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피디님이 예전에 쓰시던 그 악보 맞죠? 왜 이게 에이펙스 놈들 손에 들려 있는 겁니까!"
은우의 외침이 들끓는 이명 속을 뚫고 한율의 고막을 잔인하게 찢어발겼다. 새로운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작업실의 좁은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은우의 거친 숨소리가 사방 벽면에 부딪혀 둔탁하게 되돌아왔다. 그의 손에 쥐인 종이 뭉치는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상단에 인쇄된 에이펙스 엔터테인먼트의 로고가 한율의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유독 붉고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한율은 책상 모서리를 짚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귓가에서 삐이이- 하는 고주파의 마찰음이 고막을 송곳처럼 쑤셔댔다. 차트 10위 진입의 달콤한 여운을 만끽하기도 전에 들이닥친 현실은 늘 이토록 차갑고 가혹했다.
"은우야, 일단 진정하고……."
곁에 서 있던 서연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은우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은우는 거칠게 어깨를 비틀어 쳐내며 한율만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배신감과 혼란, 그리고 깊은 절망이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지금? 이 멜로디 라인, 피디님이 우리 데뷔 초에 보여줬던 그 미완성 곡이잖아요! 에이펙스가 다음 주에 이 곡을 자기네 신인 그룹 타이틀로 선공개한다고 보도자료를 뿌렸단 말입니다! 우리 'Resonance'랑 코드 진행도 거의 겹쳐요. 이대로 나가면 우리가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고요!"
은우의 목소리가 한율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해일이 되어 요동쳤다. 난청의 장벽을 뚫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고음들이 뇌신경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한율은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은우의 흔들리는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시끄럽군."
한율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귓속을 가득 채운 소음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남의 작업실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짖어대기 전에, 그 멍청한 머리로 생각이라는 걸 먼저 해라. 내가 미쳤다고 내 자식 같은 곡을 강도진 그 인간 쓰레기에게 상납하겠나?"
"그럼 이게 왜 저놈들 손에 있는 건데요! 피디님이 에이펙스에서 나올 때 백업 데이터 다 날려버렸다고 하셨잖아요!"
"훔쳐 간 거다."
한율은 은우의 손에 들린 악보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종이의 감촉이 거칠었다. 악보에 그려진 음표들을 훑어보는 한율의 눈빛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강도진이 내 개인 클라우드를 해킹했든, 예전에 버려진 하드디스크를 복구했든 수단은 여러 가지였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한율은 악보를 툭 던져 책상 위에 얹었다.
"이 따위로 뒤틀리고 꼬여버린 편곡을 보고도 내 곡이라고 떠드는 네 수준이 한심할 뿐이지."
"뭐라고요?"
은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존심 강한 루미너스의 메인 프로듀서이자 멤버로서, 한율의 독설은 언제나 뼈를 찔렀지만 이번만큼은 참아내기 힘든 모양이었다. 주먹을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저도 음악 하는 사람입니다! 이 곡의 브릿지 파트랑 아웃트로 구성, 피디님이 아니면 아무도 쓸 수 없는 고유의 전조 방식이에요. 에이펙스가 아무리 기계로 정교하게 다듬었다 해도 뼈대는 피디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곡을 이기지 못하면, 루미너스는 영원히 에이펙스의 아류작으로 낙인찍혀 매장당해요!"
"뼈대만 있으면 뭐하나. 관절이 다 어긋나서 삐걱거리는 해골바가지인데."
한율은 차갑게 냉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서연이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그랜드 피아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피아노 덮개를 열자 백색과 흑색의 건반들이 일렬로 정렬해 있었다. 한율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긴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렸다.
"은우야. 네가 밤새도록 이 악보를 보며 끙끙 앓았던 이유가 뭔지 아나?"
"……."
"이 곡의 멜로디는 아름답지. 하지만 에이펙스의 수학적 알고리즘은 인간의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의 미세한 엇박자를 이해하지 못해. 그래서 그들은 이 곡의 가장 핵심적인 브릿지 파트에 억지로 정형화된 드럼 비트와 기계적인 소스들을 처박아 넣었다. 마치 완벽한 조각상에 싸구려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른 것처럼 말이지."
한율의 손끝이 부드럽게 건반을 눌렀다.
뚱-.
가장 낮은 도음이 작업실의 공기를 무겁게 울렸다. 이어서 한율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유려하게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은우가 가져온 악보의 시작 부분이었다. 하지만 한율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에이펙스의 예고편에서 들리던 기계적인 차가움이 없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코드 진행, 그리고 은우가 도저히 해결하지 못해 머리를 싸맸던 꼬인 브릿지 파트에 도달한 순간, 한율은 건반을 누르는 타건의 강도를 미세하게 조절했다. 한 박자를 반 보 늦추어 들어가는 레이백(Lay-back) 주법.
순간, 작업실 안의 공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공감각 레조넌스]의 투명한 파동이 한율의 시야를 메웠다. 은우의 머리 위에 뿌옇게 흩어져 있던 불균형한 회색빛 아우라가, 한율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화음의 파동에 반응하여 서서히 맑은 청색과 금색의 스펙트럼으로 재정렬되기 시작했다.
소리가 눈에 보이고, 감정이 파동으로 느껴지는 기적의 순간.
한율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피아노 한 소절이 공간 전체를 집어삼켰다. 불협화음으로 꼬여 있던 멜로디가 단 한 번의 전조와 템포 조절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건반에서 손이 떨어지고 깊은 정적이 찾아왔다.
"……아."
은우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충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 들은 멜로디는 그가 밤새 분석하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편곡의 완전한 정답이었다. 아니, 정답을 넘어선 예술의 영역이었다.
"거칠고 둔탁한 드럼 루프로 멜로디의 숨통을 조이는 대신, 보컬의 숨소리가 들어갈 공간을 열어두는 거다. 에이펙스의 공식에는 '여백'이라는 단어가 없거든. 그들은 채우는 것만 알지, 비워내는 미학을 모른다."
한율은 피아노 덮개를 닫지 않은 채 은우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알겠나? 에이펙스가 훔쳐 간 건 껍데기일 뿐이다. 알맹이는 여전히 여기에 있어."
은우의 다리가 스르륵 풀렸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한율의 멱살을 잡으려 들던 청년은, 이제 온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이 가닿을 수 없는 압도적인 천재성. 그리고 그 천재성이 보여준 음악적 진실 앞에, 은우의 오만은 눈 녹듯 사라졌다.
"제가…… 제가 정말 어리석었습니다, 피디님."
은우는 바닥을 짚은 손을 꽉 쥐며 울먹였다.
"그것도 모르고, 피디님이 우리를 버리려는 줄 알고…… 제 시야가 너무 좁았습니다. 제발,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피디님의 음악을 제 눈으로, 제 귀로 직접 배우고 싶습니다. 루미너스를 위해, 피디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어떤 궂은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자존심 강한 서브 프로듀서의 완전한 굴복이자 진심 어린 충성의 맹세였다. 한율은 굳이 그를 다그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의 균열이 가장 단단한 결속으로 치유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다 같은 정화의 순간 뒤로, 가혹한 현실의 대가가 어김없이 한율의 신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하아……."
한율은 건반을 짚은 손가락 끝에 힘을 주며 겨우 호흡을 유지했다. 은우의 아우라를 조율하고 완벽한 주파수를 이끌어낸 대가로, 귀 안쪽 깊은 곳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이명이 웅웅거리며 주변의 소리를 다시 한번 먹먹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한율 씨……?"
낮게 가라앉은 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율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연은 은우의 굴복 과정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한율의 작업실 책상 아래, 어두운 구석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은 한율이 평소에 절대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가려두는 은밀한 영역이었다.
서연의 눈동자가 극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작업실 메인 컴퓨터 본체 밑에 숨겨져 있던 소형 보조 모니터가 켜져 있었다.
평소에는 화면이 꺼져 있어야 할 그 모니터에, 피칠갑을 해놓은 것 같은 붉은색 다이어그램 그래프와 경고 문구들이 쉴 새 없이 점멸하고 있었다. 한율의 [공감각 레조넌스] 시스템이 그의 신경망 상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보여주는 자가 진단 화면이었다.
[경고: 청각 신경 동조율 88% 돌파.] [달팽이관 및 청신경 손상 위험 극대화. 영구 난청으로 진행될 확률 92%.] [피드백 부하: 대상(윤서연)의 고온 가창 시 발생하는 성대 피로 및 신체적 통증이 프로듀서에게 2.0배로 전이 중.]
그 붉은 경고등의 점멸 아래로, 열린 서랍 틈새에 굴러다니는 물건들이 서연의 눈에 들어왔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하지만 한율의 손때가 묻은 고장 난 보청기 배터리들과 반쯤 부서진 보청기 케이스들.
서연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동안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고음을 지를 때마다, 무대 위에서 한계를 돌파하며 짜릿함을 느낄 때마다, 한율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귀를 움켜쥐거나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나 때문이었어.'
서연의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한율이 소리를 잃어가는 가혹한 대가. 그것은 서연과의 신뢰가 깊어지고, 그녀의 목소리가 세상을 향해 더 높이 울려 퍼질수록 한율의 세상은 점점 더 고요하고 어두운 심연으로 가라앉는 잔혹한 등가교환의 저주였다.
서연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었다. 눈물이 고였지만 결코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슬픔은 이내 단단하고도 서늘한 결의로 변해갔다.
'지켜지기만 하는 존재는 되지 않겠어. 한율 씨가 날 위해 청각을 제물로 바치고 있다면…… 내가 스스로 그 한계를 부수겠어. 당신의 귀를 망가뜨리지 않는 나만의 주파수를 찾아내고 말겠어.'
그녀의 눈빛에 깃든 주도적인 구원의 의지가 아우라를 통해 붉고 푸른 빛의 강렬한 불꽃으로 피어올랐다. 한율은 심장에 찌릿한 통증을 느끼며 서연의 변화를 직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징-. 징-.
은우의 주머니와 한율의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이 동시에 격렬하게 진동했다.
동시에 벽면에 걸려 있던 대형 모니터의 방송 송출 화면이 긴급 속보로 전환되었다. 화면에 나타난 인물은 에이펙스 엔터테인먼트의 기획총괄, 민설아였다.
"……에이펙스 엔터테인먼트는 소속 아티스트 민설아의 데뷔 5주년을 기념하여, 당사 최초의 글로벌 야외 단독 라이브 콘서트 'The Blue Nebula'를 전격 개최합니다. 본 공연은 전 세계 플랫폼을 통해 무료 생중계되며……."
화면 속 민설아의 모습은 차갑고도 완벽했다. 기계적인 완벽함으로 무장한 그녀의 얼굴 위로, 한율의 눈에는 또 다른 파동이 겹쳐 보였다.
민설아의 아우라 주변을 감싸고 있는 비정상적이고 균열된 청색 빛.
그것은 성대 결절의 치명적인 결함을 에이펙스의 최첨단 음향 보정 엔진과 약물로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위태로운 파동이었다. 겉으로는 은반 위의 요정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실상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정교한 유리 인형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 진실을 알지 못한다. 에이펙스의 막강한 자본과 언론 플레이는 이미 인터넷 커뮤니티를 광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 대박 민설아 단독 콘서트라니;; 심지어 무료 생중계? - 에이펙스 진짜 돈 썩어나는구나 스케일 미쳤다 ㄷㄷ - 근데 이거 방송 시간대가 루미너스 지상파 컴백 무대랑 겹치지 않음? - 겹치는 게 아니라 저격이지 ㅋㅋㅋ 망돌 하나 밟으려고 에이펙스가 대포를 쏘네 ㅋㅋㅋ 루미너스 불쌍해서 어쩌냐 역주행 하자마자 바로 묻히겠네.
악의적인 댓글들이 실시간으로 화면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에이펙스의 수장 강도진의 비열한 미소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루미너스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기 위해, 자사 최고의 카드를 가장 잔인한 타이밍에 던진 것이다.
작업실의 공기가 다시금 무겁게 가라앉았다. 은우가 주먹을 쥐며 입술을 깨물었고, 서연은 한율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차가운 손을 꼭 쥐었다.
그때, 한율의 개인 비서와 연결된 내선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방송국 관계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 피디님! 큰일 났습니다! 방금 공중파 연말 특별 결산 무대 큐시트가 확정되어 내려왔는데…… 루미너스의 라이브 쇼다운 시간대가 민설아 콘서트의 메인 하이라이트 중계 시간대와 정면으로 매칭되었습니다! 방송국 윗선에서도 에이펙스 눈치를 보느라 시간대 조율을 거부하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시청률도, 화제성도 완전히 에이펙스에 독식당합니다!"
정면 충돌.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에서의 대결이었다.
한율의 귀에서 다시 한번 붉은 낙인 같은 날카로운 이명이 울려 퍼졌고, 서연은 그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물러설 곳 없는 전쟁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