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피디님! 큰일 났습니다! 방금 공중파 연말 특별 결산 무대 큐시트가 확정되어 내려왔는데…… 루미너스의 라이브 쇼다운 시간대가 민설아 콘서트의 메인 하이라이트 중계 시간대와 정면으로 매칭되었습니다! 방송국 윗선에서도 에이펙스 눈치를 보느라 시간대 조율을 거부하고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비쳐드는 방송 관계자의 다급한 음성이 대기실의 무거운 정적을 깼다.
스피커폰을 통해 흘러나온 절망적인 소식에 백은우가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기실 한구석에 놓인 모니터 화면 속에는 에이펙스가 자랑하는 톱아티스트 민설아의 화려한 티저 영상이 쉴 새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정면 돌파라 이거지."
한율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귓가에서 이명음이 날카롭게 고막을 긁어댔다. 삐이이하는 금속성 소음이 뇌리를 찌를 때마다 관자놀이가 타 들어가는 것처럼 아팠다.
서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율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이명의 파동을 아주 미세하게 잠재웠다.
"피디님, 귀는 좀 어떠세요? 무리하시면 안 돼요."
"신경 쓰지 마. 저들이 판을 깔아줬으니, 우리는 그 판을 깨부수기만 하면 된다."
한율이 서연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시선을 모니터로 돌렸다. 화면 속 민설아의 얼굴 위로, 오직 한율의 눈에만 보이는 기이한 파동이 일렁이고 있었다.
***
사흘 뒤, 상암 SBS 공개홀.
지상파 연말 특별 결산 무대의 막이 올랐다. 방송국 로비는 물론이고 무대 뒤편 대기실 복도까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에이펙스가 기획한 민설아의 야외 단독 콘서트 'The Blue Nebula'는 한강 특설 무대에서 실시간 중계로 송출되고 있었고, 루미너스는 이곳 SBS 스튜디오 무대에서 생방송 라이브로 맞대응하는 구도였다.
방송 화면은 이원 생중계 형식으로 분할되었다. 좌측에는 한강의 화려한 레이저 쇼를 배경으로 선 민설아, 우측에는 차분하지만 단단한 아우라를 풍기며 스탠바이 중인 루미너스.
"시청률 추이 올랐습니다! 에이펙스 쪽 동시 접속자 수가 벌써 150만을 돌파했어요!"
스태프들의 다급한 외침이 콘솔 박스를 뒤흔들었다. 화면 속 민설아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선율에 맞춰 고난도의 하이라이트 곡을 소화하고 있었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하지만 모니터를 주시하던 한율의 미간이 좁아졌다.
'공감각 레조넌스'를 전개하자, 민설아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아우라가 시각화되어 들어왔다. 대중의 눈에는 그저 눈부시고 완벽한 푸른빛의 여신처럼 보이겠지만, 한율의 눈에 비친 그녀의 아우라는 끔찍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짙은 청색의 균열이었다.
성대 결절이라는 치명적인 육체적 한계를 에이펙스의 최첨단 실시간 음향 보정 엔진과 고용량의 진통 약물로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위태로운 파동. 고음으로 치닫는 마디마디마다 청색 파동이 유리창이 깨지듯 쩍쩍 갈라지며 미세한 파편을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었다.
"보정 엔진의 가청 주파수를 극한까지 끌어올렸군."
한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과거 자신이 분석했던 에이펙스 오디오 엔진의 치명적인 버그가 뇌리를 스쳤다. 특정 고음역대 대역에서 가수를 보호하기 위해 강제로 디지털 클리핑을 일으키는 한계선. 민설아의 목소리는 지금 그 한계선의 턱밑까지 아슬아슬하게 밀어붙여지고 있었다.
"은우야."
콘솔 옆에 서 있던 은우가 흠칫 놀라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예, 피디님."
"에이펙스의 음악은 가짜다. 기계의 완벽함 뒤에 숨겨진 썩어 문드러진 소리지. 저 정교한 가면이 언제 깨지는지 똑똑히 봐 둬라."
그 시각, 무대 위 핀라이트 아래에 선 서연은 객석 너머 콘솔 박스에 서 있는 한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한율의 얼굴이 평소보다 유난히 창백했다. 서연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무대 위에서 영혼을 쏟아낼수록, 한율의 청각과 신체가 그 대가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를 위해서…… 저 사람은 자신을 갉아먹고 있어.'
서연의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슬픔이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필코 이 무대를 완벽하게 성공시켜 그를 구원하겠다는 지독하리만치 단단한 각오였다.
마침내 루미너스의 시그널 곡이 시작되었다.
웅장한 베이스가 스튜디오 바닥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한율은 눈을 감았다. 공감각 레조넌스의 주파수가 서연의 심장박동과 완벽하게 싱크를 맞추기 시작한 순간, 닫혀 있던 그의 귀가 기적처럼 열렸다. 먹먹하던 세상이 걷히고, 서연의 영혼이 내뿜는 황금빛 아우라가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바늘로 고막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과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이 한율의 전신을 덮쳤다. 서연이 무대를 소화하며 느끼는 긴장감과 신체적 피로가 두 배의 고통이 되어 그의 신경망을 타고 흘러들었다.
"으윽……."
한율이 신음 소리를 삼키며 콘솔 테두리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바래 들어갔다.
"피디님!"
은우가 깜짝 놀라 다가서려 했지만, 한율은 한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무대 위의 서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서연이 첫 소절을 뱉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비트, 타고 흐르는, 우리의 소리.
쉼표 하나, 호흡 하나가 청각적인 리듬을 타며 관객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기계적인 보정 따위는 전혀 섞이지 않은,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날 것의, 그러나 가장 아름답고 깊은 울림이었다.
실시간 커뮤니티의 반응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 미친 루미너스 라이브 실화냐? 첫 소절 듣는데 소름 돋음;; - 음원인 줄 알았는데 숨소리 다 들리는 찐라이브네 ㄷㄷ - 옆 동네 민설아는 뭔가 기계음 섞인 느낌인데 루미너스는 완전 가슴 때림ㅠㅠ
한율은 무대 위 서연을 향해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템포를 아주 미세하게 늦추라는 지시였다. 에이펙스의 기계적인 비트에 맞서, 관객들의 감정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한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서연은 한율의 눈빛을 읽어냈다. 그녀는 한율이 전수한 영혼의 흉성 발성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렸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단단한 공명이 공간 전체를 장악했다.
그 순간, 강 건너 한강 무대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민설아가 마지막 클라이맥스 고음역대에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실시간 보정 엔진이 그녀의 갈라진 성대 음역을 억지로 잡아 올리려 주파수를 과도하게 증폭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에이펙스 오디오 엔진의 치명적인 결함 영역인 특정 가청 주파수 대역 디지털 클리핑이 발동했다.
*지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노이즈와 함께 민설아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보정의 가면이 벗겨진 그녀의 실제 목소리가 날것 그대로 송출되었다.
"아악……!"
쇳소리가 섞인 처참한 음이탈. 성대가 완전히 찢어지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순식간에 한강 특설 무대와 안방극장의 브라운관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민설아의 아우라를 감싸고 있던 비정상적인 청색 파동이 완전히 붕괴되며 어두운 회색빛으로 바랬다. 기계가 감추려 했던 추악한 진실이 전 세계 천만 시청자 앞에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반면, 같은 시각 SBS 스튜디오의 서연은 대미를 장식할 최후의 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어떤 기계적 보정도 없이, 오직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힘만으로 뽑아내는 순수한 황금빛 파동.
"아아아아—!"
청중들의 심장을 관통하는 전설적인 울림이었다. 음향 보정 장치의 도움 없이도 완벽한 피치와 압도적인 감정선이 스튜디오 전체를 눈물과 감동으로 적셨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화면 중앙의 실시간 청중 투표 계기판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루미너스 : 99.8% - 실시간 청중 점수 만점 달성!]
대역전극이었다. 에이펙스가 준비한 수백억 짜리 단독 콘서트는 톱가수의 처참한 음이탈 참사로 얼룩진 반면, 해체 직전의 망돌이었던 루미너스는 오직 목소리 하나만으로 지상파 연말 무대의 정점에 우뚝 섰다.
"와아아아아!"
대기실 복도와 스튜디오가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스태프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고, 무대 위의 멤버들도 서로를 붙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서연은 쏟아지는 축하 꽃가루 속에서 가장 먼저 콘솔 박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한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 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
스튜디오 뒤편, 인적 없는 어두운 복도.
한율은 벽에 한 손을 기댄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싱크율이 극대화되었던 무대의 대가는 가혹했다. 귓가에서 웅웅대는 소리조차 완전히 사라진, 지독한 무음(無音)의 세계가 그를 덮쳤다. 완전한 청각 마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하며 치밀어 올랐다.
"콜록!"
한율이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손가락 틈새로 검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손바닥을 가득 적신 것은 짙은 선혈이었다.
눈앞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다리의 힘이 풀리며 무릎이 바닥에 사정없이 부딪혔다.
쿵.
화려한 무대의 소음도, 자신들을 연호하는 팬들의 함성도 전혀 들리지 않는 차가운 침묵 속에서, 한율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시야 가장자리로 흩날려 들어온 금빛 꽃가루 몇 조각이 피웅덩이 위로 고요히 떨어져 내렸다.
시야가 빠르게 점멸했다. 암전과 미광이 교차하는 틈새로, 멀리서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실루엣이 보였다. 하얀 무대 의상. 머리칼을 휘날리며 사력을 다해 뛰쳐나온 서연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무어라 비명을 지르는 듯했지만, 한율의 고막에는 그 어떤 마찰음도 닿지 않았다. 완전한 진공 상태의 우주에 홀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바닥을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진 서연이 한율의 상체를 안아 올렸다. 그녀의 손이 한율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묻어나는 검붉은 피를 확인한 서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녀의 어깨가 벼랑 끝에 선 것처럼 거칠게 들썩였다.
서연은 울부짖고 있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목줄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한율의 흐릿한 시야에 고스란히 박혔다.
그 순간, 한율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져가던 공감각의 불씨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올랐다.
*파지직!*
두 사람의 살결이 닿은 지점으로부터 시각화된 파동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한율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기괴하고도 잔혹했다.
서연의 심장에서 뻗어 나온 황금빛 아우라의 줄기들이, 한율의 심장을 옭아맨 붉은 가시덩굴과 단단히 얽혀 있었다. 서연이 거칠게 호흡할 때마다, 가시 덩굴이 한율의 심장을 더 깊숙이 파고들며 붉은 피를 짜내고 있었다. 동조의 대가. 깊어진 신뢰의 무게만큼, 그녀가 무대 위에서 뿜어낸 에너지가 고스란히 그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역류 현상이었다.
서연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 역시 가슴을 부여잡으며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자신의 목통증과 피로가, 한율의 몸속에서 두 배의 질량으로 요동치고 있음을 영혼의 감각으로 인지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한율의 귀로 향했다. 한율의 귓가에서 한 방울의 피가 더 흘러내려 바닥의 황금빛 꽃가루를 적셨다. 서연의 눈물이 한율의 뺨 위로 툭, 떨어져 핏자국과 섞여 흘러내렸다.
"서…… 연……."
진공을 뚫고 나오지 못한 한율의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듯 흩어졌다. 서연은 그의 양 손을 제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톱이 제 무대 의상을 찢을 듯이 움켜쥐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어두운 복도 끝, 비상구의 철문이 둔중한 진동을 내며 열렸다.
정적을 깨고 다가오는 구두 굽 소리가 바닥의 미세한 떨림을 타고 한율의 뺨에 닿았다. 서연이 젖은 눈을 치켜뜨며 복도 끝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인물의 실루엣은 길고 기괴했다. 완벽하게 재단된 슈트, 흐트러짐 없는 머리칼.
에이펙스의 수장, 강도진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한율과 그를 품에 안은 서연을 느긋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이거 아주 눈물겨운 명장면이네."
조롱 섞인 음성이 복도의 얼어붙은 공기를 갈랐. 한율은 들리지 않는 귀 대신, 강도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탁하고 시커먼 아우라를 보았다. 그것은 승자의 여유가 아닌, 사냥감을 몰아넣은 맹수의 잔인한 탐욕이었다.
서연이 한율을 제 몸 뒤로 감싸 안으며 경계의 빛을 뿜어냈다. 그녀의 온몸이 분노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강도진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구두 앞코가 한율이 흘린 피웅덩이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서한율. 네 그 잘난 귀가 아주 쓸모없어질 때까지 노래를 부르겠다고 덤비더니."
강도진이 허리를 숙여 한율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광기가 번득였다.
"결국 제 발로 지옥문을 열었구나. 그 애송이 년을 살리겠다고 네 목숨을 갖다 바치면서 말이야."
그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옮겨갔다. 강도진의 손가락이 서연의 턱끝을 향해 뻗어왔다. 서연이 고개를 세차게 돌려 그 손길을 거부하자, 강도진은 낮게 실소했다.
"윤서연. 네가 부르는 그 노래가,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프로듀서의 숨통을 끊어놓는 독약이라는 걸…… 너는 알고 있었나?"
서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숨겨진 진실의 조각들. 한율이 늘 숨겨왔던 고장 난 보청기 배터리, 붉게 점멸하던 모니터의 경고등, 그리고 무대가 끝나자마자 찾아오던 그의 극심한 통증.
모든 인과관계가 그녀의 뇌리를 강타했다.
한율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서연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았다. 안 된다고, 듣지 말라고 손을 뻗으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강도진의 입술이 다시금 잔인하게 열렸다.
"내일 아침 헤드라인이 기대되는군. 천재 프로듀서 서한율, 지상파 대기실에서 영구 청각 상실 및 호흡 곤란으로 의식 불명. 그리고…… 그를 파멸로 이끈 주범, 루미너스 윤서연."
비상구 너머에서 급박한 기자들의 발소리와 카메라 플래시 불빛이 복도 벽면을 타고 번져오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함정이 두 사람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서연은 강도진의 폭언 속에서도 한율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멈췄다. 물기 젖은 눈동자 너머로, 이전에 본 적 없는 독기 서린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강도진의 정교한 시나리오대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자신 때문에 한율이 망가졌다면, 이제는 자신이 한율을 구하기 위해 이 판의 규칙을 새로 써야만 했다.
"비켜요."
서연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비키라고 했습니다, 강 대표님."
강도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상치 못한 반항적인 태도에 그의 미소가 차갑게 굳어갔다.
그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기자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기 대기실 복도 쪽에 누구 있습니다!" "어? 윤서연 씨 아니에요? 서 피디님도 같이 있는 것 같은데……!"
플래시 불빛이 어두운 복도를 백색으로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강도진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한율은 서연의 품 안에서 완전히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장 화려한 승리의 순간,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파멸의 덫이 두 사람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