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사 임사홍 일행이 회령 성문을 나서는 바로 그 순간, 국경의 변방 진지 봉화 수십 개가 동시에 붉은 섬광을 토하며 일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한원의 밤하늘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포, 봉화가……! 적습입니다! 여진족의 대규모 적습입니다!"

성벽 위에서 사수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굴러떨어졌다. 그 뒤를 이어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말발굽 소리가 벼락처럼 고막을 때렸다.

두두두두두두!

회령 계곡의 좁은 입구를 뚫고 쏟아져 나오는 횃불의 무리는 어림잡아도 팔백이 넘었다. 날카로운 가죽 투구를 쓰고 늑대 가죽을 두른 여진족 부족 연합의 철기병들이었다. 그들의 선봉대 중앙에는 십여 마리의 힘 좋은 북방마가 끄는 거대한 썰매가 있었고, 그 위에는 둔중한 주철제 대포가 얹혀 있었다.

임사홍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검을 쥔 채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 무슨…… 어찌 이 변방 구석에 저토록 거대한 화포가 있단 말이냐! 은장대군, 네놈이 정녕 오랑캐와 내통하여 이 나라를 바치려 한 것이냐!"

"뇌가 있으면 그 주둥이를 열기 전에 생각을 해라, 임사홍."

이진이 싸늘하게 대꾸하며 가열로의 통제 계기판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붉은 고로의 불꽃과 망막에 투사된 푸른 야금 설계도가 기이하게 교차했다.

"저 포는 내 기술을 훔쳐 간 네 상전, 한명진의 밀정들이 흘린 가짜 도면으로 만든 쓰레기다. 저 오랑캐 놈들이 그것을 어찌 입수했는지는 한양에 올라가서 네놈의 그 고매하신 대신들에게 직접 물어보아라."

"뭐, 뭐라고?"

"지금 당장 숨통이 끊어지기 싫다면, 그 칼 치우고 뒤로 물러서라. 내 영지에서 얼쩡거리며 방해하지 말고."

이진은 임사홍을 가볍게 밀쳐내고 야철지 중앙으로 나섰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여진족의 철기병들은 야간 돌격의 이점을 살려 일격에 야철지를 짓밟을 기세였다. 게다가 야철지의 심장인 제2호 가열로는 유황 성분이 가득한 회령 석탄의 급격한 반응으로 인해 내부 가압이 한계치에 도달해 있었다. 60초 내로 내부 압력을 제어하지 못하면 고로는 폭발할 것이고, 그렇다고 고로를 꺼버리면 여진족의 철퇴 아래 모두가 몰살당할 터였다.

'시간이 없다. 동시에 해결한다.'

이진의 망막 위에 극도의 정밀도를 가진 야금 설계도가 입체적으로 확장되었다. 동시에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초월적 지식을 현실의 물리 법칙과 동기화하는 대가, 한랭증의 전조였다. 심장 부근에서 시작된 오한이 혈관을 타고 손끝 발끝으로 무섭게 뻗어 나갔다. 이진은 이가 맞부딪치는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서태강!"

"예, 예! 대군 대감!"

망치를 든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던 서태강이 허리를 숙였다.

"고온 송풍구의 외측 덮개를 개방해라! 당장!"

서태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대감! 지금 송풍구를 열면 영하 삼십 도의 칼바람이 고로 내부로 직격합니다! 내벽이 급격히 식어 고로가 통째로 깨질 수 있사옵니다!"

"내 말을 믿어라. 내가 송풍구 내벽의 개스킷을 만들 때 고령토와 백산점토의 함량을 어떤 비율로 배합하라고 했는지 잊었느냐?"

서태강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난 겨울, 대군이 혹독하게 매질을 해가며 굳이 영하의 온도에서 열수축 강도가 극대화되도록 특수 배합한 고령토 개스킷을 조립하게 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아……! 설마 그때의 배합이 이것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맞다. 영하의 외기가 닿는 순간, 개스킷은 스스로 수축하여 틈새를 만든다. 그 균열을 통해 고압의 유황 가스만 외부로 강제 배출될 것이다. 고로 자체는 깨지지 않는다. 당장 덮개를 열어라!"

"예이!"

서태강이 장정 셋을 이끌고 고온 송풍구의 무쇠 덮개를 고정하던 볼트를 렌치로 사정없이 풀어헤쳤다.

끼이이익! 쾅!

덮개가 열리자마자 한원의 매서운 동풍이 송풍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푸스스스 하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고령토 개스킷이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며 미세하게 수축하기 시작했다. 가열로 내부의 균열율이 87%에서 멈추더니, 이내 뿜어져 나오는 유황 가스의 압력만큼 개스킷 틈새가 벌어지며 슈우우우우! 하는 굉음과 함께 가스가 허공으로 뿜어졌다.

"가, 가스만 빠져나갑니다! 가마가 안정되었습니다!"

장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가열로의 폭발 위기를 송풍구 개스킷의 열수축 특성을 이용한 '긴급 바이패스' 기술로 완벽하게 제어한 것이다.

그러나 안도할 시간은 없었다. 산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여진족 기병들의 말발굽 소리가 이미 야철지 외곽 목책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서태강, 놀 시간 없다! 증기 기동 준설거를 가동해라! 가열로에서 빠져나오는 고압의 증기를 준설거의 동력 도관으로 연결해라!"

"예! 증기 밸브 개방합니다!"

야철지 한편에 주차되어 있던 거대한 철제 괴물들이 요란한 구동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정의 눈에는 한강의 모래와 자갈을 파내는 '치수용 준설 장비'로 허가를 받았으나, 실제로는 두께가 삼 치에 달하는 고탄성 강판으로 장갑을 두른 고하중 강철 차체였다.

"준설거 세 대를 계곡 진입로에 일렬로 배치해라! 수문 방벽용 강재도 함께 가져와라!"

이진의 명령에 야철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평소 대군의 혹독한 훈련과 기술적 권위에 완전히 압도되어 있던 그들은 이제 대군의 지시라면 지옥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푸슈우우우!

증기 압력을 받은 준설거들이 육중한 바퀴를 굴리며 협곡의 가장 좁은 목목으로 기어 나갔다. 무게만 해도 수만 근에 달하는 강철 차체들이 좁은 길목을 꽉 가로막았다.

이진의 망막 위로 다시 한번 푸른색의 역학 계산식이 어지럽게 널뛰기 시작했다.

[대상: 여진족 기병 800기] [돌격 속도: 시속 40km] [충돌 모멘텀 역학 설계도 투사 중……] [최적의 충돌 에너지 분산 각도: 45도]

이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외쳤다.

"준설거 앞부분에 댐 수문용 준설 강판을 비스듬히 거치해라! 지면에 쇠말뚝을 깊게 박아 고정하고, 강판의 각도는 정확히 사십오 도를 유지해라!"

"사, 사십오 도 말입니까?"

"그렇다! 수직으로 세우면 기병들의 무지막지한 돌격 에너지를 방벽이 온전히 받아내야 하므로 무너진다! 하지만 사십오 도로 눕혀놓으면, 저들의 돌격 에너지는 위쪽 허공과 땅속으로 분산된다! 놈들이 스스로 굴러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장인들이 대군의 기하학적 지시에 따라 거대한 강철 판재들을 준설거 전면에 비스듬히 거치하고 무거운 무쇠 말뚝을 해머로 때려 박았다. 깡! 깡! 하는 명쾌한 쇳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그 직후, 여진족의 선봉 기병들이 마침내 협곡 모퉁이를 돌아 나와 방벽을 발견했다.

"돌격하라! 조선 놈들의 조잡한 나무 목책 따위는 밟아 뭉개버려라!"

여진족 장수가 거대한 철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들의 눈에는 야철지 입구를 가로막은 철제 구조물이 그저 기이하게 생긴 마차와 철판때기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피유우웅! 피융!

하늘을 뒤덮는 여진족의 화살 비가 방벽을 향해 쏟아졌다.

깡! 까강! 팅!

그러나 그 날카로운 철촉 화살들은 이진이 저탄소 탄성강으로 주조한 특수강 방벽에 닿는 순간, 불꽃만 튀길 뿐 무력하게 튕겨 나가거나 동강이 나며 부러졌다. 가죽 옷을 뚫던 오랑캐의 화살이 강철의 표면에는 흠집 하나 내지 못한 것이다.

"어, 어째서 화살이 박히지 않는 것이냐!"

여진족 기병들이 당황하는 사이, 그들의 돌격 속도는 제어할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수백 마리의 군마가 엄청난 운동 에너지를 품은 채 사십오 도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특수강 방벽을 향해 그대로 들이받았다.

쾅! 콰콰쾅!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예상했던 방벽의 붕괴는 없었다. 기병들이 방벽을 들이받는 순간, 사십오 도의 완만한 경사를 타고 말들의 몸체가 허공으로 붕괴하듯 미끄러져 올라갔다. 운동 에너지가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꺾이며 분산된 것이다. 기병들은 스스로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방벽 너머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고, 뒤따르던 말들은 앞서 쓰러진 말의 사체와 엉켜 도미노처럼 무참히 쓰러졌다.

"끄아아악!"

"말이, 말의 다리가 부러졌다!"

단 일 초 만에 수십 기의 선봉 기병들이 피떡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완벽한 물리 법칙의 승리였다. 현대식 고하중 기계 설비를 이용한 간이 바리케이드는 여진족이 자랑하는 마기(馬騎)의 돌격력을 완벽하게 무력화했다.

"이…… 이럴 수가……."

뒤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어사 임사홍과 관군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조선의 역사상 그 어떤 명장도 단 한 명의 보병 사상자 없이 오랑캐의 기병 돌격을 이토록 철저하게, 그것도 단 한 순간에 와해시킨 적은 없었다. 무거운 쇠붙이 몇 개를 길목에 기이하게 배치했을 뿐인데, 천하를 호령하던 북방의 철기가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것이…… 진짜 철이다."

이진이 냉혹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한랭증의 반동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가에서는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가열로의 불꽃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서태강, 가열로의 송풍 압력을 최대로 올려라. 놈들이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번엔 우리가 저들을 쓸어버릴 차례다."

"예! 철의 신이시여! 불을 지피겠습니다!"

서태강을 비롯한 야철민들의 눈에는 이미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은장대군은 단순한 왕족이 아니었다. 자연의 물리 법칙을 지배하고 철을 마음대로 다루는 경외스러운 지배자였다. 야철민들은 광신적인 기세로 가열로에 석탄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여진족의 대열 중앙에서 조잡한 주철포를 탑재한 썰매가 서서히 움직였다. 여진족의 추장이 직접 주철포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

이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멍청한 놈들. 한명진이 던져준 미끼를 덥석 물었구나."

그 주철포는 이진이 일부러 여을에게 노출했던 '가짜 배합 장부'의 수치대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석탄의 유황 성분을 제어하지 못한 채 급격한 열팽창을 일으키도록 설계된, 주조하는 순간부터 화약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도록 예정된 시한폭탄이었다.

치이이익!

도화선이 타들어 가고, 여진족의 대포가 아가리를 벌렸다.

콰아아앙!

대포가 불을 뿜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포신 전체가 수만 개의 날카로운 쇳조각으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포구로 탄환이 날아가는 대신, 대포 자체가 스스로 폭발한 것이다.

"아아아악!"

주철포 주위에 서 있던 여진족 포수들과 추장의 친위병 수십 명이 폭발의 화염과 쇠파편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찢겨 나갔다. 아수라장이 된 적진을 보며 임사홍은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은장대군 이진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 무시무시한 지략과 기술력 앞에 조정의 권력 싸움 따위는 어린아이들의 불장난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기도 전, 야철지 서쪽 능선에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렸다.

타아앙! 타앙!

외곽 초소에 배치되었던 보초가 피를 흘리며 굴러내려 왔다.

"대, 대감! 적의 우두머리가 이끄는 정예 철기 부대가…… 방벽의 저항이 없는 서쪽 우회 계곡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그곳을 뚫고 사철 고로의 심장부로 전속력 북상하고 있사옵니다!"

이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적의 본대가 방벽을 우회하여 야철지의 핵심인 가열로와 가동 중인 설비들을 직접 타격하려는 속셈이었다. 만약 가열로가 파괴된다면,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제철 기지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할 터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진의 심장 부근을 짓누르는 극심한 한기가 그의 의식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손끝이 이미 푸르게 변해 나뭇가지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우회로라고……? 그곳은 아직 방벽이 완성되지 않은 곳인데……."

임사홍의 얼굴이 다시 한번 절망으로 물들었다.

여진족 정예 철기병들의 말발굽 소리가 야철지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좁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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