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시월의 빗줄기가 의금부 뜰의 거친 박석을 사정없이 때렸다.
거적때기 위에 무릎을 꿇은 이진의 온몸은 이미 곤장과 주리에 찢겨 피떡으로 얼룩져 있었다. 삭풍이 도포 자락을 갈기갈기 찢으며 살결을 파고들었으나,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살을 기어오르는 한기 따위가 아니었다.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끈적한 피와 빗물이 섞여 바닥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은장대군 이진은 들으라."
형방 우두머리이자 금부도사인 임성재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에는 주칠을 한 붉은 나무 쟁반이 들려 있었고, 그 위에는 검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무거운 백동 사발이 놓여 있었다.
성종 11년, 서기 1480년 10월.
왕권을 위협한다는 훈구파의 집요한 참소와 좌의정 한명진의 음모가 마침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대명률과 경국대전을 들이밀며 왕실의 종친을 역모로 몰아세운 대신들은 마침내 조선의 왕족이자 조정의 이단아였던 은장대군에게 사약이라는 종지부를 찍으려 하고 있었다.
"주상전하께서 내리신 마지막 은혜다. 달게 마시고 대역의 죄를 씻으라."
임성재의 눈빛은 한없이 냉혹했다. 뜰 저편, 비를 피해 처마 밑에 늘어선 관료들 사이로 좌의정 한명진의 하수인들이 보였다. 사헌부 지평 홍우필을 비롯한 이들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들은 이진이 비참하게 피를 토하며 바닥을 기는 순간만을, 그리하여 눈엣가시 같던 대군 가문이 완전히 멸문지화에 이르는 순간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이진은 이를 악물었다. 깨진 이 틈새로 비린내가 섞인 침이 흘러내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전생의 억울한 기억과 현생의 분노가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 제철소의 수석 금속공학 연구원으로서, 섭씨 1,600 도의 가열로 불꽃을 제어하며 세계 최고의 특수강을 설계하던 삶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동료의 비열한 배신으로 모든 공적을 빼앗기고 차가운 연구실 바닥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곳이 하필이면 간신들의 모략에 빠져 사약을 받기 직전인 조선의 망나니 대군이라니.
'이렇게 개처럼,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다. 절대로.'
이진이 사발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파지직!
망막을 찢는 듯한 이질적인 광휘가 시야를 가득 덮쳤다. 눈앞의 빗방울들이 허공에서 백색 선을 그리며 멈춰 선 듯한 기묘한 착각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푸르스름한 빛을 뿜는 반투명한 격자무늬와 복잡한 수식들이 그의 시야 전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시스템 동기화 개시: 정밀 야금 설계도(精密冶金設計圖) 기동.] [구조 해석 및 물질 거동 분석 성능 활성화.] [분석 대상 지정: 전방 0.5미터 내의 액상 화합물.]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나갔다.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현대 제철 공정의 화학식, 열풍 가열 공기 흐름률, 미세 하중 계산식까지 실시간으로 투사하는 무한의 지식 창고가 그의 뇌세포와 완벽하게 결합하고 있었다.
"윽...!"
그 순간, 이진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허공의 지식을 현실의 물리 법칙과 동기화하는 대가는 잔혹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극심한 오한이 혈맥을 타고 사지로 뻗어 나갔다. 혈관 속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슬러시처럼 변하는 감각이었다. 뼛속까지 시려 오는 극도의 한랭증(寒冷症)이 전신을 덮치자 이진의 피부가 순식간에 창백한 청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초월적인 설계도를 인출할 때마다 생체 열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내며 얼어 죽음에 이르는 물리적 구속이었다.
"대군 대감, 어찌 그리 떠십니까? 전하의 은혜가 두려우십니까?"
홍우필이 처마 밑에서 낄낄거리며 도발했다. 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딱딱거리며 뜰에 울렸으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사발 안의 검붉은 액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망막 위의 푸른 광운이 액체를 스캔하듯 빠르게 지나갔다.
[분석 완료.] [주성분: 삼산화이비소(As₂O₃) 42.5%] [불순물: 황(S) 18.2%, 산화철(Fe₂O₃) 12.3%, 납(Pb) 8.1%, 유기 협잡물 18.9%] [상태 판정: 극도로 조잡하게 제련된 사비(砒素). 가열 공정 중 배출 가스 제어 실패 및 탈황 공정 누락으로 인한 불순물 과다 함유.]
이진의 입술 틈새로 거친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입김이 마치 혹한기의 한겨울처럼 하얗게 서려 나갔다. 몸은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그의 뇌는 공학자 특유의 냉철함으로 빠르게 계산을 끝마쳤다.
'비석을 구워 아비산(삼산화이비소)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온도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어. 황과 철이 섞인 광석을 대충 태워 만든 잡물이다.'
그는 놋사발을 응시하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뺨에 흐르는 것은 빗물인지, 얼어붙은 땀방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도살장의 칼날보다 날카롭게 번뜩였다.
"임 도사."
이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지가 사르르 떨리는 한랭증 속에서도, 그의 어조는 기이할 정도로 묵직하고 서슬이 퍼래서 뜰 안의 모든 이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조잡하고 더러운 구정물이, 정녕 주상전하께서 종친인 나에게 내리신 의약(醫藥)이란 말인가?"
임성재는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무슨 망언인가! 전하께서 내리신 사약이다. 어찌 감히 의약이라 칭하며 트집을 잡는단 말인가!"
"사약(賜藥)의 사(賜) 자는 줄 사 자다! 임금이 하사한 약이라는 뜻이지! 왕실의 종친에게 내리는 약은 예와 도리를 갖추어 혜민서와 전의감의 명의들이 가장 순수한 비석을 정제하여 올리는 것이 조선의 법도이거늘!"
이진이 가래 끓는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 사발에 담긴 것은 약이 아니다. 광산의 폐석에서 대충 긁어모은 잡철과 황을 섞어 끓인 썩은 물이다! 삼산화이비소의 순도가 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독성이 강한 유황과 납독이 허옇게 가라앉아 있거늘, 눈이 멀지 않고서야 이를 어찌 전하께서 내리신 거룩한 은혜라 하겠는가!"
"비소... 삼산화...? 대체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는 게냐!"
홍우필이 당황하여 소리를 질렀다. 생전 처음 듣는 괴이한 서구식 공학 성분의 이름이었으나, 유황과 납독이라는 단어만큼은 조정 관료들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모르면 귀를 열고 똑똑히 들으라, 사헌부의 하수인이여!"
이진이 놋사발을 손가락으로 거칠게 튕겼다. 챙강! 하는 맑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의금부의 적막을 깨뜨렸다.
"비석을 제련할 때는 가열로의 온도를 삼백 도 이상으로 올려 순수한 백색 연기만을 포집해야 하거늘, 이 약은 온도를 제어하지 못해 황과 납이 고스란히 녹아내렸다. 이 조잡한 독물을 마시면 인간의 장기가 찢어지기 전에 황독과 납독에 중독되어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며 추태를 부리다 죽게 된다!"
이진은 한 걸음 앞으로 기어 나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주변의 빗방울마저 얼려버릴 듯 차가웠으나, 그의 기세는 오히려 고로에서 방출되는 열기처럼 사나웠다.
"종친을 사사함에 있어 이토록 기괴하고 참혹한 몰골로 죽어가게 만든다면, 이는 주상전하께서 골육을 이토록 잔인하게 도살하셨다는 오명을 만천하에 뒤집어씌우는 짓이다! 이것이 너희가 말하는 충심이더냐? 전하를 도덕적 파탄자로 만들어 유림의 탄핵을 받게 하려는 역적들의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이, 이 무슨 억지인가!"
임성재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진의 폭로는 단순한 억지가 아니었다. 왕실의 종친을 죽일 때는 예우를 갖추어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관례였다. 만약 사약의 불순물 때문에 대군이 온몸을 뒤틀며 끔찍한 몰골로 비명횡사한다면, 당장 내일 아침 조정은 사림 세력의 종묘사직 상소로 뒤집어질 터였다. 게다가 약재의 불순물 문제는 훈구파가 장악한 혜민서의 부정부패와 직결되어 있었다.
"너희는 조정을 기만했다."
이진이 한명진의 수하들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당장 전의감의 약재 장부를 조사하라! 순수한 비석을 구매했다며 국고를 탕진하고, 실제로는 광산의 폐석을 납품해 차액을 남긴 자들이 누구인지 밝혀라! 그 비리의 결과물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이 쓰레기 사약이다!"
뜰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홍우필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대군의 서슬 퍼런 공학적 분석과 논리적인 도발에 완전히 압도당한 것이다. 사약을 내리려던 금부도사마저 사발을 든 손을 부르르 떨며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 약을 억지로 먹였다간, 자신들이 역모의 공범으로 몰릴 판이었다.
'성공했다.'
이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훈구파의 부패한 약재 유통망을 기술적으로 저격하여 사약의 집행을 물리적으로 저지한 순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지식과 조선의 법리를 결합해 만들어낸 완벽한 사이다적 반격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그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한랭증의 고통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경고: 생체 체온 34.0℃ 돌파. 심부 온도가 급격히 저하되고 있습니다.] [의식 소실 및 심정지 위험 단계 진입. 즉각적인 열원과의 접촉이 필요합니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심장만이 얼음덩어리 속에서 간신히 뛰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사약을 마시기도 전에 스스로 얼어 죽을 판이었다. 그에게는 가열로의 타오르는 불꽃이, 몸을 녹여줄 거대한 열원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혹독하고 거대한 열원이.
이진은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쥐어짜 소매 안을 뒤적였다. 옥중에서 자신의 피와 온기를 짜내어 밤새 작성한 상소문 한 장이 빗물에 젖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임 도사..."
이진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입술은 이미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이 상소를... 지금 당장 주상전하께 올리라."
"이것이... 무엇이냐?"
"자진 유배 상소다."
이진은 박석 위에 상소문을 툭 던졌다. 젖은 종이 위로 붉은 피가 번져나갔다.
"내 비록 모함을 받아 이 자리에 섰으나, 골육의 정을 보아 마지막 기회를 청하고자 한다. 나를... 저 추운 북방 함경도 회령으로 보내달라."
"함경도 회령이라니? 그곳은 여진족의 칼날이 오가고 한겨울에는 오줌마저 얼어붙는 불모지가 아니더냐!"
임성재가 눈을 크게 떴다.
"그곳의 가혹한 추위라면 내 몸속의 역모라는 죄악도 얼려버릴 수 있을 터. 다만..."
이진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그곳에서 내가 얼어 죽지 않도록, 사철(沙鐵)과 석탄을 다루는 야철지(冶鐵地)의 개설을 허락하고, 그곳의 가열 고로를 직접 돌릴 수 있는 전권을 내어달라 전하라. 내 그곳에서 평생 조정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철을 두드리며 죗값을 치르겠노라."
조선 경국대전의 맹점. 사병 주조는 엄히 금지되어 있으나, 변방의 척박한 영지에서 생업을 돕고 치수를 위한 강변의 가관(架管)을 제작하는 야철 상업은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이진은 그 법률적 틈새를 노린 것이다. 회령으로 가는 순간, 그는 조정의 눈을 피해 자신만의 거대한 특수강 기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전하께서는... 사약을 강제로 먹여 도덕적 오명을 쓰느니, 눈엣가시 같은 나를 북방의 동토로 영원히 유배 보내는 쪽을 택하실 것이다. 한명진 대감에게도... 내가 한양을 떠나는 것이 나쁜 거래는 아닐 터..."
말을 마친 이진의 몸이 앞으로 툭 꺾였다.
"대군 대감! 대군 대감!"
임성재의 다급한 비명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아스라히 멀어져 갔다. 의식을 잃어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진의 망막에는 오직 시뻘겋게 타오르는 미래식 가열로의 설계도만이 마지막 불꽃처럼 선명하게 낙인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