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함경도 산하를 뒤덮은 어두운 눈보라 속에서, 대지를 통째로 주저앉힐 듯한 묵직하고 거대한 발소리가 한원 고로 벽 앞을 향해 몰아쳤다.

여진 삼림 대족장이 직접 이끄는 수천 명의 대군세가 검은 장막처럼 백색의 평원을 메우며 밀려들고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말들의 거친 숨소리와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는 북방의 겨울 그 자체보다 더 차갑게 뼈를 파고들었다.

"대군 대감! 피하셔야 합니다! 저들은 일반 척후가 아닙니다!"

회령 판관 조필두가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이진의 도포 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등 뒤에 선 변방의 군관들 역시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대열을 뒤로 물리기에 급급했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삼승총과 승자총통은 영하 35도까지 내려간 혹한 속에서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맹추위 속에서 화포를 쐈다간 포신이 먼저 얼어 터집니다! 무쇠가 얼어붙은 상태에서 화약을 터뜨리면, 포벽이 굳어 유리처럼 깨져 나갑니다! 적을 죽이기도 전에 아군이 먼저 파편에 찢겨 나갈 것입니다!"

군관 하나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조선의 야철 기술로 주조한 무쇠 포들은 겨울철 극변의 혹한 앞에서는 그저 스스로를 파괴하는 시한폭탄에 불과했다. 무쇠 내부의 미세한 공극과 불순물들이 영하의 냉기 속에서 극도로 수축하며 응력 집중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화약을 넣고 격발하는 순간, 팽창하는 가스의 압력을 버티지 못한 포신은 사방으로 비산하여 사수를 도수장의 고기 점으로 만들 터였다.

하지만 이진은 조필두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언덕 위에 도열한 9문의 검은 포신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쇠가 깨진다면, 깨지지 않는 철을 쓰면 될 일이다."

이진의 목소리에는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장 앞에 거치된 속사포로 다가갔다. 포신을 감싸고 있는 것은 투박한 치수용 준설 도관의 외피였으나, 그 내부를 관통하는 진짜 동체는 달랐다. 탄소 함량을 극도로 낮추고 급랭 제어를 통해 미세 조직을 침상형으로 정렬시킨 초강도 마르텐사이트 탄성강.

이진은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고 맨손으로 차가운 포신의 결착쇠를 쓸어내렸다.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지만,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강철의 진동은 완벽했다. 오차 한계 0.1밀리미터 이하로 깎여 나간 회전식 비결정 기어판이 결착쇠 내부에서 빈틈없이 맞물려 있었다.

"서태강."

이진의 부름에,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한 대장장이 서태강이 거대한 몸을 굽히며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맹목적인 열망이 가득했다.

"예, 대군 대감. 준비는 끝났습니다."

"고온 송풍구의 개스킷을 회수할 때 썼던 내화 배합비를 기억하느냐."

서태강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지난날, 2호 고로가 폭발하기 직전 극단의 위기 속에서 이진이 내렸던 기이한 처방을 떠올린 까닭이었다. 일반적인 진흙이나 석회를 쓰지 않고, 영하의 외기 속에서 열수축 강도가 극대화되는 백산 토착 고령토를 특정 비율로 미세 배합하여 송풍구 내벽 개스킷을 제작했던 일. 온도가 급격히 포화할 때 그 수축 틈새로 고압 가스를 강제 유출시켜 고로를 보존했던 그 신의 한 수는, 오직 이진의 머릿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공학의 극의였다.

서태강은 그때 깨달았다. 이 대군 대감은 단순히 철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철의 성질을 부려 생명을 불어넣는 신적 존재라는 것을.

"소인의 뼈에 새겨 두었습니다. 영하의 냉기가 닿을 때 스스로 응축하여 기밀을 더하고, 고온의 열기가 가해질 때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 굳어지는 그 배합 비율…… 속사포의 약실 폐쇄기에도 그대로 적용하였습니다."

"좋다. 장인을 통제하는 법은 기술의 절대성을 보여주는 것뿐이지. 네 손으로 만든 그 기밀 장치가 이 혹한 속에서 어떻게 대지를 찢어발기는지 똑똑히 지켜보아라."

이진의 시선이 언덕 아래,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여을에게로 향했다. 여을은 차가운 눈바람을 맞으며 이진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한양의 좌의정 한명진에게 보낼 기밀 장부가 들어 있을 터였다.

이진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렸다.

그 장부는 진짜가 아니었다. 유황 가스를 제어하기 위한 석탄 미탄 배합률 수치 중, 고온에 도달했을 때의 임계 열팽창 균열 수치를 교묘하게 뒤바꿔 놓은 '가짜 가열로 배합 장부'. 만약 한명진과 한양의 훈구 세력이 그 장부를 입수하여 자신들만의 비밀 야철지를 건설하려 든다면, 그 가마는 불을 지피는 순간 거대한 폭탄이 되어 훈구파의 자금줄과 장인들을 통째로 날려버릴 터였다.

여을은 그 장부가 자신과 동생들의 목숨줄이라 믿고 있겠지만, 실상은 한명진의 목을 조이는 밧줄이었다. 이진은 그녀의 배신을 처단하는 대신, 가장 완벽한 역간첩의 도구로 부려 먹고 있었다. 인간의 신의 따위는 믿지 않는다. 오직 철저한 계산과 통제만이 배신하지 않는 법이다.

그때, 이진의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망막 위에 푸른빛의 반투명한 야금 설계서가 떠올랐다.

[시스템 동기화: 영하 제어 흐름률 수치 연산 시작.] [경고: 현재 외부 기온 영하 35.4도. 물리 법칙 동기화 시 시전자의 생체 열에너지 급격 소모.] [예상 체온 저하: 빙점 이하. 한랭증 경보.]

"윽……."

이진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심장과 혈관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오한이 전신을 지배했다. 손가락 끝이 시퍼렇게 죽어가고, 허파로 들이쉬는 숨결이 칼날이 되어 목구멍을 긁었다.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오며 무릎이 꺾이려 했다.

'아직은 안 된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어.'

이진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는 고로 뒤편으로 연결된 구리 도관의 밸브를 힘차게 돌렸다.

치이이이익!

2호 고로의 하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압의 보일러 열기와 연소 가스가 특수 온돌식 동력 도관을 타고 속사포의 포벽과 이진이 딛고 선 발판 아래로 순환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증기와 열기가 발밑에서부터 올라오자, 얼어붙어가던 이진의 혈관에 다시금 뜨거운 피가 돌았다.

그는 망막의 설계도를 보며 포벽의 온도를 물리화에 적합한 일정 온도로 고정 조율했다. 섭씨 15도. 외부의 영하 30도 법칙과 내부의 화약 폭발 압력이 충돌하지 않는 가장 완벽한 임계 온도였다. 영하 제어 흐름률의 반동을 고로의 폐열 동력으로 상쇄시키는 정밀 공학의 제어막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이진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눈보라를 뚫고 들이닥치는 여진족의 본대를 바라보았다. 수천의 기병이 내뿜는 살기가 한원 고로 벽의 외곽 방벽을 무너뜨릴 기세로 박두해 있었다.

"어사 대감."

이진이 곁에서 사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구르는 임사홍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이것은 무기가 아닙니다. 경국대전 치수 가관(治水 架管) 조항에 의거하여 등록된, 겨울철 강줄기의 결빙을 방지하고 준설하기 위한 '열수 분사식 준설관'입니다. 사헌부의 도첩에도 그리 기록되어 있지요."

"대, 대군 대감! 지금 저 수천의 오랑캐가 도끼를 들고 오는데 무슨 치수 장비 타령이십니까! 무기가 아니면 저들을 어찌 막는단 말입니까!"

임사홍이 비명을 질렀다. 그 옆에 선 군관들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도망칠 길을 찾고 있었다. 활을 쏘려 해도 시위가 얼어붙어 부러지고, 조총의 화약 접시는 눈바람에 젖어 불이 붙지 않는 이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대군이 가리키는 것은 그저 거대한 쇠파이프 더미일 뿐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십시오."

이진이 서늘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법률의 틈새에서 태어난 이 괴물이, 어떻게 이 땅의 규칙을 새로 쓰는지."

이진의 손이 아래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격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태강을 비롯한 포수 일개 조가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조정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분할 주조된 뒤 현장에서 완벽하게 결합된 트리거형 폐쇄 연발식 사격 기어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철컥!

무시무시한 기어 마찰음이 혹한의 대기를 찢었다.

영하 35도의 빙점 속에서도, 냉간 단조 압박 주조법으로 오차 없이 깎여 나간 회전식 비결정 기어판은 얼어붙지 않았다. 톱니와 톱니가 맞물리는 마찰 부위에 도포된 특수 정제 석탄유가 매끄럽게 흐르며 기계의 심장을 깨웠다.

두두두두두둥!

웅장한 대지를 뒤흔드는 광음이 함경도 계곡 전체를 난타했다.

포구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화염이 칠흑 같은 눈보라를 붉게 물들였다. 단순한 화포의 폭음이 아니었다. 연속적으로 약실이 개폐되며 강철 탄환을 쉴 새 없이 밀어 넣고 뿜어내는 기계식 연발의 박자였다.

"끄아아아아악!"

돌격하던 여진족 철기병들의 선두가 단 한 뼘의 전진도 하지 못한 채 말과 함께 짓겨 나갔다.

강철 포탄의 압도적인 탄성과 파괴력 앞에서는 대족장이 자랑하던 두꺼운 가죽 갑옷도, 쇠가죽으로 덧댄 방패도 한 장의 한지에 불과했다. 초당 수십 발씩 쏟아지는 탄환의 비가 여진족의 대열을 가로지르며 거대한 피의 고랑을 파 내려갔다.

"이, 이게 무슨……!"

군관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들이 평생 보아온 화포는 한 번 쏘고 나면 포신을 식히고, 화약을 다시 넣고, 포탄을 장전하는 데 수분이 걸리는 고루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이런 혹한 속에서는 격발하는 순간 포신이 깨져 나가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은장대군이 만든 이 '철제 도관'은 달랐다. 영하 35도의 추위 속에서도 포신은 깨지기는커녕, 마치 살아 있는 야수처럼 규칙적인 금속음을 토해내며 붉은 화염을 끊임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황동 탄피가 눈밭 위로 떨어지며 칙,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김을 피워 올렸다. 수십, 수백 개의 뜨거운 탄피가 눈을 녹이며 쌓여가는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쇠가…… 쇠가 깨지지 않는다!"

한 군관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어떻게 이 추위 속에서 연달아 화약을 터뜨리는데도 포신이 멀쩡하단 말인가! 정녕 신이 만든 철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그들의 눈에 서린 것은 단순한 경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를 아득히 초월한 압도적인 기술적 격차를 목도했을 때 느껴지는 맹목적인 경외심, 즉 광신에 가까운 숭배였다.

"이것이 대군 대감의 야철지가 품은 힘인가……."

임사홍은 무릎을 꿇은 채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조정의 대신들이 한양의 안락한 대청마루에 앉아 경국대전을 논하며 방계 대군을 옭아맬 명분을 찾고 있을 때, 이 버림받은 왕족은 북방의 지옥 같은 겨울 속에서 세상을 뒤흔들 강철의 괴물을 길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의 대열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천의 군세는 좁은 협곡 입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철의 비를 뚫지 못하고 낙엽처럼 쓰러졌다. 대족장의 울부짖는 명령도, 말들의 비명도 속사포가 토해내는 기계적인 박자 속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승리의 전율이 야철지를 감돌던 그 순간.

철컥.

이진이 잡고 있던 1호 속사포의 격발 레버에서 기분 나쁜 금속 마찰음이 들려왔다.

망막 위의 푸른 설계도가 급격하게 붉은색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연속 격발로 인한 약실 내부 온도 급상승.] [외부 극저온과 내부 초고온의 열충격(Thermal Shock) 발생.] [임계 균열율 92% 돌파. 다음 격발 시 약실 파괴 및 대규모 가스 역류 예상.]

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탄성강이라 할지라도 외부 영하 35도와 내부 수천 도의 온도 차가 만들어내는 극단적인 열응력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군 대감! 기어가 맞물려 움직이지 않습니다! 탄피가 걸렸습니다!"

서태강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약실 내부의 열팽창으로 인해 0.1밀리미터의 정밀 기어가 미세하게 비틀리며 걸려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 눈보라 속에서 아군의 포격이 주춤한 것을 눈치챈 여진족의 잔존 기병 수백 명이 대족장의 깃발을 앞세우고 방벽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거리, 불과 백 보.

첫 번째 방아쇠가 무시무시한 기어 마찰음을 토하며 철탄 장전을 알리는 격발 침을 치기 직전, 약실의 메커니즘은 굳게 닫힌 채 침묵했다. 대기를 가르는 여진족의 함성 소리가 코앞까지 박두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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