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가에 스며든 것은 차디찬 침묵이었다.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롭게 들이치던 방송국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콘솔의 기계음도, 스태프들의 다급한 외침도, 무대 위를 채우던 웅장한 반주 소리도 단숨에 소거되었다. 세계가 전면적인 무소음의 암전 상태로 내려앉았다.
귓구멍 안쪽에서 진득한 열감이 차올랐다. 한율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거친 콘크리트의 감각만이 그가 아직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음을 증명했다.
툭.
바닥으로 떨어진 붉은 핏방울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과도한 레조넌스 동조의 피드백. 그리고 에이펙스의 음향 조작을 막으려 무리하게 감각을 확장한 대가였다. 시야가 붉은 안개를 끼얹은 듯 흐릿하게 점멸했다.
"서…… 한율 씨!"
조정실 구석에서 메인 엔지니어가 입을 벙긋거리는 모양이 보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단 한 마디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저 진공 상태에 갇힌 것처럼 먹먹한 압박감만이 뇌수를 짓눌렀다. 사지가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워졌고, 무릎이 사정없이 꺾였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저 무대 위에는 3년의 무명을 견디고 겨우 기회를 잡은 루미너스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망가진 음악을 증명해 줄 유일한 열쇠이자, 자신을 심연에서 끄집어내 준 윤서연이 노래하고 있었다.
한율은 타들어 가는 목구멍을 억지로 열어 숨을 들이쉬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벽을 짚은 손끝에 피가 배어 나왔다. 눈앞의 황금빛 파동이 점차 옅어지며 차가운 잿빛으로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였다.
송출 시스템의 조작으로 인해 기계음이 찢어지기 직전의 찰나, 무대 중앙에 서 있던 서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어둠 속에 주저앉은 한율을 향했다.
서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오던 황금빛 아우라가 사정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템포가 어긋나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시각적인 파동의 균열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율이 흘린 피와 초점 없는 눈빛을 알아챈 것이다.
이대로 두면 무너진다. 서연의 목소리가 잠기기 시작하면, 에이펙스가 설계한 주파수의 덫에 걸려 루미너스의 컴백 무대는 최악의 방송 사고로 기록될 터였다.
하지만 서연은 주저앉지 않았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한율을 똑바로 응시한 채, 무대 아래의 그에게만 보이도록 손을 뻗어 자신의 인이어를 꾹 눌러 고정했다. 귀걸이가 흔들릴 정도로 단호한 동작이었다.
이어서 서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두려움으로 얼룩져야 할 얼굴에 피어난 것은, 다름 아닌 도발적이고도 찬란한 확신이었다. 그녀는 한율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뜨겁고도 선명한 윙크.
'걱정하지 마요. 내가 당신의 소리가 되어 줄 테니까.'
말을 건네지 않아도 그 눈빛에 담긴 의도가 한율의 심장을 사정없이 때렸다. 지켜지기만 하는 연약한 존재로 남지 않겠다는, 스스로 이 판의 룰을 부수고 프로듀서를 구원하겠다는 리더의 무서운 집념이었다.
쿵. 쿵. 쿵.
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율의 가슴 속에서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장 난 줄 알았던 감각 회로가 서연의 눈빛 하나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철벽을 치고, 인간을 불신하며 독선 속에 갇혀 살던 서한율의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구원하겠다고 손을 뻗는 저 여자를 위해서라면, 귓구멍이 막혀 평생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자학적인 집념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공감각 레조넌스 동조율 급상승 — 55%…… 63%…… 70% 돌파.]
뇌 해마에서 붉은 경고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한율의 온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들이닥쳤다. 서연이 무대 위에서 극도의 긴장감과 호흡 조절로 겪는 성대의 미세 파열, 그리고 육체적 피로가 두 배의 고통이 되어 한율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윽……!"
신음조차 나오지 않는 고통 속에서, 한율은 이를 악물었다. 턱관절이 으스러질 것 같았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그 순간, 먹먹하던 무소음의 세계에 기적이 일어났다.
스르륵, 암전되었던 시야 너머로 거대한 황금빛 비구름이 피어올랐다. 서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아우라가 방송국 무대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팽창했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소리의 파동이 시각화되어 춤추는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쾅, 하고 닫혔던 청각의 빗장이 단숨에 부서졌다.
"――아아아!"
서연의 목소리였다.
기계 보정 장치를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순수한 주파수가 한율의 귓가를 관통했다. 에이펙스가 설계한 기계적 리미터의 한계를 비웃듯, 서연은 약속된 멜로디 라인을 완전히 탈피하여 변칙적인 하이노트 애드리브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뿌려지는 순간, 한율의 눈에는 황금빛 주파수 파동이 에이펙스의 어두운 기계적 노이즈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것이 보였다.
"은우야, 지금이야!"
무대 위에서 서연이 짧게 신호를 보냈다.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루미너스의 메인 대들보 백은우가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은우의 몸에서 깊고 묵직한 청록색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We are the light, in the deepest night……."
은우의 단단하고 안정적인 저음 베이스가 서연의 날카로운 고음을 감싸 안았다. 반주 음원을 완전히 배제한, 오직 목소리만으로 무대를 채우는 '리얼 아카펠라'의 시작이었다.
기계적 보정에 의존하던 에이펙스의 시스템은 이 변칙적인 라이브 발성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송출 볼륨을 조작해 음 깨짐을 유발하려던 민설아의 계획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기계가 왜곡할 수 있는 영역 너머의, 인간의 목소리가 가진 본연의 힘이 방송국 송출망을 장악해 버렸기 때문이다.
조정실 모니터 너머로 민설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아우라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균열된 청색 빛이 격렬하게 깜빡였다. 성대의 한계와 기계적 보정의 모순을 보여주는 그 지저분한 청색 파동은, 루미너스의 깨끗한 황금빛 화음 앞에서 초라하게 먼지처럼 흩어졌다.
"이게…… 이게 말이 돼?"
민설아가 콘솔을 붙잡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기계 보정도 없이, 어떻게 이 주파수 대역을 라이브로 완벽하게 맞춰서 화음을 내는 거지? 인간의 성대로는 불가능해!"
그녀의 절규는 루미너스의 화음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대 위의 루미너스는 거침이 없었다. 서연이 길을 열고, 은우가 기둥을 세우자, 나머지 멤버들의 아우라가 오색 빛깔로 피어나며 하나의 거대한 은하수를 만들어냈다.
반주가 멈춘 방송국 스튜디오 안에는 오직 다섯 명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천상의 하모니만이 울려 퍼졌다.
비트를 쪼개는 호흡, 서로의 눈빛을 보며 미세하게 음정을 조율하는 감각, 그리고 무대 뒤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연습했던 시간들이 하나의 완벽한 호흡으로 승화되어 청중들의 심장을 때렸다.
관객석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망돌의 복귀 무대라며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카메라 감독들도, 대본을 뒤적이던 담당 PD도, 모두 홀린 듯이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송출 콘솔의 메인 미터기가 가장 이상적인 파형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기계적 왜곡이 전혀 없는, 순수함 그 자체의 소리였다.
마지막 음이 허공에 길게 여운을 남기며 사그라들었다.
몇 초간의 정적.
세계가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방송사 예능국장이었다. 조정실 유리창 너머로 무대를 지켜보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마주쳤다.
짝, 짝, 짝.
그 소리를 시작으로 스튜디오 전체가 폭발적인 함성과 박수소리로 뒤덮였다. 현장의 스태프들, 방청객들, 심지어 경쟁 그룹의 관계자들까지도 홀린 듯이 기립하여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역대급이다…… 진짜가 나타났어."
누군가의 나직한 감탄사가 마이크를 타고 조정실까지 흘러들었다.
한율은 벽에 기대어 서서, 서서히 멎어가는 통증을 느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귀로 흘러드는 박수소리가 그 어떤 음악보다 청명하게 느껴졌다.
무대 위에서 숨을 몰아쉬던 서연이 천천히 마이크를 내렸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조명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서연은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 무대 아래 어둠 속에 서 있는 한율만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한율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아려왔다. 불신으로 가득했던 그의 마음에, 윤서연이라는 존재가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새겨진 순간이었다.
"해냈어요, 피디님."
멀리서 서연의 입술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한율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입가에 묻은 피가 다 마르지 않았지만, 그의 입꼬리 역시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 * *
대기실로 돌아가는 복도는 축제 분위기였다.
"와, 형! 진짜 미쳤어요! 저 아카펠라 들어갈 때 소름 돋아서 쓰러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백은우가 한율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평소의 까칠하던 자존심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완전히 한율의 추종자가 된 눈빛이었다.
"피디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까 피 흘리시는 거 보고 정말 심장이 쿵 내려앉았어요……."
서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율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손이 한율의 뺨가에 닿을 듯 다가왔다가, 이내 멈칫하며 내려앉았다.
"괜찮아. 일시적인 자극이었을 뿐이다."
한율은 무심하게 대꾸하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훔쳤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서연을 바라보는 눈동자만큼은 이전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그것보다 오늘 무대는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애드리브로 주파수를 꺾은 건…… 무모했지만 훌륭했어."
한율의 칭찬에 서연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멤버들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대기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기실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비정상적으로 싸늘한 공기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검은색 수트를 칼같이 맞춰 입은 거구의 경호원 서넛이 대기실 문 앞을 철통같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 위압적인 기세에 루미너스 멤버들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그리고 경호원들의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하게 뒤로 넘긴 머리칼, 값비싼 맞춤 정장, 그리고 입가에 걸린 가식적이고도 오만한 미소. 에이펙스 엔터테인먼트의 수장, 강도진이었다.
그의 곁에는 얼굴이 흙빛이 된 민설아가 서 있었다.
강도진의 시선이 루미너스 멤버들을 지나, 뒤편에 서 있는 서한율에게 머물렀다. 그의 눈빛에는 뱀처럼 번득이는 살의와 나르시시즘이 가득 차 있었다.
"오랜만이네, 서한율."
강도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망돌 데리고 재롱잔치 아주 잘 봤어. 감성에 호소하는 아카펠라라니, 제법 머리를 썼더군."
"비켜라, 강도진. 네놈이 서 있을 자리가 아니다."
한율이 서연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의 눈빛에서 극심한 적대감이 뿜어져 나왔다.
강도진은 한율의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풋,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고는 발밑에 두었던 묵직하고 거대한 대형 가방을 들어 올려 복도 바닥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내가 왜 여기 왔을 것 같나?"
강도진이 가방의 지퍼를 천천히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두꺼운 서류 뭉치들과 에이펙스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외장 하드 드라이브들이었다.
"오늘 루미너스가 부른 곡 'Resonance'."
강도진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찢어졌다.
"그 곡의 핵심 멜로디 라인과 코드 진행 전체가, 우리 에이펙스 소속 작곡가들이 1년 전에 이미 등록해 둔 미발표 신곡의 데이터와 일치하더군. 무려 98%의 유사성으로 말이야."
"뭐……?"
백은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곡은 피디님이 우리를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쓴 곡인데!"
"법은 목소리 큰 놈 편이 아니라, 서류가 완벽한 놈 편이지."
강도진이 서류 한 장을 꺼내 한율의 얼굴 앞으로 던지듯 내밀었다. 서류 상단에는 에이펙스 엔터테인먼트의 직인과 함께 '저작권 우선 등록 증명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서한율.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야."
강도진이 한율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서늘하게 속삭였다.
"이 무대는 너희들의 화려한 컴백 무대가 아니라, 남의 곡을 훔쳐 부른 표절 돌의 파멸 무대로 기록될 거다."
강도진의 비웃음 소리가 무소음보다 더 차갑게 한율의 뇌리를 때렸다.
다시 한번 세계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