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피투성이가 된 전령의 숨소리가 거칠게 흩어지는 회령의 야철지 마당. 성종의 친친(親親) 직인이 찍힌 황금빛 어교 통이 횃불 아래에서 핏빛으로 번뜩였다.

사헌부 감찰 임백호는 무릎을 꿇은 채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북방의 한계를 시험하듯 몰아치는 칼바람 속에서, 대군의 망막에는 차디찬 푸른빛의 글자들이 어지럽게 명멸하고 있었다.

[경고: 생체 열에너지 급감. 중심 체온 34.2℃. 정밀 야금 설계도 동기화 대가 누적.]

이진은 가슴을 옥죄는 한랭증의 통증을 짓누르며, 손끝이 푸르게 변해가는 것을 소맷자락 속으로 감추었다. 그의 시선은 전령이 바친 어교를 지나, 멀리 어둠 속에 잠긴 한양 도성의 방향으로 향했다.

"주상 전하께서 친히 내리신 기회라……."

이진의 입술 사이로 백색의 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내 기꺼이 도성으로 가리라. 임 감찰, 그대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치수 가관(治水 架管)'의 진짜 실체를 전하의 어전에서 직접 보여줄 터이니."

임백호는 대군의 서늘한 미소 앞에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미 판은 짜여 있었다.

***

사흘 뒤, 동해안의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한양으로 향하는 대형 조운선(漕運船) 갑판 위.

강화도 앞바다를 거쳐 한강 마포나루로 진입하는 뱃길은 매서운 강바람으로 가득했다. 이진은 선실 내부에 설치된 특수 온돌 장치에 몸을 밀착한 채, 서태강이 바친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한양의 밀정망을 통해 들어온 긴급 첩보였다.

조의정 한명진이 도성 외곽에 은밀히 구축했던 사설 야철 기지가 완전히 붕괴했다는 낭보였다.

"결국 터졌군."

이진의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것은 철저히 계산된 함정의 결과였다. 이진은 과거 2화에서 밀정 여을의 정체를 간파한 직후, 그녀가 훔쳐 갈 기밀 장부에 손을 써두었다. 유황 가스를 제어하기 위한 석탄 미탄 배합률 수치 중, 고온에 도달했을 때의 임계 열팽창 균열 수치를 미세하게 조작한 '가짜 가열로 배합 장부'였다.

제아무리 한양의 뛰어난 장인들이라 할지라도, 이진이 설계한 현대식 가열로의 메커니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그들은 결정적인 핵심 기술을 알지 못했다. 이진이 5화에서 가열로의 고온 송풍구 내벽에 적용했던 '고령토 함량 비례 특수 배합 개스킷'의 비밀이었다. 영하의 외기 속에서 열수축 강도가 극대화되어, 고로가 임계 미탄 압력으로 폭발하기 직전 스스로 수축하며 가스를 유출시키는 이 바이패스(Bypass) 안전장치가 한명진의 가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멍청한 자들이 기술의 겉핥기만 보고 날뛰었으니, 가마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노벽이 견디지 못하고 폭사하는 것은 당연한 물리적 귀결이지."

이진은 혼잣말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한명진의 사설 야철지는 대폭발과 함께 수십 명의 장인들이 몰살당했고, 그들이 불법으로 주조하려던 병기들의 잔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병 주조를 대역죄로 다스리는 조선에서, 훈구파의 수장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꼴이었다.

그때, 선실의 두꺼운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여을이 들어왔다. 그녀의 양손에는 따뜻하게 데워진 놋쇠 화로가 들려 있었다.

여을은 이진의 발치에 화로를 내려놓은 뒤, 소리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군 대감."

"무슨 일이냐."

"북변의 공방에서…… 전갈이 왔사옵니다."

여을이 품속에서 붉은 진흙으로 봉인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 올렸다. 이진은 그것을 받아 지점토를 깨뜨렸다. 주머니 안에는 회령의 심복들이 보낸 짤막한 서신이 들어 있었다.

[대감의 명에 따라, 한양에 억류되어 있던 여을의 누이들과 동생들 전원을 무사히 구출하여 회령의 안전지대로 이송하였나이다. 현재 대군의 가호 아래 의식(衣食)에 부족함이 없이 지내고 있사옵니다.]

여을은 바닥에 이마를 찧을 듯이 숙였다.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차가운 선실 바닥을 적셨다.

"대감의 은혜, 뼈에 새기겠나이다. 소첩의 목숨은 물론, 저희 가문의 남은 명줄까지 모두 대감의 것입니다. 이제 한명진의 개가 아닌, 대감의 충직한 사냥개로서 살아가겠나이다."

조정의 협박에 못 이겨 밀정 짓을 해야 했던 그녀의 마지막 족쇄가 풀린 순간이었다. 이진은 흐느끼는 여을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신의를 믿지 않는 그였지만, 철저한 대가와 보상으로 묶인 관계는 그 어떤 맹약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는 것은 회령에 돌아가서 네 동생들의 얼굴을 보고 하거라. 지금은 한양의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정신 바짝 차려라."

"예, 대감. 명을 받들겠나이다."

여을은 눈물을 훔치며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서린 것은 이제 두려움이 아닌, 자신들을 구원해 준 주인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이었다.

***

반나절 뒤, 조운선은 마포나루의 자욱한 안개를 뚫고 정박했다.

선창가에는 이미 삼엄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좌의정 한명진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 지평들과 내금위 무사들이 쇠사슬과 징발장을 든 채 길목을 꽉 막아서 있었다. 그들의 뒤편에는 수십 명의 하급 서리들이 눈을 부릅뜨고 하선하는 화물들을 노려보았다.

"대군의 배가 도착했다! 단 한 상자의 쇠붙이도 빠짐없이 전수 조사를 시시하라!"

사헌부의 젊은 관원이 호통을 치며 조운선의 갑판으로 들이닥쳤다.

선적된 상자들은 엄청난 무게로 인해 배의 홀수선을 아슬아슬할 정도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초강도 마르텐사이트 탄성강으로 주조된 속사포의 핵심 기어판들과 단성 포신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만약 이것이 단 한 점이라도 노출된다면, 아무리 치수 기계라 우겨도 조정의 벌떼 같은 탄핵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묵직한 가죽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사헌부에서 오셨는가."

"은장대군 대감! 주상 전하의 어명이 있으셨으나, 도성으로 반입되는 모든 대형 철물은 사헌부의 사전 검수를 거쳐야 하옵니다. 당장 상자들을 모두 개봉하시오!"

관원이 위세를 부리며 징발장을 내밀었다.

이진은 대꾸 대신 가죽 주머니에서 번쩍이는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황동으로 정밀하게 주조된, 국왕의 친필 서명이 새겨진 '황동 식별표(黃銅 識別標)'였다. 과거 성종 즉위 조서 중, 공납 면제 대상국에 소속된 특정 조운선의 적재 전수 검사를 배제한다는 예외 법령의 증표였다. 이진이 8화에서 상공단과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미리 손에 쥐고 있던 비장의 카드였다.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황동 식별표가 횃불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자, 기세등등하던 사헌부 관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 뒤에 서 있던 늙은 서리들은 비명을 지르듯 무릎을 꿇었다.

"즉…… 즉위 조서의 황동 식별표가 아니옵니까!"

"경국대전에 명시된 바, 전하의 즉위 교서에 따라 이 식별표가 부착된 황실 공납선은 호조와 사헌부의 그 어떤 전수 검사도 받지 아니하며, 세곡과 치수 자재의 운송에 있어 절대적인 통행권을 보장받는다. 또한, 조선 경국대전 내 치수 가관(治水 架管)의 재질 및 중량 규제 면제 예외 구문에 의거하여, 강물 준설용 대형 도관은 도성 반입 시 무게 제한을 두지 않는다 되어 있다. 내가 가져온 것은 북방의 치수를 위해 주조한 대형 가관일 뿐이거늘, 서리 놈들이 감히 어필이 새겨진 식별표를 무시하고 상자를 열려 하는가?"

이진의 목소리가 뇌성처럼 나루터를 때렸다.

"이 식별표를 훼손하거나 검사를 강행하는 자는 즉시 왕실의 권위를 참칭한 것으로 간주하여, 대명률에 따라 삼족을 멸할 대역죄로 다스릴 것이다. 자, 열어보겠느냐?"

"사…… 사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미련하여 대군의 물품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급 서리들은 기겁하며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사헌부 관원 역시 손에 쥔 징발장을 떨어뜨리며 부르르 떨었다. 감히 임금의 즉위 교서와 경국대전의 예외 조항을 정면으로 거스를 배짱은 그들에게 없었다.

"물러서라. 그리고 이 상자들을 용산의 창고로 안전하게 가이드하라."

"예! 예, 대감! 즉시 길을 열겠습니다!"

조정이 쳐놓은 촘촘한 그물이, 이진이 파고든 법리적 맹점과 황동 식별표 한 장에 맥없이 찢겨 나가는 순간이었다.

***

그날 밤, 용산의 한 비밀 창고.

창고 안으로 무거운 무쇠 상자들이 차례로 입고되는 순간, 이진의 망막 유리에 푸른빛의 스펙트럼이 거대하게 펼쳐졌다.

[신경망 링크 완료. 도성 지질 데이터 수신 중…….] [분석 완료: 한강 하구 및 용산 일대 연약 지반 하중 분석도 투사.]

눈앞에 3차원 입체 지형도가 그려지며, 특정 구역의 지반 강도가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표시되었다.

"이곳의 지반은 모래와 진흙이 섞인 사질토다. 이 상태에서 마르텐사이트 기어판과 포신들을 한곳에 모아두면, 그 자중(自重)을 견디지 못하고 창고 바닥이 침하할 것이다. 바닥이 내려앉으면 관아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어."

이진은 망막의 하중 계산식에 따라 신속하게 지시를 내렸다.

"서태강."

"예, 철의 신이시여! 말씀만 하옵소서."

어느새 이진을 광신적으로 따르는 서태강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가장 무거운 마르텐사이트 회전 기어판들은 제3구역의 암반 지대로 분산 배치해라. 그리고 단성 포신들은 가관의 외형을 씌워 제1창고의 배수로 근처에 거치하거라. 하중을 평방자당 세 근 이하로 분산시키지 않으면 내일 아침 조정의 관리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바닥이 무너질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즉시 장인들을 움직여 분할 배치하겠나이다!"

장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거대한 철제 부품들을 정밀하게 나누어 배치했다.

그 순간, 이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얼어붙는 듯한 극심한 오한이 치밀어 올랐다.

"으윽……!"

이진이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전신이 빙결되는 듯한 한랭증의 반동이었다. 정밀 설계도의 연산 장치를 무리하게 구동하여 지반의 미세 하중까지 계산해 낸 대가였다.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하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하게 굳어갔다.

"대감!"

여을이 황급히 다가와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둔 한원 고로의 폐열을 담은 특수 보온 황동 구체를 이진의 가슴에 밀착시켰다. 붉게 달구어진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가자, 이진은 간신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심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괜찮다…… 이제 다 되었다."

이진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나는 거대한 강철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사직의 심장부에서 조선의 지배자들을 마주하는 것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전회의가 열리는 편전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침묵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용상에 높이 좌정한 성종 이선의 영민한 눈빛 아래, 좌우로 조선의 공경 대신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창백한 안색으로 이를 갈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좌의정 한명진이었다. 자신의 사설 야철지가 폭사하여 가문이 역모의 위기에 몰린 그로서는, 이번 어전회의에서 은장대군을 반드시 역모의 괴수로 몰아넣어야만 살길이 열리는 상황이었다.

"함경도 유배인, 은장대군 이진 입조하옵니다!"

내관의 높은 외침과 함께, 이진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편전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등 뒤로, 서태강을 비롯한 야철 장인들이 무거운 제철 상자들을 받들어 든 채 뒤따랐다.

성종의 차가운 시선이 이진의 야윈 얼굴에 닿았다.

"은장대군 이진은 들으라."

성종의 목소리가 웅장한 편전의 대들보를 울렸다.

"그대가 북방의 척박한 땅에서 치수를 핑계로 사사로이 거대한 철물들을 주조하고, 나아가 요동의 여진을 초토화한 화력무기를 만들었다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기술의 실체와 사직에 해가 되지 않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대군이라 할지라도 대명률의 엄한 법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한명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전하! 저 자가 가져온 것은 치수 도구의 탈을 쓴 역모의 변기이옵니다! 당장 저 상자들을 열어 실체를 밝히고, 은장대군을 국문 장소로 압송하소서!"

가장 거대한 권력의 폭풍이 이진을 향해 몰아쳤다.

그러나 이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성종과 한명진의 얼굴을 차례로 응시했다. 그의 망막 위로, 편전 내부의 모든 구조와 대치 구도가 푸른빛의 정밀한 정보로 투사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운명을 뒤흔들, 일촉즉발의 어전 경연 국문 재판이 마침내 그 막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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