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기어 마찰음이 쇠가죽을 찢어발기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대군 대감! 기어가 맞물려 움직이지 않습니다! 탄피가 걸렸습니다!"

서태강의 절규가 흩날리는 진눈깨비 사이를 찢고 전장에 울려 퍼졌다. 불과 백 보 밖. 여진의 대족장이 이끄는 정예 기병들의 쇠말굽 소리가 북방의 단단한 동토를 부술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서린 살기 어린 광경이 이진의 동공에 선연히 맺혔다.

이진의 망막 위로 푸른빛의 정밀 야금 설계도가 붉은색 경고등을 켜며 사정없이 점멸했다.

[경고: 연속 격발로 인한 약실 내부 온도 급상승.] [외부 극저온과 내부 초고온의 열충격(Thermal Shock) 발생.] [임계 균열율 92% 돌파. 다음 격발 시 약실 파괴 및 대규모 가스 역류 예상.]

동시에 뇌를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전신이 얼어붙는 한랭증의 전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손끝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죽어가며 감각을 잃어갔다. 심장이 굳어가는 빙점의 고통 속에서도, 전생의 기억을 품은 이진의 이성은 오히려 가혹하리만치 차갑게 굳어졌다.

"당황하지 마라."

이진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곁에 선 서태강의 고막을 꿰뚫을 만큼 매서웠다.

"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팽창했을지언정 물리 법칙의 인과를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진은 일찍이 고온 송풍구의 내벽 개스킷을 제작할 때 영하의 외기 속에서 열수축 강도가 극대화되도록 고령토 함량을 조율했던 공식을 떠올렸다. 극저온의 냉기가 가해질 때 특정 배합재가 급격히 수축하며 틈새를 만들어 가스를 방출하던 그 원리. 그 기술적 비틀기를 지금 이 약실에 역으로 적용해야 했다.

"태강아! 약실 후미 외벽에 회령의 마른 눈을 들이부어라! 당장!"

서태강이 눈을 부릅떴다.

"예? 대감! 이 뜨거운 쇠에 눈을 부으면 급작스러운 냉각으로 약실이 통째로 깨져 나갑네다!"

"내 배합을 믿어라!"

이진이 굳어가는 손가락으로 레버를 움켜쥐며 호통을 쳤다.

"이 탄성강은 백산의 고령토와 초저황 탄소조성으로 다듬어진 쇠다! 급랭의 충격을 견디도록 설계된 마르텐사이트란 말이다! 외벽을 급격히 수축시켜 기어의 미세 유격을 강제로 벌려야 한다. 어서 움직여라!"

대군의 목소리에 담긴 압도적인 지적 권위에 서태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날고 기는 함경도의 야철 장인이라 자부하던 그였으나, 이진의 앞에만 서면 철을 부리는 신의 음성을 듣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눈을 부어라! 흙손으로 쓸어 담아 당장 처박아라!"

장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얼어붙은 눈 더미를 움켜쥐고 붉게 달아오른 약실 후미에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치이이이익!

눈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아니라, 쇠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압의 수증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백색의 증기가 이진의 얼굴을 뒤덮었다.

망막 위에서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수치들이 나열되었다.

[외벽 온도 급하강. 열응력 재분배 시작.] [수축률 0.08% 도달. 약실 기어 간극 0.12mm 확보.]

철컥!

마치 자물쇠가 제 짝을 찾아 들어가는 듯한 둔탁하고도 경쾌한 금속음이 수증기 속에서 울려 퍼졌다. 약실 내부의 열팽창으로 굳게 닫혀 있던 회전식 비결정 기어판이 외벽의 강제 수축으로 발생한 미세한 틈을 타 제자리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이다.

"장전 완료되었습니다!"

서태강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이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조정의 간신 놈들이 화약 한 줌, 무쇠 한 근 대어주지 않았거늘."

그는 주저 없이 격발 레버를 당겼다.

"이 땅의 철과 화약이 누구의 것인지 똑똑히 보아라."

두두두두두둥!

한원천 계곡을 가득 메운 것은 이제껏 조선의 그 어떤 신기전도, 천자총통도 내지 못했던 기계적인 폭음이었다. 분당 80발. 자체적으로 제강한 고강도 탄성강 포신과 황동으로 압착 주조한 정밀 탄피가 맞물려 돌아가며 강철의 폭풍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탄환은 단순한 쇳덩이가 아니었다. 이진이 현대 야금학의 정밀 하중 계산식을 적용해 탄두의 형상과 경도를 극대화한 특수 배합 강철 탄환이었다.

쉬이익! 슈우욱!

공기를 가르는 기괴한 파찰음과 함께 쏟아진 탄환들은 계곡 입구로 밀려들던 여진 기병들의 전면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푸하학!

말의 가슴팍에 박힌 강철 탄환은 뼈와 근육을 관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배후에 타고 있던 기병의 견고한 가죽 판갑마저 종이상자처럼 찢어발겼다. 여진의 전사들이 자랑하던 두터운 이중 철갑조차 회전하는 강철 탄환 앞에서는 진흙덩이에 불과했다.

"크아악!"

"말을 돌려라! 하늘이 무너진다!"

단 한 발의 포탄이 터지는 것이 아니었다. 일정한 박자로 대지를 난사하는 강철의 채찍이었다. 계곡의 좁은 협로에 갇힌 여진 기병들은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탄환이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날카로운 파편들이 기병들의 얼굴과 목을 사정없이 긋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한원천 계곡은 붉은 피와 찢겨 나간 살점, 그리고 부서진 판갑의 잔해로 가득 찬 불바다로 변했다.

임사홍은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벌어진 입 사이로 차가운 침이 흘러내리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이것이…… 이것이 정녕 군기시의 화포란 말인가? 아니야, 명나라의 불랑기포조차 이리 빠르고 참혹하게 적을 쓸어버릴 수는 없다. 이것은 무기가 아니다. 움직이는 철의 장벽이다……."

조정의 대신들이 한양의 대청마루에서 명분을 논하며 은장대군의 목을 죌 음모를 꾸밀 때, 이 버림받은 왕족은 북방의 지옥 같은 유배지에서 조선의 사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힘을 창조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의 대열은 완전히 붕괴했다. 수천의 군세가 단 석 대의 속사포가 토해내는 지속적인 화망을 뚫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대족장의 울부짖는 명령도, 군마들의 처절한 비명도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격발음 속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여진의 대족장 아구다르는 눈앞에서 자신의 최정예 친위 기병 백여 기가 단 몇 숨 사이에 형체도 없이 으스러지는 것을 목도했다.

그의 이마 위로 식은땀과 피가 뒤섞여 흘러내렸다. 저 멀리 포연 속에서 붉은 눈빛을 한 채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이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명나라의 장수도, 조선의 장수도 아니었다. 철을 부려 인간을 도살하는 괴물이었다.

"철귀(鐵鬼)다……."

아구다르가 든 도끼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북방의 위대한 철귀가 진노하셨다! 우리는 인간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차가운 눈밭에 무릎을 꿇었다. 양손을 하늘로 뻗으며 머리를 땅에 찧기 시작했다. 대족장이 굴복하자, 살아남아 도망치던 극소수의 여진 기병들 역시 무기를 버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엎드려 투항의 몸짓을 보냈다.

전장에 고요가 찾아왔다. 오직 속사포의 포신에서 피어오르는 회색빛 연기와, 사방에 널린 시체들이 뿜어내는 비린내가 가득할 뿐이었다.

"하……."

서태강이 떨리는 손으로 망치를 내려놓았다. 야철지의 장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단 세 대의 화포로 수천의 여진 기병을 완벽하게 몰살했다. 이 위대한 승리의 주역은 조정의 화포도, 정규군도 아니었다. 오직 대군의 머릿속에서 나온 철의 규격이었다.

하지만 이진은 승리를 자축할 여유가 없었다.

"으윽……."

이진의 입에서 한 줌의 백색 김과 함께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밀 야금 설계도의 지식을 한계까지 인출해 약실의 열응력을 제어한 대가가 그의 육체를 덮친 것이다.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극심한 오한에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전신이 빙결되는 듯한 통증에 무릎이 꺾이려 했다.

"대군 대감!"

여을이 기민하게 다가와 그의 몸을 부축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서려 있었다.

이진은 이빨을 맞부딪치며 굳어가는 손가락으로 포신 아래를 가리켰다.

"탄피…… 뜨거운 탄피를 모아라."

여을은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장인들에게 소리쳐 격발 후 쏟아져 나온, 여전히 붉은 기운을 품고 있는 황동 탄피 수백 개를 철제 화덕의 온수통에 쏟아붓게 했다.

치지직!

탄피들이 품고 있던 초고온의 잔열이 물속으로 전도되며 순식간에 온수통의 물이 펄펄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여을은 달아오른 물에 적신 가죽 포를 이진의 어깨와 가슴에 단단히 감쌌다.

"대감,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뜨거운 열기가 가죽 포를 통해 가슴팍으로 스며들자, 굳어가던 이진의 혈관이 겨우 요동치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었던 뺨에 미약한 핏기가 돌았다.

이진은 자신을 부축한 여을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좌의정 한명진이 보낸 밀정이었다. 하지만 이진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한명진을 무너뜨릴 가장 치명적인 덫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어 돌려보냈었다.

'석탄 내 유황 가스 제어 수치 중 임계 열팽창 균열 수치를 교묘히 바꾼 가짜 가열로 배합 장부.'

한명진이 한양에서 그 장부를 바탕으로 야철 공방을 지어 무기를 복제하려 드는 순간, 그들의 고로는 거대한 폭탄이 되어 훈구 세력의 핵심을 날려버릴 것이다. 이미 그 덫은 작동하기 시작했을 터였다.

이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공방 구석에 거치된 속사포의 포신들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강변의 잡석을 걷어내는 '준설용 도관(치수 가관)'과 다름없는 무뚝뚝한 철관 형태였다. 경국대전과 사병 주조 금지령의 삼엄한 법망을 피하기 위해 완벽하게 조율된 위장막이었다.

"대감, 몸을 더 녹이셔야 합니다."

여을의 목소리에 서린 미세한 염려를 느끼며, 이진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추위는 한양에서 불어오는 법이니까."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야철지 외곽의 감시 초소 방향에서 날카로운 경종 소리가 회령천의 얼어붙은 계곡을 흔들었다.

댕! 댕! 댕!

"관군이다! 한양에서 온 의금부 관군들이 밀려옵니다!"

초병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야철지 앞마당으로 수백 개의 횃불이 어둠을 뚫고 들이닥쳤다. 말안장 위에 올라탄 자들의 복색은 회령의 변방 군관들과 달랐다. 푸른 철갑 위에 붉은 도포를 두른 자들. 한양의 궁궐을 수호하고 왕명에 따라 역적을 토벌하는 내금위 정예병들과 의금부의 압송 대열이었다.

그 수 자그마치 삼백 기.

대열의 선두에 선 의금부 판사 임백호가 말을 몰아 공방 앞마당 한가운데로 진입했다. 그의 손에는 국왕 성종의 수결이 찍힌 어찰과 붉은 명조(命條)가 들려 있었다.

"어명을 받들라!"

임백호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야철지의 장인들을 위압했다. 삼백 기의 내금위 무사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며 공방의 사방을 포위해 들어갔다. 그들의 서늘한 칼날이 횃불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은장대군 이진은 들으라! 조정의 허가 없이 대량의 철광을 채굴하고, 경국대전을 위배하여 사사로이 병기를 주조해 군대를 조직하려 한 역모의 혐의가 명백하다! 이에 의금부는 야철지의 모든 설비와 주조된 기물을 즉시 몰수하고, 주모자 은장대군을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말 위에서 이진을 굽어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대군 대감. 이제 그 가짜 농기구 장난질도 끝이외다. 순순히 포박을 받으시어 한양 어전에서 사직을 기만한 죄를 자백하시지요."

한명진과 훈구파가 쳐놓은 최후의 그물이 마침내 북방의 지옥 같은 겨울 속으로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포신에서 채 가시지 않은 화약 연기 너머로, 삼백 자루의 검날이 이진의 목끝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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