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삼백 자루의 날붙이가 뿜어내는 서슬 퍼런 쇠붙이 냄새가 함경도의 밤바람을 찢었다.

말안장 위에서 내려다보는 의금부 판사 임백호의 눈동자에는 횃불의 붉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붉은 명조(命條)는 성종의 수결이 찍힌 사직의 칼날이었다. 사방을 겹겹이 포위한 내금위 무사들의 푸른 철갑이 야철지의 벌건 고로 열기를 받아 기괴하게 번뜩였다.

"대군 대감. 이제 그 가짜 농기구 장난질도 끝이외다. 순순히 포박을 받으시어 한양 어전에서 사직을 기만한 죄를 자백하시지요."

임백호의 목소리에는 승자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이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등 뒤의 특수가열로 노벽에 몸을 기댔다. 등 가죽을 타고 전해지는 고열에도 불구하고, 망막 위의 정밀 야금 설계도를 무리하게 구동한 대가인 한랭증이 그의 심장을 얼려대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푸르게 변하며 감각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오한을 짓누르며, 이진은 입꼬리를 뒤틀어 올렸다.

"가짜 농기구 장난질이라."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얼어붙은 무릎 관절에서 삐걱거리는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고로 속에서 끓어오르는 용융액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의금부 판사 임백호. 네놈이 들고 있는 그 붉은 종이 쪼가리가 조선의 국법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느냐?"

"무슨 망발이냐! 이것은 주상 전하의 명을 받든 어명이다! 사사로이 병기를 주조하여 군대를 조직하려 한 역모의 혐의가 명백하거늘, 어찌 한 가닥 혀끝으로 천망(天網)을 벗어나려 하느냐!"

임백호가 칼자루를 움켜잡으며 호통을 쳤다. 내금위 무사들이 일제히 한 걸음 좁혀 들어왔다. 야철지의 긴장감이 폭발 직전의 압력솥처럼 팽창했다.

이진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무사들의 검끝이 그의 가슴을 겨냥했으나, 이진의 손에서 나온 것은 무기가 아니었다. 가죽으로 꼼꼼히 감싼 두꺼운 장책과 사포(紗布)로 감싼 관인 찍힌 공문서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진이 장책을 펼쳐 임백호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경국대전 호전(戶典) 치수조(治水條). 그리고 함경도 관찰사인의 직인이 선명히 찍힌 '농지 및 가열 도관 수로 연계 준설 공책(治水 架管 竣工 准冊)'이다."

임백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게 이 역모의 증거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상관이 없다라?"

이진은 차가운 침을 뱉어내며 말을 이었다.

"조선 경국대전에는 치수 가관(治水 架管), 즉 강물의 흐름을 다스리고 모래를 걷어내는 대형 도관에 한해서는 재질과 중량의 한계를 두지 아니하며, 지방관의 승인 하에 면세 및 영구 거치를 허용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땅 회령은 겨울철만 되면 강물이 얼어붙어 농업은 물론이요, 민초들의 식수조차 막히는 불모지다. 내 이를 가엽게 여겨, 특수가열로의 폐열을 강물로 인도해 물길이 얼지 않도록 수로를 정비하고 흙모래를 걷어내기 위한 '준설용 도관'을 설계한 것이다."

그는 공방 구석에 거치된 속사포의 포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것은 포신이 아니다. 강바닥의 잡석과 모래를 고압의 가열 증기로 밀어내기 위해 고안된 '치수 가관'의 분출구일 뿐이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법률의 예외 조항을 완벽히 준수하여 주조된 합법적인 치수 기계란 말이다!"

"억지 부리지 마라! 저 기괴한 쇠통에서 불을 뿜어 여진족을 도륙하는 것을 본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가관이 어찌 철환을 쏘아 사람을 죽인단 말이냐!"

임백호가 서슬 퍼렇게 소리쳤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 이진의 뒤에 서 있던 야철 장인 서태강이 거대한 쇠망치를 바닥에 쾅 내려놓으며 나섰다.

"판사 나리! 눈이 있으면 똑똑히 보우 야! 저것은 대군 대감께서 우리 회령 민초들이 겨울에 얼어 죽지 말라고 만드신 온수 도관이오! 저 도관 끝의 가열로 고온 송풍구 내벽 개스킷은 영하의 혹한이 닥치면 스스로 수축하여 압력을 흘려보내게 설계되어 있소! 우리 장인들이 대감의 지도 아래 고령토 함량을 극미하게 조율해 만든 특수 배합재란 말이외다! 이게 어찌 무기요? 고압 가스가 가마 안에서 터지지 않도록 숨구멍을 열어주는 안전 장치일 뿐이지!"

서태강의 목소리에는 맹목적인 확신과 웅장함이 실려 있었다. 그는 이진의 야금학을 '철의 신기술'로 숭배하는 광신도가 되어 있었다. 5화에서 고온 송풍구의 폭발 위기를 막아냈던 그 열수축 기밀 파쇄 기술은 이제 합법적인 치수 장치의 안전 부품으로 둔갑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야철지 외곽의 어둠 속에서 거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홰를 든 수백 명의 민초들이 회령천의 빙판을 딛고 공방 앞마당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손에는 괭이와 삽, 그리고 조잡한 농기구를 든 함경도의 야철 민초들과 변방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굶주림과 추위로 얼룩져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대군 대감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난겨울에 모두 굶어 죽거나 여진족의 말발굽에 짓밟혀 고기방석이 되었을 것이오!"

"누가 우리 대감님을 잡아가려 하는가!"

"의금부 사령 놈들이 백성들의 농사를 망치고 가뭄을 대비한 치수 도관을 빼앗으려 한다!"

민초들의 함성이 계곡을 흔들었다. 수백 명의 인간 장벽이 내금위 삼백 기의 군대를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왔다. 아무리 정예병이라 해도, 성난 민초 수백 명을 백주대낮에 도륙하는 것은 조정으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정치적 재앙이었다.

임백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 이 천한 것들이 감히 어명을 받드는 의금부의 행차를 가로막느냐! 모두 역당으로 다스려 목을 벨 것이다!"

"역당이라니? 누가 역당인가?"

이진이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임백호를 압박했다.

"조선 국법에 명시된 합법적인 치수 및 진휼 작업을 무력으로 방해하고, 백성들의 생명줄인 준설 기계를 파괴하려 드는 네놈들이야말로 사직의 근간을 흔드는 대역죄인이 아닌가! 경국대전 형전(刑典)에는 농업과 치수를 방해하여 민심을 도탄에 빠뜨린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장(杖) 일백 대에 처하고 유배에 처한다 하였거늘!"

"네 이놈, 은장대군……!"

"꿇어라."

이진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여기는 한양이 아니다. 법보다 검이 가깝고, 검보다 굶주림이 더 무서운 북방의 끝이다. 이 자리에 있는 내 백성들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네놈들은 이 회령천을 살아서 건너지 못할 것이다."

긴장이 극에 달한 순간, 임백호의 부장 하나가 기세를 제압하려 검을 휘두르며 이진에게 돌진했다.

"이 망나니 왕족 놈이 미쳤구나! 어명을 거역하는 역적은 즉석에서 참해도 무방하다!"

서슬 퍼런 검날이 이진의 목덜미를 향해 짓쳐 들어온 순간, 이진의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여을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녀의 소맷자락에서 뻗어 나온 짧은 비수가 관군의 검날을 빗겨 내며 부장의 손목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서걱!

"아악!"

부장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서태강과 야철 장인들이 들고 있던 거대한 쇠망치와 철봉이 허공을 갈랐다.

퍽! 빠드득!

"으아아악!"

말 위에서 이진을 위협하던 의금부 사령들의 머리와 어깨가 장인들의 망치질에 처참하게 깨져 나갔다. 순식간에 비명과 선혈이 낭자했다. 수백 명의 민초들이 괭이를 휘두르며 사령들을 말 아래로 끌어내렸다. 삼백 기의 내금위 무사들은 좁은 공방 마당에서 민초들의 거대한 기세와 좁은 지형에 가로막혀 진형을 전개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았다.

"멈춰라! 모두 멈춰라!"

임백호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으나, 이미 기세는 기울어 있었다.

이진은 피가 튀는 난장판 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임백호를 응시했다.

"아직도 이것이 병기로 보이는가?"

그는 속사포의 약실 뒤편에 장착된 기어식 수차 장치로 다가갔다. 극심한 한랭증으로 인해 전신이 얼어붙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망막 위에 정밀 야금 설계도의 파란 빛이 번뜩였다.

[시스템 동기화: 유체 역학 유속 제어 원리 적용.] [관개 모터 변환 시뮬레이션 가동율 100%]

이진의 시야에 포신 내부의 유체 흐름과 압력 제어 수치들이 실시간으로 투사되었다. 그는 차가운 손으로 기어 변속 레버를 움켜잡았다.

드르륵! 쾅!

포신의 후방 격발 장치와 연결되어 있던 수차 기어가 맞물리며 굉음을 냈다. 이진이 가열로와 연결된 고압 온수 밸브를 개방하자, 속사포의 포신 끝에서 거대한 화약 연기 대신 섭씨 90도가 넘는 끓는 물과 수증기가 엄청난 압력으로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이이익!

포구에서 분출된 초고온의 온수 줄기가 공방 앞마당의 얼어붙은 흙바닥을 순식간에 녹여버리며 거대한 진흙탕을 만들었다. 뿜어져 나온 고압의 수류는 마당 구석에 설치된 대형 수차를 무서운 속도로 돌리기 시작했다.

수차가 돌자, 연결된 기어들이 맞물리며 주변 농지로 연결된 대나무 도관을 통해 물이 세차게 솟구쳤다.

"보아라."

이진이 뿜어져 나오는 온수 증기 속에서 임백호를 굽어보며 차갑게 속삭였다.

"이것이 쇳물을 뿜어 수차를 돌리고, 겨울철 얼어붙은 논밭에 따뜻한 물을 대는 '관개 수로 모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내부의 특수강 파이프는 오직 유체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 냉간 단조로 깎아낸 도관일 뿐이다. 주상 전하께서도 이 장치의 도면을 보시면 치수를 위한 대군의 지혜에 감탄하실 뿐이거늘, 네놈들이 감히 이를 무기라 참칭하여 왕실을 모함하려 들어?"

임백호는 넋이 나간 듯 돌고 있는 수차와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화약 냄새 대신 자욱한 수증기만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완벽한 법리적 방어벽이자, 눈앞에서 펼쳐진 과학적 기술의 증명이었다.

이진은 임백호의 말안장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한기가 임백호의 가죽 장갑을 타고 전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주지."

이진이 오직 임백호만이 들을 수 있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이곳으로 보낸 좌의정 한명진. 그자가 지금쯤 한양에서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아느냐?"

임백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렸다.

"그, 그게 무슨……."

"여을이 한양으로 보낸 내 가열로의 설계 장부 말이다."

이진의 시선이 잠시 여을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임백호에게 꽂혔다.

"그 장부는 유황 가스를 제어하기 위한 석탄 미탄 배합률 수치 중, 임계 열팽창 균열 수치를 내 임의로 조작해 둔 '가짜 장부'였다. 한명진과 훈구 세력이 그 도면을 훔쳐 한양 근교에 비밀 고로를 짓고 특수강을 밀조하려 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겠느냐?"

이진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말려 올라갔다.

"온도를 올리는 순간, 고로 벽면의 내화벽돌이 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포화하여 대폭발을 일으켰겠지. 한양 한복판에서 훈구파의 비밀 야철 기지가 통째로 날아가고, 그들이 사사로이 철을 주조하려 했다는 대역죄의 증거가 온 도성에 흩뿌려졌을 터. 지금쯤 한명진은 그 폭발의 잔해 속에서 역모 혐의를 해명하느라 제 목숨 보존하기도 바쁠 것이다."

"아…… 아아……!"

임백호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들이 은장대군을 옭아매기 위해 쳐놓았다고 믿었던 그물이, 처음부터 이 젊은 대군이 파놓은 거대한 함정이었음을. 자신들은 그 함정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사냥개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그때였다.

"비키시오! 어명을 받든 전령이외다!"

야철지 입구의 혼란을 뚫고, 피투성이가 된 파발마 한 필이 마당 한가운데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말에서 굴러떨어진 전령의 등 뒤에는 국왕의 친친(親親) 직인이 찍힌 황금색 어교(御敎) 통이 매여 있었다.

임백호와 내금위 무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이진 역시 차가운 눈으로 전령을 응시했다.

전령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교를 꺼내 받들어 올렸다.

"함경도 유배인 은장대군 이진은 들으라! 한양 도성에서 주조 가마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도당의 무리들이 사사로이 병기를 만들려 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이에 주상 전하께서는 북방에서 여진을 치고 치수의 기적을 행한 은장대군의 특수 가열 기술에 의문을 품으시어, 대군이 제작한 '치수 가관'의 실체와 그 초강도 화력무기의 전말을 확인하고자 하신다!"

전령의 목소리가 젖어드는 밤하늘을 엄숙하게 갈랐다.

"임금께서 명하시기를, 은장대군 이진은 자신이 주조한 모든 가관의 완제품과 야철 장인들을 대동하고 즉각 도성으로 압송…… 아니, 입조(入朝)하여 주상 전하의 면전에서 그 기술의 절대성을 직접 증명하라 하셨다! 만약 그 기술이 사직을 이롭게 함이 증명된다면 국경 지령권을 하사할 것이나, 단 한 치의 기만이라도 발견된다면 그 자리에서 참형에 처할 것이다!"

어교의 붉은 직인이 횃불빛 아래 핏빛으로 빛났다.

성종이 내린 최후의 시험대.

치수 가관의 위장막을 벗겨내고 조선 최고의 권력자들 앞에서 쇠붙이의 힘을 증명해야 하는, 살얼음판 같은 한양 어전회의로의 초대장이었다.

이진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심장을 옥죄던 한랭증의 통증이 극에 달했으나,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개어 있었다.

"전하의 뜻대로 하지요."

이진이 싸늘하게 웃으며 어교를 받아들었다. 승부의 판때기는 이제 북방의 척박한 황무지에서 한양의 장엄한 어전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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