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익, 소리와 함께 기화된 가솔린 냄새가 미끼 참호 내부를 가득 채웠다.
화력 심복 세 명이 등을 맞댄 채 화염방사기의 구리 노즐을 아래로 꺾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점화기의 스파크가 튀었다. 푸르스름한 불씨가 노즐 끝단에서 아른거렸다. 참호 속에 웅크린 요한과 영민들의 눈동자에 일제히 절망의 빛이 서렸다. 그들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바닥의 그을린 철판 위로 떨어졌다.
"다 구워버려라!"
가스마스크 너머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붉은 화염이 분출되기 직전, 밸브가 열리는 금속성 마찰음이 사방을 울렸다. 요한은 눈을 감았다. 살이 타들어 갈 고통을 예감하며 옆에 있던 어린 영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제어 플랫폼 위의 카일은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화염방사기 노즐의 각도와 참호의 경계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르곤이 방폭 철문을 찢고 기갑 슈트의 추진기를 뿜으며 날아오르는 찰나의 폭조 속에서도, 카일의 손가락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고르곤의 돌격 궤적과 심복들의 점화 타이밍을 하나의 거대한 수식으로 정렬해 둔 상태였다.
카일이 오른손에 쥔 제어반의 기계식 릴레이 레버를 아래로 단호하게 꺾었다.
철컥.
무거운 강철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열차 하부에서 발생했다.
13칸 바닥 밑바닥에 숨겨진 고압 냉각수 탱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피스톤이 실린더 내부를 짓누르며 내부 압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렸다. 배관을 타고 흐르는 액체의 압력은 순식간에 3,000바(bar)를 넘어섰다. 강철판마저 두부 썰듯 잘라내는 초고압의 영역이었다.
참호 바로 앞바닥, 미세하게 벌어진 슬릿 형상의 틈새들이 미끼 노릇을 하던 이들의 발끝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틈새 속에서 압축된 공기가 빠져나가는 날카로운 파찰음이 일었다.
쉬이이익!
화염방사기의 노즐에서 막 1,200도의 불꽃이 뿜어져 나오려던 찰나였다.
바닥의 틈새를 뚫고 솟구친 것은 불길이 아니었다. 극도로 압축되어 칼날보다 예리해진 초고압 냉각 수류였다. 눈으로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뿜어진 푸른 수류가 허공을 갈랐다.
서늘하고 투명한 물의 장벽이 화력 심복 삼 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서걱.
소리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폭발음도, 비명도 없었다. 오직 두꺼운 가죽옷과 단단한 뼈가 한꺼번에 슬라이스 되는 서늘한 마찰음만이 13칸의 소음을 일순간에 지웠다.
가장 왼쪽에 서 있던 심복의 화염방사기 주입 노즐이 깨끗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잘려 나간 노즐 단면에서 미처 연소되지 못한 가솔린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노즐을 쥐고 있던 그의 두 손목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어...?"
가스마스크 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고통을 인지하기도 전에, 수압 절단 날은 그의 가슴팍을 가로질렀다.
나머지 두 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수평으로 뻗어 나간 초고압의 물줄기는 그들의 상반신을 정교하게 양분했다. 쇠가죽으로 만든 방호복도, 기갑 부대 특유의 조잡한 철판 덧댐도 소용없었다. 물은 물질의 밀도를 완전히 무시한 채 그들의 육체를 관통했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명의 상반신이 동시에 뒤로 미끄러졌다.
바닥에 남겨진 하반신은 여전히 꼿꼿이 선 채였다. 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선혈이 초고압 물줄기와 섞여 사방으로 분사되었다. 붉고 차가운 안개가 참호 주변을 덮쳤다. 뜨거운 불길이 지옥을 만들려던 공간은, 단 1초 만에 얼음처럼 차가운 피의 분수대로 변모했다.
치이이익.
잘려 나간 화염방사기 탱크에서 새어 나온 가스가 차가운 냉각수 세례에 휩쓸려 무력하게 흩어졌다. 참호 내부로 들이닥치려던 열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직 비린내 나는 수증기만이 바닥에서 피어올랐다.
요한은 서서히 눈을 떴다.
자신의 얼굴을 적신 것은 뜨거운 불길이 아니었다. 비릿하고 차가운 액체였다. 손으로 뺨을 쓸어내리자 붉은 피와 푸르스름한 냉각수가 한데 엉켜 묻어 나왔다. 참호 바로 위, 불과 몇십 센티미터 상공에서 세 명의 침략자가 허리가 잘린 채 바닥으로 무너지는 광경이 보였다.
그들의 내장과 뼈 단면이 기괴할 정도로 매끄럽게 절단되어 철판 바닥으로 쏟아졌다.
"살... 살았다."
옆에 있던 영민이 이빨을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요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제어 플랫폼 위의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여전히 감정 없는 눈으로 메인 레버를 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참호 속의 영민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오직 바닥에 뒹구는 시체들과, 저 멀리서 날아오는 고르곤의 궤적만을 기하학적으로 분석하고 있을 뿐이었다.
요한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이 참호의 위치. 자신들이 대피하도록 지시받은 구역. 그리고 정확히 그 앞을 가로지르며 솟구친 수압 절단 날의 궤적.
모든 것이 정교하게 맞아떨어졌다.
카일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함정을 발동한 것이 아니었다. 저 화력 심복들을 가장 완벽한 각도로 유인하기 위해, 자신들을 눈앞의 '먹이'로 던져둔 것에 불과했다. 심복들이 참호를 향해 화염방사기를 겨누며 방심하고 고정된 자세를 취하는 그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만약 수압 절단 날의 각도가 조금만 어긋났다면, 참호 속에 있던 영민들의 머리통 역시 깨끗하게 날아갔을 터였다. 카일은 그 위험성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은 수치만을 계산해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너는..."
요한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열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계량화된 도구로 취급당했다는 모욕감과 깊은 배신감이었다. 카일에게 영민들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함정의 살상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가련한 미끼, 딱 그 정도의 가치였다.
요한은 이를 악물었다. 카일의 차가운 눈동자가 자신들의 목숨을 숫자로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시려 왔다.
그 순간, 카일의 뇌리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두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벽을 직접 타격하는 무거운 파동이었다.
[살인 대장(Ledger of Homicide)에 새로운 정보가 기록됩니다.]
귀에 들리지 않는 서늘한 음성이 뇌 내부를 잠식했다. 동시에 세 명의 화력 심복이 죽기 직전 느꼈던 감각이 카일의 신경계로 다이렉트 주입되었다.
허리가 잘려 나가는 감각.
자신의 내장이 쏟아지는 것을 보며 느낀 극도의 인지부조화와 공포.
차가운 냉각수가 잘려 나간 신경 단면을 파고들 때의 얼어붙는 듯한 고통.
"윽..."
카일은 입술을 짓씹었다. 신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억눌렀다. 눈앞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무채색으로 변해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맥박을 제어하는 이성으로 간신히 버텨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파동 뒤로, 대장 상단에 청구서처럼 숫자가 떠올랐다.
[획득 자원: +450 DP] [현재 보유 DP: 680 DP]
막대한 자원이 일시불로 충전되었다. 13칸의 철골을 우그러뜨리고 더 기괴한 덫을 개조할 수 있는 수치였다. 그러나 그 대가는 즉각적이고 무자비하게 찾아왔다.
오른쪽 뺨에서 시작된 이질적인 느낌이 급격히 번져나갔다.
카일은 제어반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가락 끝이 뺨에 닿았지만, 아무런 피드백이 없었다. 가죽 장갑의 거친 질감도, 뺨에 묻은 차가운 냉각수의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뺨을 강하게 꼬집어 보았다. 고통조차 없었다.
얼굴 오른쪽 절반의 촉각이 완벽하게 소실되어 있었다. 마치 얼어붙은 진흙덩이를 얼굴에 붙여놓은 듯한 무감각이었다. 입술 오른쪽 끝이 마비되어 침이 흘러내릴 것 같았지만, 근육을 제어해 강제로 입을 다물었다.
이미 상실한 미각에 이어, 이제는 촉각마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의 감각이 마모될수록 요새는 강해진다. 카일은 무감각해진 뺨을 무표정하게 쓸어내렸다. 공포는 없었다. 오직 잔여 감각의 보존 기간과 향후 함정 설계의 효율성만을 저울질할 뿐이었다.
"괴물 같은 놈이."
찢어진 방폭문 너머, 자욱한 증기 속에서 기괴한 기계음이 울렸다.
고르곤이었다.
그는 추진기의 불꽃을 끄며 바닥에 무겁게 착지했다. 쿵, 하는 충격과 함께 열차의 차체가 아래로 푹 꺼졌다. 그의 시선이 좌우로 두 동강 난 채 피를 뿜고 있는 심복들의 시체에 머물렀다.
그의 얼굴을 가린 기갑 투구의 틈새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내 정예병들을 이따위 시시한 물장난으로 잘라내다니."
고르곤의 목소리에 담긴 아연한 분노가 실내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오른팔에 장착된 융합 증기톱이 다시금 회전하기 시작했다. 웅웅거리는 진동음이 바닥 철판을 타고 카일의 발끝까지 전해졌다. 톱날의 회전 속도가 극에 달하자, 원형의 강철 날이 붉다 못해 하얗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학자 놈의 대가리를 쪼개서 그 영리한 골통 속을 직접 확인해 주마!"
고르곤이 거대한 장갑차의 해치를 걷어차듯 발로 짓밟았다.
쿠웅!
철판이 우그러지며 요동치는 소리와 함께, 2.5미터의 거구가 카일을 향해 폭발적으로 쇄도했다. 바닥의 철판들이 그의 무거운 발걸음마다 비명을 지르며 솟구쳤다.
카일은 마비된 뺨을 실룩이며, 품 안에서 다음 트랩의 기폭 장치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고르곤의 신형 기갑 슈트가 뿜어내는 열기가 제어 플랫폼까지 닿았다.
카일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품 안에서 꺼낸 수동 기폭 장치의 황동 레버에 가 있었다. 마비된 오른쪽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지만, 왼쪽 눈은 고르곤의 돌격 속도를 정확히 계측하고 있었다.
초당 4.2미터. 기갑 슈트의 무게를 감안하면 운동에너지는 일반적인 인간의 서른 배를 상회한다. 정면 충돌은 즉사다.
카일이 레버를 눌렀다.
콰르릉!
고르곤의 발밑, 정확히 제13칸 중앙 통로의 두꺼운 철판 세 장이 아래로 꺾이며 거대한 함정이 아가리를 벌렸다. 열차 하부의 고압 수조로 바로 연결되는 침강식 압착 구역이었다. 이 무게의 장갑이 낙하한다면 바닥의 수압 피스톤이 작동해 고르곤을 그대로 짓눌러 고철로 만들 터였다.
그러나 고르곤은 평범한 돌격병이 아니었다.
피이이이익!
그의 어깨와 등 뒤에 장착된 증기 분사구가 백색의 고압 가스를 뿜어냈다. 순간적으로 추진력을 얻은 고르곤의 거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낙하하는 철판을 디딤돌 삼아 강하게 도약한 것이다.
그의 붉은 안광이 카일의 눈동자와 일직선으로 마주쳤다.
"잔머리만 굴리는 쥐새끼가!"
허공을 가르는 융합 증기톱이 카일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열기로 인해 주변의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카일은 다음 단계의 방어 수순을 밟기 위해 플랫폼 구석의 수동 밸브로 손을 뻗었다. 수조의 배수관을 역류시켜 천장의 고압 전기 톱날을 하강시키는 이중 기믹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황동 밸브의 손잡이에 닿으려던 찰나였다.
콰직!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제어 플랫폼 하부의 굵은 구리 배선 뭉치가 뒤틀리며 불꽃을 뿜었다.
카일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시스템의 압력 게이지가 순식간에 제로로 떨어졌다. 천장의 톱날을 구동할 전류가 차단된 것이다.
카일이 고개를 숙였다.
플랫폼 아래, 그을린 참호 옆에서 요한 베일이 피 묻은 정비용 장탄 도끼를 쥐고 서 있었다. 그의 호흡은 거칠었고, 눈동자는 광기에 가까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가 방금 내리찍은 도끼날은 제어 플랫폼의 메인 동력 케이블을 정확히 끊어놓은 상태였다.
"더는..."
요한이 도끼를 다시 치켜들며 소리쳤다.
"더는 우리를 미끼로 쓰게 두지 않겠다, 카일! 네놈도 저 괴물과 함께 지옥으로 가라!"
비이성적 헌신과 도덕적 분노.
카일의 계산식에는 존재하지 않던 인간적 변수였다. 요한은 자신들의 목숨을 도구로 삼은 카일에게 복수하기 위해, 침략자인 고르곤이 눈앞에 있음에도 방어 시스템을 파괴하는 자멸적인 선택을 내린 것이다.
계산이 어긋났다.
천장의 톱날은 요지부동이었고, 고르곤의 증기톱은 이미 카일의 정수리 위 1미터 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회전하는 톱날의 굉음이 카일의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마비되지 않은 왼쪽 뺨의 피부가 열기에 그슬려 붉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피할 곳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