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한기…… 저 빌어먹을 놈들에게…… 내 지분을 줄 바에야…….”
강민구의 떨리는 손가락이 백현의 하얀 의사 가운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손톱 밑에 낀 굳은 피가 흰 천 위로 붉은 조각처럼 흩어졌다. 헐떡이는 호흡 사이로 비릿한 침방울이 튀었다. 심의실에 모인 언론사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백광등 불빛이 백현의 무표정한 얼굴과 강민구의 일그러진 얼굴을 번갈아 비추었다.
“내 지분…… 그리고 내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배대 이사진 우호 세력의 지분 전부를…… 하백현 의사에게 양도하겠네! 상속 및 주식 위임장을…… 당장 작성하겠어!”
강민구의 목소리는 갈라진 틈새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 같았으나, 그 안에는 뼈를 깎는 증오가 담겨 있었다. 살기 위한 본능, 그리고 자신을 도구로 쓰고 버리려 했던 백강 가문에 대한 지독한 배신감이 빚어낸 맹독이었다.
“강 위원장! 지금 미쳤습니까?”
백한기가 단상 너머로 몸을 반쯤 기울이며 비명을 질렀다.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평소의 오만한 귀공자의 자태는 간데없고,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안색이 흑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지분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지껄이는 거야? 백강 메디컬의 근간을 외부인에게 넘기겠다고? 당장 저 노인네 입 막아! 보안요원들 뭐 해!”
백한기의 고함에 경비원들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하지만 백현의 서늘한 시선이 그들의 발끝에 닿자, 아무도 감히 한 걸음 더 내딛지 못했다. 수술 메스를 쥔 백현의 오른손은 미동조차 없었다. 15% 복구된 척골 신경 전도도 덕분에, 손끝에는 오랜만에 느껴지는 정교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비켜라.”
백현이 건조한 목소리로 뱉었다. 목소리에는 어떠한 고저도 없었으나, 심의실 전체를 얼려버릴 듯한 압도적인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백현은 강민구의 손을 천천히 떼어내며 그를 침대에 눕혔다.
“강 위원장, 당신의 생명은 내가 연장했다. 계약은 성립되었어.”
그때, 닫혀 있던 심의실 뒷문이 거칠게 열렸다. 둔탁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걸어 들어온 사람은 정선 세라 병원의 서은우 과장이었다. 그의 어깨는 빗물로 젖어 있었고, 손에는 해진 가죽 서류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세라 병원의 구석진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백강 병원 시절 그가 빼앗겼던 심장 원천 기기 특허 서류 가방이었다.
“늦지 않았군.”
서은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백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평소의 나태함 대신, 오랜 세월 억눌러왔던 분노와 의사로서의 자존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서은우는 가죽 가방의 낡은 버클을 풀어 헤치고, 수십 장에 달하는 빛바랜 연구 일지와 법적 원천 기술 증명서를 백한기의 발밑으로 사정없이 내던졌다.
퍼억, 하고 서류 뭉치가 바닥에 떨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게…… 뭐 하는 수작이지?”
백한기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백강 메디컬이 지난 10년간 독점하며 매년 수천억 원의 로열티를 벌어들인 ‘바이오 하트 세이버’ 원천 특허 기술.”
서은우의 목소리가 심의실 벽을 울렸다.
“그거, 내가 대학병원 시절 백강현 이사장의 강압으로 명의를 도용당해 빼앗긴 기술이야. 여기 당시 백강 법무팀이 날 협박했던 녹취록과 원본 설계 프레임워크 데이터가 다 들어 있네. 하백현 선생이 내게 판을 깔아줬으니, 나도 내 것을 찾아야겠어.”
백한기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렸다. 백강 그룹이 하백현을 옭아매기 위해 준비했던 ‘특허 침해 소송’이라는 무기가, 도리어 자신들의 심장을 관통하는 역소송 가처분 신청이라는 거대한 해일로 변해 돌아온 것이다.
“이, 이건 조작된 서류야! 당장 치워!”
“조작인지 아닌지는 법원이 판단하겠지.”
백현이 백한기를 내려다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큐어 캐피탈의 법률 대리인단이 서울중앙지법에 특허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 및 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을 접수했다. 백강 메디컬의 주력 바이오 사업 매출의 40%를 차지하는 특허가 송사에 휘말렸다는 속보가 5분 뒤면 공시될 거다. 주가가 어떻게 될 것 같나?”
백한기는 숨을 쉬는 법을 잊은 듯 턱을 벌렸다.
그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본사 재무팀과 홍보실에서 걸려오는 전화였다. 화면에 뜨는 단어는 단 하나, ‘급락’이었다.
“강민구 위원장을 비롯한 우호 주주들의 지분 18%. 그리고 내가 확보한 채권 전환 주식과 채유진 대표의 큐어 캐피탈 지분까지 합산하면 정확히 35.4%.”
백현은 한 걸음 다가서며 백한기의 멱살을 잡듯 시선을 내리꽂았다.
“백강 가문이 보유한 지분은 가차 없이 쪼개졌고, 이제 대주주로서의 지위는 내게 넘어왔다. 백한기 부사장. 아니, 이제 무직자가 될 백한기 씨.”
백현의 음성은 얼음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방금 백강 메디컬 그룹 잔여 임원진 전원에게 이사장 해임 및 이사회 재구성을 위한 임시 주주총회 소집 통지서를 발송했다. 네 아버지가 쌓아 올린 이 성채에서, 너희 가문 패거리들을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쓸어버릴 생각이다.”
백한기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방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가 그의 몰락을 박제하듯 사정없이 내려쬐었다.
***
심의실의 혼란을 뒤로하고 본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백현은 차가운 스테인리스 벽면에 몸을 기대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그의 눈앞에 익숙한 반투명 푸른 창이 영사되었다.
[경영권 강탈 완료 지수: 48%] [알림: 역사상 최대 계달 가치 달성. 시스템 동조율이 극대화됩니다.]
문구는 화려했으나, 그 아래로 흐르는 붉은색 경고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짙고 불길했다.
[위험: 신경 전도도 일시 복구 잔여 시간: 72시간 (3일)] [경고: 인과율 왜곡에 따른 육체 잔여 임계치 도달. 강제 휴면 및 영구 마비 진행률 급증. 남은 한계: D-3]
백현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약지와 새끼손가락 끝부분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찌릿함은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냉기 같았다. 척골 신경의 전도도가 일시적으로 회복된 것은 눈속임에 불과했다. 3일이 지나면, 그의 손은 이전보다 훨씬 더 참혹하게 굳어버릴 것이다. 어쩌면 메스를 다시는 쥐지 못할 정도로 영구적인 마비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D-3이라…….”
백현은 낮게 읊조렸다. 인간의 생명을 숫자로 거래하며 신의 영역을 침범한 대가는 그의 육체를 아래서부터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후회나 두려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목적지까지 달리기 위한 더 정교한 계산만이 뇌리를 채웠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어둠이 짙게 깔린 주차장 한구석에서 비상등을 깜빡이는 검은색 마이바흐가 보였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단정한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채유진이 우아하게 내렸다. 그녀의 손에는 샴페인 플루트 잔 두 개와 차갑게 칠링된 최고급 돔 페리뇽 병이 들려 있었다.
“축하해요, 하백현 선생. 아니, 이제 백강 메디컬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채유진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을 잔에 따랐다. 거품이 맑은 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백강의 주가는 폭락했고, 우리 펀드는 바닥에서 그들의 알짜 채권을 쓸어 담았어요. 강민구 위원장의 지분 양도 각서까지 공증을 마쳤으니, 이제 저 오만한 가문을 완전히 해고하는 일만 남았네요. 이 완벽한 적대적 M&A를 위해 축배를 들죠.”
그녀가 잔을 내밀었다.
백현은 잔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뇌리를 강타하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
백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하 선생?”
채유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백현의 콧등에서 검붉고 점성이 강한 피가 툭,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순한 코피가 아니었다. 핏방울은 정맥혈처럼 어둡고 끈적했으며, 그의 셔츠 깃을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현의 얇은 셔츠 소매 너머로 보이는 팔뚝의 실핏줄들이 터져나가며, 피부 위로 붉은 반점들이 기괴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마치 내부에서부터 가해진 압력을 견디지 못한 파이프가 터져 나가는 형국이었다.
툭, 타닥.
바닥에 깔린 대리석 위로 붉은 선혈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백현은 이빨을 악물었으나, 입술 사이로도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하백현! 당신 상태가……!”
채유진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유리잔이 깨지며 맑은 술과 붉은 피가 뒤섞여 어지럽게 흘렀다. 그녀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 백현의 얼굴을 닦아내려 했으나, 백현은 거칠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만지지 마.”
백현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긁혔다. 그는 세면대로 걸어가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었다.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렸고, 그는 얼굴을 파묻었다. 붉은 물이 배수구로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갔다.
숨이 막힐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의 뇌는 차갑게 작동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성공률 0%에 가까운 수술을 억지로 비틀어 성공시킨 대가이자, 시스템이 요구하는 가혹한 수명 단축의 실체였다.
“괜찮은 건가요? 당장 응급실로…….”
“의사는 나다.”
백현이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거울 속에 비친 그의 눈동자는 결막하 출혈로 인해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심연에서 걸어 나온 악마의 형상이었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아. 주총 전까지만 버티면 된다.”
채유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실리주의자인 그녀조차도, 눈앞의 남자가 뿜어내는 기괴할 정도의 집착과 생명력을 갉아먹는 복수극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칩으로 던져 백강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사들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하 주차장의 정적을 깨고 두 사람의 스마트폰이 동시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단조로운 수신음이 아니라, 재난 경보에 가까운 적색 긴급 알림음이었다.
채유진이 급히 자신의 태블릿을 켰다. 화면 가득 붉은색 속보창이 점멸했다.
[속보: 백강 메디컬 그룹 백강현 이사장, 급성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 불명 상태로 VIP 병동 긴급 이송.]
“백강현이……?”
채유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사장 해임 주총 통지서를 송달받고 격분하다가 쓰러진 모양이에요. 주가 폭락과 특허 소송 가처분 소식까지 겹쳤으니 혈압을 견디지 못했겠죠. 하지만 이상해요. 단순한 뇌출혈이 아니라…….”
백현의 폰 화면에도 세라 병원의 연락망을 타고 상세한 바이탈 정보가 전송되었다. 백현은 핏발 선 눈으로 화면의 수치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환자명: 백강현 (72세)] [진단명: 연수 파열(Brainstem Rupture) 및 거대 뇌저동맥류 파열에 의한 연수 침수] [상태: 자가 호흡 소실, 뇌사 직전 상태 (GCS 3점)] [수술 성공률: 0.08%]
백현의 시야에 붉은색 시스템 메시지가 강렬하게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제국의 심장을 도려내라.] [목표: 뇌사 직전의 백강현 이사장을 살려내어 그의 생명 주권을 완전히 찬탈하십시오.] [퀘스트 제한 시간: 6시간] [성공 보상: 백강 메디컬 그룹 장악력 100% 달성, 오른손 척골 신경 영구 복구 및 수명 5년 연장.] [실패 대가: 주인공 하백현의 영구 마비 및 즉사.]
백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백강현.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유배 보냈던 그 늙은 지배자가, 이제는 자신의 손끝에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것도 성공률 0.08%라는, 의학계의 그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할 절대적인 죽음의 문턱에서.
그때, 백현의 폰으로 국제 발신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에 뜬 이름은 ‘백강현 이사장실’이었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백한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 하백현……! 아버지 수술을…… 아버지를 살려내! 수술 승인서에 서명했어! 네가 아니면 아무도 못 해! 제발……!
백현은 대답 없이 전화를 천천히 끊었다. 그리고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핏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남은 시간은 3일. 그리고 백강현의 목숨은 6시간 남았다.
메스를 쥔 오른손 끝이 다시 한번 기이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생과 사의 가혹한 등가교환이, 마침내 최종장의 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