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르릉!
빙판을 짓이기는 수백 개의 말발굽 소리가 회령 계곡의 얼어붙은 공기를 찢발겼다. 강철 방벽이 버티지 못하는 서쪽 우회로, 그 가파른 협곡 사이로 여진족 정예 철기병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창끝에 맺힌 살기가 서쪽 고로의 벌건 연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 우회로라니! 군사도 없는 저 험로를 저들이 어찌 알고……!"
조정의 어사 임사홍은 흙바닥에 주저앉아 사시나무 떨듯 사지를 떨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가쁘게 흔들리며 이진의 뒷모습을 쫓았다.
이진의 시선은 침입하는 적들에게 머물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자신의 망막에 현각된 정밀 야금 설계서의 붉은 경고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경고: 2호 고로 송풍 압력 임계치 초과. 내화벽돌 열팽창률 94% 돌파. 45초 후 노벽 붕괴 및 고압 가스 대폭발 예정.]
"으, 윽……!"
설계서의 수식들을 강제로 인출하는 순간, 심장 머리맡을 거대한 얼음 송곳이 꿰뚫는 듯한 한기가 덮쳐왔다. 골든핑거의 잔혹한 대가였다. 말초신경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극심한 한랭증이 그의 사지를 마비시켰다. 손가락 끝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나뭇가지처럼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대군 대감! 고로가…… 고로가 터집네다! 노벽에서 시퍼런 불꽃이 새어 나옵네다!"
야철 장인 서태강이 벌겋게 달아오른 쇠집게를 쥔 채 비명을 질렀다. 가마터의 대장장이들은 폭발의 공포와 들이닥치는 오랑캐의 기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주저앉았다.
이진은 이가 맞부딪쳐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이를 악물었다. 입술 사이로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2호 고로의 송풍구 앞으로 돌진했다. 한기가 전신을 지배해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서리가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태강아! 송풍구 하단…… 고령토 개스킷에 외기를 직접 들이쳐라!"
"예? 예가 어드메라고 찬바람을 넣습네까! 고로가 완전히 식어 버립네다!"
"말대꾸하지 말고 쳐라! 당장!"
이진의 폭포수 같은 호통에 서태강은 본능적으로 송풍 차단판을 쇠망치로 내리쳤다.
쾅!
영하 30도의 매서운 북변의 샛바람이 열려진 틈새로 고온 송풍구 내벽에 그대로 들이닥쳤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5화에서 이진이 영하의 외기 속에서 열수축 강도가 극대화되도록 고령토 함량을 미세하게 조정해 제작했던 특수 배합 개스킷이 차가운 바람을 맞자마자 순식간에 수축하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개스킷이 수축하며 만들어낸 틈새로, 고로 내부에 갇혀 폭발을 유도하던 황화가스가 시커먼 연기가 되어 가파르게 분출되었다. 압력계의 수치가 급속도로 하강했다. 고로 전체를 집어삼키려던 포화 상태의 열기가 안전 배출로(바이패스)를 통해 상공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동시에, 그 배출구에서 뿜어져 나온 1,400도의 초고온 열풍이 이진의 차디찬 얼굴과 전신을 덮쳤다.
"후우우우……!"
얼어붙었던 폐부로 뜨거운 열기가 강제로 주입되자, 푸르게 죽어가던 살겋에 붉은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심장을 짓누르던 한랭증의 빙결이 녹아내리며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깨어났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공학의 극의였다. 고로를 보존하는 동시에 자신의 생명력마저 가열로의 열기로 연명시킨 것이다.
임사홍은 그 경이로운 광경을 보며 침을 삼켰다. 이진의 독선적이고도 완벽한 통제력 앞에, 그는 자신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괴물과 마주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
그 시각, 함경도 회령에서 수백 리 떨어진 한양 도성 서장고 인근의 비밀 야철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좌의정 한명진의 사가에서 동원된 병장기 밀조단과 훈구파의 일류 야철 기술자들이 커다란 주조 가마 둘레에 모여 있었다.
"이것이 은장대군이 숨겨둔 석탄 제철의 극비 배합법이란 말이지?"
한명진의 최측근 가신인 집사 최학수가 가죽 장부를 손에 쥔 채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장부에는 석탄의 유황 성분을 제어한다는 미탄 배합률 수치와 고압 가열로의 설계도가 치밀하게 적혀 있었다. 밀정 여을이 목숨을 걸고 빼내어 보낸 바로 그 '가짜 장부'였다.
"틀림없사옵니다. 대군의 야철지에서 가져온 흙과 석탄 조각을 그대로 배합하여 달구었습니다. 쇳물의 순도가 이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사옵니다."
늙은 야철 장인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들의 등 뒤에는 이미 주조를 마치고 육중한 위용을 자랑하는 50근짜리 대형 주철포가 거치되어 있었다. 은장대군이 북방에서 사병을 기르며 주조한다는 화포를 모방해 만든, 한명진 세력의 첫 번째 역작이었다.
"좋다. 시험 사격을 실시하라. 이 대포의 위력이 증명되는 순간, 은장대군 그 건방진 애송이의 목은 우리 대감님의 손끝에서 부러질 것이다."
최학수의 명령에 따라 포수들이 화약을 장약하고 포탄을 밀어 넣었다. 도화선에 불꽃이 댕겨졌다.
치이이익.
타들어 가는 불꽃을 보며 최학수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 강력한 화포가 조정의 군권을 한명진의 수중으로 인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이진이 장부에 기록해 둔 석탄 미탄 배합률은 고온에 도달하는 순간 가스의 팽창 계수를 비정상적으로 폭등시키는 '임계 열팽창 균열' 공식이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화약의 폭발 압력과 석탄 유황 가스의 화학적 누적이 겹치면 주철의 분자 구조를 순식간에 깨뜨려 버리는 시한폭탄이었다.
게다가 조선의 일반 진흙으로 급조한 가마의 벽돌들은 이 가스를 견뎌낼 내화성이 전혀 없었다.
"어……? 포신 밑바닥에서 연기가 왜 저리 많이……?"
장인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소리치려던 찰나였다.
콰아아아아앙!
천지를 진동하는 뇌성이 한양의 밤하늘을 조각냈다.
포구로 탄환이 날아가는 대신, 50근 주철포의 약실 부위가 급격한 열팽창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철포 뒤에 위치해 있던 대형 가열로 역시 가스 과포화로 인해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쿠구구궁! 푸쉬이이익!
수천 도에 달하는 벌건 쇳물과 날카로운 쇳조각 수만 개가 폭풍이 되어 야철지를 휩쓸었다.
"아아아아악!"
"내 눈! 내 눈이……!"
비명은 채 몇 초를 가지 못했다. 화염과 쇳가루의 해일 속에서 최학수를 비롯한 한명진의 최정예 야철 기술자 사십여 명이 흔적도 없이 찢겨 나가고 타 죽었다. 사방에 흩어진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기둥덩이와 파괴된 고로의 잔해뿐이었다.
비밀 야철지는 순식간에 시체 냄새와 유황 가스로 가득 찬 지옥도로 변했다. 한명진이 야심 차게 준비했던 사병 무장 계획과 일류 기술진이 단 한 순간에 통째로 자멸해 버린 것이다.
***
다음 날 아침, 한양 좌의정 사저.
"무엇이라……? 모두 죽었다고?"
한명진은 보고를 올리는 무사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의 노회한 얼굴은 차갑게 식어 가다 이내 광기 어린 분노로 일그러졌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찻잔을 바닥에 내리쳤다.
쨍그랑!
"기술자들은 물론이고 학수까지……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단 말이냐!"
"예, 대감. 화포 주조장의 고로가 완전히 주저앉아 시신조차 온전히 수습하지 못했사옵니다. 조정의 이목을 피하느라 시신들을 은밀히 묻고 있사오나, 한성부의 눈을 얼마나 가릴 수 있을지……."
무사의 보고에 한명진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한 함정이었다. 은장대군 이진이 자신들의 밀정망을 역이용해 썩은 미끼를 던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진…… 이 망나니 같은 놈이 감히 나를 기만해?'
이대로 가다간 사병 주조 혐의가 조정에 탄로 나 역풍을 맞고 가문이 멸문지화에 처할 위기였다. 이 거대한 실책을 덮기 위해서는 더 크고 확실한 올가미가 필요했다.
"여을…… 그 계집의 동생들은 어디 있느냐?"
한명진이 이빨을 갈며 나직하게 물었다.
"의금부 옥사에 단단히 묶어 두었사옵니다."
"당장 의금부 도사들을 움직여라. 그 계집의 동생들의 손톱을 모조리 뽑아서라도 대군의 역모 자백서를 받아내라. 은장대군이 북방에서 오랑캐와 내통하여 사병을 기르고 화포를 만들어 도성을 치려 했다는 격문을 꾸며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의금부를 재압박해라!"
그의 눈에 핏발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자신의 파멸을 막기 위해 타인의 목숨줄을 짓밟는 추악한 권력자의 본성이 극에 달해 있었다.
***
다시 북방 함경도 회령 야철지.
한랭증을 떨쳐내고 기력을 회복한 이진은 서태강을 비롯한 장인들을 채찍질하듯 몰아세우고 있었다.
"서둘러라! 1분 1초가 아깝다. 적의 철기병들이 우회로를 뚫기 전에 거치해야 한다!"
이진의 눈앞에 투사된 야금 설계서가 최종 결합 단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경국대전 치수 가관(治水 架管) 조항 예외 규정 확인 완료: 강물 준설용 대형 도관 및 수차 펌프 부품은 사병 무기 규제 대상에서 제외됨.]
이진은 이 영리한 법리적 방어벽 뒤에서 철저히 무기를 위장해 왔다. 겉보기에는 물길을 뚫는 치수용 준설 파이프와 회전 기어에 불과한 부품들. 하지만 이것들이 조립되는 순간, 그것은 인명을 살상하는 가장 잔혹한 병기로 탈바꿈한다.
"태강아, 회전식 비결정 기어판을 약실 하단에 결합해라!"
"예, 대감!"
서태강이 오차율 0.1mm 이하로 정밀하게 깎아낸 강철 기어판을 고정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어가 맞물리며 서늘한 금속음이 울렸다.
철컥!
이진은 망막의 설계도를 보며 조립 상태를 정밀하게 계측했다. 탄성 복합 황동 탄피를 사용하는 속사포의 심장부가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일반적인 조선의 화포처럼 포구로 화약과 탄환을 따로 넣는 고루한 방식이 아니었다. 후방에서 탄피를 연속으로 장전하여 회전 기어의 힘으로 쉴 새 없이 포탄을 뿜어내는 미래식 기관포였다.
"황동 탄피 탄환을 약실에 장전하라!"
대장장이들이 미리 준비해 둔 황동 탄피들을 일제히 약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철컥, 철컥, 철컥!
방벽 우회 협곡을 바라보는 가파른 언덕 위에, 기어식 속사포 9문이 그 무시무시한 아가리를 벌린 채 나란히 거치되었다. 칠흑 같은 총열과 황동의 기묘한 조화가 기괴하면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겼다.
옆에서 지켜보던 임사홍은 그 정체불명의 철제 도관들이 뿜어내는 살기에 압도되어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저것이…… 정녕 물을 품는 도관이란 말인가……."
"물론입니다, 어사 대감."
이진이 서늘하게 웃으며 속사포의 격발 손잡이를 잡았다.
"오랑캐의 피로 이 북방의 대지를 씻어낼 치수 장비이지요."
그때였다.
우회 계곡의 어둠 속에서 마침내 여진족 철기병들의 선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에는 야철지를 불태우고 철의 기술을 빼앗겠다는 탐욕과 살기가 가득했다.
수백 명의 철기병들이 칼을 치켜들고 고로를 향해 돌진하려던 바로 그 순간.
"사격."
이진의 나직한 명령과 함께, 서태강이 격발 기어의 레버를 힘차게 회전시켰다.
두두두두두두둥!
웅장한 대지를 뒤흔드는 광음과 함께, 9문의 속사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황동 탄피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연속으로 발사된 강철 탄환들이 폭풍처럼 협곡을 쓸어내렸다.
"끄아아아악!"
여진족 철기병들의 선두가 단 한 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말과 함께 고기방석이 되어 짓겨 나갔다. 강철 포탄의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 오랑캐의 두꺼운 가죽 갑옷과 방패는 한 장의 한지에 불과했다. 협곡은 순식간에 붉은 피와 살점으로 물든 도수장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승리의 전율도 잠시였다.
쿠우우우우웅……!
협곡 저 너머, 함경도 산하를 뒤덮은 어두운 눈보라 속에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울림이 시작되었다.
단순한 기병의 달리기 소리가 아니었다. 대지를 통째로 주저앉힐 듯한 묵직하고도 거대한 발소리.
눈보라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진 삼림 대족장이 직접 이끄는 대규모 복수 침투 부대의 본대였다. 수천 명에 달하는 여진족의 대군세가 검은 장막처럼 한원 고로 벽 앞을 향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