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루미너스가 부른 곡 'Resonance'."
강도진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찢어졌다.
"그 곡의 핵심 멜로디 라인과 코드 진행 전체가, 우리 에이펙스 소속 작곡가들이 1년 전에 이미 등록해 둔 미발표 신곡의 데이터와 일치하더군. 무려 98%의 유사성으로 말이야."
대기실 안의 공기가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루미너스 멤버들의 숨소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무대 위를 채웠던 열기와 환희는 간데없고, 오직 눅눅한 절망감만이 사방을 짓눌렀다.
"뭐……?"
백은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곡은 피디님이 우리를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쓴 곡인데!"
"법은 목소리 큰 놈 편이 아니라, 서류가 완벽한 놈 편이지."
강도진이 서류 한 장을 꺼내 한율의 얼굴 앞으로 던지듯 내밀었다. 서류 상단에는 에이펙스 엔터테인먼트의 직인과 함께 '저작권 우선 등록 증명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서한율.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야."
강도진이 한율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서늘하게 속삭였다.
"이 무대는 너희들의 화려한 컴백 무대가 아니라, 남의 곡을 훔쳐 부른 표절 돌의 파멸 무대로 기록될 거다."
강도진의 비웃음 소리가 무소음보다 더 차갑게 한율의 뇌리를 때렸다. 다시 한번 세계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한율의 시야가 미세하게 왜곡되었다. 이명이 귓가를 파고들며 웅웅거리는 잡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한율은 흔들리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강도진의 뒤편에 선 민설아를 응시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흘러나오는 아우라가 보였다. 평소의 차갑고 정교한 은색 빛이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며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탁한 청색 빛. 그것은 기계적인 인위성과 거짓을 감추려 할 때 나타나는 파동이었다. 성대 결절을 숨기기 위해 기계적 보정에 의존할 때 나타나던 그 불협화음의 빛이,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태블릿과 외장 하드에서도 고스란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표절이라."
한율이 낮게 읊조리며 강도진이 내민 서류를 받아 쥐었다. 종이 표면을 스치는 손끝이 가볍게 떨렸으나,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의 싸늘한 전율이었다.
"강도진. 넌 여전히 머리 쓰는 법을 모르는군."
"뭐라고?"
강도진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한율은 가방 안에서 삐져나와 있는 에이펙스의 외장 하드를 거칠게 채 가듯 빼앗았다. 경호원들이 움찔하며 한율을 제지하려 했으나, 한율은 이미 대기실 한구석에 설치된 대형 현장 방송 모니터 스크린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방송국의 스마트 모니터는 외부 입력과 USB 인식을 완벽하게 지원했다.
"이게 무슨 짓거리지? 경비원들, 저 자식을 당장—"
"놔둬."
한율이 싸늘한 어조로 강도진의 말을 잘라냈다. 그의 손가락이 모니터 옆면의 USB 포트에 외장 하드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화면에 에이펙스의 미발표 데모 폴더가 떠올랐다. 대기실 문틈으로 방송국 PD와 작가들, 그리고 지나가던 타사 스태프들까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건 생각보다 아주 간단해."
한율이 모니터 리모컨을 조작해 문제의 '1년 전 데모 파일'의 상세 정보 창을 띄웠다. 화면 가득 복잡한 메타데이터와 파일 타임스탬프가 나열되었다.
"에이펙스의 오디오 엔진은 모든 익스포트 파일에 고유의 디지털 워터마크와 압축 타임스탬프를 남기지. 민설아 실장, 당신이 직접 설계한 시스템이니 잘 알 텐데?"
한율의 시선이 민설아에게 내리꽂혔다. 그녀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청색 아우라가 갈기갈기 찢어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여기 표시된 파일 수정 날짜는 확실히 1년 전으로 되어 있군. 하지만 말이야."
한율이 리모컨의 휠을 아래로 빠르게 내렸다. 파일 시스템의 가장 깊숙한 곳, 디렉토리 인덱스의 생성 시간(Creation Time)과 파일 헤더 내부에 기록된 실제 인코딩 타임스탬프가 화면에 붉은색 텍스트로 대조되어 나타났다.
[Original Encoding UTC: 202X-XX-XX 03:14:22]
그 날짜는 바로 어제 새벽이었다.
"파일 속성의 수정 날짜는 타임스탬프 변조 툴로 아주 쉽게 조작할 수 있어. 하지만 파일 헤더 내부의 압축 해제 로그와 시스템 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찍힌 진짜 생성 시간까지 완벽하게 지우진 못했지. 특히 에이펙스의 보안 엔진은 파일이 생성되는 순간의 실제 표준시를 암호화해서 헤더에 박아 넣으니까."
대기실 안팎에서 나직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 방송국 PD의 얼굴이 흥미로움에서 경악으로 변해갔다.
"어제 새벽 3시 14분. 루미너스의 컴백 무대 사전 리허설 녹음본이 유출된 지 정확히 세 시간 뒤에 만들어진 파일이군."
한율이 강도진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입매가 냉소적으로 휘어졌다.
"이게 너희가 자랑하는 1년 전 미발표 신곡의 실체다. 리허설 음원을 따다가 급하게 코드 진행만 따서 어제 새벽에 가짜 데모를 구워낸 거지. 강도진, 넌 저작권 우선 등록 증명서를 위조하고 법원에 허위 사실로 가처분을 신청하려 한 거다. 이건 단순한 기싸움이 아니라 형사 처벌 대상인 사문서위조 및 업무방해죄야."
"이, 이 자식이……!"
강도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가식적인 미소는 완전히 지워진 채, 핏대를 세운 목소리가 대기실을 울렸다.
"설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설명해 봐!"
민설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청색 아우라는 완전히 불이 꺼진 것처럼 칙칙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기계적 정교함으로 무장했던 그녀의 논리가, 한율의 완벽한 기술적 분석 앞에 처참하게 조각난 순간이었다.
"더 할 말 있나, 강도진?"
한율이 서류 뭉치를 강도진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돌려주었다.
"언론에 이 메타데이터 분석본과 위조 정황을 그대로 배포하지. 대기업 에이펙스가 중소 기획사의 신곡을 빼앗기 위해 어설픈 기술로 표절 조작을 시도했다는 타이틀로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대중의 관심, 이번엔 아주 톡톡히 받게 될 거다."
강도진은 이빨을 세게 맞물렸다. 턱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는 한율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이내 거칠게 외장 하드를 뽑아 들고 돌아섰다.
"가자."
강도진이 씩씩거리며 대기실을 빠져나갔고, 민설아 역시 고개를 숙인 채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진 복도에는 무거운 침묵이 잠시 머물다, 이내 루미너스 멤버들의 안도의 한숨과 환호성으로 채워졌다.
"피디님! 대박이에요! 진짜 멋있었어요!"
정예린이 펄쩍 뛰며 소리쳤고, 백은우 역시 주먹을 꽉 쥔 채 한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이전의 반항심 대신 깊은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한율은 그들의 환호에 답하지 못했다.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이명이 다시금 뇌리를 찔렀다. 머릿속이 번쩍이며 시야가 흐려졌다. 서연과의 공감각 싱크를 무리하게 유지하며 에이펙스의 조작을 밝혀내느라, 뇌의 회로가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한율은 비틀거리는 몸을 숨기기 위해 벽을 짚었다.
"피디님……?"
서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차가운 물속에 잠겨 있던 소리들이 다시금 청명하게 고막을 두드렸다.
"괜찮아."
한율이 겨우 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 *
늦은 밤,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카니발 리무진 안은 고요했다. 창밖으로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빠르게 흘러갔다. 라디오에서는 나직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고, 멤버들은 피로에 지쳐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한율은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귀에서 시작된 둔탁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와 턱 끝까지 짓눌렀다. 서연이 무대 위에서 고음을 쏟아낼 때 느꼈던 성대의 피로와 육체적 고통이, 그의 신경망을 타고 두 배의 무게로 고스란히 전이된 탓이었다.
"많이 아프죠."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은은한 라벤더 향이 훅 끼쳐왔다.
어느새 뒷좌석에서 조수석 곁으로 다가온 서연이 한율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이 닿자, 머릿속을 찌르던 날카로운 통증이 신기하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잠깐 눈 좀 붙여요. 운전은 로드 매니저 오빠가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요."
한율은 눈을 반쯤 뜨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황금빛 아우라는 따뜻하고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한율의 깨진 시야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너도 피곤할 텐데, 가서 자라."
"싫어요. 이렇게 아파하는데 어떻게 혼자 둬요."
서연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걱정과 함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애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차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미세한 차량의 진동 속에서, 서연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쪽.
부드럽고 온기 어린 입술이 한율의 오른쪽 뺨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한율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고장 나 있던 그의 청각 신경이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맑은 소리로 그녀의 숨소리를 잡아냈다.
"이제 더는 피디님이라고만 부르지 않을래요."
서연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않은 채, 한율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나의 음악, 한율 씨라고 부를게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율의 가슴팍 깊은 곳에 박혔다. 단순한 애칭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리를 잃어가는 한율에게 그녀가 평생의 주파수가 되어 주겠다는, 가장 은밀하고도 주도적인 고백이었다. 한율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의 차가운 불신을 천천히 녹여내렸다.
* * *
다음 날 아침, 루미너스의 타이틀곡 'Resonance'가 국내 최대 스트리밍 플랫폼의 실시간 차트 10위에 진입했다. 망돌이라 조롱받던 그들이 대형 기획사의 압박을 뚫고 마침내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작업실 모니터에 선명하게 박힌 '10위'라는 숫자를 보며 한율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차트의 상승과 함께 서연의 목소리는 더욱 높은 주파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율은 가슴속 고장 난 신경망을 쥐어짜며 그녀의 고온 가창 주파수를 조율해 나갔다. 완벽한 소리를 얻기 위해, 그는 자신의 청각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귀끝에서 붉은 아우라가 피어오르며 극심한 난청의 이명이 다시금 그를 덮쳐왔다.
바로 그 순간.
쾅-!
작업실 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피디님!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눈이 완전히 뒤집힌 백은우가 방 안으로 무단 침입했다. 그의 손에는 에이펙스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그러나 한율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미완성 데모 악보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거…… 피디님이 예전에 쓰시던 그 악보 맞죠? 왜 이게 에이펙스 놈들 손에 들려 있는 겁니까!"
은우의 외침이 들끓는 이명 속을 뚫고 한율의 고막을 잔인하게 찢어발겼다. 새로운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