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잘려 나간 고르곤의 머리통은 무거웠다. 가죽처럼 질긴 목덜미를 움켜쥔 카일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바닥에 닿는 피는 차가운 철판을 따라 기괴한 무늬를 그리며 번져 나갔다.
쿠구구구궁!
강철 격벽이 비명을 지르며 위로 들렸다. 13칸과 14칸을 가로막고 있던 육중한 장벽이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고막을 찔렀으나 카일의 눈꺼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정면, 먼지 쌓인 모니터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점화되는 궤적만을 쫓고 있었다.
스파크가 튀었다. 회색 노이즈가 물결치더니, 이내 정교하게 다듬어진 하얀 가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오, 정말 이보다 더 완벽한 희극이 있을까.
가면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매끄러웠다. 마치 연극 무대 위에서 독백을 읊조리는 배우의 성조였다. 화면 속의 사내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 무식한 멧돼지 고르곤이 고작 쥐새끼의 덫에 걸려 목이 떨어지다니. 아주 훌륭한 구경거리였네, 카일 에버하르트 학자님? 아니, 이제는 13칸의 영주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크로이츠."
카일이 건조하게 이름을 뱉었다. 그의 왼팔은 아직 고르곤의 머리카락을 쥔 채였다. 피가 소매를 타고 흘러내려 붕대를 적셨지만, 카일은 그 축축함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온각이 마비된 그의 피부는 그저 무감각한 질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래, 나를 알고 있군. 기쁘기 한량없네.
크로이츠가 가면의 눈구멍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목소리에 깃든 가학적인 유열이 스피커의 진동을 타고 흘러나왔다.
―하지만 말일세, 학자님. 자네의 그 훌륭한 머리통에는 치명적인 구멍이 하나 있어. 자네는 인간을 완벽하게 계산할 수 있다고 믿지? 수치와 기하학, 그리고 효율성으로 말이야.
크로이츠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자네는 공포를 몰라. 절망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 그 위대한 예술을 단 한 조각도 이해하지 못해. 감정이 거세된 껍데기니까. 그래서 자네의 방어선은 아름답지 않아. 그저 조잡한 도살장에 불과하지.
카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크로이츠의 도발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 주겠네. 자네가 그 차가운 대가리로 결코 계산해 내지 못할 절망의 수식을. 자네의 영민들이 스스로의 살점을 뜯어내며 자네에게 울부짖을 때, 그들의 비이성적인 헌신이 어떻게 자네의 목을 조르는 덫이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이건 아주 고귀한 정신 예술 고문이 될 거야. 기대해도 좋네.
화면이 지직거리며 꺼졌다. 마지막 순간 스피커를 타고 흐른 크로이츠의 웃음소리가 13칸의 차가운 공기 속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일은 쥐고 있던 고르곤의 머리통을 바닥에 툭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요한의 구두 앞까지 굴러갔다. 요한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카, 카일…… 자네는 대체……."
요한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는 고르곤을 죽인 카일의 잔혹함보다, 방금 전 크로이츠의 경고를 듣고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는 카일의 태도에 더 큰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카일은 대답 대신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를 손등으로 쓱 닦아냈다. 입안이 찢어져 피가 고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바닥에 뱉었다.
붉은 핏물이 철판 위를 적셨다.
비린 맛도, 쇠 맛도 나지 않았다. 그저 끈적한 액체가 혀끝을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맛이라는 감각 자체가 뇌에서 영구히 삭제된 느낌이었다.
살인 대장에 고르곤의 죽음을 기록하고 얻은 대가였다. 미각의 상실. 카일은 마음속으로 그 상실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생존에 지장은 없다. 독극물을 감별할 미각이 사라진 것은 아쉽지만, 화학적 측정 도구를 사용하면 그만이다.'
그 메마른 계산 절차가 그의 사고를 지배했다. 카일은 자신이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아무런 슬픔도, 분노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13칸이라는 방어선을 어떻게 더 완벽한 요새로 고립시킬 것인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괴물……."
요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혐오와 경외가 뒤섞여 있었다.
"자네는 저들이 우리를 예술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저 가면을 쓴 미치광이가 우리를 어떻게 찢어 죽일지 이야기하는 걸 듣고도, 어떻게 그런 눈을 할 수 있지?"
카일은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빛을 흡수하기만 할 뿐, 반사하지 않는 심연 같았다.
"적의 감상적인 독백을 분석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카일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크로이츠는 고르곤보다 지능적이다. 그는 아군의 심리적 균열을 노린다. 요한, 네가 지금 보여주는 그 비이성적인 동요가 바로 그가 원하는 무기다. 내 구역에서 무익한 감정을 전염시키지 마라."
"뭐라고?"
"살고 싶다면 시체나 치워라."
카일은 요한을 지나쳐 레나에게 걸어갔다. 레나는 구석에 웅크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카일이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양손을 모으며 바짝 엎드렸다.
"레, 레나입니다! 영주님, 제게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저는 쓸모가 있습니다. 버리지 마세요…… 제발……."
그녀의 눈동자가 광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카일의 가스라이팅은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카일은 그녀의 공포를 유용한 동력원으로 분류했다.
"일어나라, 레나."
카일이 차갑게 명령했다.
"시간이 없다. 14칸의 격벽이 열렸다는 것은 전위 부대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지금 즉시 하부 철제 분리 레버 구역으로 이동한다."
레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그녀는 카일의 뒤를 따랐다.
카일은 품속에서 살인 대장을 꺼냈다. 가죽 표지가 피로 얼룩진 책이 그의 손안에서 차갑게 식어 있었다. 고르곤과 그의 선발대를 도살하며 획득한 데스 포인트(DP)가 대장 위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보유 데스 포인트: 1,200 DP]
이 자원은 즉시 방어선 강화로 전환되어야 한다. 카일은 13칸과 14칸의 연결 통로, 즉 열차의 하부 분리 레버 유전체를 응시했다.
그곳은 비상시 열차 칸을 물리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분리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부족했다. 크로이츠의 본대를 확실하게 이 안으로 끌어들여 몰살하기 전까지는, 연결을 유지한 채 덫을 깔아야 했다.
"레나. 고압 튜빙 라인을 가져와라."
"고, 고압 튜빙 라인이요? 그걸 어디에 쓰시려고……?"
"질문하지 말고 움직여라."
레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공구함에서 구리빛 튜브와 고정용 볼트들을 꺼내왔다. 카일은 살인 대장의 페이지를 넘기며 정신 파동의 도래를 준비했다.
스르륵.
페이지가 넘어가자, 머릿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고르곤이 목이 잘려 나가며 느꼈던 마지막 광기와, 척추가 끊어질 때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카일의 신경계를 여과 없이 타격했다.
"으윽……."
카일의 턱관절이 부르르 떨렸다. 눈앞이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멀어졌다. 차가운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그는 단 한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오직 이 고통의 수치를 이성적으로 억누르며, 대장의 힘을 철제 분리 레버 유전체에 주입했다.
[1,000 DP 소모.] [13칸-14칸 하부 연결선에 '고압 미세 오일 누출 루프'를 설계 및 증축합니다.]
치이이익!
철판 아래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울리며, 보이지 않는 틈새로 고압의 가연성 오일이 흐를 수 있는 얇은 관들이 혈관처럼 이식되기 시작했다.
카일은 레나가 가져온 구리 튜브를 직접 건네받아 하부 밸브에 연결했다. 그의 손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여기에 흐르는 오일은 고인화성 폐유다."
카일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 누출 루프는 미세하게 설계되어 있어, 평소에는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특정 압력 이상이 가해지거나 전기 스파크가 발생하면……."
"이, 이 하부 전체가 화염 지옥으로 변하겠군요."
레나가 침묵 속에서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녀는 카일의 치밀함에 다시 한번 전율했다. 그는 크로이츠의 도발을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다음 도살을 위한 기계적 장치만을 묵묵히 이식하고 있었다.
크로이츠가 말한 예술이니 절망이니 하는 것들은 카일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침입자들은 오직 이 요새를 단단하게 만들 자원이자, 톱니바퀴의 부품에 불과했다.
"준비해라."
카일이 도구를 정리하며 말했다.
"놈들이 온다."
타아아앙! 타아아앙!
어두컴컴한 14칸의 통로 너머에서 거친 철제 구두 소리가 메아리쳤다. 13칸의 영민들이 무기를 쥐고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눈에 다시 한번 짙은 공포가 서렸다.
어둠을 뚫고 나타난 자들은 고르곤의 야만적인 전사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정교한 방독면을 쓰고, 스팀 실린더가 장착된 기계 도끼를 든 크로이츠의 전위 용병들이었다. 그들의 방독면 유리에 비친 방 안의 풍경은 오직 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침입자다! 막아!"
요한이 소리치며 파이프를 휘둘렀지만, 용병들의 조직적인 움직임 앞에는 역부족이었다. 최전방에 선 거구의 용병이 기계 도끼를 가볍게 휘두르자, 요한은 가슴팍을 얻어맞고 뒤로 나자빠졌다.
"크아악!"
"요한!"
영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대열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용병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13칸의 제어 플랫폼을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방어선의 핵심 제어 장치를 파괴하고 카일의 목을 가져가는 것.
그 혼란의 와중에, 하부 밸브를 점검하던 레나가 용병 부대장의 시야에 걸려들었다.
"쥐새끼가 여기 숨어 있었군."
기계 도끼를 든 부대장이 기괴한 방독면 너머로 쇳소리를 내며 레나에게 다가갔다. 그의 도끼날이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레나는 막다른 벽에 몰렸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카일은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뇌가 계산을 시작했다.
'레나가 죽으면 기갑 슈트의 동력원 분석과 함정 유지 보수에 차질이 생긴다. 손실 비용이 너무 크다. 하지만 내가 직접 개입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그때였다.
레나의 눈빛이 돌연 독하게 변했다. 그녀는 카일이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 것임을, 오직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만 이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죽어, 이 괴물 자식아!"
레나가 양말 속에서 무언가를 거칠게 뽑아 올렸다. 그것은 작은 금속 실린더였다.
치이이이익!
그녀가 움켜쥔 안구 파괴용 극독 스프레이가 부대장의 방독면 흡기구와 안구 틈새를 향해 정확하게 뿜어졌다. 그것은 과거 카일이 그녀의 소지를 묵인했던 바로 그 치명적인 무기였다.
"아아아아악!"
방독면의 틈새로 침투한 극독 액체에 부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기계 도끼를 떨어뜨린 채 바닥을 뒹굴며 자신의 얼굴을 손톱으로 뜯어냈다.
"내, 내 눈이! 으아아아악!"
레나는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기어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을 확보해 냈다.
카일은 그 모습을 보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용하군.'
그것이 카일이 내린 유일한 평가였다. 레나가 살아남음으로써 그의 자산 손실은 방지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위이이이이잉!
돌연 13칸의 상부 천장에서 굉음이 울렸다. 비상 배기 덕트의 철제 밸브들이 일제히 역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철컥!
"어? 이게 무슨……?"
요한이 가슴을 움켜쥔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원래 내부의 공기를 밖으로 배출해야 할 덕트가 반대편, 즉 14칸의 원격 제어 장치에 의해 강제로 역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린 구멍 사이로, 기괴한 자색 안개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으…….
안개는 무겁고 빠르게 방 바닥을 향해 낙하했다. 그것이 닿는 곳마다 철판이 미세하게 부식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크로이츠가 예고한 '예술적인 고문'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