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고르곤의 단분자 톱날에 카일의 최후 철제 방어벽마저 일도양단으로 두 동강 나며 카일의 목전에 쇠불꽃이 흩날렸다.

고열의 파편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카일은 아무런 열기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상실해 버린 온각은 뺨을 타고 흐르는 액체가 뜨거운 피인지, 차가운 땀방울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직 시각과 귓가를 때리는 굉음만이 상황의 파국을 경고하고 있었다.

"죽어라! 쥐새끼 같은 학자 놈!"

시력을 잃은 고르곤이 톱날을 무지막지하게 휘둘렀다. 두 동강 난 방폭 철판이 비틀리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카일은 뒤로 도약했다.

등 뒤로 차가운 조작 패널의 금속 질감이 느껴졌다. 뇌세포 한구석에서 경고 신호가 울렸다. 수동 크랭크는 더는 쓸 수 없다. 기어 사이에 박힌 스프레이 캔이 구겨진 채 굳어 버렸고, 억지로 가해진 압력 탓에 황동 기어 자체가 어긋났다. 수조 압착 트랩의 격발률은 95%에서 멈췄다. 5%의 공백. 그것은 완벽을 추구하는 카일에게 치명적인 변수였다.

하지만 카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뇌는 감정을 소거한 계산 장치에 가까웠다. 수동 크랭크가 망가졌다면, 다른 방식을 쓰면 된다. 이곳은 제13연결 칸이다. 그가 자신의 피와 살인 대장의 자원을 갈아 넣어 만든 요새였다. 도처에 죽음의 덫이 깔려 있었고, 그 모든 배치도는 카일의 머릿속에 3차원 입체도로 완벽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카일은 몸을 굽혀 고르곤의 맹목적인 종횡 베기를 피했다. 단분자 톱날이 그의 머리카락 몇 올을 스치며 천장의 배관을 잘라냈다.

파직! 파지직!

잘려 나간 배관에서 고압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살 가죽이 녹아내릴 열기였지만, 카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흩어지는 파편과 증기 속을 돌파했다. 표적은 단 하나였다.

13칸 서쪽 벽면에 위치한 비상 제어반.

카일은 피가 흐르는 손가락끝으로 벽면의 두꺼운 분진을 쓸어내며, 녹이 슨 붉은색 레버 옆의 소형 아크릴 커버를 구두굽으로 까부수었다. 그 안에는 먼지 쌓인 노란색 패널 버튼이 자리하고 있었다.

13칸 최고의 침수 도살 구역을 가동하는 격발 장치였다.

"카일! 피해!"

저 멀리 배관 더미에 처박혀 있던 레나가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허리는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정비공의 비참한 말로였다. 카일은 그녀를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그에게 레나는 유용한 도구였을 뿐, 동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도구가 망가졌다면 새로운 도구를 쓰거나, 남은 부품으로 최선의 효율을 내면 그만이었다.

카일은 가차 없이 패널 버튼을 내리눌렀다.

쿠구구구궁!

열차 하부에서부터 거대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제13연결 칸의 천장 전체를 덮고 있는 거대한 저장고의 격벽이 열리는 소리였다.

"이게 무슨...!"

시력을 잃고 소리에 의존하던 고르곤이 멈칫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거구 위로 천장의 배수구가 일제히 개방되었다. 쏟아져 내린 것은 맑은 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검고, 걸쭉하며, 악취를 풍기는 점성 오수였다.

정확히는 게헨나 열차가 궤도를 달릴 때 발생하는 마찰열을 식히고 남은 윤활 폐제(廢劑)였다.

철궤의 고열을 냉각하기 위해 쓰이는 이 윤활제는 극도로 무겁고 점성이 강했다. 일반적인 필터로는 걸러내지 못하는 슬러지와 중금속 가루가 가득 뒤섞인, 그야말로 기계의 배설물이나 다름없는 액체였다.

철벅! 처처적!

수십 톤에 달하는 윤활 폐제가 폭포수처럼 고르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으그윽! 차가워... 아니, 이게 뭐지? 몸이...!"

고르곤이 비틀거렸다. 걸쭉한 타르 같은 액체가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카일은 그 모습을 냉정하게 관찰했다. 고르곤이 착용하고 있는 기갑 슈트는 증기 동력으로 작동한다. 등 뒤의 거대한 보일러와 가슴팍에 달린 공기 흡입구가 그 심장이었다. 고압의 증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공기 순환과 냉각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그 흡입구 안쪽으로 점성이 강한 윤활 폐제가 삽시간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쿨럭! 쿨럭!

고르곤의 엔진이 기침하듯 기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흡입 필터가 검은 기름 덩어리로 꽉 막히며 외부 공기의 유입이 차단되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보일러는 순식간에 내부 압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뜨거워...! 제발, 엔진이...! 보일러가 터진다!"

고르곤이 가슴을 쥐어짜며 비명을 질렀다. 기갑 슈트 내부의 온도가 미친 듯이 상승하고 있었다. 철판이 붉게 달아오르며 고르곤의 가죽을 태우는 냄새가 진동했다. 카일은 코를 킁킁거렸지만,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이미 미각과 함께 후각의 일부마저 손상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살인 대장을 사용할 때마다 치러야 하는 냉혹한 대가였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적의 파멸이 코앞에 있었다.

하지만 윤활 폐제의 투하만으로는 고르곤의 괴물 같은 생명력을 완벽히 끊을 수 없었다.

기갑의 압력이 한계에 도달하자, 고르곤이 수동 바이패스 밸브를 열어 증기를 강제로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슈트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압 증기가 주변의 검은 오수를 밀어냈다.

"이대로는 부족해."

카일이 중얼거렸다. 압력을 완전히 고정하고 수조 유압 트랩의 마지막 5%를 채워 고르곤을 압착 폐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차 뒤편의 수동 배수 조종관을 완전히 폐쇄하여 윤활유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수위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 조종관이 있는 위치는 고르곤의 톱날 사정거리 안쪽이었다. 카일이 직접 가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카일의 시선이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요한 무리에게 닿았다.

요한은 이빨을 악물고 카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카일의 잔혹함에 대한 혐오와, 동시에 생존에 대한 처절한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

"요한."

카일이 건조한 목소리로 불렀다.

"저 조종관을 잠가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이 방 안에서 삶아져 죽는다."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저 괴물 앞을 지나가라고? 우릴 미끼로 쓰려는 속셈이잖아!"

요한의 곁에 있던 젊은 영민이 소리쳤다.

카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품속에서 소형 기폭 장치를 꺼내 보였다. 영민들이 머물고 있는 피난 구역의 차단벽을 제어하는 장치였다.

"선택은 자유다. 저 조종관을 잠그고 살 확률을 높이든가, 아니면 여기서 고르곤의 톱날에 썰려 나가든가. 내가 차단벽을 열면 저 괴물은 가장 먼저 너희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갈 거다."

"이 악마 같은 자식...!"

요한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몸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카일은 그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시오패스인 그에게 대안이 없는 협박은 가장 효율적인 협상 카드일 뿐이었다. 감정적인 소모는 무의미했다.

"3초 주지."

카일이 손가락을 기폭 버튼 위에 올렸다.

"1."

"내가 간다!"

요한이 결국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를 따르던 두 명의 청년도 겁에 질린 얼굴로 요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요한 형씨! 미쳤어요? 저 학자 놈의 말을 믿는단 말입니까?"

"지금 안 움직이면 다 죽어! 저 새끼는 정말로 우릴 버릴 놈이야!"

요한이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며 수동 배수 조종관을 향해 달렸다. 고르곤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와 사방으로 튀는 윤활유 속을 뚫고, 요한이 거대한 무쇠 휠을 움켜잡았다.

"으아아아아!"

요한과 영민들이 온 힘을 다해 철제 휠을 돌리기 시작했다. 녹슨 쇠붙이가 비명을 지르며 돌아갔다. 고르곤이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휘청거리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거기 누구냐! 벌레 같은 년놈들이!"

"빨리! 카일, 빨리 끝내란 말이다!"

요한이 조종관을 목숨 걸고 붙잡은 채 카일을 향해 절규했다. 손바닥의 가죽이 찢어져 쇠바퀴에 핏자국이 묻어났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인간의 비이성적인 헌신.

카일로서는 평생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행위였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적을 구하기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은 계산적으로 명백한 손해였다. 하지만 카일은 그 비이성적인 감정마저 자신의 계획표 위에 올려놓고 사용했다. 그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카일은 바닥의 기어 틈새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하부의 철제 분리 레버 유전체를 스쳤다.

그곳에는 카일이 미리 설계해 둔 고압 미세 오일 누출 루프가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아직은 가동할 때가 아니었다. 그것은 훗날 찾아올 더 거대한 파멸을 위한 복선이었다. 카일은 눈앞의 사냥감에 집중했다.

"조종관 폐쇄 완료!"

요한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굴렀다.

동시에 바닥에 고여 있던 윤활 폐제의 수위가 순식간에 고르곤의 무릎까지 차올랐다. 천장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오수가 갈 곳을 잃고 웅덩이를 만든 것이다.

게헨나의 철궤 고열을 식히기 위해 특수 제작된 이 액체는, 역설적으로 고르곤의 기갑 슈트를 완벽하게 무력화하는 냉각 무기가 되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보일러의 외벽이 차가운 폐제와 접촉하자 급격한 온도 차를 견디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켰다.

치이이이이익!

"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가 녹는다!"

슈트 내부로 유입된 폐제와 수증기가 고르곤의 하체를 덮쳤다. 강대한 파괴력을 자랑하며 돌진하던 기갑 학살자가, 점성 오수 투하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물리적인 계산 법칙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쿠웅!

고르곤의 거구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증기톱의 회전이 힘없이 잦아들며 멈췄다. 엔진 과열로 인한 완전한 시스템 다운이었다.

통쾌할 정도의 무력화였다.

그토록 무지막지한 힘으로 무장했던 적이, 고작 버려진 윤활유 몇 톤에 허무하게 쓰러지는 모습은 기괴한 희열마저 불러일으켰다.

요한과 영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해... 해낸 건가?"

"괴물이 멈췄어...!"

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카일은 차가운 눈으로 쓰러진 고르곤을 응시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기폭 장치가 들려 있었다.

살인 대장의 페이지가 아직 넘어가지 않았다. 그것은 사냥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비켜라."

카일이 조용히 경고했다.

하지만 요한은 안도감에 취해 쓰러진 고르곤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그때였다.

철컥!

멈춘 줄 알았던 고르곤의 기갑 슈트 우측 팔이 기괴한 소음을 내며 구동했다. 완전한 방전 직전, 비상 축전기의 마지막 전류를 쥐어짜 낸 움직임이었다.

"이... 이리 와라... 카일...!"

고르곤의 시뻘겋게 충혈된 외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타오르는 시선은 요한이 아닌, 자신을 이 꼴로 만든 학자만을 향하고 있었다.

쉬이이익!

피스톤이 역류하며 고르곤의 거대한 강철 팔이 엄청난 속도로 뻗어 나왔다. 그것은 요한의 머리 위를 지나, 정확히 카일의 멱살을 향해 쇄도했다.

카일은 피하려 했으나, 바닥에 흥건한 윤활유가 발을 붙잡았다.

콰아앙!

강철 아귀가 카일의 어깨를 조여 왔다. 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온각은 없었지만, 뼈와 근육이 짓눌리는 물리적인 통증과 압각은 온전히 뇌로 전달되었다.

"잡았다... 잡았다고, 이 가짜 지배자 놈!"

고르곤이 피를 토하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의 강철 손아귀가 카일의 어깨뼈를 완전히 고정하며 파괴하기 위해 힘을 주기 시작했다. 어깨관절이 비틀리며 기괴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카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숨이 턱 막히는 상황 속에서, 그의 시선이 고르곤의 가슴팍에 달린 수동 비상 차단 밸브에 닿았다.

과연 이 아귀힘을 풀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어둠 속에서 게헨나의 차가운 철궤 소리만이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