠가 무르게 나오는 것을 어찌한단 말이오!”
서태강이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의 거친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흩어졌다.
“그것은 네놈의 무지와 태만이 만들어낸 변명일 뿐이다.”
이진이 무쇠 조각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유황은 섭씨 1,200도 이상에서 무쇠의 결정 격자 구조를 파고들어 온도가 높아질수록 쇠를 유리처럼 부러지게 만든다. 이를 해결하려면 가마 내부의 염기도를 높이고, 환원 가스의 흐름을 제어하여 황 성분을 슬래그로 완전히 포착해 분리해내야 하거늘. 네놈은 그저 송풍구의 바람만 세게 불어넣으면 온도가 올라갈 줄 알았겠지.”
“염기...? 슬래그...? 그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소리요!”
서태강의 얼굴이 경악과 혼란으로 뒤틀렸다. 일평생 경험과 감각만으로 쇠를 다뤄온 그에게, 이진이 뱉어내는 정밀한 화학적 인과는 난생처음 듣는 외계의 언어와 같았다.
이진은 대답 대신 머릿속의 ‘정밀 야금 설계도’를 한 단계 더 깊이 가동했다.
웅장한 한원 고로의 내부 유체역학 도면이 망막 위에 투사되었다. 가마 내부의 가스 압력 수치와 백토 배합에 따른 화학 반응식들이 쉴 새 없이 명멸했다.
[내부 고온 가스 흐름 제어 변수 동기화...] [임계 한랭증 경고: 생체 열에너지가 최저 안전 기준치 이하로 급감합니다.]
순간,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극렬한 빙결의 고통이 이진의 전신을 덮쳤다. 사지가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극단적인 한기였다. 입술이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변했고, 그의 무릎이 눈밭을 향해 꺾이려 했다.
‘아직은 아니다... 여기서 쓰러질 순 없다.’
이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어금니가 깨질 듯한 고통을 참아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태강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치고 불타오르는 용광로 아궁이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장갑을 벗어 던진 채, 벌갛게 달아오른 가마 벽면에 맨손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살가죽이 타들어 갈 듯한 초고온의 열기가 스며들자, 비로소 얼어붙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 괴기스럽고도 처절한 집념에, 서태강을 비롯한 주변의 장인들은 압도되어 침묵했다. 망나니 대군이라 불리던 사내가 뿜어내는 기백은, 흡사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온 악귀와도 같았다.
“잘 보아라.”
이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석탄 더미 곁에 놓인 하얀 흙더미를 가리켰다. 백산에서 채굴해 온 고령토였다.
“이 백토를 석탄과 사철의 무게 대비 일대일의 비율로 배합하고, 송풍구의 각도를 아래로 15도 낮추어 불어넣어라. 그리하면 가마 내부의 압력이 상승하여 유황이 무쇠에 스며들기 전에 가스로 배출될 것이다. 만약 내 말대로 하여 단단하고 굳건한 특수강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 스스로 이 자리에서 목을 치겠다.”
이진의 폭군과도 같은 독선적인 명령이 야철지에 울려 퍼졌다.
장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웅성거렸다. 서태강 역시 이진의 기세에 짓눌려 침묵했으나, 이내 자존심을 세우며 철퇴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좋소! 만약 대감의 해괴한 방법으로 가마를 돌렸다가 쇠는커녕 가마가 깨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전하의 어명이라 해도 이 야철지의 불을 영원히 끌 것이오!”
장인들이 이진의 지시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토를 갈아 사철과 배합하고, 가마의 송풍구를 기이한 각도로 재조정했다.
이진은 가마 곁의 열기를 받으며 그 과정을 매서운 눈초리로 감시했다. 아주 작은 오차라도 내는 장인이 보이면, 그는 자비 없이 호통을 치며 공정을 바로잡았다. 그의 병적인 완벽주의 앞에 장인들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마침내, 개조된 첫 번째 가마에 불이 지펴졌다.
풍구를 통해 들어간 강한 바람이 가마 내부의 온도를 무서운 속도로 끌어올렸다. 이진이 설계한 열풍 순환 구조에 따라, 가마 안의 불꽃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푸르스름하고 맹렬한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불꽃의 빛깔이 다르다.”
서태강의 눈이 커졌다. 수십 년간 불을 다뤄온 그였기에, 지금 가마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열량의 변화가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쇠가 녹아내리는 액상화 온도를 넘어, 유황을 완벽하게 분리해내는 임계점에 도달하려는 찰나였다.
쿠구구구궁...!
갑자기 가마 하부에서 불길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가마 내부의 급격한 압력 상승을 이기지 못한 노벽의 점토층이 쩍쩍 갈라지며, 틈새로 시뻘건 가스와 불꽃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가, 가마가 터집니다! 대피하십시오!”
한 장인의 비명과 함께 야철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가마 내부의 고압 가스가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기 직전의 일촉즉발의 상황.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와중에, 이진의 눈동자만이 그 파멸의 불길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