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철컥.

레버가 끝까지 내려앉는 순간, 금속 톱니들이 서로를 맞물어 으깨는 비명이 고막을 찔렀다.

그러나 함정이 완전히 구동하기도 전, 전방에서 대기를 찢는 고주파의 증기 배출음이 터져 나왔다. 도살자 고르곤의 선발대가 몰고 온 증기 전차가 2차 추진을 시작한 것이다. 보일러 내부에서 압축되어 있던 초고압의 가스가 실린더를 밀어내며 전차의 궤도를 폭발적으로 회전시켰다.

콰아아앙!

육중한 철제 격벽을 지탱하고 있던 임시 지지대가 가해지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비틀렸다. 지지대 표면에 용접되어 있던 강철 볼트들이 권총 소리 같은 파열음을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찢어진 철판 모서리가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엎드려!"

요한이 목을 터뜨려 비명을 질렀다.

그는 카일이 서 있는 안전 구역으로 후퇴하는 대신, 반대편 참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곳은 13칸의 영민들이 급조해 둔 얕은 엄폐 참호였다. 그 흙먼지 구덩이 속에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어린아이 세 명과 겁에 질린 부인들이 서로를 껴안은 채 동결되어 있었다.

바르그의 거대한 도끼가 요한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반으로 갈랐다. 철판 바닥이 수박 껍질처럼 쪼개지며 불꽃이 튀었다. 요한은 바닥을 구르며 버려진 볼트액션 소총을 움켜쥐었다. 노리쇠를 후퇴전진시키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눈빛만큼은 타오르고 있었다.

탕!

요한이 격발한 탄환이 바르그의 중장갑 어깨받이에 맞고 튕겨 나갔다. 살상력은 없었지만, 적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요한은 그대로 참호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등판으로 아이들을 덮어 누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카일은 그 모든 과정을 망막 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록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요한의 이타적인 도약과 적들의 포화 각도를 차갑게 분할하고 있었다.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소시오패스의 뇌 속에서, 요한의 돌발 행동은 '예측 불가능한 인간적 변수'에서 '가장 이용 가치가 높은 미끼'로 즉각 재분류되었다.

"요한 베일. 가치 척도, 상(上). 유인 효율성 92%."

카일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바르그의 돌격대원들이 요한이 쏜 총성에 반응하여 총구를 일제히 참호 쪽으로 돌렸다. 그들이 든 개량형 증기 소총의 총구에서 붉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납탄들이 참호 전면의 철판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두두두두둥!

쇠붙이가 짓겨 나가는 소음 속에서 카일은 주머니에서 가죽 표지의 살인 대장을 꺼냈다. 대장의 활자들이 그의 망막 위로 투명한 숫자들을 띄워 올렸다.

[영민 개체 번호 41 (요한 베일) - 생존 확률: 14.2%] [영민 개체 번호 72 (소아) - 생존 확률: 8.7%] [현재 화선(火線) 왜곡 지수: 78%]

살인 대장은 영지 내의 생명들이 죽음에 도달하는 궤양 지수와 효율을 백분율로 나누어 실시간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카일의 뇌리에 차갑게 내려앉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었다. 적들의 화력이 요한의 참호에 집중되는 바로 이 순간이,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적의 탄약을 고갈시킬 최적의 기회라는 계산뿐이었다.

카일이 구리 파이프로 연결된 통신기 송수신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미동도 없었다.

"B구역 우측 생존자들은 현 위치에서 좌측으로 정확히 세 걸음 이동해라. 머리를 들지 말고 포복할 것. C구역은 사격선이 꺾이는 즉시 전방 함정 유압 밸브의 보조 고리를 해제한다."

통신기를 통해 전달되는 카일의 건조한 어조는 영민들에게 절대적인 규율로 작용했다. 그들에게 카일은 구원자가 아니었다. 명령을 어기면 방패막이로 던져질 것이라는 공포가 그들의 척수를 지배하고 있었다. 영민들은 침을 삼키며 젖은 바닥을 기었다.

그들이 자리를 옮기자마자, 방금 전까지 그들이 머무르던 엄폐 가벽 위로 증기 기관총의 탄막이 쏟아져 내렸다. 철판이 종잇장처럼 구멍 뚫리며 파편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카일이 설계한 실시간 회피 지도 덕분이었다.

"적 화력 60% 분산 확인. 아군 피해, 전무."

카일이 펜을 움직여 대장에 수치를 적어 넣었다. 적들은 허공과 빈 강철판에 값비싼 화약을 낭비하고 있었다. 완벽한 자원 분배이자 계량화된 방어였다.

"카일 님! 저놈들이 참호 측면을 돌파하려 합니다!"

방벽 뒤에서 조준경을 들여다보던 레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기름때 묻은 뺨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르그의 부관이자 저격수인 외눈박이 사내가 참호 머리 위쪽의 철골 교각 위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든 장총의 총구가 요한의 정수리를 정확히 겨누었다. 요한이 고개를 드는 순간 머통수가 날아갈 판국이었다.

"레나. 네 손에 쥐어진 대형 철갑탄의 규격은?"

카일이 묻지도 않고 조준선 방향을 지시했다.

"12.7밀리미터... 하지만 저격수가 엄폐물 뒤에 완전히 숨어 있어서 각도가 안 나옵니다!"

"각도를 만들 필요는 없다. 저격수의 어깨 뒤를 봐라. 증기 보일러와 연결된 황동색 압력 호스가 보이나?"

레나가 침을 삼키며 조준경의 배율을 높였다. 먼지와 매연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황동색 파이프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굵기는 손가락 하나 정도에 불과했다.

"저걸 맞추라고요? 이 진동 속에서?"

"맞추지 못하면 다음 차례는 너다. 네가 저들의 고기 가공기에 들어가는 비용보다, 저 탄알 한 발의 가치가 훨씬 높다는 걸 증명해라."

카일의 어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레나의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카일이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는 도구는 폐기될 뿐이다.

레나가 심호흡을 하며 개리슨식 철갑 소총의 개머리판을 어깨에 밀착시켰다. 그녀의 양말 속에는 카일 모르게 숨겨둔 안구 파괴용 극독 스프레이가 들어있었지만, 지금은 그걸 쓸 때가 아니었다. 오직 눈앞의 표적에 집중해야 했다.

후우.

레나가 방아쇠를 당겼다.

쾅!

귀를 찢는 격발음과 함께 소총이 레나의 어깨를 사정없이 때렸다.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어두운 열차 칸의 내부를 순간적으로 백색으로 물들였다.

탄환은 가파른 포물선을 그리며 저격수의 방패막이를 관통했다. 그리고 정확히 황동색 압력 호스의 조인트 부위를 때려 박았다.

치이이이이익!

초고압의 과열 증기가 터져 나오며 저격수의 얼굴을 덮쳤다. 살이 타들어 가는 비명과 함께 저격수가 총을 떨어뜨리며 교각 아래로 추락했다. 그가 떨어지면서 들고 있던 탄띠가 아래쪽 전차의 노출된 연소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콰콰콰쾅!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전차의 화약고가 유폭되며 발생한 거대한 폭풍이 선발대 대원들을 덮쳤다. 적들의 집중 포화선이 완전히 왜곡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단 한 명의 영민도 다치지 않은 채, 적들의 화력 중심지가 스스로 붕괴하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성공... 했어요."

레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일의 시선은 이미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었다. 연기 속에서 걸어 나오는 거대한 실루엣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검게 그을린 연기 헤치며 세 명의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도살자 고르곤이 아끼는 정예 화력 심복들이었다. 온몸에 두꺼운 방열 가죽과 철판을 두른 그들의 얼굴에는 기괴한 돼지 형상의 가스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그들의 양손에는 길쭉한 구리 노즐이 들려 있었고, 등 뒤의 철제 탱크에서는 녹색의 휘발성 액체가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량형 화염방사기였다.

"쥐새끼들을 태워라."

가운데 서 있던 거한이 쇳소리 나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세 개의 노즐 끝에서 기분 나쁜 녹색의 불꽃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요한과 아이들이 갇혀 있는 얕은 참호였다. 참호의 깊이는 그들의 화학 화염을 막아주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화염방사기의 주입 노즐이 참호를 향해 천천히 수평을 그리며 고정되었다.

치익, 불꽃이 뿜어지기 직전의 압력 충전음이 어두운 통로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화염방사기 노즐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녹색의 불꽃이 공기를 태우며 매캐한 유황 냄새를 풍겼다.

참호 안의 열기는 순식간에 화씨 100도를 넘어섰다. 요한은 자신의 몸 아래에 깔린 아이들의 머리를 더 깊숙이 눌렀다. 그의 낡은 셔츠 등판이 열기에 누렇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살이 익어가는 공포 속에서도, 요한은 소총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카일이 서 있는 제어 플랫폼을 향해 있었다. 구걸도, 원망도 없는 투명한 눈빛이었다. 오직 아이들을 살려달라는 무언의 신호만이 카일의 망막에 가닿았다.

카일은 그 눈빛을 보았다. 그의 가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슬픔이나 동정 같은 감정의 찌꺼기는 소시오패스의 뇌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살인 대장의 톱니바퀴가 더 빠르게 굴렀다.

[영민 개체 번호 41 (요한 베일)의 사망 시 예상 손실: 노동력 45%, 영민 통제력 60% 저하.] [대체 불가 미끼 자원의 소멸 위험 고조.]

"비효율적이다."

카일이 읊조렸다. 요한이라는 장기는 아직 쓸모가 있었다. 13칸의 영민들을 폭동 없이 굴리기 위해선, 저 쓸데없이 숭고한 선동가가 살아서 희망의 끈 역할을 해주어야 했다.

카일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바닥 철판 밑을 흐르는 파이프라인의 수치를 읽었다.

유압식 압착 가시 트랩의 메인 실린더는 이미 격발 대기 상태였다. 하지만 카일이 레버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기에, 실린더 내부에는 엄청난 양의 고압 작동유가 갇힌 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레나."

카일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타고 레나의 귀로 파고들었다.

"예, 예!"

"우측 3번 보조 밸브의 압력 방출구를 수동으로 개방해라. 나사는 왼쪽으로 반 바퀴만 돌려."

레나가 조준경에서 눈을 떼고 아래를 보았다. 3번 보조 밸브는 고온의 오일이 흐르는 통로였다. 그걸 열면 압축된 오일이 전방으로 분사된다. 하지만 그 방향은 정확히 화염방사기를 든 거한들의 발밑이었다.

"하지만 카일 님! 그 밸브는 제어 장치와 직접 연결되어 있어서, 수동으로 돌리면 역류하는 압력이 제 손을..."

"지금 돌려라. 3초 준다."

카일의 목소리에는 자비가 없었다.

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른손을 희생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카일의 명령을 거스른 자들의 최후를 이미 수없이 보았다. 그녀는 주머니 속의 극독 스프레이를 만지려던 손을 돌려, 붉게 달아오른 황동 밸브를 움켜쥐었다.

"으아아아아!"

레나가 비명을 지르며 밸브를 꺾었다.

치이이이이익!

찢어지는 듯한 고압 가스 배출음과 함께, 섭씨 120도가 넘는 시커먼 작동유가 전방의 에어덕트를 통해 분사되었다. 짙은 안개처럼 뿜어져 나온 오일 분무가 참호 앞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 화염방사기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콰아아앙!

녹색의 화학 화염이 분사된 작동유 안개와 만나는 순간, 단순한 연소를 넘어선 대폭발이 일어났다. 공기 중의 산소가 단숨에 연소하며 거대한 진공 상태가 형성되었다. 폭발의 반동으로 화염방사기의 불길이 거꾸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커헉! 무슨...!"

화력 심복 중 한 명의 가스마스크 틈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학 액체가 담긴 배낭의 압력 밸브가 역류한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터졌다. 녹색 불길이 거한의 등 뒤에서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방열 가죽이 불길에 녹아내리며 그의 뼈와 살을 한데 짓개기 시작했다.

철판 바닥을 구르는 거한의 몸에서 단백질이 타는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다.

[적 개체 해체 완료. 데스 포인트(DP) 250 획득.] [살인 대장에 정보 기록 중...]

카일의 머릿속으로 거한이 불타 죽으며 느낀, 전신이 녹아내리는 듯한 극통의 정신 파동이 휘몰아쳤다.

"흡..."

카일은 플랫폼의 난간을 움켜쥐었다.

그의 미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대장의 기록이 진행됨에 따라 손끝을 타고 흐르던 차가운 철판의 감각이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손보호대 너머로 느껴져야 할 쇳덩이의 온도가 무감각한 공허로 변해갔다.

온각(溫覺)의 상실이었다.

카일은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불타는 전차의 열기가 얼굴을 때리고 있었지만, 그의 피부는 아무런 온도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얼어붙은 진공 속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동요가 없었다. 감각의 상실은 생존을 위한 등가교환일 뿐이었다.

"두 놈 남았다."

카일의 건조한 시선이 폭발의 잔해 너머를 향했다.

동료의 폭사를 본 나머지 두 명의 화력 심복들이 뒤로 주춤거렸다. 그들의 방열 마스크 너머로 노골적인 공포가 서렸다. 기계처럼 움직이던 침략자들이 처음으로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참호 속에서 요한이 기침을 토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등으로 폭발의 열풍이 휩쓸고 갔으나, 카일이 계산한 진공 차단벽 덕분에 치명적인 화상은 면한 상태였다.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들을 참호 구석의 배수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카일... 네놈은 대체..."

요한이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사지로 자신들을 몰아넣고, 그것을 미끼로 적을 몰살시키는 기괴한 전술. 인간을 부품으로 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계산이었다.

카일은 요한의 시선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의 펜 끝은 여전히 살인 대장 위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은 적 개체: 2. 전력 효율성 40% 저하.] [최종 섬멸을 위한 지점 도달율: 98%.]

"레나, 사격 준비."

카일이 명령했다.

레나는 손바닥의 화상을 참아내며 다시 소총의 노리쇠를 당겼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총몸을 적셨다.

남은 두 명의 화력 심복들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화염방사기의 구리 노즐을 바닥으로 꺾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차가 파괴되고 선발대가 전멸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퇴로가 차단된 광인들의 선택은 동귀어진이었다.

"지옥으로 가라, 벌레 같은 놈들!"

그들이 등을 맞댄 채 화염방사기의 밸브를 최대로 개방하려 했다. 13칸 전체를 통째로 태워버릴 기세였다.

그때였다.

쿵.

13칸과 12칸을 연결하는 두꺼운 방폭 철문 너머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기괴한 타격음이 울렸다.

쿵! 쿵! 쿵!

단순한 충격이 아니었다. 거대한 강철을 손으로 구겨버리는 듯한 압도적인 완력이 철문을 뒤흔들고 있었다. 방폭 문의 중앙부가 안쪽을 향해 둥글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20cm 두께의 특수 합금판이 종잇장처럼 밀려 나왔다.

화염을 당기려던 심복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그들의 가스마스크 안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 대장님인가...?"

콰직!

마침내 방폭 문의 경첩이 뜯겨 나가며 천장으로 솟구쳤다.

찢어진 철문 사이로 쏟아져 나온 것은 엄청난 양의 검은 증기였다. 그리고 그 증기를 가르며, 인간의 규격을 한참 벗어난 거대한 실루엣이 걸어 나왔다.

높이 2.5미터가 넘는 기갑 보행 슈트.

그 슈트의 흉부에는 사람의 유골로 만든 기괴한 장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오른팔에는 증기 실린더로 구동되는 거대한 살육용 둥근 톱날이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도살자 고르곤이었다.

그가 붉게 달아오른 톱날을 바닥 철판에 쓸며 천천히 전진했다. 끼이이이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13칸 내부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켰다.

고르곤의 시선이 불타버린 전차의 잔해와 부하들의 시체를 지나, 제어 플랫폼 위의 카일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투구 틈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쇠를 가는 듯한 저음이었다.

"학자 놈이 제법 영리한 덫을 놓았군."

고르곤이 오른팔의 톱날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내 이빨은 이 철판때기들과 함께 네놈의 목구멍을 씹어 삼킬 것이다."

그가 폭발적으로 대지를 박찼다.

기갑 슈트의 추진기가 불꽃을 뿜으며, 거대한 덩치가 카일이 서 있는 플랫폼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카일의 눈동자 속에, 붉게 타오르는 톱날의 궤적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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